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상세
[커버스토리] 저널리스트 브랜드, 어떻게 강화할까
커버스토리 | 등록일 : 2020-03-02

저널리스트 브랜드의 대표적인 사례는 해외에서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전설의 저널리스트 밥 우드워드와 탐사보도 전문가 시모어 허시가 그 예다. 한국판 밥 우드워드와 시모어 허시를 배출하기 위해 우리 언론이 짚어봐야 할 것은 무엇일까. 편집자 주

 

손석희 없는 JTBC, 김태호 없는 MBC, 나영석 없는 tvN을 상상해봤는가? 미디어 백화제방(百花齊放) 시대가 등장하면서, 개별 언론사 플랫폼에 따른 완장 효과는 사라지고 브랜드화에 성공한 언론인이 빛을 발하게 된다. 저널리스트의 시대가 왔다. 밥 우드워드(Bob Woodward), 시모어 허시(Seymour Hersh), 손석희, 최승호 네 명의 언론인 사례를 통해 저널리스트 브랜드를 어떻게 강화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현장이 답이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 부편집인

 

밥 우드워드를 만나려고 시도한 것은 2003년이었다. 당시 우드워드가 쓴 부시는 전쟁 중(Bush at War)(2002)이라는 신간 속에 나는 김정일을 증오(loathe)한다. 질색할 만큼이라는 부시 대통령의 육성 증언이 있었기 때문이다. 밥 우드워드는 조지 부시 대통령을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유일한 언론인이었고, 이 발언은 북한과 북핵 문제에 대한 부시 대통령의 입장을 가늠할 수 있는 유일한 증거였기 때문에 우드워드에게 여러 차례 인터뷰를 요청했다. 그러나, 그는 어떠한 답변도 보내지 않았다. 그를 만나기 위해 워싱턴포스트로 가서 무작정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퇴근하는 인파 속에서 허탕을 치고, 퇴근 인파가 잦아질 무렵 결국 워싱턴포스트의 한 기자에게 어디로 가면 우드워드를 만날 수 있냐고 물었다. 그 기자는 우리도 우드워드를 보는 게 소원이라고 말하곤 사라졌다. 워싱턴포스트 기자들도 편집국에서 만날 수 없는 70대의 우드워드는 지금도 현장 어딘가에서 발로 뛰는 영원한 탐사 기자였다

 

 

 미국의 대표적인 언론인 밥 우드워드 ©한국언론진흥재단

 

우드워드는 조지 H.W. 부시(아버지 부시), 클린턴, 조지 W. 부시(아들 부시), 오바마 등 대통령의 임기 첫해가 지나자마자 정권의 성격과 핵심 정책을 파헤치는 책을 출간했는데, 그때마다 미국 정계를 강타했다. 우드워드는 9·11테러 이후 백악관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를 보여주는 책과 미국 사회의 변화를 진단하는 시리즈 기사를 써 생애 두 번째 퓰리처상을 받았다. 부시는 전쟁 중에 이어 공격 시나리오(Plan of Attack)(2004), 부정의 나라(State of Denial)(2006), 내부의 전쟁(The War Within)(2008) 등이 차례로 나왔다. 부시 대통령을 비롯해 백악관과 행정부 고위 참모 수백 명을 인터뷰해서 쓴 글이다. 백악관에서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과정을 마치 옆에서 보듯 생생하게 그렸다.

그의 취재력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우선 우드워드 자신의 명성이다. 29세 때 닉슨 대통령을 끌어내린 워터게이트 특종 이래 우드워드는 전설적인 기자로 불려왔다. 워싱턴의 각 행정부는 이 전설을 앞다퉈 만나고 싶어 했고, 치적을 알리는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다. 언론을 상대하지 않기로 유명한 부시 대통령도 우드워드를 1년에 세 번이나 독대했다. 우드워드가 클린턴 행정부 내부 이야기를 쓴 어젠다(The Agenda)(1994)란 책을 준비하던 시절에도 클린턴 행정부의 백악관 직원들이 줄을 서서 만났다고 한다.

백악관 고위 관료들이 줄을 서서 우드워드를 만나려는 가장 큰 이유는 워터게이트의 명성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더 큰 이유는 그가 워터게이트의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꾸준한 노력을 통해 자신의 전문성과 브랜딩 가치를 높였기 때문일 것이다. 백악관, 연방대법원, 국방부 등 미국의 핵심 정부 기구를 심층 취재한 책을 차례로 내놓으면서 그는 워싱턴의 전체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란 평가까지 듣고 있다. 백악관 고위 관리들조차 우드워드의 책을 읽고서야 워싱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게 됐다고 말할 정도다.

우드워드는 오바마 대통령 시기에도 대통령과 의회 간의 피비린내 나는 정치싸움을 조명한 정치의 대가(Price of politics)(2012)를 출간했다. 또한 70대인 2018년에도 트럼프행정부의 내막을 파헤친 공포: 백악관의 트럼프(Fear: Trump in the White House)를 출간해 미국 정가에 파란을 몰고 왔다. 우드워드가 워터게이트 특종 이후 단독으로 낸 책은 무려 17권이다. 중요한 점은 이 모든 저술은 그가 현장에서 엄청난 발품을 팔아 취재한 땀의 노력이란 점이다. 

나는 지난 2009년 미국 탐사보도 총회에서 우드워드의 강연을 들을 기회가 있었다. 그는 운집한 기자들에게 질문을 던졌다. “부시 대통령과 4~5시간 단독인터뷰를 하면서 몇 개의 질문을 던졌을 것 같은가?” 어떤 기자는 10, 또 다른 기자는 20개쯤이라고 답변을 했다.

우드워드는 어떻게 답변했을까? 그는 부시에게 무려 500개의 질문을 던졌고 그래서 책이 나올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 사람에게 500여 개의 질문을 던지기 위해 얼마나 많은 준비가 필요했을까? 29세 때 이룩한 워터게이트 특종기자란 명성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하게 자신을 연마하는 절차탁마의 노력이 오늘날 밥 우드워드의 명성을 가져온 것이다. 그의 취재원이 됐던 사람들은 우드워드는 예의 바르고 상대를 불편하게 만들지도 않는다, “그를 만나면 원래 하려던 말보다 더 많은 것을 나도 모르게 털어놓게 된다고 말한다. 절차탁마의 노력이 가져온 노하우가 아닐까?

 

취재원과의 신뢰를 저버리지 마라!”: 미라이 학살특종기자 시모어 허시

 

19683월 베트남 남부 미라이 마을에서 미군이 베트남 민간인 500여 명을 학살했다. 전모를 밝히기 위해 30대 초반의 젊은 기자 시모어 허시는 베트남을 오가는 집요한 취재 끝에 학살의 내막을 고발하는 5편의 심층 기사를 작성했다. 어느 언론도 기사를 받아 주지 않자, 허시는 디스패치뉴스서비스(Dispatch News Service International)’라는 뉴스 배급사를 직접 설립해 기사를 배급했다. 미국 30여 개 신문 등에 동시에 실린 기사로 인해 미국엔 반전의 물결이 몰아쳤다. 눈앞에서 보듯이 생생하게 묘사한 이 취재로 허시는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미라이 학살 특종에 안주하지 않고 부단하게 노력하며 끊임없이 특종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점이 허시의 특장이다. 그는 미국의 캄보디아에 대한 비밀 폭격, CIA의 국내 사찰, 백악관 비밀 도청, CIA와 헨리 키신저의 칠레 아옌데 정권 전복 개입 등 수많은 특종을 해냈다.

2004년에는 뉴요커지(The New Yorker)에 아부그라이브(Abu Ghraib) 교도소에서 벌어진 미군의 이라크 포로 학대 사건을 폭로해 큰 파장을 낳았다. 허시는 단순히 사진을 공개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정보를 얻기 위해 이라크인 수감자에게 신체적 강압과 성적 모욕을 안기는 심문 방법을 권장하는 비밀 작전을 승인한 럼즈펠드 국방장관이 학대의 배후이며, 부시 대통령도 이 프로그램의 존재를 보고받았다고 폭로했다

 

 

미국 탐사보도의 일인자 시모어 허시 ©Democracynow

 

또한, 북핵 위기가 고조되던 2004년 허시는 파키스탄 핵의 아버지라 불리는 압둘 카디르 칸(A. Q. Khan) 박사가 북한에 핵무기 제조에 필수적인 원심분리기를 제공하고 고농축 우라늄 프로그램을 지도했다는 메가톤급 특종을 터뜨린다. 나는 당시 뉴요커지에 실린 기사를 보고, 허시에게 인터뷰를 요청했지만 만나지 못하고, 2009년 탐사보도 총회에서 만날 수 있었다.

허시가 빛나는 이유는 미라이와 아부그라이브 등의 사례에서 보듯, 미국의 야만성과 폭력을 고발하는 데 앞장섰다는 점이다. 그는 가장 취재가 어려운 국가 안보와 정보 분야를 취재하면서, 심지어 자국의 치부를 드러내는 보도를 하면서도 단 한 번도 취재원을 노출시키지 않았다. 허시는 초급장교 때부터 맺은 신뢰 관계를 장군 때까지 수십 년간 유지한다고 한다. 탐사보도 총회에서 허시는 미국 국가안전보장국(NSA, National Security Agency)을 파헤친 제임스 뱀포드(James Bamford) 기자와 나란히 강단에 섰다. 뱀포드는 NSA는 외부 위협으로부터 미국을 보호하기 위해 설치된 것이 아니며, 전쟁을 조장하고 타국 기본권의 근간을 흔들 목적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것이 목적이라며 미국의 전자 감시 실태를 폭로했다. 그런데, 백발의 노기자 허시가 갑자기 뱀포드에게 화를 냈다. 그가 노트북을 보면서 설명한다는 게 이유였다.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NSA를 취재한다는 기자가 노트북을 사용하다니. NSA는 너의 모든 정보를 다 볼 수 있다. 당장 노트북을 덮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허시는 자신은 기자가 된 이후 단 한 번도 노트북에 취재 정보를 넣은 적이 없다고 말했다. 항상 취재수첩에 정리하고, 그것을 다 쓰면 멀리 있는 친구에게 보낸다고 했다. 그러면 그 친구는 다시 다른 친구에게 보내는 식으로 서너 번 돌려 그 수첩이 어디 있는지 모르게 보관해왔다고 고백했다. CIA, NSA, 미 국방부 등 가장 위험한 곳을 취재해오면서도 단 한 번도 취재원이 노출되지 않은 비결이었다. 이러한 철저함을 바탕으로 허시는 전쟁과 테러 등 국가안보위기 상황이 발생했을 때, 대부분의 주류 언론이 정부를 선전하기에 바쁜 것과는 달리, 미국의 권력 남용과 인권침해를 끊임없이 비판하고 감시해왔다. 그러기에 미국 언론인들은 허시를 탐사보도의 일인자이자 탐사보도의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데 주저하지 않는다.

 

한눈팔지 않고 선택과 집중하라 : 손석희

 

손석희 JTBC 사장은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이다. 시사저널의 영향력 조사에서 15년간 부동의 1위였다. 처음은 순탄치 않았다. 손석희는 MBC 입사 후 보도국 기자로 전직했는데, 텃세가 심했다. 누군가 MBC 보도국으로 전화해 손석희 기자 좀 바꿔주세요라고 하니까 손석희 기자라는 사람은 없습니다라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탕 소리가 나게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바로 옆에 손석희 기자가 앉아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는 저널리즘 탐구에 대한 열망을 버리지 않고, 1997년에는 저널리즘을 더 공부하기 위 해 자비로 미국 연수를 떠났다. 학비를 벌기 위해 미 국 10부작 다큐멘터리를 만들어 MBC에서 방영하기 도 했다. 직접 원고를 쓰고 카메라맨의 도움을 받아 가며 편집도 직접 했는데, <미국의 그늘, 홈리스>, <한인 갱들의 강력범죄 증가>, <세상의 주인공은 여성> 등에서 알 수 있듯이 교육·양성평등·사회 불평등 문제 등 저널리즘의 본령을 다뤘다. , 한인 갱들이 싸우는 LA 뒷골목이나 홈리스 거주지 등 미국 경찰도 다가가기 조심스러워 하는 곳을 위험을 무릅쓰고 취재했다.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으로 꼽히는 손석희 전 JTBC 사장. 그는 시사저널의 영향력 조사에서 15년간 부동의 1위를 차지했다. <출처 - 1. 필자 제공, 2~5. MBC, 6. JTBC>

 

MBC로 복귀한 손석희는 1999<아침 뉴스 2000>이라는 뉴스 앵커를 맡았다. 그는 앵커가 현장에 출동해 취재하는 5분 내외의 탐사보도 꼭지인 <앵커출동>을 만들기도 했다. 손 앵커의 첫 탐사보도는 지하철 파업이었고, 그를 주제로 프로그램을 만들던 나는 취재에 동행했다. 경찰에 쫓기던 지하철 노조원들이 서울대 운동장에 집결하기로 했다는 정보를 입수한 손 앵커는 신속하게 서울대로 향했다. 그런데, 그가 도착하기 직전, 경찰이 먼저 서울대로 진입 시도를 하고 있었다. 노조원들은 관악산 속으로 숨었다. 텅빈 운동장에서 손 앵커는 주저 없이 순식간에 3~4개의 스탠딩 리포팅을 했다. 상황이 급변해서 당황스러울 법도 했는데, 손 앵커는 직권면직과 강경투쟁마주 달리던 두 열차는 결국 충돌하고 말았습니다라는 스탠딩 리포팅을 텅빈 운동장에서 했다. 평소 철저한 저널리즘의 훈련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손석희의 저널리스트 브랜드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개인적으로 손석희의 브랜딩은 철저한 노력 외에도 자신에 대한 엄정함과 절제, 철저한 선택과 집중에서 왔다고 생각한다. 음악에도 해박한 손석희를 원하는 곳은 너무나 많았다. 예능에서도 많은 제의가 들어 왔지만 모두 거절했다. 손석희의 매형인 주철환 PD<대학가요제>를 할 때마다 손석희에게 MC를 맡아달라고 사정했지만, 20여 년간 거절당했다고 토로했다. 다른 사례는 <e-멋진 세상>이란 교양 프로그램 MC를 맡을 때다. 제작진은 손석희에게 국제 시사프로그램 MC를 맡아달라고 제의했고, 그는 수락했다. 그런데, 프로그램 녹화장에서 손석희는 <e-멋진 세상>이 국제 시사 현안을 다루기보다는 풍물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에 가깝다는 걸 알게 됐고 결국 6개월 만에 하차했다. 손석희는 2000년대 들어 <100분 토론>과 라디오 시사프로그램인 <시선집중>에 전념했다. <100분 토론>7, <시선집중>14년간 진행했는데, 이는 저널리즘에 대한 소신과 철저한 자기 관리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특히, 새로운 저널리즘의 영역을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시선집중>은 이후 JTBC <뉴스룸>의 원형이 됐다는 평가를 받는다.

손석희의 저널리즘은 어떤 것일까? 20155월 그는 언론정보학회 학술대회에 기조 강연자로 나서 저널리즘 철학을 발표했다. 그가 중시하는 저널리즘의 원칙은 사실·공정·균형·품위였다. 그는 시청률에서 손해를 보는 한이 있더라도 품격을 잃지 않겠다고 밝혔다. 의제설정(Agenda Setting) 못지않게 어젠다 키핑(Agenda Keeping)’이 중요하다고 했다. 어젠다 키핑은 손석희 자신이 만든 말로 의제 유지의 원칙은 세월호 보도를 1년 이상, 4대강 보도를 6개월 이상 지속한 뚝심의 원천이었다. 손석희의 또 다른 키워드는 개방이다. JTBC는 언론사 최초로 미디어 다음, 네이버, 네이트, 유튜브 등에 생방송으로 뉴스를 내보냈고, 이 개방과 공유 정신으로 JTBC는 한때 지상파 3사를 합친 것보다 많은 조회수를 기록했다. ‘네트워크도 중요한 키워드다. 쌍방향 소통을 넘어 시청자가 뉴스 생산자의 일부가 되는 네트워크의 실현이 손석희가 꿈꾸는 언론 민주화였다. 선택과 집중은 손석희 저널리즘의 고갱이다. JTBC 뉴스는 아이템 수를 줄이는 대신, 선택과 집중으로 심도 있는 뉴스를 시청자에게 제공했다. ‘다 알아야 할 필요는 없지만, 더 알아야 할 필요는 있다는 캐치프레이즈는 이 문구를 만든 손석희의 삶과 저널리즘 정신을 오롯이 대변하고 있다.

 

224일 사장직에서 물러나면 뉴스타파로 돌아가 탐사보도를 계속하겠다고 밝힌 최승호 전 MBC 사장 ©뉴스1

 

진실을 향한 불굴의 투쟁: 최승호 PD

 

최승호는 <황우석 신화의 난자 의혹>, <줄기세포 신화의 진실>, <검사와 스폰서>, <4대강, 수심 6m의 비밀> 등 탐사보도를 통해 진실을 찾아 나섰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온 것은 해고였다. 사회적 살인이라는 해고를 겪었지만, 최승호는 굴하지 않고, 뉴스타파로 자리를 옮겨 왕성한 탐사보도를 이어갔다. 그 과정을 거치면서 신뢰받는 언론인으로 각인됐다.

뉴스타파에서 최승호는 조세회피처 명단 공개, 국정원 대선 개입 의혹 등 기념비적 탐사보도를 선보였다. 또한, 국정원 간첩 조작 사건을 탐사보도한 영화 <자백><공범자>를 제작했다. 최승호는 두려움을 모르는 언론인이다. PD수첩에서 순복음교회 등의 대형교회 문제, 재벌, 국가안보와 민감한 차세대 전투기 문제도 가감 없이 다뤘으며, <금정굴의 비밀>편에서 보듯, 국군에 의한 민간인 학살 문제도 한국 방송 사상 최초로 다뤘다. 특히, 허준영 코레일 사장, 원세훈 국정원장, 김기춘 비서실장 등을 카메라 앞에 세웠고, 박기준 등 현직 검사장들을 끌어내렸으며 퇴임하는 이명박 대통령의 집 앞에서 기다렸다가 경호원들의 제지를 뚫고 언론이 질문을 못하면 나라가 망한다고 외쳤다.

최승호를 두려움을 모르는 언론인이라면 그것을 가능케 한 가장 큰 원동력은 무엇일까? 바로 언론인으로서의 책임감이다. 최승호는 어떤 문제든지 그냥 대충 건드려서는 제대로 해결이 되지 않는다. 집요하게 뿌리를 파서 끝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보여줘야 한다. 적당히 대충해서는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고 믿는다. 2005수첩> 앵커를 맡았을 당시 최승호는 능력이 모자라서 못 하는 경우는 있었지만 외압 때문에 못 하는 일은 없다. 시청자의 제보를 기다린다고 말했다. 진심이 담긴 최승호의 말은 시청자들의 심금을 울렸고, 류영준 서울대 연구원도 이 방송을 보고 황우석 줄기세포 연구 조작에 관한 제보를 결심했다.

최승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언론 윤리다. 언론인이라면 현실을 왜곡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국민들에게 알려줘야 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다. 현실을 있는그대로 알려주는 데는 외압을 물리치는 것도 필요하지만, 언론인의 내적 윤리도 매우 중요하다고 믿는다. 2009, 나는 최승호 PD와 함께 미국 탐사보도협회 연수에 참가했다. 그가 특히 중시하는 과목이 있었는데, ‘언론 윤리과목이었다. 최승호는 언론 윤리 과목 청강을 담당 교수에게 신청했는데 바로 거절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포기하지 않고 바로 강의실로 향했다. 교수도 만만치 않았는데, 커리큘럼과 시놉시스를 최승호에게 주지 않았다. 무안해서 그냥 나올 법도 했지만, 최승호는 옆의 학생에게 커리큘럼과 시놉시스를 빌려서 복사했고, 뻔뻔하게도 수업시간 끝까지 앉아 버텼다. 교수가 졌고 드디어 청강을 허락했다. “왜 그렇게 구박까지 받아가며 수업을 들으려고 하냐?”고 물었더니, 최승호는 언론 윤리는 다른 무엇보다 더 중요하다고 답했다.

최승호의 활동 중 눈에 띄는 것 중 하나는 60~70대의 현직 언론인이 탐사보도협회를 방문하면 좇아가서 어떻게 하면 당신처럼 70대가 돼도 계속 취재를 할 수 있냐?”는 질문을 던지고 열심히 메모하는 것이다. 70대가 돼도 현장에 있고 싶다는 의지의 발로일 것이다. 지난 224일 자로 최승호는 MBC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장에서 물러나면 다시 뉴스타파로 돌아가 탐사보도를 계속하겠다고 일찌감치 밝혔다. 영원한 언론인 최승호의 진실 탐구는 앞으로 계속될 예정이다.

 

현장을 지켜야 진정한 저널리스트

 

모든 전문가들이 정보의 홍수 시대에 깊이 있고 전문성 있는 보도로 승부해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전문성 있는 보도가 독자와 시청자에게 인정받기 위해서는 저널리스트의 브랜딩이 절실하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저널리스트들의 브랜딩이 잘 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일까? 출입처가 너무 자주 바뀌는 문제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큰 문제는 너무 빨리 현장을 떠난다는 데 있다. 현장에서 어느 정도 경력을 쌓아 관리자가 되면서 저널리스트로서의 길을 잃게 된다. 밥 우드워드, 시모어 허시, 손석희, 최승호는 관리자가 되려 애쓰기보다는 현장과 저널리즘의 가치를 중시했다. 어쩔 수 없이 관리자가 돼도 현장의 감각을 잃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유튜브 등 미디어 빅뱅 시대다. 저널리스트로서 택할 수 있는 두 갈래 길이 있다. 어떤 길을 갈 것인가? 전통적인 개념의 보직자인가? 아니면 저널리스트인가?

 

 

저자의 다른 미디어
  • 필자 : 박건식
  • 소속 :
  • 직함 :
  • 발행 : 2020-03-02
  • 조회수 : 20
  • 키워드 :
블로그 공유 트위터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