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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제작기] 뉴스타파 x ICIJ <판도라 페이퍼스>
취재기·제작기 | 등록일 : 2021-11-26

비영리 탐사보도기관인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ICIJ)는 지난 10월 3일 전 세계 정치인, 재계 인사, 연예인 등의 해외 조세도피처를 통한 역외 탈세 정황 폭로 문건을 발표했다. 이른바 판도라 페이퍼스’. 뉴스타파는 ICIJ와 협업을 통해 판도라 페이퍼스에서 한국인 명단을 찾아 공개했다. 언론 역사상 최대 협업으로 꼽히는 이번 프로젝트의 진행 과정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썸띵 뉴!

 

2020년 10월 28일 수요일 이른 아침, 눈을 뜨자마자 습관적으로 업무 메일 수신함을 열었다. 밤사이 들어온 그렇고 그런 보도자료, 각종 뉴스레터, 스팸성 메일 더미 사이에서 메일 제목 하나가 눈에 띄었다.

 

“something new!”

 

순간 몸에 가벼운 전율이 스쳤다. 일종의 조건반사처럼. 발신자와 수신자만 아는 일종의 암호 같은 두 단어, 새 프로젝트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ICIJ(International Consortium of Investigative Journalists), 즉 국제탐사보도언론인협회 소속 기자이자 국제 협업 프로젝트 코디네이터 S가 보내온 메일은 간결했다.

 

“안녕, 잘 지내는가요. 내가 그립지는 않았나요? :)

우리 ICIJ가 뭔가 새로운 자료를 입수했어요. 관심이 있다면 늘 하던 대로 동의서 양식을 보내드릴게요. 그리고 다음 주에 화상회의를 한 번 하려고 해요. 고마워요. S” 

 

한눈에 들어오는 짧은 메시지, 바로 답장 버튼을 눌렀다. 어찌 관심이 없을 수 있겠느냐는 답장을 보내고 몇 시간 뒤 워싱턴의 S가 프로젝트 동의서 양식을 보내왔다. 프로젝트 암호명은 귀엽게도 ‘알라딘’. 3쪽짜리 동의서에는 알라딘 프로젝트 국제 협업 취재팀 내부에서 공유하는 데이터를 외부와 공유하지 말 것 등 각종 비밀 유지 조항이 빼곡히 들어있었다. 이번이 뉴스타파가 2013년 ICIJ와 첫 협업을 시작한 이후 10번째로 주고받는 프로젝트 동의서다.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 대표자 명의로 서명을 하고, 프로젝트에 합류할 뉴스타파 글로벌팀 취재 기자와 데이터 기자 명단도 동의서에 기재해 ICIJ에 다시 보냈다. 얼마 뒤 알라딘 데이터 접근 권한을 부여했다는 연락이 왔다. 드디어 ‘데이터와의 전쟁’ 시간이 ‘다시’ 왔다.

 

ICIJ가 관리하는 알라딘 데이터(이후 ‘판도라 페이퍼스’라는 공식 명칭으로 변경) 공유 플랫폼에는 이중의 보안 장치가 걸려있다. 이 빗장을 풀면 과연 어떤 데이터가 모습을 드러낼까?

 

‘코리아’ 등장 문서만 20만 건 

사막에서 바늘 찾기

 

조세도피처 ‘역외 서비스’ 업체 여러 곳에서 유출된 파일이라는 귀띔은 받았지만 접근 권한을 받아 처음으로 접속했을 때 그 규모에 압도되지 않을 수 없었다. 검색창에는 전체 파일 수가 1,200만 건으로 나온다. 먼저 데이터 공유 플랫폼 검색창에 ‘korea’를 입력해 봤다. 21만 1,073개 문서가 검색됐다. ‘코리아’라는 단어가 들어간 파일 수가 20만 건이 넘는다는 말이다. 물론 중복 문서도 다수고 ‘코리아’가 단순 언급된 파일도 상당수다. 하지만 이를 제거하더라도 여전히 많다. 사막에서 바늘 찾기다. 하지만 어쨌든 범위를 좁혀 나가야 했다. 가장 원시적이고 힘든 방법이지만, 또 가장 확실한 방법은 유명 인사의 이름을 하나하나 끊임없이 입력해 보는 것이다. 누구나 떠올릴 법한, 조세도피처로 갔을 만한 사람들의 이름을 입력하고 확인했다. 문제는 동명이인이 너무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 “드디어 나왔다”고 무릎을 쳤다가도 곧 다른 사람으로 확인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물론 이런 수작업에만 매달린 건 아니다. 뉴스타파가 보유하고 있는 수만 명의 인명 데이터베이스를 ‘판도라 페이퍼스’ 데이터와 ‘배치 검색’해서 일치하는 한국인 이름을 추출했다. 이들이 등장하는 문서가 8만여 건이 나왔다. 또 판도라 데이터에서 조세도피처 페이퍼컴퍼니의 ‘베네피셜 오너(Beneficial Owner)’, 즉 실소유주로 등장하는 한국인과 한국 기업 이름도 추려냈다. 모두 400여 개 이름이 나왔다. 이를 대상으로 하나씩 확인해 나가는 작업이 이어졌다.

 

사상 최대 유출

14개 역외 서비스 업체 내부 파일 2.94TB

 

우리 취재진을 1년 넘게 문서와 씨름하게 만든 판도라 페이퍼스 파일 1,200만 건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일까? 뉴스타파는 지난 10월 29일 제러드 라일(Gerard Ryle) ICIJ 대표를 줌으로 연결해 ‘판도라 페이퍼스를 파헤치다’라는 제목으로 유튜브 라이브 토크를 진행했다. 이 자리에서 라일 대표는 판도라 페이퍼스를 어떻게 입수했는지는 말할 수 없지만 ICIJ 취재팀이 10년 전부터 조세도피처 문제를 지속적으로 추적해 왔기 때문에 관련 제보가 계속 들어오고 있다고 말했다.

 

실제 ICIJ는 2013년 조세도피처 페이퍼컴퍼니 설립과 관리 서비스 업체인 PTN과 CTL에서 유출된 260GB 규모의 고객 정보를 입수해 ‘오프쇼어 리크스(Offshore Leaks)’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이후 파나마 로펌 모색폰세카(Mossack Fonseca)에서 유출된 조세도피처 고객 정보를 입수해 파나마 페이퍼스(2016년)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역시 로펌 애플비(Appleby) 유출 데이터를 토대로 파라다이스 페이퍼스(2017년) 프로젝트를 이어나갔다. 대부분 한두 곳의 역외 서비스 업체나 조세도피 전문 로펌 내부에서 유출된 자료가 바탕이 됐다.

 

하지만 이번 ‘판도라 페이퍼스’는 이전과는 차원이 달랐다. 모두 14개 역외 서비스 제공 업체(Offshore Provider)에서 유출된 고객 정보 관련 문서 1,200만 건이 통합돼 있다. 문서 생산 기간은 1970년부터 2021년까지다.

 

14개 업체 가운데 100만 건 이상 문서가 유출된 업체는 모두 네 곳. 세계 최대 역외 서비스 업체인 트라이던트트러스트(Trident Trust)에서 337만 5,331건, 파나마 로펌 알코갈(Alcogal)에서 218만 5,783건, 아시아시티트러스트(Asiaciti Trust)에서 180만 650건, 그리고 홍콩의 한국계 회계법인 일신과 일신기업컨설팅에서 157만 5,840건 등이다.

 

유출 데이터를 파일 유형별로 분류하면 PDF나 워드 파일 등의 문서 타입(Document Type)이 640만 건, JPEG와 PNG 등의 이미지 타입이 290만 건, 아웃룩(Outlook)과 eml 등 이메일 타입이 120만 건, 엑셀과 CSV 등 스프레드시트 타입이 46만 건, 기타가 88만 건 등이다. 전체 파일의 규모는 2.94TB로 역대 최대다. 이전 파나마 페이퍼스는 2.64TB, 파라다이스 페이퍼스는 1.4TB 규모였다.

 

제러드 라일 ICIJ 대표는 뉴스타파 토크쇼에 나와 “무대 뒤에서 가장 힘든 부분은 이렇게 수많은 비정형 데이터를 국제 협업에 참여한 기자들이 일목요연하게 검색할 수 있도록 구조화된 데이터베이스로 만드는 것”이었고 실제 프로젝트 공식 시작 전에 오랜 시간과 기술 인력, 예산이 소요됐다고 말했다.

 

언론 역사상 최대 협업

 

판도라 페이퍼스 프로젝트는 국제 협업 취재진 규모 측면에서도 사상 최대를 기록했다. 한국 뉴스타파를 비롯해 영국 BBC와 가디언, 미국 워싱턴포스트, 프랑스 르몽드, 일본 아사히신문 등 전 세계 150개 매체에서 600여 명의 기자가 1년 넘게 판도라 데이터 플랫폼에서 함께 자료 분석에 매달리고 결과를 공유했다.

 

놀라운 건 지난 10년간 이어진 ICIJ의 조세도피처 국제 협업 프로젝트에서 특정 언론사나 언론인이 특종 욕심 때문에 비밀 유지 약속을 어기고 먼저 보도하거나, 혹은 보안 규정을 위반해 사고를 일으킨 경우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단독과 경쟁에 익숙한 저널리스트들이 소속 회사 울타리와 국경과 언어 장벽을 넘어 ‘조세 정의’라는 하나의 목표를 두고 연대와 협업하는 모습은 언론 역사에 새 지평을 여는 장면이었다.

 

600여 명의 기자는 협업 기간에 줄곧 취재 결과를 공유했고, 프로젝트 이름도 함께 논의해 결정했다. 이제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판도라 페이퍼스’라는 이름도 각 취재팀이 여러 안을 제시하고 논의해 결정한 산물이다. 뉴스타파도 ‘다크 페이퍼스(Dark Papers)’라는 이름을 던져봤으나 아쉽게 채택되지는 않았다. 물론 지금은 판도라가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디데이: 2021년 10월 4일

 

디데이, 바로 첫 보도일도 협업취재팀이 각국 사정을 고려해서 장고 끝에 결정했다. 한국 시간 2021년 10월 4일 새벽 1시 30분, 세계 곳곳에서 <판도라 페이퍼스>를 제목으로 단 기사 수백 건이 동시에 터져 나왔다.

 

여러 국가의 전·현직 정상, 고위 정치인과 공직자 300여 명, 유명 스타와 마피아 보스 등이 감춰온 비밀 금융 정보가 드러났다. 여기엔 요르단 국왕, 우크라이나와 케냐 및 에콰도르 대통령, 체코 총리, 토니 블레어 영국 전 총리의 역외 거래 정보가 포함됐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측근 등 러시아와 인도, 미국, 멕시코 등의 억만장자 100여 명도 조세도피처를 이용해 자산을 관리한 것으로 확인됐다. 불법 역외 시스템을 감시하고 단속해야 할 권력자들이 오히려 문제의 시스템을 악용해 재산을 불려온 사실이 역외 서비스 업체 내부 문서로 밝혀졌다.1)


뉴스타파도 10월 4일 새벽부터 판도라 페이퍼스 취재 결과물을 내보내기 시작했다. 이수만 회장과 에스엠엔터테인먼트 임직원 이름이 등장하는 홍콩 법인 8곳, 홍콩 페이퍼컴퍼니 중 하나와 연결된 이 회장의 미국 말리부 별장 매입, 에스엠엔터테인먼트 홍콩 자회사인 드림메이커 지분을 이수만 회장과 두 아들 등 일가가 크게 늘려온 사실 등이 대표적이다. 또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 전 새마을운동 중앙본부 회장과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 등이 조세도피처인 사모아 등에 페이퍼컴퍼니를 설립하고 해외 비밀계좌를 운영한 사실도 확인해 보도했다.

 

판도라 상자에서 나온 ‘한남동 이재용’

 

앞서 뉴스타파팀이 방대한 판도라 페이퍼스 데이터에서 한국인들을 어떻게 찾아냈는지 언급한 바 있다. 원시적인 방법, 누구나 짐작하듯 검색창에 이름을 하나씩 넣어 확인한 대상에 당연히 이재용도 들어있었다. 이재용의 영문, ‘Jae Yong Lee’를 입력했을 때 모두 200여 건의 파일이 검색됐다. 취재팀은 이들 문서를 세밀하게 검토했다. 동명이인이 여럿 나왔다. 인내심의 한계가 오던 중 한 역외 법인 구매 문서에서 서울 용산구 한남2동 OOO번지를 주소로 기재했고, 생년이 1968년인 이재용이 나왔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주소 및 생년 정보와 부합했다.

 

뉴스타파는 이 문서에 첨부된 여권 사본 한 장도 발견했다. 흑백의 팩스 전송 문서였지만 이재용 부회장의 얼굴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관련 파일을 분석한 결과 이 부회장은 대표적 조세도피처인 영국령 버진아일랜드(BVI, British Virgin Islands)에 설립된 페이퍼컴퍼니 ‘배처리파이낸스코퍼레이션(Bachury Finance Corp.)’을 지난 2008년 취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유령회사의 설립일은 2008년 3월 7일이다. 이 부회장은 또 이 BVI 법인 계좌를 스위스 은행 UBS 취리히 본점에서 개설한 것으로 확인됐다. 당시는 삼성그룹 법무팀장 출신인 김용철 변호사의 폭로로 특검이 삼성 비자금 의혹 사건을 대대적으로 수사할 때였다.

 

언론의 침묵

 

뉴스타파는 이재용 부회장 관련 리포트를 판도라 페이퍼스 보도 4일째인 10월 7일 아침 내보냈다. 이후 폭로 내용 못지않게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에스엠엔터테인먼트나 이수만 회장에 관해서는 수많은 기사를 쏟아낸 언론사들이 이재용 문제는 일제히 눈을 감고 입을 다물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그 이유는 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이 잘 아실 것이다.

 

이재용 개인도 삼성전자 측도 침묵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대다수 매체가 자발적으로 이 사안을 보도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렇게 이재용 건은 흘러가는가 싶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일이 일단 그렇게 끝나지는 않았다.

 

참여연대, 경실련 등 여러 시민단체가 이재용과 삼성에 대해 탈세 조사와 수사를 촉구하는 성명을 냈다. 청년정의당은 이재용 부회장을 조세 포탈, 재산 국외 도피, 범죄수익 은닉 등의 혐의로 서울중앙지검에 고발했다. 현재 이 사건은 서울경찰청에 이첩돼 금융범죄조사부가 수사하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당초 서울중앙지검 범죄수익환수부에서 이 사건을 담당하기로 했다가 경찰에 넘긴 이유는 현재로선 알 수가 없다. 경찰도 삼성 이재용 같은 거물을 수사할 수 있다는 선례를 보여주기를 바랄 뿐이다. 사실 아주 어려운 수사도 아니다. 이미 여러 증거가 나와 있다. 남은 핵심은 스위스 은행 UBS 계좌에 이재용이 얼마나 많은 돈을 감추고 굴렸는지다. 우리 정부는 그간 여러 차례 스위스와 금융정보 교환 협정을 체결했다고 홍보한 바 있다. 그렇다면 우리 수사당국은 하루빨리 스위스 당국에 이재용이 운영한 BVI 페이퍼컴퍼니 배처리파이낸스코퍼레이션의 계좌 정보를 요청해서 확인하면 된다.

 

탈세는 문명사회의 적

 

한국탐사저널리즘센터-뉴스타파는 2013년부터 10년 가까이 조세도피처 문제를 추적하고 있다. 힘든 취재다. 명백한 문서 증거가 있는데도 대상자는 대부분 부인한다. 뉴스타파가 취재 대상자들에게 전혀 환영받지 못하는 조세도피처 프로젝트를 많은 시간과 인력, 예산을 투입해 계속 수행하는 이유는 단순하다. 지난 10월 4일 Day-1 보도 때 앵커 멘트로 대신한다.

 

“전 세계에 걸쳐 있는 조세도피처 페이퍼컴퍼니에는 세계 경제에서 창출된 부의 10%가 묻혀 있는 것으로 추산됩니다. 세수 손실로 따지자면 매년 8,000억 달러, 우리 돈 천조 원대 규모죠. 빈부격차와 기후 위기 등에 대응할 수 있는 공공 재원이 극소수 자산가와 그들의 조력자에 의해 지하세계로 감춰지는 겁니다. 세금이 문명을 떠받치는 기둥이라 한다면, 조세도피처가 왜 문명사회의 적으로 불리는지 잘 알 수 있겠죠.”




 

 

1) ICIJ 국제협업 취재팀, <마피아부터 국왕까지...조세도피처의 고객들>, 뉴스타파, 2021.10.4, http://www.newstapa.org/article/N0Nh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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