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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한국 언론 재건축하기] 독자의 눈높이, 이전과는 다르다
커버스토리 | 등록일 : 2020-12-07

일간지에 의존해 새로운 정보를 접하던 것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최근 독자들은 스스로 찾아서 수집하는 정보를 더 신뢰한다. 언론이 다시 독자들과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어떤 노력이 필요할지 살펴봤다. 편집자 주

 

 

2019년 신년 기획으로 기자협회보는 <잃어버린 독자를 찾아서>라는 시리즈물을 통해 언론사가 당면한 문제를 정면으로 마주했다. 이 시리즈물은 독자와의 재연결을 통해 언론 산업의 쇠퇴를 막아 보고자 하는 국내 언론사들의 다양한 시도와 주목할 만한 해외 사례들을 적절히 담고 있다. 흥미로웠지만 시의적절하다고 평가할 수는 없었던 것이, 냉정히 말해 다소 늦은 감이 없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참여 저널리즘이니 협력적 저널리즘이라는 개념이 등장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학계도 현업도 너무 오랫동안 먼 곳의 불구경처럼 대해 온 것은 아닌지 생각한다. 지금이라도 여기저기서 변화의 시도들이 활발히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집중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변화들이 얼마나 지속적일지, 결국 성공할지는 모르지만 중요한 것은 결과 여부를 떠나 어떤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움직임의 불씨를 살리기 위해서 언론과 독자의 관계에 관해 다시 생각해 본다. 

 


틀에 박히지 않은 정보 원하는 최근 독자들 
독자를 다시 찾는 노력은 수렁에 빠진 자식을 찾는 일과는 다르다. 독자가 떠난 것이라기보다는 품 안의 자식이 아니라는 점을 애써 외면하며 머물러 있었던 언론의 책임이 크기 때문이다. 독자를 찾는다는 것은 무엇일까? 독자의 행동에 관해 더 많은 데이터를 들여다보고 이들이 무엇에 반응하는지를 알게 된다는 것인가? 이들이 어떤 플랫폼으로 이주하는지를 추적해서 새로운 경로를 개척하는 것인가? 

독자를 찾는 일은 단지 독자의 움직임을 파악하는 일을 넘어서는 것이어야 한다. 그것은 독자와의 관계를 재정립하는 것이고 이를 통해 언론사 혹은 기자의 정체성을 새로 정립하는 일이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브랜드든 기존의 오래된 정체성을 바꾸기는 물론 쉽지 않다. 백지부터 아예 새로 그리는 것이 있는 것을 바꾸는 것보다 더 쉬운 경우가 많다. 그만큼 자원과 경험이 있는 곳에서 혁신이 일어나기는 힘들며, 힘든 만큼 노력이 더 들어가야 하는 것은 세상이 순환하는 이치일지도 모른다. 독자와 언론의 관계를 재정립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날 독자들의 삶 안에서 뉴스가 어떤 의미를 갖고 활용되는지를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채널의 희소성’은 레거시 미디어의 존립 기반이었다. 그러나 정보는 이제는 희소하지 않다.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정보를 추구하기는커녕 반대로 정보가 사람들을 미친 듯이 쫓아다닌다. 특히 청년층이 뉴스를 찾아 읽으려는 노력이 덜해 보이는 것은 바로 그 때문일 것이다. 사회적인 이슈가 되는 일들은 스스로 정보를 추구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통로가 너무나 많다. 청년들의 경우 연성뉴스로 분류되는 이슈들은 오히려 검색해서 찾지만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경성뉴스들은 그냥 알게 된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다. 중요하지 않아서가 아니라 찾지 않아도 결국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인스타그램이나 페이스북 등 소셜미디어 계정 구독을 통해 평소 관심 있는 기관이나 조직, 혹은 활동성 있는 정보통 사람들의 계정을 걸어 둔다. 계정은 청와대나 여성단체일 수도 있고, 평소 관심을 갖는 기업가들이나 혁신가들일 수도 있다. 중개인이 필요 없는 직거래인 것이다. 중개인이 있어야 하는 이유를 이들은 잘 납득하지 못한다. 가공되지 않은, 틀에 박히지 않은 신선함과 특정한 관점이 살 아있는 정보야말로 취할 효용이 있기 때문이다. 

뉴스는 추구하지 않아도 널려 있는 것이기에 특정한 뉴스를 ‘선택’하기보다는 포털이든 소셜미디어든 넘쳐나는 뉴스의 흐름 안에서 영양가 없는 뉴스를 ‘제끼는’ 방식으로 본다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한 묘사가 아닐까 생각한다. 영양가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공통적인 기준은 내가 투자한 시간만큼의 효용인가 하는 효율성이다. 특별할 것도 없고 친절한 설명을 하지도 않고 특정한 관점이 살아 있지도 않은 중매인이라면 1호 ‘제낌’의 대상이다. 2분이든 3분이든 내가 투자할 시간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시간(관심)은 독자에게 가장 희소한 자원이다.

청년들은 전통적으로 중요하게 여겼던 경성뉴스를 일부러 찾아보지 않는다. 찾지 않아도 결국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뉴스1

 

뉴스 가치에 대한 언론과 독자의 거리감  

 

기존 언론사 종사자들의 생각과 일반 뉴스 소비자들의 생각이 가장 큰 괴리를 보이는 부분은 뉴스 가치에 있다. 뉴스 가치라고 하면 주로 생산자들이 어떤 속성의 내용을 뉴스로 선택하는가를 의미했다. 예컨대 시의성, 균형성, 새로움 등이었다. 그것이 그대로 기사에 반영되면 읽혔기 때문이다. 뉴스가 다른 정보와는 확연히 구별되는 차별성을 갖는다고 전제됐기 때문에 토픽이 갖는 특성을 곧 뉴스 가치라고 간주했다. 

 

하지만 이제 생산된 기사가 곧 읽히는 기사는 아니다. 뉴스를 이용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뉴스의 가치는 내가 이 뉴스를 보는 데 드는 시간과 에너지 등 비용이 과연 그 값어치를 하는가에 있다. 뉴스와 기타 정보의 구분이 흐려지고 정보는 더 이상 희소한 자원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 많다. 사회적 영향 뿐 아니라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 얼마나 짧은 시간에 정보를 파악할 수 있는가 하는 효율성, 가독성, 심미적인 글의 아름다움 등 전보다 훨씬 더 확대된 다양한 요소들이 뉴스 가치를 형성한다. 

 

사람들이 매일 사용하는 미디어의 종류와 뉴스 이용시간 모두 늘었다. <2019 언론수용자 조사>에서 보고된 데이터를 취합해 보면 하루 평균 뉴스 이용 시간은 2008년 62.8분에서 2018년 81.3분으로 증가했다. 2008년과 2018년 응답자들이 ‘뉴스’가 무엇이라 생각하고 답했을지는 매우 다르겠지만 적어도 사람들의 뉴스에 대한 수요는, 즉 세상과 주변 사람들에 대한 궁금증은 줄어들었다고 볼 이유는 없다. 

 

정보 욕구는 일정 총량이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알면 알수록 채워지기보다는 오히려 더 알고 싶어지는 특징이 있다. 더욱이 어떤 뉴스에 관한 댓글이나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의견이나 해석이 공유될수록 정보 욕구는 더 커진다. ‘나’뿐 아니라 타인들도 관심이 있다는 점 자체가 그 정보의 가치를 높이기 때문이다. 뉴스 품질에 대한 실망은 더 알고 싶은 욕구가 한층 증가한 상태에서 정보성이 떨어지는 엇비슷한 기사에 노출될 경우 한층 더 깊어진다. 

 

뉴스의 정의는 본래부터 매우 느슨하다. 세상 돌아가는 모든 이야기가 뉴스이다. 과거 언론사들이 세상의 수많은 일 중 일부를 골라 보도했던 것이 뉴스의 개념으로 굳어진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사람들에 따라 이 ‘세상’은 하나일 수가 없다. 여러 개의 세상 안에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세상을 정해 놓고, 그 세상 이야기만 중요하다고 외칠 수는 없다. 이야기를 건네기 위해서는 우선 상대의 세상을 그려 보는 노력이 선행돼야 한다. 

 

과거의 ‘익숙한 틀’로 독자 상대하는 언론

 

사람들의 뉴스 소비 동기나 소비 유형은 무척이나 다양하다. 필자가 2016년 한국언론진흥재단을 통해 수행한 연구(김은미·이준환, 2016)에서도 사람들은 스스로의 배경 및 가치에 따라 다양한 뉴스 소비 양상을 보여줬다. △네이버·다음과 같은 대형 포털의 뉴스만 소비하는 유형 △SNS의 뉴스만 소비(팔로우)하는 유형 △기술이나 비즈니스처럼 특정 분야만 구독하는 유형 △화제성을 중심으로 댓글만 주로 읽는 유형 △커뮤니티 게시판만 구독하는 유형 등 단순히 채널 유형이나 시간 등의 차원만으로 구분하기 어려운 선호도와 습관을 지니고 있었다. 

 

전통적인 언론사가 생산하는 뉴스에 대한 거부감은 단순히 신뢰나 품질과 같은 추상적인 차원만이 아니다. ‘기존 뉴스보다 더 전문적인 블로그, 외신이 있어 굳이 뉴스를 볼 필요가 없다’, ‘뉴스에서는 흐름만 확인하고 구체적인 사실은 직접 검색하는 것이 훨씬 더 정보 가치가 있다’, ‘사실 확인은 뉴스에서 중요한 가치가 아니다’ 등 아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이유가 있었다. 

 

특히나 청년층은 국내 정치, 대기업이나 거시지표 중심의 경제 기사, 사건·사고 기사가 여전히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는 언론사 뉴스들을 접하며 자신의 삶과 비교해 거리감을 느낀다. 혹자는 이러한 뉴스 수요의 변화를 청년층이 실용적인 가치에만 관심이 있다고 평가하기도 하는데 필자는 생각이 다르다. 오히려 청년층은 공공의 가치를 매우 중시한다는 점이 지속적으로 발견되기 때문이다. 미국 밀레니얼의 뉴스 소비에 관한 한 기관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의 뉴스 소비 동기는 시민적 관심, 당면한 문제 해결을 위한 정보 추구, 타인들과 관심사를 공유하고자 하는 사교적 관심 등 이 세 가지가 비교적 균형 있게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Young, 2015). 국내 주요 일간지와 방송 뉴스의 경우 여전히 세상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순서로 구성돼 있다. 하지만 일상과의 관련성이나 관심도 측면에서 보자면 오히려 문화-사회-경제-정치 순서라고 보는 것이 더 평균적인 우선순위에 가까울 것이다. 인터넷 등장 이후 상호작용적인 미디어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구성하고 보여 주는가는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사람들은 사회 안에서 많은 사람과 교류하면서 지낸다. ‘개나 소나’라는 말이 모욕적인 이유는 개인의 개별성을 인정하지 않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서든 인간 소통행위의 가장 상위 동기는 개인의 정체성을 인정받고 존중받는 것이다. 미디어에서 어떤 정보를 보고 있는가는 개인의 정체성을 보여 주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뉴스도 이러한 큰 흐름에서 예외가 될 수는 없다. 

 

혹자는 ‘이게 뉴스냐?’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사례는 많다. 밀레니얼을 타깃으로 한 독일 신문 디차이트(Die Zeit)가 16~35세의 사람들을 타깃으로 발행하는 온라인신문 제트(ze.tt)의 경우 사랑과 성, 정체성과 심리, 정치와 권력, 페미니즘과 몸 담론, 문화예술 등의 유목을 기본으로 제공하고 있다. 물론 모든 언론사가 이렇게 특화된 방향으로 갈 필요는 없다. 하지만 국내의 주요 일간지들은 모두 과거에 익숙한 틀로만 상상의 독자를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의심이 들 만큼 유사한 구성을 보인다. 기존의 정치, 경제, 사회 등의 고정화된 구분이나 관습적으로 자리 잡은 주제별 우선순위를 근본적으로 극복하지 못하고 있다. 이미 동일한 인구사회학적 집단 안에서도 세상에 대한 관심이나 취향, 선호도는 뚜렷이 구별된다. 정치적 이념만이 극화되는 대상은 아니다. 전체 인구의 도달률과 같은 지표가 과연 앞으로도 얼마나 의미가 있을지 의심스럽다. 

 

우리 모두가 ‘메시지 교환자’

 

전통적으로 뉴스는 묶음 상품으로 존재해 왔다. 조금씩 다른 소비자 수요가 분포해 있을 때, 하나의 가격으로 이들을 모두 묶어서 팔면 그중 몇 가지를 따로 구매하는 것보다 소비자에게도 이득인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구체적인 수요가 있거나 묶여 있는 것 중 어느 하나에 꽂혀 있는 소비자에게 묶음 상품은 아무런 의미도 혜택도 없다.

 

‘독자’나 ‘이용자’라는 말이 오늘날의 사람들을 이해하는 데 장애가 될 수도 있다. 여전히 수동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지속적으로 주변 사람들이나 조직들과 메시지를 교환하는 대등한 소통참여자이다. 이들은 미디어‘를’ 쓰기보다는 미디어 ‘안에서’ 산다. 모두가 대등한 ‘메시지 교환자(messengers)’들이다. 적어도 동등한 존재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과연 이들이 어떤 콘텐츠를 만들고 교환한다는 것인지 묻는다면 질문의 번지수가 살짝 틀렸다. 교환이 지속되는 것 자체가 주요 콘텐츠이다. 

 

미디어 안에서 모든 참가자는 거대한 대화에 참여하고 있다. 대화가 이뤄지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구분할 수 없는 접점들은 너무나 많다. 댓글은 이미 오래된 접점 공간이라 할 수 있다. 뉴스를 볼 때 본문은 빼고 제목과 댓글만을 보는 유형도 있다. 사람들은 기자들을 감시하고 기자들은 소셜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메시지를 열심히 살핀다. 최근 들어 특정인의 소셜미디어상 발언이나 여기서 여러 사람의 실시간 메시지 교환을 통해 만들어진 이슈들이 취재의 대상이 되는 경우를 빈번히 볼 수 있다. 의제 설정은 역방향 쌍방향으로 일어난다. 

 

뉴스의 영향력은 어떤 것이 뉴스로 만들어졌는가보다는 디지털 미디어 공간에서 얼마나 확산했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확산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과연 뉴스라고 볼 수 있을까. 댓글도 공유도 하나도 없는 뉴스란 과연 뉴스라고 할 수 있을까 다시 생각하게 된다. 교환을 지속하는 것 자체가 오늘날 미디어 문화의 요체라는 점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정보 욕구 못지않게 오히려 사교적 동기를 추구하고 있다. 

 

언론인과의 접촉경험이 긍정적일 경우 언론에 대한 신뢰가 증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백영민·안수찬·김위근, 2019)는 점도 관계성이 중요하다는 점을 뒷받침하고 있다. 언론사는 관계성 증진을 추구하는 실험을 수행하고 있다. 이스라엘에서는 메신저 앱인 왓츠앱(Whatsapp)에 기자들이 자신의 독자들을 일종의 팬 그룹처럼 육성하며, 저널리즘을 모두 함께 만들어가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Kligler-Vilenchik & Tenenboim, 2020). 또한 국내에서 한겨레21이 페이스북과 ‘카카오톡 단톡방’을 통해서 ‘독편3.0’이라 불리는 독자편집위원회를 운영한다든지(김고은, 2019) KBS 기자들이 댓글 읽어 주는 유튜브 채널을 운영한다든지(김달아, 2019) 하는 사례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관계성 증진은 사람들이 자신이 무언가에 참여하고 기여한다는 효능감을 충족시킨다. 일상적으로 얻는 충족감은 자존감의 주요 원천이다. 일정 규모 이상의 독자를 거느린 거대 유튜버들은 관심사의 고도화나 정보의 품질보다 자연스럽게 커뮤니티 만드는 작업을 지향한다. 커뮤니티가 생겨나면 참여자들 모두가 여기에 정체성을 두게 된다. 나에게 반응을 보여 주고 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곳에는 자연스럽게 자주 갈 수밖에 없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소통의 기본은 ‘나’라는 정체성을 강화하는 데 있다. 대화가 정체성을 만들고 ‘내’가 관여하는 곳일수록 몰입감은 자연스럽게 발생한다. 

 

외면과 불신 탓하기 전에 근본부터 다시

 

언론사들은 디지털화, 모바일화를 외친다. 함께 고려해야 할 것은 디지털 기술이 모든 사람의 손에 똑같이 쥐어진다는 점이다. 이러한 도구를 똑똑하게 활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진다. 시각화나 도표화 관련 실력자들도 많다. 무엇보다 뉴스는 이들이 보는 수많은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다. 정보가 구성되고 시각적으로 제시되는 방식과 품질은 자연스레 비교를 통해 상대적으로 평가한다. 후지게 만들어진 뉴스는 그저 후진 콘텐츠 중 하나일 뿐이다. 고품질 콘텐츠는 널려있다. 더욱이 외국어가 가능한 사람들은 국내 뉴스도 이미 해외 언론을 통해 보며 번역 기술이 고도화될수록 언어에 의한 뉴스 시장의 구획은 빠르게 사라질 것이다. 

 

언론의 신뢰도 추락을 고민하지만 언론사가 신뢰도라고 생각하는 개념이 이미 낡은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전통 뉴스미디어가 생산하는 뉴스에 대한 외면과 불신이 있다는 지적이 틀리지 않지만 변화를 보여주지 않으면서 외면과 불신을 탓할 수는 없다. 외면과 불신은 분명 가치를 주지 못한다는 냉정한 평가이기도 하다. 누군가는 소셜미디어가 사람들의 이념적 양극화를 부추긴다고 걱정한다. 사람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필터버블에 갇혀 있다고도 한다. 필자는 오히려 언론사가 역시 필터버블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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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필자 : 김은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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