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다고 소셜미디어, 팟캐스트, 유튜브 등으로 상징되는 탈언론(post-journalism)이 전통적 언론의 대안 세력으로 자리 잡은 것도 아니라는 게 박 교수의 비관적 진단이었다. 그는 탈언론 시대를 “나의 기호와 취향에 맞춰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정보만 편향적으로 소비하며 내가 진실이라고 믿고 싶은 것이 진실이 되는, 우리 편에 이득이 되느냐가 진실의 유일한 판별 기준이 돼버린 시대”라고 진단했다.
전통적 언론이 객관주의 신화, 출입처 제도 관행, 사주와 간부들의 압력, 이데올로기로 결정된 뉴스가치 등 낡은 우상을 숭배하는 반면, 탈언론은 낡은 우상을 부수는 일에는 성공했지만 팬덤 또는 종교의 성격까지 띠는 당파성이라는 또 하나의 새로운 우상을 제조하고 있다는 것이 박영흠 교수의 진단이다. 극단적으로 정리해본다면, 진실을 추구해야 하는 언론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서 ‘진실이 중요하지 않은 재앙 같은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세미나 제목은 ‘진실 상실 시대의 진실 찾기’가 아닌가. 절망 속에서도 희망은 찾아야 했다. 이와 관련해 박 교수는 우상과의 싸움에서 고전을 면치 못하는 한국 언론을 향해 이런 화두를 던졌다.
“어디로 가야 할지 길을 찾을 수 없는 답답한 상황에서 필요한 것은 우리가 이미 알고 있지만 오랫동안 잊고 있던 방향을 알려줄 이정표다. 오랫동안 우리 사회의 나침반이 되어주었던 리영희 선생에게 다시 기대어보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중략) 지금 언론의 현실은 아직 리영희가 역사책 속으로 들어갈 때가 아니라고 말하는 듯하다. 오늘날 기자 리영희를 취재와 보도의 현장에서 다시 소환해야 한다. 50년 전 리영희가 강조한 저널리즘의 원칙은 여전히 우리가 옷깃을 여미고 귀담아들어야 할 가르침이다.”
세미나 현장에서 이 화두에 곧바로 호응한, 그것도 ‘딱딱한 주장’이 아닌 ‘생생한 증언’을 통해 화답한 사람이 있었다. 3세션 발제자이자 조선일보 외신부에서 약 4년(1967년 초부터 1970년까지) 동안 리영희 선생과 함께 기자로 일했던 신홍범 도서출판 두레 대표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1986년 보도지침 폭로사건의 주역 중 한 명인 신 대표의 발제문 제목은 ‘추억 속의 언론인 리영희 선생 - 베트남 전쟁 보도를 중심으로’였다. “언론인으로서, 또 지식인으로서 리영희 선생이 남긴 가장 큰 업적 중의 하나가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파헤친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일찍이 간파한 리영희 선생의 혜안
신홍범 대표의 증언을 들어보기 전에 베트남 전쟁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베트남 전쟁은 1960년에 결성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NLF, 일명 ‘베트콩’)이 베트남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위해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으며 남베트남 정부를 지원한 미국과 벌인 전쟁이다. 베트남의 독립을 위해 프랑스와 벌인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1946∼1954)과 구분해 ‘제2차 인도차이나 전쟁’이라고도 불린다. 초기에는 북베트남의 지원을 받은 NLF와 남베트남 정부 사이의 내전(內戰) 성격이 짙었으나, 1964년 8월 7일 미국이 통킹만 사건을 구실로 북베트남을 폭격하면서 전쟁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한국은 미국의 요청으로 1965년 베트남에 파병을 보내며 이 전쟁에 얽혔다.
“한국의 신문들이 베트남 파병 이후 ‘반공 성전’ 또는 ‘자유진영과 공산주의의 투쟁’으로 전쟁을 묘사하면서 전쟁열을 부추기고 있을 때 유독 리영희 외신부장만이 지속적으로 비판적인 입장에서 기사를 썼습니다. 진실이 드러나는 데는 때로 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리영희 부장이 그렇게 열심히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알리려 노력했건만, 당시 그것은 외로운 목소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국 언론의 압도적인 견해는 베트남 전쟁이 여전히 ‘반공 성전’이라는 것이었고, 전쟁이 ‘잘 수행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에서 특히 심했지만,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미국 국민들도, 서방세계도 이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러한 프레임이 오류였다는 것은 공식적으로 1970년대에 접어들면서 드러나기 시작했다. 1971년 6월 대니얼 엘스버그에 의해 미 국방부 비밀문서가 폭로되고 전쟁의 진실을 밝히려는 미국 언론의 움직임이 본격화되면서 베트남 전쟁의 추악함이 드러난 것이다. 북베트남 폭격의 구실로 삼았던 1964년 8월의 통킹만 사건도 조작된 것으로 밝혀졌다. 마침내 1975년 미국이 베트남에서 철수하면서 전쟁이 종결되자 미국 국민은 물론 전 세계인이 미국의 엄청난 기만과 사기, 허위, 날조, 선전에 속았다는 것을 알게 됐다. 신홍범 대표는 발제 중에 이러한 대반전(大反轉)을 상징하는 한 인물에 대해 언급했다.
“1961년 미국 케네디 행정부의 국방장관으로 취임한 뒤 존슨 정부에 이르기까지 7년에 걸쳐 베트남 전쟁을 지휘한 로버트 맥나마라(Robert McNamara) 국방장관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배한 뒤 21년이 지난 1996년에 간행된 회고록에서 이 전쟁을 ‘수치스런 전쟁, 패배한 전쟁’이라고 규정하면서 자신의 과오를 솔직히 인정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지 21년 뒤에야 잘못된 전쟁임을 깨달은 것을 전쟁이 진행되고 있던 1960년대 중반의 조선일보 외신부장이 일찍이 간파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홍범 대표의 이 증언을 들으면서 나는 최근에 넷플릭스를 통해 시청했던 10부작 다큐멘터리 <베트남 전쟁>이 떠올랐다. 이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미국 정부의 핵심 당국자들은 베트남 전쟁 초기부터 이 전쟁에 잘못 발을 들여놓았다는 것과 자신들이 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다음 일화가 그것을 잘 보여준다.
케네디 대통령에 의해 국방장관으로 발탁된 맥나마라는 승전 의지가 넘쳤던 전쟁 초기 미군이 이기고 있는지 지고 있는지 파악하려고 차트를 그리기로 결심했다. 하버드대 교수이자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내며 통계와 수치를 중시한 그는 전사한 적군과 획득한 무기의 수 등을 일간, 주간, 월간, 분기별로 보고하라고 지시했다. 이렇게 작성된 차트에 따르면, 연초에는 채 100명이 되지 않던 NLF 망명자 수가 연말이 되자 400명에 육박했다. 의기양양해하는 맥나마라에게 베트남 현지 사정을 잘 알고 있던 국방성의 한 간부가 이렇게 말했다.
“차트에서 중요한 뭔가가 빠졌네요. 그건 바로 베트남 사람들의 기분(feeling)입니다.”
이 조소 섞인 코멘트에는 남베트남 사람들의 마음은 미국이 지원하는 남베트남 정부에서 이미 멀리 떠나 있었고, 미 국방성 실무자들도 전쟁 초기부터 잘 알고 있었다는 사실이 내포돼 있다. 다만 국내의 정치적·경제적 이해관계와 국제적 위신과 체면 등 여러 가지 이유와 명분 때문에 당국자들은 전쟁을 계속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 15년 동안 수만 명의 미국의 젊은이들이, 그보다 훨씬 더 많은 베트남 사람들이 속절없이 죽어나갔다. 결국 베트남 사람들의 기분, 즉 민심(民心)을 외면하고 수치(數値)에 집착하던 세계 최강국 미국은 패전의 수치(羞恥)를 맛봐야 했다.
그런데 신홍범 대표의 증언에 따르면, ‘언론인 리영희’는 이미 1960년대 중반부터 너무나 분명하게 베트남 전쟁을 ‘나쁜 전쟁’, ‘잘못된 전쟁’, ‘정의롭지 못한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실제로 그는 자서전 ‘대화’에서 이렇게 진술한 바 있다.
“미국이 베트남 사태에 대해 군사적으로 개입한 1960년부터 미국이 패망하고 베트남에서 도망치다시피 철수한 1975년까지의 긴 세월 동안, 정말이지 나의 온 관심은 베트남 전쟁에 쏠려 있었어요. 그동안 미국 군대의 포탄과 고엽제와 기총소사로 수없이 죽어간 베트남인들의 죽음과 고통과 눈물을 어느 하룻밤도 생각하지 않은 적이 없었어요. (중략) 신문사 일에 몰두하고 술도 많이 마셔도, 아무리 바빠도 고통받는 베트남인들을 생각하면서 분노했어요. 매일 그들을 위해 기도하지 않고는 잠자리에 들 수 없었어요.”
정권과 거대 언론사에 탄압받은 리영희 선생
이런 세계시민(global citizen) 의식으로 무장한 언론인으로서의 세계관과 양심의 괴로움 때문에 리영희 선생은 베트남 전쟁에 몰입할 수밖에 없었다. 베트남 전쟁에 비판적일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나중에 그는 1985년 출간한 《베트남 전쟁》 서문에서 베트남 전쟁의 성격을 “스페인 내전과 함께 현대사에서 인류의 양심을 시험한 두 전쟁”이자 “20세기의 양심에 그어진 상처”로 규정했다. 그러나 한국이 베트남 전쟁에 파병한 당사국인 데다가 극우에 가까운 반공주의가 사람들의 생각을 지배하고 있던 시기에 이 전쟁을 비판적으로 다룬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다음은 신홍범 대표의 증언이다.
“베트남 전쟁에 대한 리영희 부장의 이러한 보도는 그에게 고난을 가져다주었습니다. 박정희 정권의 눈치를 보던 조선일보는 그의 외신부장 자리를 빼앗는 대신 조사부장을 맡기며 유배를 보냈고, 몇 달 뒤엔 그마저 부족했던지 부원 하나 없는 위층의 기사심의실로 발령을 내버렸습니다. 사표를 내라는 이야기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래도 사표를 내지 않자 마침내 편집국장이 직접 나서 사표를 강요했습니다. 바로 그즈음 리영희 부장이 나에게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덕수궁을 함께 산책하지 않겠느냐는 것이었습니다. 조선일보를 떠나기로 한 결심을 알려주려고 불러낸 것이었죠. 무슨 말로 위로를 해야 할지 몰랐고, 분노를 느꼈습니다.”
당시 리영희 ‘부장’은 42세였고, 신홍범 ‘기자’는 30세였다. “세계의 각 대륙에서 일어나는 그 시대의 엄청난 인류사적 변혁의 역동성을 깊이 관찰 연구”(리영희 선생의 자서전 《대화》 중에서)하던 한국의 언론인은, 국내 언론들이 그렇게도 롤모델로 삼고 싶어 했던 언론인은, 뉴욕타임스나 워싱턴포스트 기자들보다 앞서 베트남 전쟁의 본질을 꿰뚫고 천착했던 한국의 언론인은 그렇게 펜과 원고지를 빼앗기고 말았다.
신홍범 대표는 “리영희 부장에게서 저널리스트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았을 뿐만 아니라 지식인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보았다”고 고백했고, 이날 세미나 토론자로 참석한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베트남 전쟁을 둘러싼 고민과 갈등이 유럽과 미국에서 68혁명으로 폭발하는 동안 한반도는 무풍지대였지만 리영희 선생은 그 역할을 온전히 혼자 감당하셨다”고 평가했다. 1세션 발제자 박영흠 교수는 다음과 같은 발언으로 발제를 끝맺었다.
“진정 언론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한다면, 우리는 리영희를 다시 읽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