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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함 침몰 사건이 발생 11년 만에 재조명됐다. MBC < PD수첩 >
경기도 평택 2함대 사령부 ‘서해수호관’에 전시된 천안함 <출처 – MBC < PD수첩 > 화면 갈무리>
꽤 오래된 다짐
기억을 되짚어보니 천안함을 취재해보고 싶다는 마음은 꽤 오래전부터 있었다. 2010년 천안함 사건 당시 나는 해군 소속 해경 전경으로 군 복무를 하고 있었고, 그날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서해에서 경비함을 타고 있었다. 그리고 천안함 전사자 명단에서 입대 동기인 ‘해군 545기 강현구 병장’을 발견했을 때의 그 아찔함은 지금도 생생하다. 일면식도 없는 입대 동기일 뿐이지만 괜히 그에게 미안했고, 한 번 더 신경 써서 뉴스를 찾아보곤 했다. 한편으로는 나도 사람인지라, 우리 배가 아니어서 다행이라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기도 했다. 그러면서 당시에도 PD를 지망했던 나는 ‘언젠가는 꼭!’이라는 마음이 마치 그 동기에게 빚이라도 진 것처럼 가슴 한편에 있었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방송으로 밥벌이를 하는 사람이 됐고, 막상 < PD수첩 >에서 아이템으로 ‘천안함’을 다루려 마음먹으니 엄청난 중압감으로 다가왔다. 사건 이후 11년이 지났음에도 ‘천안함’은 이념적으로 좌우를 갈라놓으며 아직도 우리 사회를 표류하고 있었고, 어떻게 방향을 잡더라도 욕먹을 것이라는 주변의 우려가 쏟아졌다. 하지만 ‘내가 이걸 왜 걱정하지? 이 걱정이야말로 이 아이템을 꼭 해야만 하는 원동력이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순간 오히려 그 부담들은 일종의 긍정적 오기로 치환되기 시작했다. ‘주변의 우려=이 아이템의 원동력’은 부담감을 이겨내기 위한 일종의 주문이었다.

배 안에 있던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고민이 많았다. 천안함은 사건 발생 이후에도 11년 동안의 의혹이 덧대어져 그 이야기가 너무나 방대해졌기 때문이다. 천안함 사건의 모든 내용을 < PD수첩 > 한 시간에 담아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워 보였다. 그래서 나는 배 안에 있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빌리는 전략을 택했다. 그간 보도된 천안함에 대한 보도는 주로 침몰 원인, 혹은 그 시시비비를 가리는 내용뿐, 배 안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는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종종 전역한 장병들의 이야기가 실리긴 했지만 대다수 국민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지 않는 듯했다. 한두 명의 인터뷰로만 구성된 기사들은 충분히 의미 있다고 생각됐지만, 공동의 이야기가 아닌 개인의 목소리처럼 비쳐 파급력이 강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마침 최원일 함장이 전역했고, 그를 구심점 삼아 파편화된 인터뷰와 정보들을 모을 수 있었다. ‘침몰 원인’이 아닌 ‘침몰 시점’을 기준으로 사건의 비포(Before)와 애프터(After)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면 왜 천안함이 우리 사회를 이렇게까지 갈라놓는지 입체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어렵게 만남이 성사되고, 사전 미팅에서 만난 최원일 함장은 첫 만남부터 굉장히 인상 깊었다. 사건 이후부터 전역하는 이 시점까지 마치 칼을 갈았던 사람 같았고, 언론에 대한 적개심과 경계가 상당했으며, 역설적으로 이제라도 자기에게 귀 기울여주는 언론을 고맙게 생각하기도 했다. 정식 인터뷰를 진행하며 그가 준비한 말들을 다 듣고 나니 무려 6시간이 흘러 있었다. 군 생활 34년 동안 몸에 밴 딱딱한 말투로 인터뷰가 계속됐지만, 그간의 설움이 짙게 배어 나왔다.
다음은 전역한 생존 장병들을 만났다. 그들 대부분 인터뷰를 꺼렸고, 하나같이 언론을 의심했다. 섭외가 난항을 겪을 때면 최 함장의 도움을 받아 비교적 쉽게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취재 작가의 인터뷰 요청을 차갑게 거절하던 이들이 그의 전화 한 통에 설득되는 걸 보고, 이들 사이에서 최 함장은 아직도 신망이 두터운 지휘관이구나 싶었다.
문제는 현역 군인, 장교들이었다. 모든 절차가 국방부에서 막혀 섭외 진도가 나가질 않았다. 공식 인터뷰 없이 통화 녹취로 갈음한다든가, 모자이크와 음성 변조로 신원 보호를 해주는 전통적인(?) 취재 방식을 사용할까도 했지만, 이렇게 해서는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름과 계급을 밝히고, 현역으로서 군복을 입고 어렵게 입을 떼는 것이 그 증언의 무게감을 나타낸다고 생각해 국방부를 통해 공식 섭외를 강행했다. 수많은 전화와 설득 그리고 공문이 오갔다. 그 와중에 해군공보실장은 이미 한참 전에 전역한 선배 사령관들이 ‘불편하실까봐’ 인터뷰를 허락하는 것이 두렵다고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심기 경호’. 군대란 조직의 특징을 아주 잘 보여주는 일이랄까. 이런 지루한 공방 끝에 현역 장교들의 인터뷰를 겨우 허가받을 수 있었다. 실제 방송에는 이 모든 과정이 “현역 군인으로서 어렵게 인터뷰를 할 수 있었습니다”라는 짧은 내레이션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어 약간 허무하기도 했다. 아무튼 이렇게 전역한 장병들과 현역 장교들 10명, 그리고 5명의 유가족까지 인터뷰할 수 있었다.
눈물과 진실 사이
제작 PD들은 기본적으로 눈물의 힘을 맹신하기 때문에 모두 울음을 위한 인터뷰에 공을 들인다. 나 역시 ‘어떻게 하면 이 사나이들을 울릴 수 있을까’라는 고민을 했으나 완전한 기우였다. 그들은 모두 울었다. 모두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가 있었고, 대다수가 11년이 지난 지금도 아직 약을 복용 중이었다. 체격 좋은 건장한 전역 군인도, 군복을 입은 현역 군인도, 나이가 지긋한 분도 인터뷰를 마칠 때쯤이면 모두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인터뷰 중단 요청을 하더니 아예 엎드려서 엉엉 운 생존 장병도 있었다. 유가족들 인터뷰는 말할 것도 없다.
나중에 후반 작업을 할 때 고민이 참 많았다. 이들의 눈물을 편집하자니 아깝고, 다 넣자니 ‘우리 아직도 힘들어요’라고 감정으로만 호소하는 것 같았다. 결국 군복을 입은 채 울컥하며 말을 잇지 못했던 부함장 한 명의 눈물만을 고르는 ‘절제’를 택했고, 결과적으로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방송상으로는 인터뷰이들이 모두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기에 시청자들은 억지나 호소가 아닌 ‘사실’로 받아들이기 편했을 것 같다.
그들이 묘사해 준 2010년 3월 26일 21시 22분은 마치 어제 일을 이야기해 주는 것처럼 생생했다. 심지어 그때의 감정마저도 생생해서 그들 모두 말하는 내내 고통스러워했다. 아직 그 시간에 갇혀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안타까웠다. ‘이런 게 PTSD구나’라고 그저 짐작할 뿐이었다. 인터뷰가 잘됐다며 만족하고 돌아왔지만 그 지나친 생생함이 이후에는 나의 숙제로 되돌아왔다. 이 생생함을 시청자들에게 어떻게 전달할 것인가. 재연을 찍더라도 실제 배를 뒤집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작은 보트도 아니고 심지어 건물만 한 군함이었다. 고심 끝에 90도로 꺾인 함장실과 갑판을 세트로 아예 짓기로 했다. 최대한 실제처럼 보이기 위해 마포구 한강공원에 전시된 서울함의 요소요소를 실측했다(서울함이 천안함보다 약간 크지만 그걸 고려해서 반영했다). 프로그램을 만들다 보면 시청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조금 과장된 재연을 찍거나 은유적인 표현을 할 때도 있지만 이번에는 할 수 있는 한 최대한의 실재를 구현하려고 노력했다. ‘어설프게 찍었다간 이 천안함 사건이 가볍게 보여 생존자들에게 누를 끼치진 않을까’라는 마음으로 그날 참여하는 재연 배우, 카메라 감독, 스태프들 모두가 최선을 다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총체적 난국의 군 보고 체계
사건 직후 천안함을 둘러싼 군 조직은 어땠을까. 크고 작은 일들이 수없이 일어났지만 우리가 주목한 건 ‘새 떼’ 논란으로 알려진 속초함에서의 일이었다. 속초함은 천안함 침몰 직후 해당 경비 구역에서 잠수정으로 추정되는 ‘미식별 해상표적’에 135발을 쏘았다고 한다. 그런데 아군의 함정이 침몰한 초유의 상황에서 NLL로 북상하는 해상 표적에 135발을 쏘았다는 그 중요한 보고를 ‘그거 새 떼 아이가?’라는 전대장의 말에 정말 ‘새 떼’로 수정하고 말았다는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방송 후 어느 댓글의 표현을 빌자면 ‘대한민국 군대 갔다 온 사람은 모두 이해할만한 이 블랙코미디 같은 상황’이 군 조직의 허술함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라고 생각한다. 이 귀한 증언은 당시 속초함에서 근무했던 간부에게 직접 들을 수 있었는데, 배까지 타고 들어가 어느 섬에서 만난 그분은 내가 취재 나온 PD라는 걸 모르는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선입견 없이 말했고, 그 부분에서 오히려 신빙성이 갔다. 구성진 입담은 덤이었다. 사실은 취재하러 온 PD였다는 걸 밝혔고 심히 당황하셨지만 취재원 보호는 확실히 해드린다는 말로 달래드렸다.
이와 같은 군 보고 과정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고 더 심각한 문제를 초래했다. 사건 직후 ‘어뢰에 맞은 것으로 사료됨’이라는 보고가 중간에서 사라진 것이다. 어떠한 이유에서인지 2함대 사령관은 ‘선체 파손’이라 합참에 보고했고, 합참의장은 만취한 상태여서 보고를 제대로 받지도 못했다. 덕분에 청와대 벙커에서는 엉뚱한 추측만을 남발하고 있었고, 훗날 국정감사와 청문회에서 ‘어뢰 보고’는 뜨거운 감자가 됐다. 이 일련의 과정을 추적하는 중에 당시 책임자들에게 이유를 물었으나 하나같이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혹은 ‘관심 없다’고 답했다. 어제 일처럼 눈물 흘리는 천안함의 생존자들과는 아주 대조적이었다.

사건의 애프터를 살펴보니 그만큼 중요한 게 비포였다. 사건 전에는 더 기막힌 일이 있었다. 신학용 당시 의원과 김종태 당시 기무사령관에 따르면 며칠 전부터 ‘북한의 수중침투징후’가 있었지만 예하 부대에 하달되지 않았다는 것. 이런 전후 사정 속에 ‘함장 개인의 비행’으로 천안함 침몰을 초래했다며 최원일 함장을 형사입건했으니 그의 억울하다는 말이 십분 이해가 갔다. 군 수뇌부와 청와대는 이런 식으로 본인들의 자잘한 실수를 덮는 데 급급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명박 정부는 ‘안보 무능’으로 낙인찍히는 것에 대한 엄청난 부담이 있었을 테니까. 하필이면 공식 선거운동 개시일에 ‘천안함은 북한 소행’이라며 발표한 것에 대해 전문가들은 ‘안보 무능’을 ‘북풍’으로 덮기 위함이었을 것이라 추측했다. 그 결과 천안함을 진영 논리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는 토양이 만들어졌고, 그렇게 11년간 정치적으로 활용됐다. 그리고 천안함 생존자들에게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선거철마다 소환되는 천안함
방송 후 많은 분이 시의적절하게 취재를 잘했다고 피드백을 줬다. 그런데 사실 나는 한 달 전부터 취재하고 있었을 뿐, 방송 즈음 예상치 못하게 천안함 사건이 다시 너무 뜨거워져서 오히려 당황스러웠다. 최원일 함장은 전역 후 국방부 앞 1인 시위를 하고 있었는데 취재를 시작할 때만 해도 사람들은 그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더불어민주당 전 대변인의 망언을 시작으로 톱뉴스를 장악하더니 이준석 국민의힘 당 대표의 눈물, 윤석열 예비 후보의 방문, 그리고 휘문고 교사의 막말을 절정으로 천안함이 다시 선거판으로 스멀스멀 호출되고 있었다. 여전히 정치의 도구로 쓰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기도 했다.
이번 < PD수첩 >은 국민들로 하여금 천안함 사건이 이렇게 정쟁의 소재로 활용되는 세태에 경각심을 주면서 우리 사회를 위해서라도 분열이 아닌 반성의 계기가 됐으면 하는 바람에서 만들었다. 이것으로 수많은 억측과 정쟁으로 점철돼 11년째 한국 사회를 표류 중인 천안함의 그 슬픈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데 일조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