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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공영방송의 모범적 사례로 꼽히던 BBC도 미디어 환경의 변화에 위기를 맞고 있다. 적대적인 정부, 젊은 시청자 확보를 위한 경쟁, 수신료 기반 재원 충당에 대한 반대 등 산적한 문제를 지혜롭게 풀어낼 수 있을지, 미디어 업계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편집자 주
코로나19 사태를 계기로 정확하고 신뢰성 있는 정보를 제공하는 것에 대한 필요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다. 영국에서는 이 역할을 전통적으로 BBC가 수행해 왔다. BBC는 여전히 약 80%의 영국 내 주간 도달률을 자랑하며, 세계에서 가장 성공적인 공영방송사로 손꼽힌다. [그림 1] 그러나 뉴스 제공 방식의 구조적 변화와 일련의 자충수, 여기에 정치인들의 공세까지 맞물려 그 신뢰가 흔들리고 있다.

[그림 1] 도달률 면에 있어 유럽에서 가장 성공적인 공영방송사로 꼽히는 BBC
BBC의 주요 재원은 여전히 영국 내 모든 텔레비전 이용자에게 부과되는 수신료다. 그러나 온라인 콘텐츠 소비 비중이 높아지면서, 텔레비전 수신료 제도는 점점 시대에 뒤떨어지는 제도가 돼가고 있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Reuters Institute)의 <디지털 뉴스 리포(Digital News Report)>에 수록된 설문조사에 따르면, 지난 수년간 텔레비전 뉴스의 주간 도달률은 약 10% 하락했으며 젊은 층의 경우 하락 폭이 훨씬 더 컸다. 35세 미만의 경우 대부분의 뉴스를 온라인과 SNS를 통해 접하며, 주된 뉴스 소비 기기는 스마트폰이다. 많은 영국인들이 텔레비전을 갖고 있어도 BBC보다 넷플릭스 같은 거대 스트리밍 업체가 제공하는 서비스를 통해 드라마나 예능 프로그램을 시청할 가능성이 높다. 거의 무한한 선택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 BBC는 수많은 방송사 중 하나일 뿐이며, 이제 인터넷에서는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고 있다.1) 수년 전보다 전반적인 신뢰도 또한 낮아졌다. 영국 내 설문조사에서, 대부분의 뉴스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40%에 그쳤으며 SNS에서 접하는 뉴스를 신뢰한다고 응답한 비율은 10%에 불과했다.
이 설문조사 결과만큼이나 염려스러운 사실은 BBC에 대한 시청자 신뢰도 역시 낮아지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에 대해 BBC가 전적으로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다양해진 선택지와 SNS의 유해한 영향도 한몫했다. 그러나 임원 연봉 논란, 성별 임금 격차 해소 실패, 최근 선거 기간 중의 편집상 실수로 보이는 사건 등 BBC가 둔 일련의 자충수 역시 상황을 악화시켰다.
BBC는 뉴스를 보도할 때 적절한 공정성을 보장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러나 국론을 분열시킨 ‘브렉시트 찬반 국민투표(2016년 6월)’ 이래로 BBC의 보도가 편파적이라는 비난이 증가하는 추세다. 이러한 비난은 2019년 영국 총선 당시 BBC 정치부 기자가 좌파 진영으로부터 ‘정부의 나팔수’라는 비판을 받으며 꾸준히 증폭됐다. 반대 정치 진영 역시 불만을 제기했다. 폐렴 증세가 의심되는 4세 아동이 병원 바닥에서 잘 수밖에 없었던 사건을 BBC가 ‘광범위하게’ 보도한 것이 반 보수당 성향의 증거라는 주장이었다.2) 이외에도 BBC의 유명 진행자 앤드루 닐(Andrew Neil)이 방송을 통해 보리스 존슨(Boris Johnson) 총리의 인터뷰 거부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면서 긴장이 고조됐다.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자체 연구 결과를 보면 BBC에 대한 시청자의 인식은 상당히 좋은 편이다. BBC는 선거 보도 언론사 중 선호도와 신뢰도가 가장 높았고, 설문조사 응답자의 43%가 BBC의 선거 보도에 대해 호평했다. [그림 2] 그러나 SNS 그리고 대부분 BBC의 영향력 축소를 바라는 우파 언론에서는 상당히 다른 상황이 전개됐으며, 이 때문에 BBC의 입지는 계속 취약해지고 있다.

[그림 2] 2019년 언론사별 영국 총선 보도 평가 <출처 -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이끄는 보수당 정부는 총선 승리에 고무돼 그간 BBC의 재원 충당 방식에 대한 재검토를 촉구해왔고, 장관들은 BBC의 주요 라디오 뉴스 및 시사 프로그램에 출연하지 말라는 지시를 받았다. 이에 따라 중차대한 시기에 새 정부에 대한 외부 감시의 수준이 낮아질 수밖에 없었다. 칙허장(charter) 갱신이 이뤄지는 2027년까지 수신료 징수가 계속됨에도 불구하고, 존슨 총리는 수신료라는 일반 조세가 더 이상 정당화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장관들은 텔레비전 수신료 미납을 비범죄화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며, 이 방안이 실현될 경우 BBC의 재정 상황은 더욱 빠르게 악화될 수 있다. 상당수 우파 언론사가 실시한 여론조사에서는 수신료를 폐지하거나 자발적인 구독 모델로의 전환을 촉구하는 결과가 나왔으며, 이대로 정책이 시행된다면 BBC의 수입 감소 및 활동 범위 축소가 거의 확실시된다. 토니 홀(Tony Hall) 사장이 2020년 6월에 사임하기로 하면서 BBC의 대응 역량은 약화돼 왔다. 이사회 의장의 5년 임기 역시 거의 끝나가고 있다.
코로나19 사태가 논쟁의 판도를 바꾸는 데 어느 정도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수백만 시청자들이 코로나19 관련 정보 및 행동 요령을 알아보기 위해 BBC가 라디오, 텔레비전, 온라인을 통해 송출한 특집방송을 시청 또는 청취했다. 이성적이고 자극적이지 않은 방식의 커뮤니케이션이 필요했기 때문에, 정부는 BBC 프로그램에 대한 보이콧을 철회했다. 아울러 정부는 매일 상당수 국민을 대상으로 방송을 송출하는 믿음직한 공영방송의 가치를 더욱 깊이 절감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지난 30년의 기간 중 최악의 공중보건 위기 상황’에서 보리스 존슨 총리가 BBC에 대한 공세를 중지할 가능성도 있으나 반드시 그러리란 보장은 없다.
새로운 시대의 공영방송은 어떤 모습일까
[그림 3] 코로나19 예방 행동 수칙 <출처 - BBC 뉴스 홈페이지>
그러나 코로나19 사태로 인해 BBC에 대한 신뢰도가 높아진다 해도 이는 단기적인 현상일 가능성이 높다. BBC의 신뢰도가 단기적으로 증가한다고 해서, BBC의 변화를 추동하는 일부 핵심 요인들을 간과할 수는 없다. 일부 비평가들은 정보·예능·교육 등 광범위한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공영방송사는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그 근거로 온라인 매체 선호 현상을 들고 있다. 미국의 공영방송 PBS와 비슷한 모델을 채택해 BBC의 몸집을 줄이고 교양성을 강화한 뉴스에 주력하는 방송사로 개편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한편 이러한 개편이 이뤄질 경우 국민, 지역민, 소수자의 이익이 제대로 대변되지 않을 것이며, 독특하고 핵심적인 시각이 미국의 거대 스트리밍 서비스에서는 절대 반영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그간 BBC는 수많은 정부 감사, 스캔들을 비롯한 수많은 우여곡절을 꿋꿋이 견디며 방송사의 규모와 명성을 지켜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의지가 확고한 강력한 정부가 들어서고 미디어 지형이 근본적인 변화를 겪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결과가 달라질 가능성이 높다. 디지털 기술과 플랫폼이 주도하는 미디어 환경을 고려할 때, 공정하고 특징 있는 결과물과 서비스는 어떤 모습이어야 할지, 그리고 텔레비전이 아닌 스마트폰이 주된 방송 소비 기기로 자리 잡은 지금 이러한 콘텐츠를 어떤 방법으로 부각할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필요하다. 이에 대한 해답은 영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BBC는 과거부터 지금까지 세계 공영방송의 표준이 돼 왔다. 앞으로 BBC의 운명 그리고 신임 사장이 향후 전개될 재원 및 전략과 관련한 딜레마를 풀어나가는 방식에 귀추가 주목될 것이다.
닉 뉴먼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선임연구원이다.
이전에는 BBC 뉴스 부문 미래 미디어 총괄을 담당했으며, BBC 뉴스 홈페이지 개설 멤버이자 국제 뉴스 담당 편집자로 활약하기도 했다.
1)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19(Digital News report 2019)> 에 따르면 영국인 70%가 진짜 뉴스와 가짜뉴스 구별에 대한 우려를 가지고 있다.
2) 2019년 영국 총선 당시 노동당은 보수당 내각이 국립보건서비스(NHS, National Health Service)를 팔아 버릴 계획을 세웠던 것을 증명하는 문건을 입수했다며, 보수당과 미국 간 실무회의 기록물을 공개했다. 해당 문건에는 미국이 보건 서비스로의 ‘완전한 시장 접근권’을 영국에 요구하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 가운데 폐렴 증세가 의심되는 4세 아동이 병원 바닥에 누워 치료를 받는 사진이 언론에 보도됐다. NHS의 열악한 시설 문제를 보여주는 이 사진은, NHS를 선거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르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출처- “BBC 팩트체크도 꺾지 못한 ‘총선 가짜뉴스’”, ≪신문과방송≫ 2020년 1월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