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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로 세계인의 지식 격차가 심화된 지금 교육 콘텐츠를 통해 전 세계인에게 다가갈 수 있을까? 조지프 나이, 폴 크루그먼, 마이클 샌델, 유발 하라리 등 세계 정상급 석학들의 강의로 주목을 받은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 제작기를 살펴본다. 편집자 주
BTS,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까지 전 세계가 한국의 문화 콘텐츠에 푹 빠져있는 이때, 이처럼 세계인에게 사랑받을 콘텐츠가 우리에게 또 있을까?
“물론 있다.”
이게 EBS가 내린 결론이다.
세계인이 코로나19라는 역사적인 전염병 시대에 숨죽여 살게 된 지 벌써 2년이 됐다. 갈수록 시민 간의 지식 격차는 심해지고 SNS를 통해 가짜 지식이 난무하고 있다. 이것은 한국뿐만 아니라 전 세계적인 사회현상이었다. 이미 그 이전부터 미디어 환경은 급변하고 있었다. 넷플릭스 같은 뉴미디어, 구독경제 플랫폼이 세계 미디어계를 장악해나가고 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지상파 방송사의 위기 속에서 EBS는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는가?
생존을 위한 성찰의 시간이 EBS에도 찾아왔다. ‘우리가 남보다 잘하는 게 과연 무엇인가?’ 우선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어려운 교육 전문 공영방송 채널이라는 정체성을 다시 확실히 하는 것에서 출발했다. 이 과정에서 ‘진짜 고급 지식을 전 세계에 전하자. 그 지식 허브를 대한민국이 담당하자’는 기획이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같은 문제의식을 느끼고 있던 교육부와 국가평생교육진흥원이 EBS와 의기투합해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라는 전혀 새로운 교육 콘텐츠가 첫발을 뗄 수 있었다.
세계적 석학들의 현장감 있는 강연 프로그램
왜 하필 세계 석학들의 강연인가. 강연이라는 장르는 돈으로 하루아침에 뚝딱 만들어낼 수 없는 특수성이 있다. 강연자 네트워크와 제작진의 지적 수준이 축적되는 게 무엇보다 필수적이다. 이 조건이 충족되지 않으면 웬만한 돈을 아무리 쏟아부은들 좋은 콘텐츠를 지속해서 생산해낼 수 없다. 이제까지 숱한 강연 프로그램들이 바로 이 점을 간과해 조기에 문을 닫았다. EBS는 이미 20년 넘게 강연 프로그램을 제작하고 있고 <다큐프라임> 같은 교육 다큐멘터리로 매우 강력한 세계 석학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제작진의 지적 수준은 상당히 향상됐고 각 분야에서 전문성을 축적해왔다. 세계 석학을 한자리에 불러 모으는 강연 포맷이 EBS가 세계에서 가장 잘 만들 수 있는 프로그램이라는 점은 분명해 보였다.
아내 몰리 나이와 함께한 조지프 나이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좌교수. 코로나19를 피해 뉴햄프셔의 한 농장에서 진행된 촬영에서 몰리 나이는 프로그램 제작에 불편함이 없도록 제작진을 헌신적으로 도왔고, EBS 제작진은 그들의 결혼 60주년을 축하하며 이 사진을 선물로 전달했다. ⒸEBS
강연이라는 장르의 꽃은 ‘섭외’다. ‘야구는 투수놀음’이라는 말도 있지만 강연 프로그램에서 출연자의 비중은 그보다 훨씬 더 절대적이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는 직접 대면 촬영을 원칙으로 했다. 다시 말해 코로나19 시대에 흔해 빠진 ‘비대면 강연’은 현장감이나 내용 전달에 한계가 있어 배제하기로 했다. 그러다 보니 그토록 섭외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던 제작진에게 가장 큰 근심거리는 역시 코로나19 상황이었다. 섭외에 나설 당시는 전 세계적으로 무서운 속도로 사망자가 속출할 시기였다. 대개 ‘석학’이라고 하면 절대다수가 환갑이 넘으신 분들이고, 고령으로 거동이 불편한 분도 적지 않다. 이분들이 코로나19의 진원지로 지목받는 동북아시아에서 온 스태프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는 것은 우리 제작진이 극복해야 할 큰 과제였다.
어떻게 하면 코로나19 상황에도 섭외를 잘 할 수 있을까? 물론 국외 섭외의 기본은 이메일이나 홈페이지, SNS에 글을 남기는 것이지만 쉬운 방식의 섭외는 실패 리스크가 크다. 한 번 실패하면 대개 만회는 불가능하다. 섭외를 위해 출판사에 기대보자니 결국 강연 프로그램이 책 홍보 프로그램으로 변질되는 부작용이 있다. 이런 식으로 설령 출연 의사를 보내온다고 해도 감당 안 되는 거액의 출연료를 요구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 상업 방송사에서 접근할 때 더욱 그렇다.
섭외의 본질로 돌아가야 한다. 방송에서 좋은 섭외란 과도하지 않은 출연료로 최적의 출연자를 캐스팅하는 것이다. 대개 좋은 섭외에는 왕도가 없다. 해당 방송사나 제작진의 일원인 자신이 살아오면서 얻게 된 네트워크를 총동원하는 것이 지름길이다. 그래서 방송 프로그램에서의 섭외는 그 방송사나 제작진이 ‘그간 만들어온 인간관계의 성적표’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처럼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도는 위기 상황이라면 이 현상은 더욱 강화된다.
세계적으로 사랑받는 지식 프로그램이 되기 위해
EBS 네트워크에는 <다큐프라임> 등에 출연 경험이 있는 석학들이 있었다. 그 덕분에 석학들 중에서는 한국의 방송사 중 EBS만은 알고 있는 분들이 꽤 있었다. 이를 증명하는 사례가 바로 세계 정상급의 정치학자, 조지프 나이(Joseph Nye, 미국 하버드대 케네디스쿨 석좌교수)였다. 지난 30~40년 동안 정파를 가리지 않고 미국 역대 대통령들의 조언자였던 그는 올해 여든다섯이어서 코로나19에 대한 우려가 컸다. 자택인 보스턴을 떠나서 통신도 원활하지 않고 야생 곰들이 항상 출몰하는 뉴햄프셔의 농장에 칩거할 정도였다. 웬만하면 코로나19를 이유로 거절했을 법도 한데, 지난 2014년 EBS <다큐프라임 – 강대국의 비밀>과의 인연으로 흔쾌히 ‘은신처’인 농장에서의 촬영을 허락했고, 많은 시간과 정성을 할애했다. 결국 나이 교수는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의 첫 편을 빛내게 됐다.
국내 유력한 학자들도 각양각색의 이유로 발벗고 나서 EBS를 도왔다. 대표적으로 이현숙 교수(서울대 연구처장)와 김정호 석좌교수(KAIST 전기및전자공학부)는 일전에 출연했던 EBS 프로그램에서 함께 땀흘린 제작진을 위해, 구민교 교수(서울대 행정대학원)는 제작진으로 있는 제자를 돕기 위해 미국에 계신 은사님까지 총동원해 헌신적으로 힘을 보탰다. 섭외 과정은 이렇게 EBS의 강력한 ‘지식 후원자’들이 국내는 물론 세계 도처에 포진해있음을 확인하는 시간이었다.

이렇게 조지프 나이(정치)를 시작으로 폴 크루그먼(Paul Krugman, 경제),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 정치철학),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 역사), 리처드 도킨스(Richard Dawkins, 생물학), 존 헤네시(John Henessy, IT),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 음악), 주디스 버틀러(Judith Butler, 젠더), 로버트 와인버그(Robert Weinberg,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거장들이 매일 밤 한국의 안방을 찾아올 수 있게 됐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의 강연자 라인업이 2021년 8월 하순 처음 발표됐을 때 각 언론과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역대급’이라는 호평이 있었다. 시대를 선도하는 거장들의 빼어난 통찰과 함께 이들이 한국 사회에 특별히 던지는 애정 어린 조언은 이 교육 콘텐츠가 ‘메이드 인 코리아(Made in Korea)’라는 것을 실감하게 한다.
<위대한 수업, 그레이트 마인즈>는 국내용 단발성 TV 프로그램으로 그치지 않는다. 올해 12월 글로벌 OTT 플랫폼(www.thegreatminds.com)을 오픈해 여섯 개 언어(한국어, 영어, 중국어, 일본어, 스페인어, 프랑스어)로 전 세계에 제공할 예정이다. 지금 EBS는 한국의 교육 콘텐츠도 BTS, 영화 <기생충>, 드라마 <오징어게임>처럼 세계인에게 깊숙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인지 실험하고 있다. 물론, 한술 밥에 배부르랴. 그러나 언젠가 석학이 수백 명, 수천 명이 돼 전 세계 시청자의 다양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을 날, 그리고 세계의 지식인이라면 반드시 출연하고 시청해야 할 프로그램으로 성장할 날을 그리며 EBS 제작진은 오늘도 국내외 코로나밭에서 이 힘든 시간을 견디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