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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견이 개입되지 않는 순수한 사실이란 것이 과연 존재할까. 우리 언론은 항상 의견과 함께하면서도 그 존재를 부정해왔다. 향후 지속가능한 생존과 발전을 위해, 언론과 의견의 합리적인 공존 방법을 찾아본다. 편집자 주

언론은 오랫동안 ‘사실’과 ‘객관’을 표방해왔다. 시민들의 의식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론은 사실적이고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믿음을 폭넓게 공유해 왔다. 의견은 사실의 반대 개념으로 객관을 해치는 경계해야 할 부정적인 요소로 간주해왔다. 하지만 어느 나라, 어느 시대건 의견을 배제한 사실만으로 뉴스를 생산한 언론은 없다. 신문 지면의 상당 부분은 사설과 칼럼이며, 사실 보도를 표방하는 스트레이트 뉴스조차 다양한 방식으로 기자의 의견이 개입한다는 것은 이미 주지의 사실이다. 언론은 언제나 의견과 함께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의견 개입 없는 순수한 사실은 불가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언론과 의견은 함께할 수 있나?”란 질문은 “언론은 어떻게 의견과 함께해야 하나?”라는 질문으로 수정하는 것이 맞을 듯싶다.
지금까지 언론이 의견을 대하는 태도는 함께 있으면서 존재를 부정하는 상황, 즉 의견을 피력하면서 사실을 제시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신문 지면은 ‘사실과 의견의 분리’ 방침에 따라 ‘사실’을 표방하는 스트레이트와 사설, 칼럼, 해설 등 의견이 개입된 기사를 공간적·양식적으로 분리한다. 이런 편집은 적어도 스트레이트 기사는 의견이 개입되지 않는 ‘사실’이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여기에 동의한다 해도 신문지면은 많은 의견 기사들로 채워진다. 그런데도 객관주의 언론의 지배적 정체성은 ‘사실의 전달자’에 무게 중심을 둔다. 이처럼 기자들이 의견의 존재를 축소하고 사실을 강조하는 것은 직업적 의무감의 발로일 수도 있고 직업적 욕망의 발로일 수도 있다.
공적 세계에서 일어나는 일을 전달하는 언론의 보도가 사실성을 확보하지 못한다면 공론의 영역은 혼란에 빠질 것이므로 사실성에 대한 강조는 언론의 최소한의 책무에 대한 염려의 산물일 수 있다. 물론 여기서 사실성은 취재원의 말을 따옴표(“ ”)로 정확하게 옮겼다는 차원을 넘어 취재원의 말의 내용에 대한 사실 검증까지 포함해야 할 것이다. 사실성이 단지 가짜뉴스가 아닌 사실을 보도한다는 정확성에 제한된 것이라면, 즉 ‘받아쓰기’의 정확성을 사실성으로 인식하는 것이라면, 사실성에 대한 언론의 책무를 편의적으로 축소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까지 사실성을 추구하는 언론 관행은 ‘받아쓰기 저널리즘’, ‘형식적 사실주의’ 등 비판이 암시하듯, 따옴표로 전달한 내용의 정확성을 넘어 사안 자체의 사실 여부를 검증하는 데는 소홀했다. 반면 뉴스의 취사선택을 전문적 영역으로 간주하면서 특정 사실을 선택하고 편집을 통해 강조하거나 축소하는 방식으로 은밀하게 의견을 표현하는 전략적 의례들을 집중적으로 발전시켜왔다.
게이 터크만(Gaye Tuchman)이 개념화한 ‘인용부호의 현명한 사용’은 취재원의 말을 직접 인용함으로써 기자의 의견이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을 현시하는 전형적인 객관주의 보도 관행이다. 하지만 이 관행 속에서도 기자는 취재원의 말을 부분부분 자의적으로 절단·채취하고 배치한다. 맥락을 자유롭게 선택하며 아무런 허위 정보 없이도 자신의 의견을 충분히 개진할 수 있다. 한국 정파 언론에서 자주 보이는, 제목에 취재원의 말을 그대로 직접 인용하는 행태, 이른바 ‘따옴표 저널리즘’은 인용부호 사용의 ‘현명함’의 경계를 한참 넘은 ‘적나라한 남용’의 경우라 할 수 있다.
사실인 척 ‘의견’ 보여주는 이유
기자들이 사실의 형태로 의견을 제시하는데 열광하는 것은 뉴스 생산 조건에서 비롯되는 직업적 욕망과 관계가 있다. 제한된 시간에 제한된 노동력을 투입할 수밖에 없고, 다양한 이해당사자들의 저항에 노출되는 기자들은 안전하고 효율적인 보도를 추구하는 방편으로 사실성을 정확성으로 축소하는 인식 체계를 갖기 쉽다. 이런 선택적 인식은 취재원이 제공하는 정보 자체의 사실성 검증이란 고단한 노동을 기자의 의무에서 제외함으로써 사실성 추구가 요구하는 전체 노동량을 현저하게 줄여 준다. 그런데 이렇게 단순 전달자 역할만 하면 기자들의 직업적 영향력이 약할 수밖에 없다. 기자들은 사실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재량권의 영역인 취사선택과 편집을 통해 의견을 개진하고자 하는 직업적 욕망을 갖기 쉽다. 뉴스를 ‘사실의 형태를 한 의견’으로 제시할 수 있는 기술은 공론 과정에서 모든 해석을 중지시키는 사실의 힘을 전유하면서 의견에 대한 책임은 지지 않아도 되는 지위를 부여하기 때문이다. 문제는 사실의 형태로 제시되는 의견이 민주적 공론 과정의 기본 조건인 다양한 해석을 차단하고 특정 이데올로기적 담론을 전달하는 미디어가 될 수도 있다는 점이다. 예컨대 정파 언론이 반대 정파 정치인의 사소한 비위를 집요하게 보도하면서 자기 정파 정치인의 비위에 대해서는 침묵하는 ‘무보도’의 편집 방침을 지속해서 유지한다면, 개별 기사는 사실의 형태를 띠지만 누적적으로 전달되는 메시지는 반대 정파는 나쁘다는 정파적 의견인 것이다. 지금 한국 언론에 이런 행태가 그 어느 때보다 만연한데, 이는 사실의 형태를 띤 의견으로 영향력을 행사하고자 하는 기자의 욕망이 한국 사회의 뉴스 생산 조건과 결합한 결과로 볼 수 있다. 즉 정파적으로 분열된 시민사회에서, 재정 여건이 어려운 전통 뉴스 매체가 정파성이 상품이 되는 현실에 적응하면서 제한된 조건 속에서 언론의 영향력을 행사하려는 전략의 결과라는 것이다.

언론이 주목할 것은 사실 아닌 의견
이처럼 언론의 관행은 뉴스 생산의 조건과 기자들의 직업적 욕망과 깊은 관련이 있기 때문에 뉴스 연구자들의 수많은 지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변화는 더디게 진행됐다. 객관주의의 역사를 거슬러 가 보면, 뉴스 연구자들의 비판은 기계적 사실성에 제한된 형식적 사실주의와 사실의 형태를 한 의견의 이데올로기적 위험성에 대한 지적을 두 축으로 전개됐다. 이러한 비판에 내재한 궁극적 요구는 언론은 사실 검증에 더 깊이 관여해야 하고, 의견을 사실처럼 보도하는 대신 의견을 윤리적으로 제시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요구 중 미흡한 사실성을 보완하려는 노력은 1960년대부터 미국 언론을 중심으로 지속적으로 진행돼왔고, 괄목할만한 성과도 있었다. 1960년대의 탐사보도를 출발점으로 사건 전달보다 원인을 해석하는 데 주력한 롱 저널리즘(long journalism), 해설 저널리즘(explanatory journalism), 팩트체크 저널리즘(factcheck journalism), 맥락 저널리즘(contextual journalism) 등 새로운 저널리즘 형태들이 나타났다. 이 대안적 저널리즘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주어진 사실의 검증을 강화하고 새로운 사회적 사실을 발굴하며 원인이 되는 맥락적 사실까지 폭넓게 보여준다는 취지를 공유했다. 이처럼 사실성에 대한 보완이 나름의 성과가 있었던 것에 비해 ‘사실의 형태를 한 의견’에 대한 보완책, 즉 의견으로서의 뉴스를 다루는 언론의 윤리적 입장에 대한 진전은 미흡하다. 언론이 지향해야 할 가치로 공정성을 표방하기를 중단하고, 대선 후보에 대한 지지를 공개하는 것 정도가 언론 내부의 불편한 존재인 의견에 대해 미국 언론이 취한 조처이다.
객관주의 언론의 이러한 전개 양상은 앞으로 언론이 주목해야 할 것은 사실이 아니라 의견임을 암시한다. 사실의 강조를 언론의 역할을 축소하는 방향으로 적용해 온 언론의 직업적 태도는 이미 설득력을 다 잃었다. 사회는 더 풍부한 사실성과 더 설득력 있는 의견을 동시에 요구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객관주의 관행이 사실성을 입증하는 전략에 집중돼 상대적으로 언론의 의견 표현을 안내하는 윤리 체계를 구축하지 못했다. 언론은 공적으로 의견을 표명할 수 있는 자격을 사회로부터 인정받기 위해 의견 표현의 규범을 구축해 나가야 한다. 그렇다면, 언론이 의견 표현의 규범을 구축하기 위해서는 어떤 인식의 전환과 실천이 필요할까? 필자는 세 가지 방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사실과 의견 분리’ 원칙의 함정
첫째, ‘사실과 의견의 분리’라는 객관주의 관행에 대한 성찰과 대안적 인식이 필요하다. 사실과 의견의 분리 가능성은 엄격한 사실이 가능하다는 전제를 깔고 있는데, 이런 인식은 이미 객관주의 연구에서 부정된 관점이다. 마이클 셧슨(Michael Schudson)은 객관주의 이념이 이미 “사실은 합의에 의해 타당성을 갖게 된 진술”로 사회 구성적 사실임을 강조했다. 사실 여부를 사회적 합의가 결정한다는 것은 사실과 의견의 분리 불가능성을 의미한다. 나아가 사실도 특정 시점에 사회적으로 결정된 지배적인 집단적 의견이라는 점을 암시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언론은 뉴스를 사실의 형태로 표상되는 의견으로 가정하는 것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긍정적 실천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크다. 사실과 의견의 분리 원칙을 추종했던 객관주의의 역사적 실천 경험이 언론의 사실성 검증은 축소하고 사실의 형태를 한 의견으로 직업적 영향력 확장을 추구했던 사실을 떠올려보라. 적은 자원을 투여해 최대한의 효과를 얻기 위한 기자의 직업적 욕망이 얼마나 쉽게 ‘사실의 권능’을 남용하는 방향으로 흐르던가. 코바치와 로젠스틸의 “진실이 우리의 목표이기는 하지만, 최선을 다해도 이를 잡기 어렵다는 것을 알지만, 여전히 이 목표를 품고 있는 것”이라는 언론의 윤리적 지향에 대한 언명은 뉴스의 본질을 사실의 형태로 표상되는 의견으로 인식해야 나올 수 있는 윤리적 자세이다.
둘째, 정치적 입장을 투명하게 밝히고, 일관된 관점을 갖고 원칙에 근거한 편집 체제를 유지하도록 해야 한다. 뉴스 생산에서 사실과 의견의 구별이 근원적으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면, 의견의 대립이 가장 선명하게 나타나는 정치 영역 정도는 의견임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 언론이 공정성을 언론이 추구해야 할 가치로 내세우지 않고, 대선주자에 대한 입장을 공표하는 것은 정치 기사가 사실보다 의견에 가깝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 언론은 정치 영역에서도 겉으로는 사실을 강조하며 중립적 입장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매우 정파적인 보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모순적 양상은 정치적 입장이 다른 두 주체가 의견을 사실로 오인하면 토론을 통한 논리적 절충의 기회가 사라지기 때문에 비롯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즉 정치 영역에서 지나친 사실 추구는 역설적으로 정파성의 늪에 빠지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정파성과 정치성(혹은 이념성)을 구별하는 것이다. 둘 다 정치적 입장을 표현하는 말이긴 하지만, 정파성은 정당에 대한 (정서적) 태도를 강조하며, 정치성은 가치와 정책에 대한 이성적 지향을 강조하는 표현이다. 언론이 일관된 입장을 유지한다는 것은 다양한 사회 현안을 해석하는데 원칙이 되는 가치와 여기에 기반한 정책을 지지한다는 것이지, 정당에 대한 묻지마 지지나 반대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한국 언론의 강한 정파성은 가치와 정책에 대한 선택의 일관성보다 정당과 거기 소속된 사람에 대한 정서적 태도가 압도적으로 우선하는 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사실과 의견의 분리’를 기초로 사실 구성에 초점을 맞춘 현재의 보도 준칙을 어떤 형태의 뉴스든 그 본질을 ‘사실 전달을 방법론으로 하는 의견으로’ 가정하고 점진적으로 수정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 우선 사실과 의견의 유형을 세분화할 필요가 있다. 사실을 의견과 구별하는 데 초점을 맞추지 않고 뉴스의 공적 가치와 기자 노동의 관여 정도를 기준으로 구분하면, 주어진 사실, 확인한 사실, 발굴한 사실의 세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주어진 사실은 공공기관 등 취재원이 준 정보를 각색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도했을 때의 사실이다. 확인한 사실은 제보나 발표 등 외부에서 받은 정보를 적절한 확인 절차를 거쳐 검증한 사실이다. 발굴한 사실은 기자가 탐사보도나 데이터 저널리즘 등의 방법으로 독자적으로 발굴한 사실이다. 주어진 사실만을 기자가 추구해야 하는 사실성의 경계로 가정하면 보도된 기사의 사실성이 담보되지 않는다. 주어진 사실을 확인해서 확인한 사실을 보도하면 사실성은 확보되지만, 뉴스 선택의 범위는 여전히 주어진 사실을 넘지 못한다. 보도돼야 할 숱한 사회구조적 문제는 사실 보도의 경계 밖으로 밀려난다. 한국 언론은 주어진 사실을 (한다고 칭찬받지 않지만 안 하면 비판받는) 의무로, 확인한 사실을 (안 한다고 비판받지 않지만 하면 칭찬받는) 초과 의무로 인식하는 ‘형식적 사실주의’ 경향이 강했으며, 발굴한 사실은 아예 사실의 범주가 아닌 ‘기획’이라는 범주로 묶어 사실의 경계 밖으로 내보냈다. 바람직한 것은 확인된 사실까지를 의무, 발굴한 사실을 초과 의무로 가정하는 사실성의 스펙트럼을 갖는 것일 터이다.
언론의 새로운 실천 규범, 사실성과 투명성
의견은 합의의 난이도를 기준으로 해석적 의견, 규범적 의견, 정치적 의견으로 나눌 수 있다. 해석적 의견은 설명이 필요한 사안에 대해 해설을 목적으로 심층적이고 전문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의견을 말한다. 예컨대 현대자동차에서 차가 새로 출시돼 자동차 전문가의 견해를 빌어 경제성, 기능성, 환경적합도 등 다양한 관점에서 평가하는 기사를 쓴 경우가 여기에 해당한다. 규범적 의견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을 준거로 일탈적 행위를 비판하는 의견을 말한다. 잔인한 강력범죄를 저지른 범인에게 엄벌을 촉구하는 기사를 쓴 경우가 전형적 사례라 할 수 있다. 정치적 의견은 낙태죄나 성 소수자 문제부터 대선 후보 평가까지 정치성과 정파성을 드러낸 의견을 말한다. 세 유형의 의견 중 합의가 가장 어려운 것은 정치적 의견이다. 해석적 의견은 사회적으로 공인된 전문성, 규범적 의견은 사회적으로 합의된 규범이 의견 갈등을 조정하는 기준이 되지만, 정치적 의견은 이런 기준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역설적으로 언론이 의견을 표명하는 규범 체계를 먼저 구축해야 하는 영역은 정치적 의견이다.
언론의 역할을 최대치로 잡으면 사실 확인을 넘어 사실 발굴을 통해 파묻힌 사회적 문제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정치적 공론의 영역에서는 규범적 중재자의 역할을 더 적극적으로 하는 것이다. 바람직한 언론은 주어진 사실과 확인한 사실보다 사실성을 토대로 발굴한 사실을 더 적극적으로 추구해야 한다. 그런데 고단한 사실 발굴의 의지는 언론의 역할과 사회 정의에 대한 기자의 확고한 입장과 강한 의견 표현의 욕망에서 나온다. 요컨대 탐사보도나 데이터 저널리즘처럼 뉴스 가치가 크고 사회적 의미가 있는 사실은 정의로운 의견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는 의견 표현의 규범적 원칙에서 우선적 토대가 사실성이라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다만 여기서 사실성만이 강조되면 의견이 사실로 둔갑할 소지가 있으므로, ‘이 기사는 의견’이라는 점을 기사 양식을 통해 표현하는 것과 같은 ‘투명성’이 보완될 필요가 있다. 예컨대 서너 개 사례와 전문가 인터뷰 두세 개로 구성되는 한국 언론의 ‘역피라미드형 기획기사’는 사회현상에 대한 기자의 해석적 의견을 사실처럼 보도하는 경향이 있는데, 투명성이 부족한 경우라 할 수 있다. 어떤 사회현상과 관련된 전형적인 하나의 사례를 길게 인용해서 환유적으로 사회현상에 대한 기자의 의견을 표현하는 내러티브 저널리즘은 사실성에 기초하면서도 투명성이 보완된 기사 양식이라 할 수 있다.
현재 선정적 정파성에 물든 한국 언론은 사실 검증과 의견 표현의 윤리 모두가 부실한 상황이다. 흔히 어려운 재정 상황과 뉴스 생산의 열악한 조건이 원인이자 명분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언론의 장기적인 생존과 발전은 사실성과 투명성을 절충하는 방향으로 언론 실천의 기준을 수정하면서 더디지만 지속가능한 신뢰를 구축해 나가는 것이 아닐까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