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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 품격의 재구성
커버스토리 | 등록일 : 2021-01-05

​저널리즘이 품격을 갖출 수 있을까? 신뢰와 권위가 추락하고 있는 우리 언론계에서 이를 논하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 언론에 있어 품격은 어떤 의미이고, 이를 갖추기 위해 어떤 변화와 노력이 필요할지 살펴본다. 편집자 주 

 

 

품격이 가능한 목표인가? ‘저널리즘의 품격’이라는 주제를 받고 고민이 많았다. 도대체 뭘 말하는 거지? 국어사전의 정의에 따르자면, 품격은 “사람 된 바탕과 타고난 성품”이나 “사물 따위에서 느껴지는 품위”를 말한다. 아마도 후자의 의미로 쓴 것 같은데, 품격이나 품위나 그게 그 말 아닌가. 

 

《한국 언론의 품격》(2013)이란 좋은 책이 이미 나와 있기에 다시 읽어봤지만, ‘품격’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이 책은 기사의 품질, 한국형 기자 제도, 언론의 자기성찰, 언론 자유와 법제, 편집과 경영 간의 관계 등 5개의 분야에 걸쳐 올바르거나 바람직한 방향만 제시하고 있을 뿐이다. 혹 다른 책들엔 품격에 대한 설명이 있을까 싶어 내 서재를 한참 뒤진 끝에 《인간의 품격》, 《말의 품격》, 《보수의 품격》, 《불만의 품격》이란 책을 찾아냈다. 《인간의 품격》은 《The Road to Character》라는 원제를 의역한 번역서이기에 탈락시켰고, 나머지 책들을 다시 읽어 보았지만 역시 품격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너무 어렵게 생각한 건 아닌가? 아무래도 그런 것 같다는 결론을 내렸지만, 내가 품격이라는 단어에 매달린 이유를 밝힐 필요가 있겠다. 나는 평소 언론을 향해 ‘신뢰와 권위 회복’을 요청하곤 하지만, 신뢰와 권위는 품격과는 좀 다른 말이다. 나는 품격이 가능한 목표인가에 대해 의구심이 있다. 다음 세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 한국 신문은 고급지와 대중지가 엄격하게 분리되지 않은 채 둘의 성격을 동시에 가진 복합형 모델이기 때문이다. 이 모델은 다른 매체들에도 영향을 미쳐 저널리즘도 그런 특성을 갖게 됐다. 품격은 고급지에나 해당될 뿐, 대중지의 미덕은 아니다. 속된 말로 “품격이 밥 먹여주나?”라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국 언론은 그간 품격으로 먹고 살아온 건 아니며, 앞으로도 그럴 가능성이 높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일부 언론이 저지른 오보와 왜곡 보도가 ‘기레기’라는 말을 낳게 했다지만, ‘기레기’를대 중화시킨 건 ‘정파성 전쟁’이었다. Ⓒ뉴스1

 

 

둘째, 디지털 혁명의 속성이 언론에 강요하는 ‘클릭과 트래픽’ 위주의 굴레는 품격에 적대적이기 때문이다. 또한 디지털 혁명으로 인해 ‘인민주의적 반엘리트주의(populist anti‐elitism)’의 추동을 받는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 흐름은 더욱 강해질 것이기 때문이다.1) 물론 해외엔 그런 굴레에도 불구하고 품격을 실현하는 언론이 있다곤 하지만, 한국에선 앞서 지적한 첫 번째 이유로 인해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 디지털 혁명이 심화시킨 ‘필터버블’과 ‘정파성 중독’은 품격의 가치를 크게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최근 언론을 향해 쏟아지는 ‘기레기’라는 욕설은 품격의 당위성을 요구하는 듯 보이지만, 그건 착시(錯視) 현상에 불과하다.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일부 언론이 저지른 오보와 왜곡 보도가 ‘기레기’라는 말을 낳게 했다지만, ‘기레기’를 대중화시킨 건 ‘정파성 전쟁’이었다. 자신의 정파성을 충족시켜주는 언론이 ‘기레기’에 가까운 짓을 할수록 ‘참언론’이라며 열광하는 사람들이 많았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겠다.


어깨에 힘 빼고 일하자

 

그래서 품격을 포기하자는 주장을 하려는 건 아니다. 언론이 ‘신뢰와 권위’를 누리는 것만 해도 지금으로선 꿈같은 목표가 아닌가. 그 목표가 어느 정도 달성된다면 품격에 바짝 다가서는 것인바, 나는 여기서 품격을 ‘신뢰와 권위’를 누리는 수준으로 재정의하려 한다. 내가 생각하는 품격의 3요소는 겸손, 신뢰, 실력이다. 다소 엉뚱해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3요소는 언론이 기존의 ‘권력 모델’에서 ‘봉사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는 걸 전제로 하기에 결코 가벼운 요청이 아니다.

 

1787년 영국의 보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에드먼드 버크(Edmund Burke)가 의회 연설에서 기자석을 가리키며 ‘제4부(the fourth state)’로 부른 이래로 언론은 입법·사법·행정에 이은 제4부의 권력기관으로 기능해 왔다. 권력을 감시하는 권력기관이었던 셈이다. 이런 ‘권력 모델’은 정치와 권력에 대한 갈증이 비교적 심했던 한국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망정, 과거엔 주로 정치와 권력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가 기자가 되기를 열망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도 이른바 ‘폴리널리스트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다.2)


그런데 디지털 혁명은 그런 ‘권력 모델’에 치명타를 가하고 말았다. 무엇보다도 이른바 ‘1인 저널리스트’의 시대가 열리면서 언론 권력의 주체가 광범위해졌기 때문이다. 권력자란 원래 소수일 때 권력 행사를 할 수 있는 법이다. 그런데 그 소수의 특권을 다수가 나눠 갖게 되면서 권력자로 행세하기가 어려워졌을 뿐만 아니라, 다수의 감시를 받는 처지로까지 내몰리게 됐다. 물론 소속 언론사의 규모와 영향력을 앞세워 언론권력자들 사이의 위계를 세워보려는 시도가 여전히 이뤄지고 있긴 하지만, 그럴수록 세상이 달라졌다는 걸 실감하게 될 뿐이다.

 

그렇게 달라진 세상에서 ‘권력 모델’을 대체할 수 있는 건 바로 ‘봉사 모델’이다. 원론적으로 보자면, ‘권력 모델’과 ‘봉사 모델’은 동전의 양면 관계다. 권력을 누리는 정치인들이 말하는 걸 들어보라. 자신의 권력 행사를 한사코 대중에 대한 봉사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많다. 맞다. 좋은 법을 만드는 것도 봉사다. 그러나 대중은 그들이 봉사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문제는 행동거지다. ‘정파성 전쟁’으로 정치에 대한 불신과 혐오를 가중하는 일에 맹목적인 행동대원으로 기능하거나 싸가지 없는 독설을 양산해내는 정치인의 모습에서 봉사를 연상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오만은 봉사와 양립하기 어렵다.

 

내가 말하는 ‘봉사 모델’은 쉽게 말하자면, 어깨에 힘 빼고 일하자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권력을 행사하던 사람들이 명퇴나 정년 후 자영업을 하게 되면 부딪히는 가장 큰 문제가 바로 이것이다. 처음엔 영 어색하고 괴롭기까지 하지만, 시간이 좀 흐르면 달라지게 돼 있다. 기자들 역시 다를 게 없다. 진짜로 봉사하는 자세를 가져보자. 무료 봉사도 아니다. 자영업자가 돈을 벌기 위해 낮은 자세로 일하는 데에 필요한 독한 마음을 먹어보자는 것이니 말이다. 이제 이런 이야기를 겸손, 신뢰, 실력이라는 품격의 3요소로 나눠 이야기해보자.

 

‘1인 저널리스트’에게서도 배워야 한다


첫째, 겸손이다. 기자들이 겸손하긴 어렵다. 훈련 과정부터가 그렇다. 20대 기자라 하더라도 주로 만나는 사람들은 나이가 든 권력자들인데 겸손하게 보였다간 될 일도 안 된다. 다소 건방을 떠는 건 필요악이다. 그런데 문제는 공사(公私)를 구분해야 함에도 그런 두 가지 행동 모드를 동시에 갖는 게 매우 어렵다는 점이다. 공적 업무를 위해 가졌던 자세가 몸에 밴 나머지 아예 의식까지 바꿔버리는 경우가 많다.

 

김세은은 《한국 언론의 품격》에 쓴 ‘한국 언론의 자기 성찰’이라는 글에서 이 점을 잘 지적했다. 그는 “우리나라 기자들은 유독 엘리트 의식이 강하고 ‘쓸데없는 자존심’도 강하다. 이는 기본적으로 비판을 거부하고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는 기자들의 문화를 만들어낸다”며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러나 기자들의 엘리트주의에 대한 다른 의견도 나왔다. 그건 엘리트주의가 아니라 ‘교육을 제대로 못 받아 겉멋이 들어서’ 그런 것이고 엘리트 의식이 아닌 ‘권력 의식’, ‘특권 의식’에 젖어서 그렇다는 것이다. (중략) 엘리트주의이든 권력 의식이든, 기자들의 아집과 독선은 보호 본능으로까지 연결되고, 이것이 내부든 외부든 비판에 귀를 닫고 마음을 닫게 하는 원인으로 작동한다.”3)


그렇다. 바로 그게 문제다. 하지만 이제 그런 생각과 자세론 생존하기조차 어려워진 상황에 돌입했으니, 겸손을 생존을 위한 당위의 차원에서 받아들여야 한다. 나는 겸손을 ‘배움의 기회’라고 하는 문제와 연결해 생각하고 싶다. 엘리트 의식이나 특권 의식의 가장 나쁜 점은 배움의 기회를 차단함으로써 달라진 환경에 대한 창조적 적응력을 죽인다는 점이다.

 

일견 초라해 보이는 ‘1인 저널리스트’에게서도 배울 게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할 때 비로소 레거시 미디어의 살길도 열린다. 배움의 자세를 가지면 세상을 다른 시각으로 관찰하는 일이 가능해지며,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는 눈도 밝아진다. 물론 기사의 품질도 높아진다. 사건의 피상을 넘어서 한 걸음 더 들어간 취재와 분석이 가능해지기 때문이다.

 

‘아래에서 위로’ 부여되는 ‘권위’를 갖자


둘째, 신뢰다. 종교적 신념에 가까운 정파성으로 무장한 사람들의 신뢰를 얻는 건 사실상 불가능하다. 그런 정파성의 반대편에 있는 언론사나 기자의 경우에 말이다. 이젠 널리 알려진 비밀이지만, “나의 기레기는 너의 참언론이고, 나의 참언론은 너의 기레기다.” ‘정치 전쟁’으로 인해 두 개로 쪼개진 나라에서 양쪽 모두 자신들의 마음에 들지 않는 언론을 향해 기레기를 외쳐대는 상황에선 모든 언론이 기레기가 되고 만다. 그런 해괴한 상황을 문제 삼지 않은 채 언론에게만 기레기 소리를 듣지 않게끔 성찰하라고 요구하는 건 부당하다.

 

이걸 전제로 이야길 해보자. 다른 경우엔 신뢰를 얻을 만하게끔 행동하고 있는가? 예컨대, 오보에 대해 말해보자. 오보는 불가피하다. 중요한 건 오보 이후의 태도다. 언론은 사과에 인색하다.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인색하다. 왜 그럴까? ‘권위’를 내세우기 때문이다. 이게 바로 ‘권력 모델’의 가장 큰 폐해다. 언론은 정부 기관이나 정치권이 하는 짓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실수를 저질렀음에도 사적인 인간관계에서라면 결코 하지 않을 오만방자한 자세를 보인다. 우리는 개인이 아니라 권위 있는 권력기관이기 때문에 공신력 보호 차원에서 오만하게 구는 게 불가피하다는 식이다.

 

왜 그래야 하나? 혹 ‘권위’의 개념을 잘못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언론이 가져야 한다고 역설하는 권위는 ‘위에서 아래로’ 부과하는 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부여되는 것이다. 지금으로선 꿈같은 이야기지만, 오보를 비롯해 자신들의 실수를 1면에 큼지막하게 알리면서 사과하는 언론사가 있다고 가정해보자. 논조엔 동의하지 않아도 그 언론사의 기사는 믿을 수 있다는 신뢰가 형성되는 동시에 독자들이 부여하는 권위가 생성될 수 있지 않을까?

 

언론이 신뢰를 얻기 위해선 그런 자세와 더불어 광고 수주를 위한 ‘협박식 영업’을 중단하고 최소한의 ‘시장 논리’가 작동하게끔 해야 한다. 여기서 ‘시장 논리’는 언론의 일방적인 횡포를 교정해야 한다는 의미에서 사용하는 완곡어법이다. 지난 2018년 7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편집국 기자 광고·협찬 영업 활동 금지법’을 주장하는 글이 올라왔던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진짜 기레기 욕은 이 과정에서 많이 나온다는 걸 명심하고, 언론계 차원의 정화 활동을 스스로 벌여야 한다.

 

또한 언론은 이상과 현실의 괴리를 줄여나가기 위한 솔직함을 보여야 한다. 스스로 공적 기관을 자임하는 언론은 기업보다 이상적인 주장을 훨씬 더 많이 외쳐대는 바람에 언행 불일치로 인한 위선과 그에 대한 대중의 혐오에 있어 훨씬 불리한 처지에 놓여 있다. 언론 스스로 자신의 역할을 미화해 가능하지 않은 이상을 외쳐댐으로써 자승자박(自繩自縛)의 결과를 초래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차원에서 ‘세속화’하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4)


'공공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하라

 

셋째, 실력이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에서 타키투스의 말을 인용해 “인간 세계에서는 자기 실력에 기초를 두지 않은 권세나 명성만큼 믿을 수 없는 것도 없다”라고 했다. 조직의 권세와 후광으로 살아가는 언론인들이 명심해야 할 금언이다.

 

책을 많이 읽는 분들은 늘 절감하겠지만, 국내에서 베스트셀러가 된 번역서의 저자 중엔 기자들이 많다. 반면 국내 필자들이 쓴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기자들을 찾기는 매우 어렵다. 즉, 기자들이 출판 시장에서 이렇다 할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왜 그런지 그 이유를 찾다 보면 한국에서 기자의 경쟁력이 무엇으로 결정되며, 그것이 저널리즘의 질과 품격에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에 대한 답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그간 지식인을 공급하던 대학이 치열한 생존 경쟁과 서열 경쟁에 내몰리면서 교수들은 이른바 ‘논문 기계’가 돼가고 있다는 건 이제 상식이 됐다. 그렇다면 그로 인한 ‘지식인의 죽음’은 필연이며, 우리는 그런 변화를 반겨야 할까? 나는 바로 여기에 언론의 살길이 숨어 있다고 생각한다. 언론인이 과거 주로 교수들이 맡았던 ‘공공 지식인’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며, 그 과정에서 저널리즘의 품격 제고가 자연스럽게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언론의 정파성 전쟁이 심각하다곤 하지만, 그런 전쟁 자체보다는 정파성을 드러내는 방식과 내용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어떤 주장을 내포한 기사를 쓸 때 반대편은 어떤 반론을 할 것인지 그걸 염두에 두고 기사를 쓴다면 어떨까? 독자들에게 쟁점에 대한 정보와 지식의 최대한을 제공해주면서 최종 판단은 독자가 하게끔 하면 안 되느냐는 것이다. 물론 이렇게 하는 데엔 시간과 노력이 훨씬 많이 요구된다. 하

지만 모든 기사를 이런 식으로 써나가는 훈련을 하고, 이게 하나의 모범적인 모델로 자리 잡는다면, 그런 변화의 결실은 저널리즘의 품격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할 것이다.

 

나는 언론계에 바라는 꿈이 하나 있다. 그것은 이런저런 이유로 언론 조직을 떠날 시, ‘폴리널리스트’가 되기를 지향하는 언론인보다는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수준의 ‘독립 프리랜서 저자’를 지향하는 언론인이 더 많아지는 것이다. 물론 한국 출판 시장의 협소함으로 인해 큰 기대를 걸긴 어렵겠지만, 언론 산업이 정보 지식 산업으로 거듭나는 길을 모색해 나가다 보면 다른 새로운 출구도 열릴 것이다. 유용민이 잘 지적했듯이, “이런 것도 저널리즘인가”라는 반응을 유발할 수 있는 새로운 시도를 적극적으로 감행하는 ‘프래그머티즘적 저널리즘(Pragmatistic Journalism)’이 필요하다는 건 두말할 나위가 없다.5) 

 

언론이 ‘권력 모델’에서 ‘봉사 모델’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은 파란만장한 한국 근현대사에서 언론에 요구됐던, 정치와 권력 중심의 역할과 사명의 유효기간이 거의 끝났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다. 언론은 그간 권력과 변화에 대해 반응만 해오던 역할에서 스스로 권력의 분산화를 꾀하면서 변화를 앞서서 이끌어가는 변신을 해야 한다. 그런 변신을 위해 겸손, 신뢰, 실력을 갖춘 젊은 언론인들이 많이 나오기를 열망한다.

 

 

 

 

 

 

 

1) 강준만, <왜 대중은 반지성주의에 매료되는가?: 설득 커뮤니케이션의 관점에서 본 반지성주의>, 정치·정보연구, 22(1), 27-62쪽, 2019.2.

2) 김세은, <한국 ‘폴리널리스트’의 특성과 변화: 언론인 출신 국회의원을 중심으로>, 한국언론학보, 61(3), 7-54쪽, 2017.6.

3) 김세은, <한국 언론의 자기 성찰: 미디어 보도와 미디어 비평>, 박재영 외, 《한국 언론의 품격》, 나남, 221-223쪽, 2013.

4) ‘협박식 영업’과 ‘언행불일치로 인한 위선과 혐오’에 대해선 강준만·전상민, <“모든 기업은 미디어 기업이다”: 브랜드 저널리즘이 강요하는 언론개혁의 전망>(커뮤니케이션이론, 15(1), 5-57쪽, 2019.3) 참고

5) 유용민, <뉴스 미디어 창업 시대 프래그머티즘적 저널리즘 요청: 저널리즘과 사회 변동의 관계학적 논의를 중심으로>, 커뮤니케이션이론, 14(3), 322-376쪽, 201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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