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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반대편에서도 통하는, 살아남을 수 있는 콘텐츠는 무엇일까. 새로운 시대에 맞는 새로운 문법은 있을까. 모든 제작자의 고민일 것이다. MBC 시사교양 대표 프로그램인
'이대로 가다가는 망할지도 모른다', '지상파 광고 수익이 작년 대비 수십 퍼센트 하락했다', '제작비를 삭감해야 한다' 등등. 좋지 않은 소식이 매일같이 들려온다. 성과를 나타내는 모든 그래프에는 최악이라는 수식어가 자석처럼 달라붙고, 불과 며칠 뒤에는 또 다른 '최악'이 그 자리를 차지한다. 그것도 벌써 수년째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담 넘어 다른 방송사들의 사정도 크게 좋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나마 효자 역할을 하고 있는 몇 프로그램들로 위안 삼을 뿐이다.
이 와중에 중요한 프로젝트를 하나 맡게 됐다.
MBC 시사·교양본부의 대표 프로그램
팔리는 콘텐츠
생존을 위해 어떤 식으로든 변화가 필요했다. 특히나 요즘같이 어려운 시기에 ‘수익성’이 좋지 않은 다큐멘터리 장르는 그 존재의 이유를 새롭게 증명해야만 했다. 그렇다면 무엇을 어떻게 바꿔야 하는가? 흔히들 얘기하는 ‘고퀄(고퀄리티)의 콘텐츠’를 만들 수만 있다면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재미있는 콘텐츠’만 있다면 적자를 줄일 수 있을까? 책상 위에 백지를 올려두고 끙끙 앓기를 며칠. 우선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먼저 해보기로 했다. 주어진 시간은 딱 2개월 남짓, 목표는 60분 분량의 완전히 새로운 프로그램 두 편이었다.
먼저 TV 다큐의 보편적인 포맷에 대해 뜯어보기 시작했다. 보통 국내 TV 다큐는 1시간 동안 한 개의 주제만 다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또 지난 수십 년간 비슷한 연출 방식(사례자 일상+내레이션)으로 제작됐고, 화면의 호흡도 매우 느리고 긴 편이었다. 하지만 요즘 TV 시청자들은 매우 눈이 높고 냉정하다. 잠깐이라도 지루한 요소가 보이거나, 계속 봐야 할 이유가 사라진다면 가차 없이 떠나버린다. 때문에 마음을 단단히 먹지 않는 이상, TV로 다큐 한 편을 끝까지 시청한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이 전통적인 TV 다큐 포맷에 대해 다시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꼭 모든 다큐를 1시간 분량에 한 가지 주제로만 만들어야 할까? 요즘 꽤나 잘나가는 넷플릭스에서 슬기로운 해법을 읽을 수 있다. 단정할 수는 없지만, 넷플릭스의 콘텐츠들은 길지 않은 여러 개의 회차들로 나뉘어 구성되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 여러 개의 회차들은 다시 하나의 ‘시즌’으로 묶인다. 또 각 회차가 끝날 때마다 시청자들이 이탈하지 않도록 다음 회가 계속해서 자동 재생된다! 그러니 한번 보기 시작하면 창밖에 해가 떠오를 때까지 멈출 수가 없는 것이다.
인기 시리즈인 다큐멘터리 <익스플레인(Explained)>1)가 그 좋은 예다. 이 다큐 시리즈는 15~20분 내외의 매우 짧은 여러 개의 회차들로 구성돼 있다. 그래서 틈날 때마다 하나씩 하나씩 시청하다 보면 어느새 긴 다큐 여러 편을 다 본 것과도 같아진다. 마치 여러 개의 챕터로 구성된 두꺼운 책 한 권을 읽어나가는 것과 비슷한 방식이다.
[사진 2] 5~20분 내외의 매우 짧은 여러 개의 회차들로 구성돼 틈날 때마다 시청할 수 있는 넷플릭스 <익스플레인>. <출처-넷플릭스 홈페이지 화면 갈무리>
이러한 구성 방식에는 주목할 만한 장점이 있다. 무엇보다 콘텐츠의 길이가 길지 않다는 것만으로도 시청자들은 부담을 크게 덜 수 있다. 이는 당연히 콘텐츠 접근성을 높여준다. 게다가 집 밖에서 TV가 아닌 다른 모바일 기기로도 가볍게 시청이 가능하다는 점 또한 중요 포인트다. 그뿐만 아니라 ‘분량이 짧다’라는 것은 제작자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준다. 영상의 호흡은 자연스럽게 빨라지고, 내용은 간결하게 압축된다. 또 긴 설명보다는 한눈에 알아보기 쉬운 효과적인 이미지들의 비중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 최근 트렌디한 콘텐츠 혹은 ‘고퀄’의 콘텐츠로 분류되는 콘텐츠들이 지닌 공통적인 특성이기도 하다.
비슷한 주제의 여러 회차들이 하나의 ‘시즌’으로 묶인다는 것도 매우 큰 강점이 될 수 있다. 콘텐츠는 쌓이면 쌓일수록 하나의 브랜드가 되고 곧 훌륭한 상품이 되기 때문이다. 이제 단순히 편성표를 채우기 위해 제작되는 콘텐츠들은 그 존재의 이유를 상실하고 있다. 고정 시청자들을 만들기도 어렵고, 한 번 방송되고는 사라져버리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앞으로는 완벽하게 계획된, 그러면서도 목표와 개성이 뚜렷한 콘텐츠들만 제작해서 ‘경쟁력 있는 상품’으로 묶어야 경쟁에서 유리하다. 그래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다면 TV 다큐도 매번 2편 이상을 모아 시리즈 단위로 기획해보면 어떨까? 논의 끝에
[사진 3]
지구 반대편에서도 먹히는 콘텐츠
이제 남은 것은 ‘어떤 아이템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였다. 나름 새 그릇을 만들었는데 늘 먹던 것을 담는다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이번에도 ‘어떻게 하면 살아남을 수 있을까?’를 먼저 고민하기 시작했다. 답은 의외로 쉽게 구할 수 있었다. ‘시청자의 관심을 끌 수 있는 화제성 높은 아이템’ 이었다. 그리고 여기에 한 가지 조건을 더했다. 그것은 ‘지구 반대편에서도 먹힐 만한 아이템’ 이었다.
이제는 콘텐츠 기획 단계에서부터 해외 시청자도 고려해야 한다. 국내 광고 시장만으로는 더 이상 생존이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국내 예능 프로그램의 포맷이나 드라마 그리고 다큐들이 해외에 판매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이처럼 방송 이후에 판매되는 것과 방송 이전부터 해외 시청자를 타깃팅 하는 것은 개념이 완전히 다르다. 해외 시청자를 고려하는 순간 아이템 선정부터 제작 방식까지 모든 것을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또 콘텐츠를 업로드할 온라인 채널과 수익을 올릴 방법에 대한 고민도 필요하다.
넷플릭스와 국내 지상파 방송사의 가장 큰 차이 중 하나가 바로 이 ‘타깃팅’이다. 기본적으로 지상파 방송사들은 주로 국내 2049세대, 그것도 수도권에 거주 중인 시청자들을 주 타깃으로 한다. 이유는 콘텐츠를 평가하는 가장 중요한 지표가 바로 ‘국내 수도권 유료 가구 시청률(MBC 기준)’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다수의 콘텐츠들은 한국 사회에 대한 탄탄한 배경지식을 전제하는 경우가 많다. 또 시의성이 강하기 때문에 일정 시간이 지나고 나면 시청할 이유가 없어지기도 한다. 지상파 방송 시장이 작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면 넷플릭스는 전 세계인을 타깃으로 콘텐츠를 기획, 제작한다. 그리고 전 세계 이용자들의 시청 횟수와 시청 시간을 기반으로 콘텐츠를 평가하기 때문에 각 콘텐츠들은 다양한 인종과 문화를 아우른다. 넷플릭스가 추천하는 콘텐츠들을 한번 훑어보자. 물론 이용자의 시청 패턴에 따라 제각각이겠지만 기본적으로 어느 인종, 어느 국가, 어느 시점에 시청해도 무리가 되지 않는 콘텐츠들을 쉽게 볼 수 있다.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나라에 사는 누구든 지금이 몇 년도이든, 당신이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콘텐츠들이 널려있다는 얘기다.
이미 전 세계는 촘촘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지 오래다. 초고화질의 콘텐츠도 쉽게 공유할 수 있고 언제든 원하는 시간에 시청할 수 있다. 심지어 한국은 이런 인프라 부분에서 크게 앞서있다. 하지만 국내 지상파 방송사들은 정작 이 훌륭한 네트워크를 활용할 계획을 세우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해외 시장에 대한 ‘무관심’, 투자에 대한 ‘귀찮음’, 그리고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하지만 이제는 해외 시장의 문을 더욱 적극적으로 두드려야 할 때다. 기획, 제작 단계에서부터 더 많은 시청자들과 넓은 시장 그리고 더 다양한 공급 방법들을 고려해야 한다.
그래서 <시리즈M>(구
[그림 4] <시리즈M>의 첫 시리즈-<별의별 인간 연구소>는 전 세계 모든 인간에 대한 흥미로운 관심거리들을 직접 실험해보고, 세련된 CG로 명쾌하게 설명한다. <출처 – 필자 제공>
그렇게 해서 <시리즈M>의 첫 시리즈는 지난 2월에 방송됐다. 늘 그렇듯 평가는 다양했다. ‘신선하다’, ‘트렌디하다’는 평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심란하다', ’부족하다‘ 등 비판도 많았다. 다행히 작은 성과도 있었다. 다수의 사업자들이 향후 협업을 제안해온 것이다. 새로운 사업 모델의 가능성을 확인한 것만큼은 긍정적인 결과였다. 또 호흡이 빠르고 길이가 짧다 보니, 더 짧은 디지털 전용 콘텐츠로 재편집하기도 수월했다. 그 덕에 다양한 버전의 콘텐츠를 네이버TV, 유튜브 등 다방면에 재공급할 수 있었다.
생존을 위한 콘텐츠
제작자로서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확실히 깨달은 것이 있다. 이제 시청자들은 편성표대로 콘텐츠를 제공하는 지상파 방송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다는 것. 그리고 ‘식상한’ 콘텐츠 공급자는 외면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나스미디어의 <2020 인터넷 이용자 조사>에 따르면 조사 대상자의 51.3%가 유료 동영상 서비스(OTT)를 이용한다고 답했다. 이유는 주로 콘텐츠의 다양성(49.0%)’과 ‘서비스별 독점 콘텐츠 제공(43.6%)’때문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무엇으로 OTT를 시청할까?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모바일 기기를 먼저 떠올렸겠지만 조사 결과는 달랐다. 유료 OTT 이용자들 중 무려 30%가 TV로 유료 OTT를 시청한다고 답한 것이다. 즉, 이제 TV는 그저 집에서 가장 큰 디스플레이에 불과한 것이다.
이미 콘텐츠 편성의 주권은 시청자에게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이 변화를 따라 자본의 흐름과 생태계 또한 매우 다각도로 변하고 있다. 하지만 지상파 방송사들은 변화에 빠르게 대처하지 못하고 있다. 매주 회의마다 들려오는 ‘광고 수익이 줄어들고 있다’, ‘지출을 줄여야 한다’는 수준의 얘기들은 그저 신세 한탄에 가까운 얘기일 뿐이다. 이제는 정말 근본적인 대책과 대대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콘텐츠 기획, 제작 방식부터 인력 배치, 마케팅 전략과 콘텐츠 유통 방식까지 모든 것을 다시 검토해봐야 할 때다. 대단히 큰 성공을 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그저 살아남기 위해서다.
1) 다양한 주제를 감각적인 영상과 전문가들의 인터뷰로 설명하는 형식의 넷플릭스 단편 다큐 시리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