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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 첨단 기술의 경연장, 개표 방송
테크 | 등록일 : 2020-06-01

신기술의 경연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개표 방송은 각 방송사가 극강의 새로움을 추구하는 방송이다. 그만큼 새로운 기술, 기법, 장치가 동원되고 흥미에 초점이 맞춰진다. 이번 제21대 총선 개표 방송에 사용된 신기술들과 그 성과를 살펴봤다. 편집자 주 


두 개의 평면 미디어월을 90도 각도로 매치한 KBS의 ‘듀얼 K월’은 제21대 총선 개표방송의 가장 큰 파격이었다. <출처 - KBS 개표 방송 <내 삶을 바꾸는 선택, 2020 총선> 갈무리>

  

“혹시 뭔가 다른 게 있지 않을까?” 

 

새로운 것, 남들이 하지 않은 것, 세계 최초이거나 하다못해 국내에서라도 최초인 것. 원래 개표 방송은 그런 거라고 누군가 그랬다. KBS뿐만이 아니라, 개표 방송을 준비하는 국내, 아니 세계 모든 방송사가 이 새로운 것에 대한 갈증에 시달려서 레퍼런스를 그렇게 열심히 찾아본다고 했다. 보통 한 해 걸러 한 해꼴로 개표 방송을 치르고, 여차하면 1년에 선거를 두 번씩 치르는데, 오죽할까 싶긴 했다. 여기에 ‘했던 걸 또 하는 건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이유 모를 부채감까지 더해지면 새로운 걸 찾지 않고서는 안 될 것만 같은 자기 최면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방송을 준비하는 내내 뭔가를 더 찾아야 하지 않나 불안해했다.

 

 


 

KBS는 직각으로 꺾인 형태의 ‘듀얼 K월’의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한 콘텐츠를 다수 준비했다. 왼쪽은 ‘듀얼 K월’ 전용 인포그래픽, 오른쪽은 전용 콘텐츠 ‘숫자로보는 총선’ 중 한 장면 <출처 - KBS <내 삶을 바꾸는 선택, 2020 총선> 갈무리>

 

 

국내 최초 직각 미디어월 ‘듀얼K-월’ 선보인 KBS 

 

KBS는 지난 4.15 총선에서 국내 개표 방송 사상 최초로 메인 세트에 직각 형태의 LED 미디어월을 세웠다. 이것도 앞서 언급한 ‘새로움에 대한 갈증’과 무관치 않았다. 긴 곡선의 단면 미디어월은 적어도 최근 몇 년간 치러진 KBS 개표 방송에서는 일종의 성역과도 같았다. 조금 과장하자면 길이의 차이나, 휜 정도의 차이가 있었을 뿐이었다. 단장은 늘 이게 불만이라고 했다. 20m건, 30m건 어차피 아주 일부만 쓸 거 뭐 하러 길게 만드느냐고.

  

KBS가 선보인 ‘듀얼K-월’은 길이 12m, 높이 3.84m짜리 평면 미디어월 2개가 직각으로 만나는 형태다. 곡선 형태의 LED월과 다르게 월 한가운데가 자칫 단절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래서 최초 제안부터 반대하는 사람이 적지 않았다. 오히려 더 많았던 걸로 기억된다. 그런데 만들어 놓고 보니 90도로 꺾인 구조는 더불어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의 대립적인 구도를 보여주기에 너무나도 안성맞춤이었다. 좌우 양면을 적극 활용한 다수의 데이터쇼, 미디어 콘텐츠가 효과를 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결과적으로도 그랬지만, 세트의 구성만 놓고 보면 선거의 구도나 결과를 설명하기에 적확한 선택이었다. 듀얼K-월의 장점은 한쪽 단면만을 활용할 땐 전형적인 LED월의 특성을 살릴 수 있다는 거였다. MC는 곡선 형태의 미디어월보다 더 가까이 붙어서 좌우를 활보하면서 역동적으로 정보를 전달해 줄 수 있었다.

 

 


국회를 배경으로 펼쳐진 AR쇼는 볼거리와 정보, 두 가지 모두를 제공하기 위해 활용한 기술이었다. 

왼쪽은 실시간으로 촬영한 드론 영상에 디지털시계를 합성한 AR 그래픽. 

오른쪽은 국회의 사당을 배경으로 선보인 AR 아이템 ‘지역별 이 시각 1위 후보’ 중 한 장면 

<출처-KBS <내 삶을 바꾸는 선택, 2020 총선> 갈무리> 

 

90도로 꺾은 듀얼K-월이 방송에서는 한 번도 시도된 적 없는 ‘기법’이었다면, 실시간 드론 중계와 증강현실(AR) 그래픽은 국회라는 상징적인 장소를 가장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게 만든 ‘기술’이었다. 선거를 앞두고 도입한 국내 최고 성능의 초대형 드론은 10시간이 넘는 개표 방송 내내 국회와 여의도 금융가, 한강을 배경으로 압도적인 그림을 안방에 전달했다. 여기에 실시간으로 들어오는 드론 영상의 위치 정보를 추적하는 시스템을 이용해서 디지털시계나 개표 방송 로고 같은 대형 액세서리 그래픽을 화면에 곳곳에 얹어가며 단순 드론 영상 이상의 연출을 가능하게 했다. 소소하지만 이것도 국내 최초였다.

 

국회 앞마당에 설치된 분석룸, ‘K-큐브’ 지붕에도 LED 화면을 설치하고 출구조사와 당선 예측 시스템 ‘디시전K’ 데이터를 지속적으로 노출시켰다. 때마다 드론으로 훑어주면서, 생생한 드론 영상에 정보성까지 가미했다.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펼쳐진 대형 AR 데이터쇼는 ‘역시 국회의원 선거 데이터는 국회에서 봐야 제맛이지’하는 느낌을 제대로 살렸다.

 

국내 최초 음성AI 프로그램 시도한 MBC


MBC의 개표 방송은 현란했던 그래픽만큼이나 기술적으로도 색달랐다. 그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건 개표 방송에서는 처음으로 시도됐다는 ‘음성AI 프로그램’이었다. 이낙연, 황교안, 안철수, 심상정, 정봉주 등 각 정당을 대표하는 인사들의 음성을 이 프로그램으로 가공한 뒤에 마치 실시간으로 비례대표 정당 득표율을 읽어주는 것처럼 연출했는데, MC가 말해주기 전까지는 솔직히 모를 정도로 감쪽같았다. MBC 개표 방송의 시그니처, 야외에 설치된 ‘에어돔’에서는 앞면과 뒷면을 동시 터치할 수 있게 만든 투명 터치스크린과 전국 253개 지역구의 개표 상황을 색상으로 나타내는 LED볼 지도를 배치해 눈길을 끌었다. 매번 개표 방송 때마다 신기술 도입에 적극적이었던 MBC는 이번 개표 방송 역시 다양한 기술로 채워 넣었다.

 

속된 말로 ‘약 빤 선거 방송’의 명가 SBS는 비교적 기술 도입에는 인색한 편이었는데, 이번 선거에서는 당선 예측 통계 시스템에 AI를 붙인 ‘AI 유확당(유력확실당선)’을 주요 콘텐츠로 내놨다. 핵심은 실시간으로 지역구 후보자의 당선 확률을 계산해 낸다는 거였는데, 4년 전 총선 때 MBC가 이미 한 번 내놨던 콘텐츠와 콘셉트가 겹쳐 신선도가 다소 떨어졌던 게 아쉬웠다.

 

개표 방송, 신기술의 경연장 


21대 총선 개표 방송에 등장한 기술들의 일부만 나열해도 이 정도라는 게 놀라울 수도 있지만, 사실 새로운 기술을 선보인 건 유독 이번 선거에서 벌어진 일만은 아니다. 개표 방송은 사실상 새로운 기술의 경연장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장미 대선으로 기억되는 지난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KBS는 스포츠 중계에 주로 쓰이던(축구 경기 때 운동장을 종으로 횡으로 날아다니는) ‘4축 스파이더캠’을 AR 그래픽 표출에 활용했다. 이것도 역시 국내 개표 방송 사상 처음이었다. 광화문광장 위 어두운 하늘을 배경으로 띄웠던 AR 그래픽은 촛불로 상징되는 장소의 의미와 맞물리면서 더 웅장하게 느껴졌던 걸로 기억된다. 

 

 


지난 2017년 5월 치러진 제19대 대통령 선거 당시 KBS가 선보인 스파이더캠 AR 중 한 장면. 

스포츠 중계에 주로 쓰이던 스파이더캠을 개표 방송에 활용한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출처 - KBS <2017 대선 ‘선택! 대한민국’> 화면 갈무리> 

 

시간을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 보자. 2012년 18대 대선 때, KBS는 당시만 해도 비교적 신기술에 속했던 미디어 파사드를 개표 방송에 처음 도입했다. 야외에서는 광화문 KT 사옥 한 면 전체를 배경으로 초대형 빔프로젝터 16대를 활용해 거대한 미디어쇼를 펼쳤다. 출구조사 발표와 같은 핵심 콘텐츠도 여기서 소화했다. 실측에 가까운 모델링과 정교한 매핑(mapping)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전까지는 올림픽 정도의 글로벌 이벤트에나 쓰이던 기술이었다. 실내에서는 4만 안시의 빔프로젝터를 활용한 가상 세트를 세워 기존의 LED월을 대체했다. 역시 생방송에서는 단 한 번도 기획된 바 없는 도전적 선택이었다. 같은 해 치러진 총선에서는 버추얼 미디어월이 눈길을 끌었다. 쉽게 말해 터치스크린을 VR 형태로 확장했다고 볼 수 있다. 메인 스튜디오에 설치된 크로마키에 터치 센서를 심어서 VR형태로 구현된 미디어월 콘텐츠를 비교적 자유자재로 구동할 수 있게 한 게 특징이었다.

  

지난 제20대 총선 당시 MBC가 주력 콘텐츠로 활용했던 움직이는 스크린, ‘로봇M’은 정교함이 돋보인 기술이었다. 로봇에 연결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모니터는 메인 스튜디오를 가로지르며 개표 데이터나 그림을 미디어월과 유기적으로 주고받아서 눈길을 끌었다. 당선자 예측 시스템 ‘스페셜M’이란 이름(이번 총선에서는 ‘적중2020’으로 이름을 바꿨다)으로 각 지역구 후보들의 당선 확률을 실시간으로 보여준 건 또 다른 킬러 콘텐츠였는데, 단순히 실시간 개표 데이터를 읽어주는 기존의 개표 방송 공식에서 벗어난 파격적인 시도였다. ‘지금 누가 이기고 있나’와 ‘결국은 누가 이길지 것인가’를 동시에 보여줌으로써 지역구 개표 결과를 조금 더 먼저 알고 싶은 시청자의 가려운 곳을 조금이나마 긁어줬다. 최근 개표 방송에서는 조금 뜸하지만, SBS 개표 방송도 지난 2012년, 2016년 총선에서는 홀로그램 기술을 활용해서 현장에 있는 기자를 스튜디오로 소환(?)하는 생경한 그림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기술도 중요하지만 결국은 ‘기본기’ 


눈길 끄는 기술이 없는 개표 방송은 이제 상상할 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됐다. 개표 방송에는 고정된 문법이 없다는 점에서 여러 가지 기술이나 기법들이 적용될 수 있는 여지가 크다는 장점이 작용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선거에 담긴 과정과 정치적 의미의 분석이라는 개표 방송의 핵심 가치들이 기술이나 흥미 위주의 CG에 밀려 사라져 가는 건 아닌지 걱정하는 목소리도 여전하다. KBS가 개표 방송을 준비하면서 단순히 ‘최초’만 고집하지 않은 이유이기도 하다. 비교적 장기간 준비할 수 있는 여지가 있다는 점에서 처음 선보일 수 있는 기술인지가 주요 고려 대상이긴 하다. 다만, 처음이라는 건 그만큼 활용 사례가 적다는 걸 반증하는 것이고, 그만큼 안정적이지 않다는 뜻으로 읽힐 수 있다. 최초라는 타이틀을 얻을 수 있더라도 안정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가를 가장 먼저 고려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역대 개표방송은 ‘신기술 경연장’ 역할을 해왔다. 왼쪽은 지난 2012년 18대 대통령 선거 당시 KBS가 개표방송에 처음 도입한 ‘미디어 파사드’. 

오른쪽은 2012년 19대 총선 당시 크로마키와 터 치 센서를 활용해 만든 ‘K월’ <출처 - 2012년 KBS 대선·총선 개표 방송 갈무리> 

 

이번 KBS 선거 방송단이 핵심 개념으로 내세운 키워드가 여섯 개였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기본기’였다. 새로운 기술의 적용 자체보다 검증된 기술을 가장 잘 활용하는 데 더 큰 비중을 두겠다는 뜻이다. 실제로 역대 개표 방송에서는 검증되지 않은 기술을 썼다가 뒷수습을 하느라 애먹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번 개표 방송에서 미디어월을 90도로 꺾기 전 업체의 협조를 받아서 실제 시연회를 열어본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상상하는 것과 달리 왜곡 현상이 너무 심하다면 실제 방송에 사용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사전 검증은 필수였다. 아무리 화려한 기술이라고 하더라도 반드시 그걸 써야 하는지, 아무 의미 없는 기술은 아닌지도 고려 대상이었다. 단적인 예가 5G 통신 기술을 활용한 현장 중계 방안이었다. 개표 방송 준비 초기부터 고려한 여러 기술 중 하나였지만, 검토 끝에 결국 사용하지 않았다. 최신 통신 기술을 사용한다는 명분 이외에 특별한 장점이 없었다. 기술 도입에만 이래저래 억대 예산이 투입되는 데 비해 효과는 미미했다고 판단한 게 이유다.

 

기술과 내용,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개표 방송에 활용되는 특수영상을 담당했던 입장에서 제일 경계했던 것도 신기하다는 이유만으로는 쓸지 말지 판단하지 않았던 것이다. 과거 개표 방송을 보면 ‘저 아이템을 왜 저런 방식으로 보여주지?’ 싶은 것들인 다수 있었다. 제작 과정에 참여한 분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 기술이 그때 유행이었다는 이유로 채택했다고 한다. 기술부터 정하고 그걸 잘 쓸 수 있는 아이템을 끼워 맞추다 보니, 시청자 입장에서는 신기함보다 어색함이 앞섰던 게 아닌가 싶다. 이번 개표 방송 준비 과정에서도 기술 구현 방법을 먼저 고려하다가 낭패를 볼 뻔했는데, 그만큼 내용과 기술의 결합이라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난 2016년 총선 당시 MBC가 선보인 ‘로봇M’. 로봇에 달린 스크린과 미디어월이 유기적으로 활용됐다. <출처 - MBC <선택 2016> 갈무리>

 

 

이번 개표 방송에서 호평을 받는 것 중 하나가 듀얼K-월이었는데, 그것도 단순히 색다르다는 이유만 있었다면 채택되지 않았을 것이고, 효과도 별로였을 거라고 확신한다. 미디어월을 꺾자는 제안을 누군가 던졌을 때 머릿속에 선거 구도에 맞는 아이템 여럿이 떠올랐고, 실제로도 그대로 구현이 됐다. 국회를 배경으로 한 AR 제안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아이템들을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펼친다면 그 어느 곳에서 하는 것보다 의미가 남다를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몇 가지 사례만 놓고 봐도, 결국 기술을 사용했을 때 전달하고자 하는 내용이 극대화될 수 있었기에 기술사용의 의미도 있지 않았을까. 

 

2년 뒤인 2022년은 대통령 선거와 지방선거가 석 달을 간격으로 같이 치러지는 해다. 그사이 또 어떤 기술들이 나와서 개표 방송에 쓰일 후보군에 오르내리게 될지 모르겠다. 그때 이 일을 맡게 될 누군가는 똑같은 고민과 시행착오의 과정을 겪게 될 것이다. 다만, 한 가지만 명심하면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다. 기술이 옷이고 내용이 사람이라면, 옷은 사람을 돋보이게 하는 데 의미가 있는 거라고. 옷에 사람을 맞추면 입은 사람도, 보는 사람도 불편하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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