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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BC 창사특집 다큐멘터리 <휴머니멀>
취재기제작기 | 등록일 : 2020-03-02

2020년 새해 벽두 시청자들을 감동시킨 다큐멘터리가 방영됐다. 지구상의 같은 생명체로서 쾌락과 이권을 위해 동물을 죽음으로 몰고 있는 인간에 대한 이야기 <휴머니멀>이었다. 창사특집이라는 무거운짐과 험난한 제작 과정을 이겨낸 명품다큐멘터리 탄생의 뒷이야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갑작스러운 발령이었다. 수년간 몇 번을 거절하고 도망 다녔던 터라 더 그렇게 느꼈던 걸까. ‘창사특집이라니. 팀장을 만나 자초지종을 듣고, 외통수에 걸린 심정으로 퇴근했던 게 벌써 재작년 12월이었다.

다큐멘터리 PD들에게 창사특집은 영광이자 굴레다. 아무나 할 수도 없지만, 누구도 딱히 나서지 않는 자리. 회사의 이름을 건 무거운 중압감을 1년 넘게 어깨에 짊어지고 내려놓지 못한다. 당연히 PD 본인의 관심과 열정이 차고 넘칠 아이템을 골라야 한다. 안 그러면 그 1년이 감옥이다. 시청자들의 눈높이도 충족시켜야 한다. 창사특집 다큐멘터리에 대한 시청자들의 기대치는 명품이라는 세속적인 단어로 요약된다. 평소에 볼 수 없었던 비주얼과 규모를 갖춘, 만듦새 좋은 다큐멘터리를 내놓으라는 요구다. 그런 기대는 일견 정당하지만, 제작진의 상상력을 제한시키는 측면도 있다. 하지만 그 교집합을 찾아내는 것도 오롯이 PD의 몫이다.

나의 관심사에 사람들도 흥미가 있을지, 내가 보여줄 우주가 보는 이들의 세상과 겹칠지를 확인하는 데 한 달여를 보냈다. 휴먼(Human), 애니멀(Animal), 공존, 멸종 같은 단어를 끄적이며 몽상과 계산을 오갔다. 해가 바뀐 설날, 부모님 댁에서 떡국을 먹으며 올 추석은 못 챙길지 모른다고 미리 양해를 구했다.

    

이후의 성패를 좌우하는 건 결국 돈과 시간이다

 

특집프로그램이란 말은 역설적으로 아무 준비도 되어있지 않다는 뜻이다. 예산도, 제작 스태프도, 표준화된 공정도 없다. 처음에 이걸 어떻게 세팅하느냐에 다큐멘터리의 완성도가 달렸다. 일단 제작비의 규모를 최대한 늘려야 했다. 본사의 자금만으로 창사특집을 만드는 시절같은 건 애당초 없었다. 방송가가 레드오션화되기 이전부터, 외부의 제작 지원은 창사 특집 같은 대형 다큐멘터리의 성사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더구나 2018년에 발생한 1,000억 원의 적자로 회사는 긴축 비상경영에 들어갔다. 종잣돈을 마련해 와야 회사에도 당당히 제작비를 요구할 수 있음이 서글펐다.

 

 

 


1. 보츠와나 카사네에서 코끼리에 GPS를 다는 작업을 촬영하고 있다. <출처 - 필자 제공> 

2. 일본 타이지 마을에서 돌고래 보호 활동가와의 인터뷰 장면 <출처 - 필자 제공>

3. 태국 치앙마이에서 프레젠터 유해진 배우를 촬영하고있다. <출처 - 필자 제공>

 

 

가장 안정적으로, 그러면서도 내용에 대한 간섭 없이 제작 지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은 한국전파진흥협회(RAPA, Korea Radio Promotion Association) 같은 정부 유관 부처다. UHD로 제작하면 차세대 콘텐츠 다큐멘터리 부문에 지원할 수 있다. 빼곡하게 60쪽에 달하는 사업수행계획서를 만들어 제출했다. 프레젠테이션 면접에서 지상파 방송사는 독립 제작사에 비하면 제작비 여력이 있지 않냐, 매번 나오지만 매번 답하기 어려운 질문과 마주해야 했다. 공영방송의역할, 대규모 제작이 가능한 시스템과 노하우 등 뻔한 대답으로 진땀 흘리는 내 모습이 초라했다. 그냥 저 한번 믿어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간신히 삼키고, 전날 연습한 멘트를 이어갔다.

다행히 다큐멘터리 기획안 중 가장 많은 액수의 지원금을 따냈다. 한국전파진흥협회에서 지원한 금액만큼을 본사도 투입한다는 조건이었다. 그렇게 종잣돈을 두 배로 불리니 애당초 목표로 했던 제작비의 80%가 만들어졌다. 나머지는 굴리면서 불리면 된다.

촬영 준비는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섭외용 기획안을 만들어 프레젠터 후보들에게 보내는 일부터 시작했다. S급 셀럽들은 최소 반년 정도의 일정을 미리 확정하는 경우가 많다. 하반기에 동행 촬영하려면 3월에시작한 섭외도 결코 빠른 게 아니다.

 

   

1. 짐바브웨 빅토리아 폭포 촬영 모습 <출처 - 필자 제공>

2. 짐바브웨 사자보호단체와 촬영 중인 프레젠터 류승룡 배우와 스태프들 <출처 - 필자 제공>

 

   

해외 현장 어레인지는 더 더뎠다. 아프리카는 연락을 넣으면 답이 먼저 오는 법이 없다. 동시에 5개국에 촬영 허가, 섭외 요청을 넣어놓고 시차 때문에 밤마다 확인 전화를 돌렸다. 마수걸이 촬영이라 더 어려울 뿐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또 한 달이 훌쩍 갔다. 잠비아 트로피헌팅 촬영 뒤에 보츠와나, 케냐 사전 답사를 억지로 붙여 첫 출장을 간신히 짜맞췄다. 한 달짜리 출장 한 번에 제작비 1억 원이 손쉽게 나간다. 직접비를 집행한다는 건, 이제 더는 무를 수 없는 지점에 도달했다는 뜻이다. 그 두려운 깨달음 앞에 첫 출정의 설렘 같은 건 사치였다. 앞만 보고 가야 하는데, 그 앞에 뭐가 있는지를 그땐 도통 알 수 없었다.

      

쉴 틈 없는 촬영 속도전

 

1차 출장 간 사이에 그다음 출장인 미국 촬영이 세팅됐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온 지 2주 만에 다시 미국으로 향했다. 그리고 열흘 만에 다시 일본 사전헌팅을다녀왔다. 어떻게든 촬영이 진행된다는 게 감사할 정도의 속도전이었다. 신혼인 조연출이 올해 들어 아내보다 나랑 더 많이 잤다며 볼멘 농담을 해댔다. 순식간에 7월이 됐다.

아프리카 2차 촬영을 앞두고서야 출장 랠리가 잠시멈췄다. 가장 중요한 보츠와나 코끼리 밀렵의 촬영 허가가 나오지 않고 있었다. 보츠와나는 수교국도 아니어서 주일본보츠와나대사관을 통해 업무를 처리해야 했다. 더구나 밀렵은 국가 이미지나 관광 산업과 연관된 예민한 이슈였다. 두 달 전에 넣어놓은 촬영 허가 신청이 반려됐다는 사실도 보츠와나한인회를 통해서 간신히 알아냈다. 내용을 완화한 신청서를 다시 접수시키고 아프리카 출발을 강행했다.

15명 이상이 대규모 장비로 움직이는 출장을 허가 없이 진행하는 건 도박이다. 몰래 촬영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고, 눈에 띄지 않을 인원도 아니다. 하지만 빈손으로라도 지금 가지 않으면, 이후의 출장 일정과 프레젠터 스케쥴에 전부 차질이 생긴다. 먼저 케냐 촬영을 진행하며, 보츠와나한인회장의 도움으로 간신히 조건부 허가를 받아낼 수 있었다. 제작진이 보츠와나 촬영 장소인 카사네(Kasane)로 들어갈 때, 나는 수도인 가보로네(Gaborone)로 홀로 향해, 각서를 쓰고 허가증을 수령했다. 데드라인을 딱 하루 남긴 시점이었다. 그렇게 시청자들을 큰 충격과 슬픔에 빠뜨린 코끼리 밀렵 현장을 카메라에 담을 수 있었다.

귀국할 때도 보츠와나는 우리를 쉽게 놔주지 않았다. 촬영을 마치고 짐을 챙겨 공항에 갔을 때였다. 무장 경찰 20명 정도가 공항 로비에 들이닥쳐 제작진 전원을 인근 경찰서로 체포해갔다. 이유도 알 수 없었다.

동양인들이 카메라를 들고 보름 가까이 돌아다니니 신고가 들어간 모양이었다. 촬영 원본을 내놓으라고 했다가, 드론 촬영을 했는지 묻다가, 제작진 전원의 짐을 털기 시작했다. 촬영을 빙자해 코끼리 상아나 동물 사체 일부를 반출하는 건 아닌지 의심하는 눈치였다. 당연히 아무것도 나올 리 없고, 당황하는 경찰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어렵게 받아낸 촬영 허가증이 빛을 발했다. 가보로네 담당 부서에 직접 전화해 허가증이 진짜인지 확인하고서야 우리를 풀어줬다. 촬영된 내용 중에 허가서에 포함되지 않은 긴급상황도 제법 많았기에, 간신히 잡아탄 비행기에서 가슴을 쓸어내렸다

 

장기 다큐멘터리의 유산 물려받은 책임감을 깨닫다

 

누군가 물은 적이 있다. 뜻대로 안 돼 아쉬운 현장은 어디였냐고. 현장은 어디건 뜻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다. 더구나 해외 로케에 촬영 대상이 동물이면 말 다했다. 그래서 조금 더 유연하게 대안을 마련하고 빠르게 결정해야 한다. 그런 마음으로 쉴 틈 없이 아프리카 3차 출장, 일본 2차 출장까지 내달렸다. 이젠 인천 공항만 봐도 신물이 넘어올 지경이었다. 일본 타이지 돌고래 사냥까지 찍고서야 처음 그런 생각이 들었다. ‘, 이제 어떻게든 방송은 나갈 수 있겠구나.’

 

 

보츠와나 촬영 현장의 김현기 PD <출처 - 필자 제공>

 

 

 

그러고도 제주도, 이탈리아, 중국 출장을 다녀와서야 촬영이 마무리됐다. 마지막으로 귀국해 스태프들과 공항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질 때, 다리가 조금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큰 사고나 다친 사람 없이 여기까지 왔음이 무엇보다 감사했다. 나이가 들며 보니, 그건 촬영이 잘 된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었다.

이후 후반 작업의 우여곡절까지 일일이 나열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매일 편집실에서 날밤을 샜고, 조연출들은 회사에서 서식하는 생명체처럼 보였다. 메인 작가는 마지막 5부 대본을 넘기고 바로 다음날 첫 아이를 출산했다. 그렇게 수많은 스태프들을 갈아넣어방송이 무사히 나갈 수 있었다.

다행히 호평과 찬사가 이어졌다. 간만에 창사특집 명품다큐멘터리의 계보를 이었다는 뻔한 수사도 낯뜨겁기보단 고마웠다. 그만큼 절박했단 뜻일 거다. 1년이란 시간과 10억 원에 달하는 제작비를 써서 회사 이름이 떡하니 박힌 프로그램을 만든다는 부담. 하지만 1년은 ‘FF(▶▶) 버튼을 누른 듯 순삭됐고, 그 어렵게 만든 예산도 쓰려니 모자랐다. 이제 정말 끝났다고 생각하자, 무사히 마쳤다는 안도감부터 터져 나왔다. 시간과 능력의 부족으로 해내지 못한 것들에 대한 아쉬움도 빠질 리 없었다. 지나놓고 보니 결과적으로 틀렸던 판단에 대한 자책도 들었고, 그런 순간들도 잘 견디며 날 제어해준 동료들에 대한 고마움도 밀려왔다.

<휴머니멀>의 내용과 메시지에 대한 자평은 낯 뜨거워 차마 못쓰겠다. 제작기를 방송 내용으로 채워 넣지 않은 것도 같은 이유다. 하지만 이 글을 통해서 그걸 말하고 싶었다. 그저 옆에서 바라보며 막연히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힘들고, 많이 더 보람 있었다고. 그간 짊어지고 걸어온 부담감을 어깨에서 내려놓는 순간, 앞서 장기 다큐멘터리를 만들어온 PD들이 떠올랐다. 이 짐을 외롭게 짊어져 온, 그리고 나에게 이어준 선배. 해본 경험이 있어야, 해볼 필요성도 안다. 그래야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우리의 역량을 영혼까지 끌어모아 이런 걸 만들어야 한다고 버틸 수 있다. 아직도 지상파 4사 정도만이 이런 대형 다큐멘터리를 만들 수 있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휴머니멀>은 그런 의지와 노력이 모인,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몰아준결과물이다. 가치는 경험을 통해 전이된다. 그리고 그 소중한 경험치를 획득한 이상, 나에게도 또 다른 장기 다큐멘터리를 만들 PD들을 격려하고 지원할 의무가 생긴 셈이다. 그들에게 <휴머니멀>이 최신 버전의 길라잡이가 되길 희망한다. 그간 못 쓴 휴가를 내고 뒹굴거리는 와중에 발견한 문구로 마무리를 갈음한다.

      

우리는 10년 안에 달에 착륙하기로 했습니다. 그것이 쉬워서가 아니라 어렵기 때문에 하려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의 에너지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나타내는 척도가 될 것입니다이는 또한 우리를 비롯한 모두가 달성하고자 하는 바이기 때문입니다.”

- 1962년 아폴로 계획을 발표하며 - J. F. 케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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