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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자 다섯 알에 지명수배를 당하거나, 한글을 몰랐던 지적장애인이 경찰 조사 과정에서 성매매범이 됐다면, 그들에게 내려진 사법 처리와 과정은 과연 정당한 것일까? 우리 사법절차와 행정 효율성의 이면에서 벌어지고 있는, 법에 가려진 이들에 대한 탐사보도를 들여다본다. 편집자 주
“이태권 씨, 내일부터 탐사기획부로 출근하면 됩니다. 그동안 수고했어요.”
지난해 12월, 퇴근을 앞두고 사건팀 캡의 전화였다. 탈(脫) 수습을 한 달가량 남겨둔 시점, 설렘과 걱정이 밀려왔다. 동기들이 한창 담당 지역 경찰서에서 사건을 찾아 취재하는 동안 나는 스스로 취재처를 정해 혼자서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수첩에 빼곡히 적힌 시민단체 목록을 절반쯤 지워가던 중 찾은 곳이 인권연대였다. 인권연대는 ‘장발장은행’을 설립하고 벌금을 못 내 감옥에 갈 처지에 놓인 사람들에게 무담보로 돈을 대출해 주고 있었다. 대출 신청 서류에는 가벼운 벌금형에도 삶이 무너지는 사람들의 사연이 날 것 그대로 적혀있었다. 먹여 살릴 다섯 자녀를 둔 한부모 가정의 가장, 교통사고 벌금 때문에 일자리까지 잃은 고아 배달기사 등 하나같이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었다. 도대체 우리 사법절차의 민낯은 어떤 모습이기에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하고 있는 것일까. 우리는 이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법에 가려진 사람들’의 이야기를 찾아 나서게 됐다.

<법에 가려진 사람들> 취재팀 서울신문 탐사기획부 <출처 - 서울신문 유튜브>
사법절차의 민낯, 그 사례를 찾아 나서다
기획을 시작하기 전 ‘어떻게 쓸 것인가’는 우리의 주된 고민이었다. ‘불쌍하다는 이유로 범죄를 용서받을 수 있느냐’는 식의 반발이 나올 수 있을 거라 예상했다. 우리가 세운 원칙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단순히 ‘불쌍하고 어려우니 도와주자’고 호소하기 위해 기사를 쓰는 것이 아니라는 점. 그리고 다른 하나는 근본적인 문제 개선을 위해 사법절차 과정의 맹점을 하나하나 짚는 것이 주가 돼야 한다는 점이었다.
우선 기초 데이터부터 모았다. 인권연대의 협조를 받아 2015년 장발장은행이 설립된 이래 지난 5년간 대출 심사를 통과한 사람 792명의 대출신청서를 전수 분석했다. 물론 쉬운 작업은 아니었다. 대출자들의 개인정보는 함부로 반출하거나 열람할 수 없었다. 부원들은 매일같이 인권연대 사무실로 출근해 대출자 1인당 많게는 열 장이 넘는 서류를 하나하나 뒤졌다. 1만여 쪽에 달하는 서류에 둘러싸여 엑셀에 데이터를 입력하는 작업만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는 일은 더 어려웠다. 개인정보 문제 때문에 서류상 확인한 사연만 보고 장발장은행을 통해 일일이 인터뷰 의사를 물어야 했다. 인터뷰를 요청한 80명 중 취재를 허락한 사람은 열네 명이었다. 이미 법적 처벌까지 받은 이들이 인터뷰에 쉽게 응해 주진 않을 거라 예상하긴 했지만 그래도 너무 적은 숫자였다. 그나마도 대부분 생계나 다른 개인 사정을 이유로 대면 인터뷰는 꺼렸다. 전화와 문자로 다시 지난한 설득의 과정을 거쳤다. 부원들은 그렇게 설득한 취재원들을 만나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서울, 경기, 강원, 청주, 부산, 제주 등 전국을 찾아갔다.

‘감자 노인’ 이병준(80·가명) 씨를 경기도 성남의 자택에서 조용철 기자가 인터뷰하고 있다. <출처 - 서울신문 소셜미디어랩부>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만으로는 부족했다. 약식명령이 빚어낸 사법절차 전반의 문제점을 다각도로 조명하기 위해서는 더 다양한 사례가 필요했다. 여기서부터는 ‘맨땅에 헤딩’하는 방식으로 취재할 수밖에 없었다. 사례를 찾기 위해 다양한 외곽 취재를 시도했다. ‘약식명령’, ‘벌금’ 등의 키워드로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사례를 찾아 무작정 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좀처럼 사례가 모이지 않아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같은 팀의 조용철 선배가 활로를 뚫었다. 그는 대법원의 법원도서관에서 판결문을 검색해 새로운 사례를 찾고 직접 주소지로 찾아가 설득하는 작업을 꾸준히 이어갔다. 버린 줄 알고 감자 다섯 알이 든 종이박스를 가져가 절도범이 된 폐지 줍는 노인의 사례(<감자 5개 훔친 죗값 50만 원… 지명수배된 80세 폐지 노인>, 2월 17일 자), 검찰 조사 과정에서 성착취 피해자였음에도 자발적 성매매범으로 둔갑한 사건(<한글 못 읽는 지적장애 그녀… 사법권력, 성매매범 만들다>, 2월 25일 자) 등은 그렇게 드러났다. 하나같이 모두 하루하루 생활조차 힘든 이들, 그래서 자신의 목소리를 제대로 낼 스피커조차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실제 벌금을 내지 못해 교도소로 노역을 다녀온 이를 만나는 일도 쉽지 않았다. 재산형(財産刑)인 벌금형이 빈곤층에게 자유형(自由型)으로 바뀌면서 생기는 고통을 생생하게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례가 필요했다. 매일 수감자들이 출소하는 시간인 새벽 5시에 맞춰 서울구치소 앞에서 ‘뻗치기’를 해야 하나 고민하던 차에 지속적으로 도움을 요청했던 한국법무보호복지공단의 취재협조 답변이 왔다. 최근 약식명령으로 벌금형을 받았지만 벌금을 납부하지 못해 노역장에 유치됐던 한 사람이 취재에 응했다는 소식이었다. 인터뷰를 통해 그는 “노역이 노역이 아니다. 사실상 일감이 없어서 감옥에 갇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라며 노역장과 관련해 상세한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 안에서도 고액 벌금을 체납한 ‘거물’은 영치금으로 편한 감옥 생활을 한다는 얘기도 나왔다(<종일 일해도 10만 원 vs 손 까딱 않고 100만 원…벌금 대신한 몸값마저 다른 ‘노역 카스트’>, 2월 26일 자). 노역장 내부에서 영치금을 통해 계급이 갈린다는 이야기가 있었지만 경험자의 증언으로 생생하게 기사화 된 것은 처음이다.
사법 행정 효율성의 그늘에 선 사람들을 만나다
처음에는 인터뷰가 제대로 되지 못할까 걱정도 많았다. 막상 만났을 땐 어렵게 들은 이야기가 일방적인 주장에 그치진 않을까 우려도 했다. 하지만 담담하게 들려준 그들의 이야기는 우리 사법체계의 민낯을 그대로 보여줬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보험기간이 만료된 오토바이를 끌고 배달을 나섰다가 일어난 접촉사고로 100만 원의 벌금을 받았던 윤경백(31·가명) 씨가 그랬다. 무보험으로 사고가 나자 겁을 먹었던 윤 씨는 사고의 잘잘못을 따질 겨를도 없이 그 자리에서 50만 원의 합의금을 주기로 하고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지병이던 당뇨병 합병증으로 발가락이 썩어들어갔고, 입원비도 모자란 상황에서 합의금 변제에 실패했다. 이후 우리 탐사팀이 진행한 모의재판의 배심원장을 맡았던 이수원 변호사는 “윤 씨가 교차로에서 방향을 바꾸다 직진해 오던 차량과 부딪혔기 때문에 상대방도 전방 주시의 의무를 소홀히 한 점이 있다. 상대방의 과실도 있었을 가능성이 있다”라고 뒤늦게 아쉬워했다. 그러나 법은 이런 사정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에게 벌금 100만 원을 선고한 약식명령 판결문에는 ‘전방 주의 의무 위반’, ‘의무보험 가입 위반’이라는 건조한 문구만이 씌어있었다. 윤 씨는 끝내 벌금형을 선고받은 전과자가 됐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체념한 듯 보였지만, 법에 대한 원망과 서운함은 남아있었다. “그동안 경찰에서 검찰, 법원에 이르기까지 누구 하나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준 사람 없었다”라는 그의 말에서는 조용한 울분마저 느껴졌다.
약식명령에 불복해 정식 재판을 청구할 수도 있지만, 당장 먹고살기도 힘든 사람들에게 재판은 그림의 떡이었다. 게다가 약식명령서 아래 “재판에서 더 높은 형이 나올 수도 있다”라는 공지 문구는 겁박 아닌 겁박처럼 서민들의 가슴에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우리 사회가 사법행정의 효율성을 추구하는 동안 정작 그 이면에서 놓치고 있었던 것은 다름 아닌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일선 현장의 법조인들도 우리의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는 반응을 보였다. 김상현 대한법률구조공단 법무관은 지금의 약식명령 제도에 대해 ‘한번 경찰에서 검찰로 송치되면 그대로 검찰의 구형대로 약식명령까지 받게 되는 컨베이어 벨트’라고 지적했다. 통계상으로도 약식명령으로 벌금형을 선고받고 돈이 없어 노역장에 유치된 사람들의 숫자는 지난해에만 3만 5,320명이었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가 말했던 ‘악의 평범성’이 우리 법에 어른거렸다.

한국외국어대 법학전문대학원 내부 모의법정. <법에 가려진 사람들> 기획 2부 4회에 나간 시민배심원단의 모의재판 평결은 이곳을 대관해 진행했다. <출처- 필자 제공>
일반 시민들의 생각은 어떤지도 구체적으로 확인해보기로 했다. 우리 사법체계와 시민들의 인식 사이에 벌어진 간극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2부 후반부에 보도된 ‘국민 법감정’ 설문조사 분석(<돈·권력 쥔 자, 법망 피해 간다>, 2월 26일 자)과 ‘시민 배심원단 모의재판’(<모의 배심원단 오토바이 사고, 정식 재판서 다퉜다면 일부 무죄>, 3월 3일 자)은 그런 인식의 연장선에서 이뤄졌다.
특히 일반 시민들을 배심원단으로 꾸린 모의재판은 국민들이 가진 우리 법에 대한 인식을 간접적으로나마 적나라하게 보여 줄 수 있는 기회였다. 한 배심원은 ‘감자 노인’ 이병준(80·가명) 씨의 사연에 대해 “감자를 훔칠 의도가 있었다면 먹었을 것”이라며 “경찰이 왔을 때 바로 돌려주지 않았나. 법이 처벌만을 목적으로 해선 안 된다”라고 말했다. 오토바이 배달을 하다 사고가 난 윤경백 씨의 이야기를 들을 때 한 배심원이 “사고 당시 보험이 없다 보니 과실비율을 따질 생각도 못 하고 무조건 배상해주겠다고 한 것 같아 안타깝다”라며 날카로운 지적을 하기도 했다. 모의재판을 보며 실제 경찰 조사에서, 검찰에서, 법원에서 이처럼 사건 당사자들의 목소리를 더 적극적으로 귀 기울였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취재부터 기사작성까지 숨 가쁘게 달려온 두 달, 서울신문 탐사기획 ‘법(法)에 가려진 사람들’은 그렇게 만들어졌다.
보도 후 반향, 사법기관 변화의 마중물 기대
보도가 나가고 이어진 반향은 기대 이상의 것이었다. ‘감자 노인’ 이 씨의 사연을 본 독자들은 줄을 지어 후원 문의를 해왔다. 폐지 줍는 노인을 고작 감자 다섯 알에 지명수배까지 이르게 한 우리 사법 절차의 차가움에 대한 반기였다. “벌금의 기준은 도대체 어떻게 정해지는 건가”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게 대한민국의 법인가” 등 기사에 달린 댓글 창에서는 한바탕 토론이 벌어졌다. 아직 시민들의 온정이 살아있다는 것도 뜻깊었지만, 그보다 더 의미 있었던 것은 경찰과 검찰이 즉각적으로 움직였다는 사실이었다. 수원지방검찰청 성남지청에서는 1회 보도 뒤 곧바로 신문사에 연락을 해왔다. 이 씨의 사정을 고려해 지명수배를 풀어주고 벌금을 분납할 수 있게 해주겠다고 했다. 경찰도 마찬가지였다. 아직 기획이 다 끝나지도 않았던 시점이었는데 민갑룡 경찰청장이 직접 나서서 소외층의 법률 지원을 위해 장발장은행과 업무협약을 체결했다. 우리 보도가 제기한 문제의식이 조금이나마 사법기관들의 변화를 이끌 마중물이 될 수 있겠다는 희망이 보인 순간이었다.
소명의식과 부조리 바꾸는 탐사보도의 가치
돌이켜보면 이제 갓 입사해 막 수습을 뗀 내게 탐사기획이라는 긴 호흡의 취재는 힘들지만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기회였다. 분명 처음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사실 지금도 어렵다), 취재를 이어갈수록 걱정은 줄어들고 그 자리에는 어느 순간 끝까지 파고들어 보겠다는 집념만이 남아있던 까닭이다.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부조리한 우리 사회의 민낯을 마주했을 때 뭔가 바꿔보고 싶다는 소명이 있어서였다. 언론에게 탐사보도의 가치는 그래서 더욱 소중하다. ‘언론이 위기’라는 말은 늘 있어왔지만 ‘기레기’로 통용되는 대중의 신뢰 저하와 가짜뉴스가 판치는 지금, 진정성 있는 취재와 깊이 있는 보도만이 우리의 무기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우리 기자들이 기자로서 남아있을 수 있는 정체성은 바로 이런 소명의식과 부조리를 바꾸는 경험 위에 세워진다.
끝으로, <법(法)에 가려진 사람들> 기획의 시작을 함께한 조용철 선배가 끝을 함께 보지 못하고 떠난 것은 깊은 슬픔으로 남는다. 팀의 취재가 어려움을 겪을 때 가장 먼저 나서곤 했던 선배는 시리즈 보도를 채 마치기도 전인 지난 2월 25일 불의의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 기사작성을 모두 마친 시점이었다. <법에 가려진 사람들>의 1부와 2부 시작을 장식했던 절도범이 된 감자 노인, 지적장애여성의 성 노예 사건 모두 그가 직접 발품을 팔아 발굴해 낸 사례였다. 지적장애여성 장수희(가명) 씨를 변호했던 국선변호인은 취재를 위해 서울에서 4시간 거리의 지방에 있는 자신을 찾아온 선배를 이렇게 기억했다. “의뢰인이 겪었던 일과 유사한 피해가 일어나지 않게 하겠다는 사명감이 있는 분이었다. 그러면서도 좋은 취지지만 당사자에게 또 다른 피해가 되진 않을까 염려하고 조심스럽게 다가왔던 인간적인 기자였다.” 그는 누구보다 치열하게 취재하면서도 언제나 약자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유머와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았던 사람이었다. 이 취재기는 조용철 선배에게 바치는 우리들의 편지이기도 하다. 용철 선배, 이제는 부디 그곳에서 평안하시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