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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협력개발기구 유리천장 지수 최하위권, 최악의 성별 임금 격차. 매년 여성의 날에나 기사화되는 주제일 뿐, 달라지는 것은 없다. 경향신문 <유리천장 박살 프로젝트>는 이 같은 우리의 현실에 주목했다. 대한민국 일터의 성평등은 이루어질 수 있을지, 피·땀·눈물이 밴 취재기를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몇 년 전 유럽 여행을 하던 중 유명 관광지의 여자 화장실에서 젊은 남성 청소 직원을 발견하곤 화들짝 놀랐던 적이 있다. 아름다운 풍광만큼이나 잊히지 않는 기억이다. 1년간 생활한 적 있는 스웨덴에선 마트에 갈 때마다 계산대에서 만나는 남녀노소 직원들의 모습에 한동안 적응이 되지 않았다. 야간과 휴일이면 특히 청년들이 많았는데, 나중에 들어보니 청년들은 수당이 더 많은 시간대 근무를 선호해 세칭 명문대 석·박사 학생들도 마트의 시간제 근무를 만족스러워한다고 했다. 청소 노동자, 마트 계산원은 한국에선 대표적인 중년 여성들의 일자리다. 별반 의문을 품어보지 않았던 한국의 여성 노동 실태에 내가 모르는 부분이 있는 건 아닐까. 일하는 여성으로서, 언젠가 기회가 되면 나라별, 문화별로 다른 남녀 노동 실태를 취재해 보고 싶었다. 가슴 한켠에 품게 된 목표였다.
지난 3월 8일, 여성의 날을 앞두고 논설위원실에서 관련 발제와 논평을 하다 불현듯 이 목표가 떠올랐다. 여성의 생존권과 참정권을 상징하는 ‘빵과 장미’, 성별 임금 격차를 고발하려 진행하는 ‘3시 여성 스톱(STOP) 공동행동’ 캠페인(성별 임금 격차를 생각하면 여성은 8시간 노동 기준으로 오후 3시 이후엔 퇴근해도 된다는 의미). 매년 여성의 날이면 반복되는 기사들이 참을 수 없이 지겹게 느껴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권 유리천장 지수 실태와 최악의 성별 임금 격차가 부끄럽다는 논평을 하면서 변하지 않는 여성 노동의 현실에 대한 분노에 불이 붙었다. <유리천장 박살 프로젝트> 기획 기사는 이렇게 출발했다. 중요한 건 타이밍. 어떻게 시작하는 게 좋을지 기회를 엿보다 여성가족부가 상장법인 성별 임원 현황 조사를 발표한다는 8월 초를 디데이로 삼아 취재를 자원했다. 여성, 노동문제에 각별히 관심이 많은 사회부 2년 차 후배와 함께 취재팀이 꾸려진 건 7월 말이었다. 디데이까진 보름여. 시간이 촉박했다.

뼈대와 살붙이기
막상 팀이 꾸려졌지만 의욕만 앞섰을 뿐, 어디부터 어디까지 취재할지조차 막막했다. 명확한 목표 의식만이 앞을 비춰주는 등대였다. ‘좀처럼 변하지 않는 여성 노동의 열악한 현실을 진단하고 이를 바꿔볼 방법을 찾을 것!’ 이를 목표로 우선 우리 사회의 불명예 통계 두 가지, OECD 최하위권인 여성 임원 비율과 성별 임금 격차를 뼈대로 세웠다. 여성 임원 비율은 여성가족부 발표 자료를 쓰면 되고, 성별 임금 격차는 자체 조사를 하기로 했다.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2020년 사업보고서를 공개한 2,326개 기업을 분석해 사업 분야별 직원을 성별로 합산하고 인원수로 나눠 회사별 임금을 구했다. OECD의 방식을 따라 임금 중앙값(중위 임금)을 산출했다. 독자들에게 친숙한 대기업들은 따로 분석하는 것이 주목도를 높일 수 있겠다고 생각해 100대 기업의 통계는 따로 내기로 했다.
다음은 드러내기 방법의 문제. 매년 반복되는 익숙한 통계를 어떻게 하면 가장 효과적으로 보여줄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 취재를 자원하면서 처음부터 염두에 뒀던 부분은 날것 그대로의 데이터를 공개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여성 임원 수가 몇 %라는 기사, 임금 격차가 OECD 꼴찌라는 기사는 매년 나왔지만 식상한 단신성 기사에 불과했다. 내 문제로 다가오게 하려면 회사 이름을 포함하는 등 ‘시각적 충격’을 줘야 한다는 것에 취재·편집·디자인팀 모두가 동의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을 찾다가 여성 임원이 아예 없는 기업이 많다는 사실에 착안했다. 상장회사 여성 임원 비율에 따른 세 종류 구획(0%, 0~50%, 50% 이상)을 기본으로 하고, 임금 격차는 OECD 평균과 한국 평균을 기준으로 세 가지 구간으로 나눠 양호, 보통, 심각을 표시했다. 파격적인 지면은 이렇게 결정됐다.
데이터가 뼈대라면, 이젠 살붙이기가 남았다. 데이터를 생생히 살려줄 여성 노동의 현실을 취재해야 했다. 인력과 시간 압박뿐 아니라, 무엇보다 여성 노동의 현황 자체를 잘 모른다는 게 큰 문제였다. 맨땅에 헤딩하는 심정으로 전문가들에게 연락하고 추천받은 논문과 책 등을 닥치는 대로 읽었다. 거칠게라도 여성 노동문제의 전체적인 맥을 잡아야 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세대를 막론하고 되풀이되는 일터의 성 불평등 실태를 세대별 여성들의 인터뷰와 통계로 촘촘히 싣는 지면 안을 구성했다. 이후엔 여성 노동의 주요 쟁점들을 정리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로 했다. 기사 계획에만도 시간이 많이 흘렀다.

피·땀·눈물이 밴 지면
시간은 빠듯하게 가고 있는데, 막상 1회 기사를 쓰려고 보니 생각지도 못한 복병이 여럿이었다. 임금 격차 관련 통계를 정렬하다 보니, 임금을 외국 환율로 계산했는가 하면, 연봉이 아닌 분기 기준을 쓰는 등 공시기준에서 벗어난, 말도 안 되는 통계 오류들이 발견됐다. 임금이 잘못 기재된 것으로 추정되거나 일부 자료를 누락한 기업, 직원이 전부 남성 또는 여성만 있는 기업 등 159개 기업은 제외하고 통계를 다시 냈다. 규모가 큰 몇몇 기업들은 담당자에게 전화로 확인했다. 짜증이 치밀었다. 왜 이렇게 부실 공시를 하는 것일까. 금융감독원 측은 성별 임금과 근속연수 등의 공시항목은 투자 판단에 영향을 미치는 주요 사항이 아니기 때문에 일부 실수나 누락이 있어도 제재하지 않는다는 어이없는 답을 내놨다. 취재원들은 “달라지는 글로벌 투자 기준 상황에서 성별 정보가 주요 공시사항이 아니라고 한다면 시대 흐름을 못 읽고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성별 임금 격차가 왜 좀처럼 해소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지, 당국의 이런 태도가 중요한 대목이라고 생각한다.
1회 기사가 나가기 직전까지 확인 또 확인을 거쳐, 그야말로 취재와 편집, 디자인팀의 ‘피·땀·눈물’이 배어 있는 지면이 탄생했다. 보도 이후 감사하게도 많은 독자가 호응을 보냈다. 취재원들은 의미 있는 기사와 지면이라며 격려와 칭찬을 보내왔다. 특히 시각적 충격을 주려 여러모로 고민했던 <당신의 회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지면이 회자하며 많이 공유됐다는 얘길 들어 보람을 느꼈다. 미디어오늘은 <검은 색 채운 경향신문 지면을 보면 암담하다>라는 기사에서 지면 이미지가 페이스북 등 SNS 공간에서 확산하고 있다는 소식을 실었다. 사실 기사 제목이 딱 이번 기획 취재 내내 느낀 취재팀의 심정이었다. 한국 여성 노동의 현실은 알면 알수록 암담했다. 성 불평등 현실도 현실이지만, 이유를 묻지도 않고, 고치려는 노력도 부족한 것이 더욱 절망적이었다. 전문가들은 한국 여성 노동의 특징으로 극심한 성별 임금 격차와 성별 직종·직무 분리, 돌봄 책임과 경력단절, 결국 비정규·저임금의 질 낮은 일자리로 수렴하는 현실 등을 꼽았다. 모든 요인이 얽혀 서로 영향을 준다. 법으론 금지된 일터의 여러 성차별이 ‘관행’이라는 한마디로 모두 용인되는 사회다. 아프게 찔렸던 한 취재원의 말이 있다. 성폭력 문제는 비교적 단순해 언론이 많이 다루지만, 일터 내 성차별은 복잡하게 얽혀있고, 사업장마다 상황이 달라 언론이 아예 주목하지 않는다고 했다. 반복되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언론의 무관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지독한 시간 압박 속에 2회 기사를 정신없이 마무리하며 뜨거운 여름 몇 주가 지나갔다.
이 지면을 빌어 함께 고생한 오경민 기자와 편집부 임지영, 디자인팀 김덕기 기자에게 감사를 전한다. 성실하고 꼼꼼한 후배를 만난 건 행운이었다. 취재원들의 칭찬이 끊이지 않았다. 의욕만 앞선 채 시간 안배에 실패하고 마감 시간에 허둥대는 허술한 선배를 만나 고생이 많았다. 후배의 꼼꼼한 취재를 거친 기사는 한 직장인 엄마 지원센터에서 자료집에 인용하고 싶다는 문의가 올 정도였다. 사실 논설위원과 2년 차 기자의 팀 구성은 사내에서도 거의 한 세대 차가 나는 ‘이색적인 콜라보’였다. 그러나 오히려 세대 차 덕분에 부모님, 자녀, 친구들, 주변 얘기를 하며 일터의 성차별이 세대와 상관없이, 내 주변에서 지금 이 순간도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는 점을 절감할 수 있었다. 함께 분노하고 절망했고, 그래도 뭔가는 바꿔봐야 하지 않겠느냐며 의기투합했다. 편집과 디자인팀이 기사의 보는 맛, 읽는 맛을 살렸다. 모든 회사를 한 면에 다 실을 수 없을 것 같아 여성 임원이 전혀 없는 회사들만 ‘블랙리스트’처럼 싣자고 제안했는데, 이모저모 궁리하더니 가장 적절한 지면 구성과 친근한 제목으로 가슴에 확 와닿는 멋진 지면을 만들어 냈다.
보도 이후의 숙제들
일말의 의무감에 무모하게 덤벼든 도전이었다. 1차 숙제는 끝냈으나 더 큰 숙제가 남은 느낌이다. 그래도 보름여 짧은 시간에 여성 노동문제의 전반을 들여다보며 심해까지 자맥질하고 나올 수 있었다. 많은 전문가의 설명을 듣고 논문을 읽는 동안 자연스럽게 직장 내 성희롱과 성폭력, 임금 격차, 성별 직종 분리, 돌봄의 성 역할 규정 등의 문제가 모두 한 뿌리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많은 말과 글들을 읽고 들었지만, 이를 제대로 소화할 인력과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아쉽다. 이번 기사들엔 유난히 후속 기사를 기대한다는 댓글이 많았다. 백신 접종, 여름휴가 기간까지 겹친 논설실의 인력난으로 틈틈이 논설실 일까지 병행하느라, 기사 함량이나 기사 분량이 독자들의 넘치는 관심과 기대에 부응하지 못했다는 부끄러움과 미안함이 많이 남는다. 10을 취재해 놓고 2~3 만큼만 기사에 반영할 수 있었다. 이번에 담지 못했던 거대한 빙산 밑의 이야기들을 풀어놓을 장이 있기를 기대한다.
후배는 첫 회의를 하며 초등학교 때도 임금 격차 꼴찌라는 똑같은 뉴스를 봤다고 했다. 그 긴 시간 동안 전혀 상황이 바뀌지 않은 것이다. 취재할수록 우리 사회와 정부가 OECD 최악 성별 임금 격차를 바꿀 의지가 없다는 심증이 거의 확신으로 굳어졌다. 일터의 성차별 현황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하려는 노력도 하지 않고 있다. 바꿀 생각이 없다면 매번 부끄럽다는 말이나 하지 말아야 한다. 혹시나 싶어 OECD 성별 임금 격차 통계를 찬찬히 들여다봤다. 우리도 조금씩 개선되고는 있지만, 다른 나라들은 더 빨리 변하고 있었다. 우리 바로 위 순위인 일본도, OECD 평균도 임금 격차 개선 속도가 우리보다 빨랐다. 영국은 현재의 우리와 임금 격차가 비슷했던 32.7%(1990년)에서 OECD 평균인 12.5%에 근접한 12.3%로 좁히기까지 꼬박 30년이 걸렸다. 현실을 개선하려면 지금부터라도 각종 제도로, 실천적 노력으로 변화의 물꼬를 터야 한다. 나는 두 딸의 엄마다. 딸들이 초등학교 때 본 임금 격차 기사를 취직 후에도 보는 일이 없기를, 한 단계만이라도 올라서길 바란다.
성평등은 ‘친환경’과 같은 국제적인 대세로 급부상하고 있다. 이 기준에서 벗어나면 경제적 손해도 감수해야 하는 시대가 곧 온다. 일터의 성평등은 인권, 당위의 문제를 넘어선 우리 사회의 지속가능성과 생존, 발전의 핵심 키 중 하나다. 수당이나 단편적 제도 몇 가지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삽 뜨기가 아닌, 불도저로 갈아엎어 잘못된 뿌리를 통째 뽑아야 할 문제, 제대로 붙잡고 단단히 씨름해야 할 문제다. ‘쇼트커트’를 둘러싼 입씨름을 할 때가 아니다. 여성의 일상을 옥죄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 일터의 성 불평등 문제를 직시하고, 개선 방법을 찾기에도 시간이 부족하다. 이번 대선에서도 일터의 성평등은 당연히 주요 의제가 돼야 한다. 후보들은 문제 해결을 위한 장기적인 로드맵과 구체적 실천 방안을 내놔야 한다. 3T(검사, 추적, 치료)는 방역에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모든 정책에서 끈질긴 추적과 치료가 중요하다. 특히나 일터의 성평등 문제는 아직도 현황을 파악하는 ‘검사’ 단계에서부터 막혀 있다. 경향신문이 추적과 치료 과정을 계속해서 지켜볼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