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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제작기] KBS <미얀마 시민혁명> 취재기
취재기제작기 | 등록일 : 2021-06-04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일어난 지 석 달이 지났다. 지금 이 순간에도 많은 국민이 목숨을 잃고 있지만 해외 언론의 현장 취재는 불가능한 상태다. 미얀마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태국의 필자로부터 현지 상황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지난 2월 1일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지만 현장 취재는 불가한 상태다. <출처 – 필자 제공>

 

 

‘키인 아웅(가명)’은 또박또박 한국말로 말했다. “제 얼굴이 나가도 됩니다.” 양곤대에서 한국어를 전공한 그는 또렷한 우리말 발음과 단호한 어조로 화상 인터뷰를 했다. 인터뷰 말미에 “우리 미얀마 청년들이 한국과 한국 문화를 사랑하듯이, 한국인들도 우리의 투쟁을 지켜봐 주시고 응원해주십시오”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부분은 그대로 KBS <뉴스 9>에 보도됐다.

 

며칠 뒤 키인에게 연락이 왔다. 시위대가 주요국 대사관을 찾아 ‘반 쿠데타 시위’에 지지 의사를 밝혀줄 것을 호소하는데, 자신들은 양곤의 한국대사관을 다녀왔다고 했다. 5분 정도 되는 영상 속에서 100여 명의 미얀마 젊은이들이 한국대사관 정문 앞에서 무릎을 꿇고 외치고 있었다. 한 여성은 한국말로 “민주화를 원하는 미얀마 시민들이 죽어가고 있습니다. 우리를 살려주십시오”라고 외쳤다. 보도가 나간 뒤 이 녹취는 SNS에서 수없이 리트윗되면서 우리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이 장면은 미얀마 쿠데타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이 깊어지는 데 큰 기여를 했다.

 

갈 수 없는 그곳

 

지난 2월 1일, 미얀마에서 쿠데타가 발생했다. 총선을 통해 두 번째로 집권하는 아웅산 수치 정부의 취임식이 열리는 날이었다. 특파원으로 방콕에 발령 나고 7개월, 미얀마의 수도가 네피도(Naypyidaw)라는 것조차 몰랐다. 미얀마 현장 취재는 꽉 막혔다. 취재 비자는 물론, 기업 초청장을 통한 방문조차 불허됐다. AP나 로이터의 영상을 받아 보도를 이어갈 무렵 미얀마 시민과 하나둘씩 연결이 됐다. 그들은 시위 현장을 확인할 수 있는 수많은 페이스북과 트위터 주소를 알려줬다. 한국에 있는 미얀마 근로자들이 SNS에 내 이메일과 페북 주소를 공개했고, 3월이 되자 매일 수많은 영상과 제보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미얀마인들이 보안을 위해 주로 쓰는 시그널(signal)이라는 앱도 다운받았다. 우리가 미얀마에 가지 못하니 이렇게 미얀마가 우리에게 왔다.

 

내가 있는 태국은 미얀마와 3,000km의 국경을 맞대고 있다. 여덟 시간을 운전해 미얀마 북부 국경도시 매솟(maesot)을 찾았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 70%가 미얀마인이고 쇼핑몰에서도 미얀마어를 쓴다. 출입국사무소 앞에 자리를 잡고 화상 연결(MNG, Mobile News Gathering)로 미얀마 상황을 전했다. 원고 전송을 위해 인터넷이 되는 근처 식당에 들렀는데 종업원들이 모두 미얀마인들이었다(태국 국민소득의 7분의 1 정도인 미얀마인들은 태국으로 밀입국해 온갖 궂은일은 다 한다). 종업원들이 우리 일행에게 다가와 어설픈 태국어로 뭔가를 설명했다. 태국인 코디네이터는 그것이 “미얀마 사람들이 계속 죽는다”라는 뜻이라고 알려줬다.

 

그 국경 마을에서 미얀마의 최대 소수민족 카렌족과 무역을 하는 교민 사업가를 만났다. 카렌민족해방군(KNLA, Karen National Liberation Army) 사령관을 만날 수 있게 해준다고 했다. 4월 2일 우리는 매솟을 다시 찾았다. 밤늦게 호텔로 머리를 짧게 깎은 남성 두 명이 찾아왔다. 내일 아침 차로 한 시간 정도 가면 사령관이 국경을 넘어오는데, 장소는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인터뷰 사례로 무엇을 좀 해드리면 좋겠냐고 물었는데, 빵을 사달라고 했다. 우리는 호텔 레스토랑에 진열된 식빵과 케이크를 모두 포장했다.

 

다음날, 매라매드(maela-mad) 국경지대에서 카렌민족해방군의 소포도(Saw Paw Doh) 사령관을 만났다. 태국군과 미얀마군이 모두 쫓고 있는 고령의 반군 지휘관은 미얀마군의 공습으로 카렌족이 죽어가고 있다고 했다. 그가 보여준 휴대폰 영상에는 미얀마 전투기의 공습에 파괴된 파푼(Papun) 지역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뉴스에 쓸만한 영상은 거의 없었다. 머리와 팔다리가 잘려나간 시신이 너무 많았다. 우리가 영화에서 보는 전투 장면과는 거리가 멀었다.

 

소포도 사령관은 미얀마의 반 쿠데타 진영(CRPH, Committee Representing Pyidaungsu Hluttaw)이 계획하고 있는 연방군 창설에는 회의적이었다. 70년 넘게 독립을 꿈꾸는 카렌족 반군 지도자는 버마인 군부가 버마인 시민을 학살하는 현실에 대해 말을 아꼈다. 4년 전 미얀마 군부가 소수민족 로힝야족을 학살할 때, 아웅산 수치 고문은 이를 부인했다. 군부와의 관계 때문이었다. 소수민족들에게는 아직 그 배반의 기억이 남아있다.

 

 

미얀마 쿠데타의 첫 희생자 먀 뚜웨 뚜웨 카인 <출처 – 필자 제공>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한다”

 

3월 27일, 방콕에선 미스그랜드인터내셔널 대회가 열렸다. 63개국에서 온 미인들이 15일간의 자가격리를 감수하고 대회에 참가했다. 이 대회에는 연일 자신의 SNS에 쿠데타 군부를 비판하고 “봄의 혁명을 위해 죽어간 모든 이들에게 경의를 표한다”고 밝힌 미스 미얀마 한 레이(Han Lay, 22세, 쏘 난다 웅1))가 참석한다. 우리 취재팀이 한 레이를 인터뷰하기 위해 대회장에 도착할 무렵, 이미 당일 사망자 수가 100명을 넘고 있었다. SNS에는 참혹한 사진들이 끝없이 올라왔다.

 

저녁 7시에 시작된 미스그랜드인터내셔널 본선, 3부가 시작되자 ‘탑 20’에 포함된 한 레이가 단상에 올랐다. 그녀는 “오늘 나의 조국에서 100명이 넘는 시민들이 군인들의 총탄에 쓰러졌다”, “내가 속한 양곤대 학생들도 많이 죽었다”고 차분히 말했다. 그녀는 “미얀마의 민주주의를 위해 국제사회가 즉각 행동해 줄 것”을 요청했다. 수많은 연예인과 화려한 의상 속에 진행 중이던 미인대회는 숙연해졌다. 그날 한 레이는 관람객의 가장 큰 격려와 박수를 받았다.

 

미얀마 군정의 유혈 진압에 정점에 달했던 그 무렵, CNN의 고참 특파원 클라리사 워드(Clarissa Ward)가 양곤에 들어갔다. 외신 기자로는 처음이었다. 미얀마 군부에 고용된 이스라엘 로비스트의 초청으로 비자가 발급됐다. 군부가 초청한 CNN 특파원이 무슨 취재를 할 수 있을까? 처음 방문한 곳도 시민 폭도들이 방화를 저지른 중국인 투자 공장이었다. 클라리스가 이동하는 곳마다 10여 대의 정체 모를 차량이 따라다녔다.

 

클라리스와 거리 인터뷰를 한 미얀마 시민들은 어디론가 끌려갔다. 시민들은 잡혀간 사람이 누구며 어느 경찰에서 붙잡혀있는지 조목조목 SNS에 올렸다. 한 대학생은 큰 도로 입구에 ‘민주주의(Democracy)’라는 글을 들고 언제 올지 모르는 CNN 기자를 기다렸다. 한 젊은 여성이 전통 시장을 찾은 클라리스에게 다가서자 그는 “나는 당신이 체포되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주저하던 그 여성이 잰걸음으로 다가와 “우리는 민주주의를 원한다(We want a Democracy)”라고 말하고 서둘러 사라졌다. 이 장면은 고스란히 클라리스의 첫 번째 리포트에 담겼다. 기자가 가지 못하니 또 미얀마 시민들이 다가왔다. 인터넷마저 꽉 막힌 도시에서 시민들은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수많은 시민이 죽어가는 가운데도 미얀마 군부는 쿠데타의 정당성 강조에만 힘을 쏟고 있다. <출처 – 필자 제공> 

 

5월 7일, 우리는 미스 미얀마 한 레이를 다시 만났다. 그는 대회가 끝난 뒤에도 고국으로 돌아가지 못한 유일한 참가자가 됐다. 신변의 위험을 느낀 어머니가 계속 거처를 옮기고 있다고 고백했다. 어머니는 자신을 너무 자랑스러워한다고도 했다. 영어와 중국어에 능통한 그녀는 인터뷰 말미에 한국어로 “한국인들의 응원에 너무 고맙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언젠가 미얀마의 민주주의가 승리하면 꼭 다시 KBS가 미얀마를 방문해주길 바란다고 했다.


목격자인 우리, 미안마와 함께하다 


쿠데타 석 달이 지났다. 자카르타 아세안(ASEAN) 정상회담의 합의에도, 미얀마의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시민들은 오늘도 그 장면 하나하나를 휴대폰에 담는다. 등록이 말소된 현지 언론 미얀마나우(Myanmar Now)나 미치마(Mizzma)의 기자들이 국경 밀림에 숨어 기사를 올린다. 이 기록은 온라인을 타고 실시간으로 공유된다. 오늘 군경의 총에 맞아 죽은 마궤(Magwe)의 그 청년이 뭘 하는 사람이며 무엇을 외쳤는지 금방 알 수 있다. 아버지와 과일을 먹다 총에 맞아 죽은 소녀의 소식은 그렇게 뉴욕타임스 1면에 기록됐다.

 

 

미얀마의 폭력은 계속되고 있다. 시민들은 오늘도 그 장면 하나하나를 휴대폰에 담는다. <출처 – 필자 제공>

 

 

언젠가 미얀마의 민주화가 이뤄지고 한 레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는 날이 오면, 이들 기록은 역사의 증언이 될 것이다. 법정에서 공권력의 폭력을 고발하는 증거가 될 것이다. 역사는 그렇게 제자리를 찾을 것이다. 미얀마의 유혈 진압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는 목격자로 그 현장을 함께 지켜보고 있다. 우리는 미얀마와 함께하고 있다.

 

 

 

 

 

1) 미얀마 사람들은 태국 사람들처럼 대부분 이름과 부르기 쉬운 호칭을 갖고 있다. 한 레이는 일종의 예명이고, 쏘 난다 웅이 그녀의 정식 이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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