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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헌법 제31조는 적고 있다. “모든 국민은 능력에 따라 균등하게 교육을 받을 권리를 가진다”라고. 코로나19 시대 이 조항은 잘 지켜지고 있을까. EBS와 경향신문이 각자의 시선으로 이 무거운 주제를 바라봤다. 이들이 힘을 합쳐 조명한 교육 격차의 취재 현장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코로나19가 만들어내는 교육 격차
몇 권의 책, 그것이 출발점이었다. 조귀동 작가의 《세습 중산층 사회》, 교육평론가 이범의 《문재인 이후의 교육》, 박권일 등 저의 《능력주의와 불평등》, 조치원 김밥천국집 아들 임명묵 씨의 《K를 생각한다》, 그리고 올해 3월 출간된 《한국의 교육과 사회이동》 종단 연구 시리즈. 이 책들은 한국 교육이 딛고 서 있는 지층의 단면을 드러내는 동시에, 더 나아가 한국 사회의 거대한 욕망 구조의 역사를 분석한다. 성취와 좌절, 그리고 성취의 재생산과 좌절의 대물림. 흥미로운 지점은, 같은 현실을 두고도 능력주의, 공정, 격차에 대한 원인과 해법이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차이는 정치적인 견해의 간극으로 더 벌어진다.
어찌 됐든, 현실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육 격차의 징후들은 더욱 뚜렷해졌다. 수도권 14~50위권 대학 졸업생들이 갈 수 있는 안정적인 직장이 사라졌다는 점, 의대 3,000명, 치의대, 수의대, 한의대 2,000명 등 도합 5,000명이 대학 입시의 최상층을 이루고 있다는 점, 인천국제공항공사 정규직 전환 논란에서 알 수 있듯이, 연봉 3,000만 원 이상의 ‘괜찮은 일자리’를 둘러싼 경쟁이 극도로 치열해졌다는 점, 자사고, 과학고, 영재학교에 들어가기 위한 선행학습이 초등학교 4학년까지 내려갔다는 점, 그리고 지방대가 소리 없이 소멸하고 있다는 점.
코로나19라는 터널 속, 한국의 교육은 지속되고 있다. 완전히 낯선 환경이지만 여전히 학생들은 배우고, 여전히 교사들은 가르친다. 다만 이 어둠 속에서는 누가 더 빨리 달리는지, 누가 뒤로 처지는지 알 수가 없다. 코로나19 이전에도 사회경제적 조건의 차이에 따른 불평등과 격차는 컸다. 몇 개의 질문이 맴돌았다. 코로나19 시대의 어둠은 이 격차를 더 벌리고 있을까. 이 격차는 불평등이라 불러야 할까. 누구나 고통을 받고 있다는 이유로 혹시, 더 고통받는 자들의 아우성이 묻히고 있는 것은 아닐까.

기자와 PD가 잘 헤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교육학과 교수와 교육평론가 등의 보고서를 잔뜩 읽었다. 무엇인가 현실이 촘촘하게 직조되면서 완벽해지는 느낌도 있었지만, 그것이 진짜 현실일까 하는 의구심이 강하게 들었다. 《어떤 양형 이유》에서 박주영 판사는, 법적인 평가로 이뤄진 판결문은 오히려 구체적 인간들과 그들의 고통을 소실시킨다고 밝혔다. 판결문이 그러하듯, 예리한 통계 분석과 전문가 해석을 담은 한국 교육에 관한 일부 보고서들은 역설적으로 한 사람 한 사람 실체적 인간의 모습을 지우고 있었다. 고민이 깊어졌다. <대한민국 헌법 제31조>라는 거창한 타이틀은 만들어 놓았지만, 실제로 누구를 만나야 할지에 대해서는 제작진 내부에서도 쉽게 결론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쯤, 경향신문 정책사회부를 만나게 됐다.
기자들과의 협업. 막연한 기대감도 있었지만, 오래된 부담을 마음속에서 떨치기 어려웠다. 기자와 PD가 만나서 잘된 일이 없다. 기자는 얄팍하고 PD는 무디다. 물론, 실제 그런 느낌도 없지 않다. 기자와 PD의 협업이 대부분 실패하는 주된 이유는 무엇일까. 시작하기 전에 그 이유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했다. 그것은 협업이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이해한다는 선의에서, 같은 일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PD가 기자 일을 하고, 기자가 PD의 일을 하는. 이것이야말로 잘못된 협업은 아니었을까. 좋은 협업이란, 서로를 믿고 각자 다른 일을 하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같은 사안을 다루더라도 본능적으로, PD는 따뜻한 아메리카노를, 기자는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만들어낸다. 방송 다큐멘터리의 온도는 저널리즘의 온도보다 대체로 높다. 내레이션과 음악, 피사체의 눈물이 사회적 이슈를 절충하고 봉합한다. 이것은 시청자들에게 남기는 최종 감정이 불쾌감(displeasure)이 돼서는 안 된다는 방송계의 오래된 관습이다. 이에 반해 저널리즘에서는 끝까지 절개지의 낯선 풍경을 가감 없이 보여주는 것이 미덕이다. 이런 까닭에 사회적 이슈를 다루는 방식으로는 저널리즘이 방송보다 더 냉철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방송과 저널리즘의 차이, PD와 기자의 차이는 좁혀져야 할까. 그렇지 않다. 적어도 이 다름의 불가피성을 이해하고, 서로가 각자 다른 방식으로 공통의 프로젝트에 기여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했다. 교육 불평등을 포착하기 위해서, 그리고 그것을 하나의 사회적 의제로 세우기 위해서는 ‘단단한 저널리즘’의 도움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결과적으로 그 단단한 저널리즘을 경향신문은 보여줬다.

서로가 다른 렌즈로
같은 피사체와 같은 현상을, PD의 카메라와 기자의 카메라는 다르게 포착한다. 그 다름을 명백하게 드러내는 지점은, 카메라와 피사체 사이의 초점거리(focal length)다. 단순히 거리상의 문제는 아니다. 도식적이기는 하지만, 초점거리에 따라 카메라의 렌즈는 접사 렌즈, 표준 렌즈, 광각 렌즈로 나눌 수 있다. 접사 렌즈는 피사체와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표정과 상황을 포착하고 묘사한다. 때로는 징그러울 정도로 생생하다. 주인공의 인터뷰와 현장음을 동반하면서 몰입도를 극대화한다. 표준 렌즈는 흔히 우리가 드라이하다고 이야기하는, 스트레이트 뉴스의 시선이다. 육하원칙에 입각한, 적당한 거리의 정보 전달이다. 마지막으로, 광각 렌즈는 피사체와 그 피사체를 둘러싸고 있는 배경을 동시에 보여준다. 접사 렌즈로는 포착되지 않았던, 넓은 사회적 맥락이 담겨 있다. 전문가의 분석, 사회적 통계 등이 대표적인 광각 렌즈에 해당한다.
사회적 이슈를 다룰 때, 방송은 접사 렌즈를 많이 사용하는 데 반해, 저널리즘은 광각 렌즈를 주로 사용하는 것처럼 보인다. 사례가 풍부한 방송 다큐멘터리도 가끔 광각 렌즈를 소홀히 하는 탓에, 이런 말을 듣는다. “사례 하나하나는 재미있는데,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반면, 접사 렌즈가 부족한 저널리즘은 구체적인 인간의 모습이나 목소리를 담아내지 못하는 약점을 지닌다. 불분명한 취재원 A 씨와 B 씨. 뉴욕타임스에서는 좀처럼 보기 힘든 취재원들이다.
그럼에도, 접사 렌즈와 광각 렌즈를 자유자재로 사용하며 부지런히 현실을 포착하는 훌륭한 저널리즘도 물론 존재한다. 좀 거슬러 올라가면 2009년 한겨레21의 <노동OTL> 시리즈에서부터, 2019년 시사IN의 신년기획 <대림: 대림동에서 보낸 ‘서른 번의 밤’>, 서울신문의 <존엄한 죽음을 말하다>, 한겨레의 <대한민국 요양보고서> 그리고 올해 동아일보의 <증발: 갑자기 사라진 사람들>까지. 내가 보기에, 이 시리즈들이 칭찬을 받아야 하는 이유는 단순히 기자들의 고생이 많았거나 뛰어난 인터랙티브 저널리즘을 구현해서가 아니다. 그것은, 현실 속으로 뛰어들어 스스로 기꺼이 접사 렌즈가 되는 기자들이 있다는 사실, 그리고 용기 있게 그 작은 사례 하나하나에 담겨 있는 사회적 맥락이 무엇인지, 아낌없이 광각 렌즈를 지원하는 신문사가 있다는 사실이다. 훌륭한 저널리즘은 기자의 렌즈와 회사의 렌즈가 결합함으로써 구현된다.
미디어 컬래버레이션의 가능성
경향신문과의 협업은 순조롭게 진행됐고, 결과도 만족스러웠다. 시청자들의 반응도, 인터넷 맘카페에서의 반응도 좋았다. 1부에서는 수학 공부의 어려움을 토로하는 전국의 중학생 37명, 2부에서는 사회적 사다리의 불평등을 이야기하는 대학생 21명이 등장했는데, 이들의 인터뷰는 같은 날 동시에 방송 다큐멘터리와 신문 기사에 소개됐다. EBS는 사회적 맥락을 매끈하게 제시하고자 하는 욕심을 참고, 오롯이 인터뷰이들의 목소리를 생생하게 들려주는 것에 치중하기로 했다. 그리고 경향신문은 이들의 이야기 속에 공통적으로 존재하는 사회적 맥락을 풍부하게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삼기로 했다. 즉 EBS는 접사 렌즈를, 경향신문을 접사와 광각 렌즈를 동시에 사용하는 전략이었다. 그래서 방송에서는 그 흔한 전문가의 인터뷰가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 내레이션도, 음악도 모두 배제한 채, 학생들의 목소리를 전면에 배치했다. 이런 시도는 최종적으로 노 내레이션 풀 인터뷰 다큐멘터리(No narration full interview documentary)라는 하나의 실험으로 귀결됐다.

경향신문은 EBS가 담지 않았던, 사회적 맥락에 주력했다. 특히 1부에 등장한 중학생들의 ‘학습 생애 그래프’를 활용해 아이들이 언제부터 학습에 관심을 잃었는지, 언제부터 못 따라가게 됐는지 시각화했다. 여기에 전문가들의 인터뷰와 저널리스트의 분석을 담았다. 2개월 정도의 짧은 기간이었지만, 조직의 경계를 넘은, 신문사와 방송사 간 미디어 컬래버레이션 실험은 대단히 성공적이었다.
가능성의 측면에서 보면, 방송 다큐멘터리가 저널리즘의 창을 드는 것보다, 저널리즘이 다큐멘터리의 눈을 가지게 될 가능성이 훨씬 높다. 이는 뉴욕타임스와 같은 선도적인 저널리즘이 일궈내는 미디어 실험과 한국의 기존 신문사들이 신문을 버리고 웹 플랫폼으로 넘어가려는 시도에서 읽힌다. 하지만 미디어 경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면, 한 회사 내에 저널리즘 팀과 방송 다큐멘터리 팀을 별도로 운영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 국내외에서 여러 시도가 있지만, 대체로 실패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돈이다. 실제로 동영상 제작팀이나 인터랙티브팀 운영에 매우 많은 비용이 들고 비용을 감당할 수익 모델도 뚜렷하게 존재하지 않는다. 아마도 저널리즘 팀과 방송 팀을 지속적으로 결합 운영하고 확장할 수 있는 미디어 기업은 극소수일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하나의 제안을 해 본다. 미디어 기업 간의 컬래버레이션에 대해서는, 언론 지원 기관에서 공모제 형태로 제작비나 취재비를 지원하는 것은 어떨까. 아마도 기존 신문사와 방송사가 조직의 경계를 넘어 훨씬 수월하게 협업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건이 충족된다면 방송과 저널리즘이 결합해 수준 높은 저널리즘을 구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지상파도, 지역 방송사도, 지역 언론도, 개인 저널리스트도, 독립 PD도 참여할 수 있다. 이런 제도가 활성화된다면, 어느 순간에는 미국이나 유럽의 수준 높은 솔루션 저널리즘이나 탐사보도 저널리즘이 한국에서도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