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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는 지난 1월 1일, 개정 편집강령과 편집강령규정을 독자에게 공개했다. 언론사 스스로 자성의 노력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고무적인 행보다. 시시각각 변하고 있는 언론 환경에 맞춰 어떤 기준을 새롭게 만들고 개선했는지, 그 면면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다시, 기본으로
‘기레기(기자와 쓰레기의 합성어)’라고 기자를 비하하는 말이 어느 순간 우리 사회에 일반적으로 통용되기 시작했다. 심지어 젊은 기자들 중심으로 스스로를 기레기라며 자조하는 목소리도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개인적으로는 2014년 세월호 참사가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한다. 일차적 책임은 기자에게 있다. 최소한의 취재 윤리도 무시하고 경쟁적 보도를 쏟아낸 데 따른 업보다.
어떤 분야든 일정 수준의 직업윤리라는 게 뒤따른다. 지난 몇십 년을 돌아볼 때 우리 언론은 이를 소홀히 했다. 최근 저널리즘의 위기가 찾아왔다는 목소리가 크게 들린다. 하지만 대부분의 언론사는 플랫폼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이럴 때일수록 간과해 왔던 윤 리규정에 대한 정비도 시급하다는 지적이 많다.
한국일보의 편집강령 개정과 취재보도준칙 신설은 이런 당면한 요구에서 출발했다. 한국일보는 1989년 언론 자유와 알 권리 수호, 인권 옹호 의지를 담아 편집강령을 만들었다. 언론계에서의 위상이 정점에 있을 때다. 이후 1991년과 2012년 개정 작업을 거쳤다. 하지만 추가로 따라야 할 변화가 부족했다. 전 사주의 편집국 폐쇄 사태(2013년) 등 어려웠던 내부 사정이 결정적 원인이었다.
2015년 새 사주가 들어오고 나서부터 사내 노동조합을 중심으로 취재보도준칙 마련 작업이 꾸준히 진행됐다. 안정화에 접어들면서 이제 기본부터 다시 착실하게 다져야 한다는 내부적 공감대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지난해 조국 전 법무부 장관 논란과 관련해 우리의 취재 기준과 방향을 점검하는 내부 토론회를 거치면서 이런 분위기는 한층 고조됐다. 최근 속도를 내고 있는 디지털 퍼스트 작업도 영향을 미쳤다.
편집국, 디지털콘텐츠국, 노동조합, 민실위원회까지 참여
편집강령 개정과 취재보도준칙 신설은 지난해 상반기부터 구체적으로 논의가 진행됐다. 2019년 6월 신임 편집국장 임명을 계기로 편집국의 뉴스1부문장, 디지털콘텐츠국의 디지털뉴스부장, 민실위원(15년 차 이상, 5년 차 이하) 조합 지부장까지 포함한 TF가 꾸려졌다. 자료 취합 등의 사전 준비 단계를 거쳐 지난해 9월부터는 본격적인 정비 작업에 돌입했다. 12월까지 총 다섯 번의 오프라인 회의와 비정기 온라인 회의를 진행하면서 의견을 모았다. 기존에 있던 편집강령과 편집강령규정부터 개정에 나섰고, 전반적인 비중은 취재보도준칙 신설에 뒀다. 이렇게 만들어진 편집강령 개정안과 취재보도준칙 신설안은 이후 논설실장과 콘텐츠본부장, 편집국장과 디지털콘텐츠 국장에게 전달해 보완했다. 논설실장은 1989년 편집강령 제정 당시 주니어 기자로 참여했기 때문에 정비 작업에 이때의 경험을 토대로 의견들을 더했다. 또 한국일보 출신 배정근 숙명여대 교수의 최종 감수를 거쳤으며, 편집국 출신의 부사장과 사장을 통해 다시 한번 의견을 모았다. 개정 편집강령과 편집강령규정은 지난 1월 1일 자로 지면과 온라인을 통해 독자들에게 공개했다.
제정 취지를 최대한 살리다
편집강령은 시대가 바뀌어도 변할 수 없는 기본 가치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제정 당시의 취지를 최대한 살리는 데 주안점을 뒀다. 자유민주주의와 인권 존중, 평화와 통일 지향적 자세 등 언론으로서 가져야 할 시대적 사명과 책임 등이 크게 변할 수 있는 가치가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사회 갈등 상황과 관련해서는 변화를 줬다. 편집강령 제정 당시인 1980년대 후반은 우리 사회에서 영호남을 중심으로 지역 갈등이 가장 큰 문제 중 하나다. 하지만 30년이 지난 지금 계층과 세대, 이념 갈등이 지역 갈등보다 훨씬 증폭된 양상을 보인다. 이 때문에 이런 갈등을 극복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는 언급이 추가됐다. 언론 자유와 편집권 독립에 대한 부분도 가다듬었다. 편집강령규정에는 편집국장의 신임 절차가 포함돼 있다. 때문에 이와 관련해 지방취재본부 구성원들을 위해 이미 시행 중인 모바일 투표를 넣었고, 신임안 통과 이후 의 절차도 손질했다. 이번 편집강령과 편집강령규정 개정에서 또 다른 고민은 모든 표현이 편집국 위주로 돼 있었다는 점이다. 디지털 퍼스트를 위해 디지털콘텐츠국이 별도로 신설된 상황에서, 편집국만을 위한 강령이 되지 않도록 표현을 다듬었다. 다만 디지털 중심의 변화가 과도기에 있는 만큼, 조직의 안정성을 위한 부분도 고려했다.
높아진 젠더 감수성 반영
이번 작업에서 가장 중점을 둔 부분은 취재보도준칙의 신설이었다. 기본적으로 신문윤리위원회 신문윤리강령 및 신문윤리실천요강과 한국기자협회 윤리강령 및 실천요강을 참고했다. 일단 형식은 편집강령규정 안에 취재보도준칙을 포함하는 것으로 정했다. 크게 범위를 일반 사건과 성폭력 사건, 자살 사건, 성 평등, 선거 보도, 재난 관련 준칙으로 나누기로 했다.
먼저 사건보도준칙에 있어서는 실명 공개 원칙을 세웠고,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증인 및 피해자 가족 노출 등과 관련한 원칙을 세웠다. 사회적으로 젠더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는 상황도 적극적으로 고려했다. 우선 성폭력 사건 보도를 일반 사건 보도와 분리해 별도의 준칙을 마련했다. 성폭력 사건의 경우, 그간 젠더 감수성 부족으로 언론 보도의 폐해가 많이 지적돼 왔다. 이에 피해자 인권 보호를 최우선으로 한 는 내용을 맨 앞에 내세웠고, 주변인 등에게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한다는 부분도 포함했다. 최근 성폭력 사건 보도에서 흔하게 범하는 폐해인 가해자 중심 용어나 표현 사용 금지 조항도 넣었다.
성 평등 보도준칙 역시 최근 급격하게 변화한 사회상을 충실히 담아내고자 했다. 성별을 불필요하게 강조하지 말자는 내용과 다양한 가족 형태를 존중하고 특정 가족 형태를 부정적으로 묘사하지 않는다는 조항이 대표적이다. 다문화 가정 및 동성 가정과 제3의 성 등을 고려한 것이다.
경각심이 고조된 자살 사건 보도도 더 신중하게 접근하기 위한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데 의견이 모다. 이는 지난해 말 특정 연예인 죽음 관련 기사에 대한 책임에서 우리도 자유로울 수 없다는 판단에서다. ‘자살’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는 것은 물론, 자살 사건 보도 자체를 자제하는 쪽으로 문구를 정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부분은 자살 사건을 일반 사건과 동일한 선상에서 묘사하는 것이다. 이 때문에 자살 장소와 방법, 경위 자체를 묘사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아직 현장 기자들에게는 일반 사건과 자살 사건을 구별해 취재하고 기사를 쓰는 게 다소 어려운 일처럼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이런 원칙을 최대한 구현하는 것이 언론이 사회적 공기로서 역할의 단면이라는 생각에 포함하기로 했다.
기레기라는 오명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세월호 참사 이후 지속해서 제기됐던 재난보도준칙에 대해서도 신경을 썼다. 특히 최근 몇 년간 재난 보도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지점을 우선적으로 고려했다. 속보성 때문에 정확성을 포기하면서 일반 독자들에게 혼란을 가중할 수 있다는 점을 먼저 감안했다. 세월호 참사 때 언론을 향한 비판이 잘못된 속보에서 시작됐다는 것을 상기했다. 이를 토대로 재난보도준칙의 가장 우선순위는 최대한 정확한 보도를 하는 것으로 규정했다. 또 재난 현장 취재에 있어 인명 구조와 보호, 사후 수습 등에 지장을 주지 않아야 한다는 사실도 빼놓지 않았다. 또 중요한 정보에 대해서 받아쓰기 수준이 아니라, 취재의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검증을 최대한 강화하도록 했다.
올해 예정된 21대 총선을 대비해 선거보도준칙도 포함했다. 선거보도준칙과 관련해서는 특히 공정성 부분에 초점을 맞췄다. 의도치 않게 특정 정당이나 후보에 유리하거나 불리한 기사가 나가는 경우까지 최대한 고려해서 기사를 작성해야 한다는 원칙을 세웠다. 선거 때 흔하게 발생하는 정치 공방에서는 면밀한 확인 과정을 거치는 동시에 각 정당과 후보자들의 반론을 확실하게 보장하는 쪽으로 문구를 정했다. 기사와 사진 외에 영상과 기타 콘텐츠 모두에서 공정의 가치를 내걸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현장에서 필요한 기준
이렇게 만들어진 취재보도준칙이 과연 현장에서 어느 정도 반영될 수 있을까. 이 고민은 지금 이 순간도 진행형이다. TF 논의에서도 현실적인 현장 상황을 어떻게 접목하느냐가 최대 쟁점이었다. 그간 지속적으로 취재보도준칙의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결과물이 늦어진 것도 이런 내부 분위기와 무관치 않았다. 실제 이번 정비 작업에서도 선후배 기자들을 중심으로 “기준을 만들어 놓고 현장에서 적용할 수 없으면 무용지물 아니냐”, “현장의 상황을 너무 모른 채 이상향만 정해 놓은 것 아니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다. 이 부분을 고려해, 일반 사건 및 성폭력 사건, 자살 사건 등 대부분은 현장 의견을 충분히 듣는 작업도 병행했다. 사회부와 정책사회부 등 해당 부서의 의견을 다시 한번 청취하는 과정을 거쳤다. 내부의 시선으로만 기준을 만드는 것이 한계라는 우려도 보완하고자 했다. 다양한 외부 인사들을 정해 매달 진행하고 있는 독자권익위원회 회의에서 나온 의견들에 지속해서 귀를 기울였다.
취재보도준칙 신설 두 달…앞으로의 과제
취재보도준칙을 신설한 지 두 달째 접어들었다. 현장에서 취재보도준칙이 어느 정도 반영되고 있는지 아직 체감하기 어렵다. 다만 내부적으로 작은 변화들이 눈에 띈다. 최근 확산하는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발생한 코로나19 사태부터 그렇다. 발생 초기 표현과 관련해 내부적으로는 “재난보도준칙에 따라 자극적인 표현을 삼가자”는 얘기들이 먼저 나왔다. 2015년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유행 때와 달리 새로운 확진자 발생 경우에도 중앙사고수습본부의 공식 브리핑을 분명히 확인한 후 속보를 처리하고 있다. 정확성을 더 중요한 가치로 판단한 것이다. 4월 총선을 앞두고 쏟아지는 선거 관련 기사에서도 중립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엄격해진 여론조사 기사 기준을 지키는 것은 이제 담당 기자들에게는 기본이 된 분위기다. 최근 자살 기사도 보도 자체를 최소화하고 있다. 연예 뉴스를 중심으로 한 어뷰징 기사에 대한 내부 기준도 강화하고 있다. 취재보도준칙 신설과 맞물려 올해 초에는 2019년 한 해 동안 언론중재위원회에서 내놓은 ‘매체별 시정 권고’ 통계도 편집국 전체에 공유하고 있다. 시정 권고에는 취재보도준칙의 상당 부분을 어떻게 지키고 있는지 각 언론사의 현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취재보도준칙 신설 이후 올 한 해 동안 우리가 얼마나 이를 지키고 있는지 수치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한다. 내부적으로 이런 변화는 1년 전과 비교해도 비약적이다. 외부에서 보기에 미약할 수 있지만, 이런 변화들이 현장의 기자 모두에게 온전하게 전파될 시간도 오래 남지 않았다고 판단한다.
이번 취재보도준칙 신설 이후 당초 기대와 달리 더 구체적이지 않고 추상적 수준에 머물다는 비판도 제기됐다. 이를 수용한다. 최종 감수를 맡았던 배정근 교수는 지난해 발간한 <언론윤리규정 개선을 위한 연구>에 나와 있는 언론윤리규정 개선안을 참고해 좀 더 상세한 기준을 만들 것을 조언했다. 실제 이 연구에서 제시한 항목 중 당장에 필요한 현실적인 기준들도 눈에 띈다. 진실성을 위해 “인터넷과 사회관계망서비스(SNS) 등 온라인 공간에서 취득한 정보는 더욱 엄격한 사실 검증을 거치고 출처를 표시한다”라거나, 독립성을 위해 “트래픽을 늘릴 목적으로 반복 전송 같은 어뷰징 행위를 하지 않는다”, 투명성을 위해 “익명 취재원은 정당한 사유가 있는 경우에만 예외적으로 사용한다” 등은 내부 논의가 진행 중이거나, 독자권익위를 통해서도 꾸준히 제기돼 왔던 지적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도 현장 기자부터 편집국 출신의 경영진까지 공감했다. 조만간 취재보도준칙의 후속이라 할 수 있는 작업을 긴 호흡으로 이어갈 예정이다. 아직 부족하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우리의 잘못을 ‘관행’이라는 말로 비켜가지 않을 것이다. 취재보도준칙의 실천은 이제 기자의 의지에 달린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치열해진 언론 환경에서 정 도를 걸을 수 있는 유일한 출발점이라는 점에서 취재 윤리 강화를 위한 한국일보의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