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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법에는 일반인에게는 낯선 ‘작량감경’이라는 규정이 있다. 이 용어로 인해 대한민국 법정에 선 재벌들에겐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 공식처럼 적용되고 있다. 발음하기도 어려운 이 용어에 의구심을 품고, 실체를 좇은 CBS 법조팀의 취재기를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세상 많은 일의 시초가 그렇듯 CBS 법조팀의 ‘무모한 기획’은 술자리 이런저런 잡담으로부터 시작됐다. 지금은 논란 끝에 가석방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 대한 최순실 국정농단 의혹 파기환송심 선고에서 서울고법 형사1부는 뇌물공여 등 혐의로 기소된 이 부회장에게 징역 2년 6월을 선고하고 법정 구속했다.
서울고법 형사1부는 이 부회장에게 집행유예 대신 법정 최저 형량을 반 토막 낸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했다. 매체들의 방점은 재판부가 ‘실형’을 선고했다는 데 찍혔다. 하지만 수십억 원의 횡령과 뇌물 혐의까지 받은 수형자에게 2년 6개월의 형량이 적정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극소수의 매체만이 의문을 제기했다.
서울고법 형사1부가 이 부회장이 받아야 하는 최저 형량을 법정형의 절반으로 깎아낼 수 있었던 법적 근거는 일반인에게는 용어마저 생소한 ‘작량감경(酌量減輕)’이라는 규정이었다. 얼마 전까지 대한민국 재벌들이 법정에 섰을 때 어떤 죄목에도 만능 답안처럼 등장했던 ‘징역 3년에 집행유예 5년’이라는 공식 또한 작량감경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했다. CBS 법조팀 구성원 중 일부가 식사 자리에서 작량감경 규정이라는 ‘만병통치약’에 대한 의구심을 토로했다. 이 모든 일의 시작이었다! 사실 법원을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기자들 입장에서도 작량감경은 많이 듣기는 했지만 제대로 알고 있다고 말하기 힘든 단어였다. 그저 재량에 의해 형량을 감경할 수 있는 재량권 정도로 인식하고 있었을 뿐 그 재량권이 어느 정도 범위인지, 또 법정에서 얼마나 빈번하게 사용되고 있는지 등은 잘 알고 있지 못했다.

20세기 일본 법 조항 지금도 쓰는 대한민국 사법부
취재 대상이 될 수 있을지 기초 취재에 들어갔다. 우선 작량감경을 규정하고 있는 법조문부터 찾아봤다. 형법 제53조 “범죄의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는 때에는 작량하여 그 형을 감경할 수 있다”는 법 조항 하나가 전부였다. 형법 제53조에 따르면 판사는 ‘정상에 참작할 만한 사유가 있을 때’라는 생각만 들면 형을 깎을 수 있었다. 한 마디로 판사 마음이라는 소리였다. 이 법령이 지난 1953년 제정된 이후 지금까지 단 한 번의 개정도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도 놀라웠다. 좀 더 깊이 들어가 보니 전 세계 사법제도에서도 이처럼 판사에게 전폭적인 감경 권한을 실어준 예는 찾아보기 힘들었다. 일본이 메이지유신 과정에서 ‘덴노(천황)’의 권한을 일선 판사들에게 나눠준다는 독특한 개념으로 만들어진 제도가 그대로 우리 형법 체계에 수용된 것이었다.
21세기 대한민국 사법부가 20세기 초반 일본의 법 조항을 그대로 가져와 사용하고 있다니…. 더구나 사회적 논란을 일으킬만한 판결 때마다 쓰이고 있다는 현실이 불가사의였다. 기획으로 다뤄봄 직한 주제라는 확신이 들었다. 다만 ‘추미애-윤석열 갈등’ 등 당시 현안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던 CBS 법조팀의 특성상 이런 ‘거대 담론’과 현안 취재를 동시에 진행하기가 벅차다는 점은 기획 착수를 끝까지 고민하게 만들었다.
팀장의 고민을 받아준 것은 팀원들이었다. 법조팀 구성원들은 ‘가치 있는 취재’가 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고 한번 고생해보자며 스스로 나서줬다. 팀원들의 ‘파이팅에’ 팀장도 무리수를 강행하며 호응했다.
시작은 호기로웠지만 지금 와서 취재 초기의 막막함을 돌이켜 보면 ‘무모한 도전’이라고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과거 기사를 검색해 보니 어떤 형태로든 작량감경 규정을 직접 분석한 기사는 찾을 수 없었다. 작량감경 규정에 대한 데이터를 수집하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법원 행정처가 작량감경 규정과 관련한 통계는 거의 생산하고 있지 않다는 점을 발견했다.
참고할 만한 과거 기사도, 분석할 만한 데이터도 전무한 막막한 상황을 맞아 CBS 법조팀이 선택한 방법은 ‘정공법’이었다. 판결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판결문 분석이 그것이다. 논의 끝에 전국 최대 규모 1심법원인 서울중앙지방법원의 2019년 판결 가운데 작량감경이 적용된 판결문을 전수 조사하기로 했다. 가장 최근 데이터는 2020년 판결이겠지만 이 해는 초반부터 코로나19 유행으로 서울중앙지방법원이 정상적인 운용을 하지 못하던 해였다.
금단의 영역 국민에게 내보이다
2019년 서울중앙지방법원에서 작량감경이 적용된 판결문 925건과의 지루한 싸움이 시작됐다. 팀원들은 법조 현안에 대한 취재와 더불어 본인에게 할당된 판결문 분석을 동시에 해 나갔다. 작량감경 판결이 나온 사건의 여러 요소를 코딩화해 분류하는 작업이 지루하게 계속됐다. 우려했던 대로 2020년 말까지 추미애 전 법무부 장관과 윤석열 전 검찰총장의 갈등이 극한으로 치달으면서 작업 진척 속도는 더욱 느려졌다.
느렸지만 어쨌든 작업은 진행됐고 흥미로운 결과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작량감경은 2019년 한 해 서울중앙지방법원 법정에 선 피고인 1,020명에게 적용됐고 줄어든 형량은 1,000년에 달했다. 비교적 중한 범죄를 다루는 합의부 사건 가운데 절반인 50%에 작량감경이 적용됐을 정도로 광범위하게 적용되고 있었다. 성범죄, 음주운전, 경제 범죄에 적용되는 경우가 특히 많았다. 이렇듯 형량의 절반을 깎아준 이유 가운데서 동종 범죄 전력이 없다는 이유와 진지한 반성을 하고 있다는 이유가 가장 많았다.
기획을 시작한 지 반년이 훨씬 넘은 2021년 6월 말이 돼서야 <기준 없는 法의 용서 ‘작량감경’ 대해부> 기획 기사의 1편이 출고됐다. 출고 1주 전까지도 출고 시점을 놓고 고민이 많았다. 지나친 애착에 기사를 다시 보면서 고치고 첨가하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이러다가 기사 출고도 불가능해질 것 같다는 불안감에 덜컥 기사를 출고시켰다. 인터넷 기사로만 7회, 방송 리포트 5회에 걸친 대형 기획이었지만 솔직히 구독자나 청취자들의 반응을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다. 일반인의 관심을 끌기에는 지나치게 전문적인 기사라고 생각했다. 법조인 사이에서 어느 정도 화제가 되는 수준이면 만족이었다.

비운 마음에 비해 기사에 대한 반응은 상당했다. 대형 기획 기사임에도 포털 네이버와 다음에 걸린 기사에는 편마다 100개 전후의 댓글이 꾸준히 달렸다. ‘의미 있는 기사’, ‘기사다운 기사’라는 평을 자주 찾아볼 수 있었다. 심지어 청와대 청원게시판에 ‘작량감경 제도를 없애달라’는 글까지 올라왔다. 우리는 작량감경 제도가 꼭 필요한 제도(실제로도 그렇다)라고 생각하지만 이번 기획 기사의 의도가 현재 작량감경의 실태 파악과 문제 제기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성공적인 반응이었다. 법조계의 반응은 더 뜨거웠다. 김오수 검찰총장, 김영란 대법원 양형위원장도 작량감경 기획에 큰 관심을 보였다. 당사자인 법원에서도 여러 반응이 감지됐다. 법원 내부망에 올라온 작량감경 기획 기사 밑에는 “고민해야 할 문제”라는 댓글이 달리기도 했다. 쉽지 않은 과정이었지만 금단의 영역이었던 ‘작량감경’의 민얼굴을 국민에게 그대로 드러내 보여줬다는 점에서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의미 있는 기획이었던 만큼 후속작도 고민 중이다. 그만큼 늘어날 ‘사서 고생’을 생각하며 벌써부터 머리가 아프지만 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