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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이 세상을 바꿔 놓았고, 그 가운데 언론 생태계도 격변을 겪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닥친 언론의 위기, 극복할 방법은 있을까. 피에르 아스키 국경없는기자회 회장에게 되새겨야 할 언론의 역할과 나아갈 방향을 들어본다. 편집자 주
필리핀의 마리아 레사(Maria Ressa)와 함께 노벨 평화상을 공동 수상한 러시아의 드미트리 무라토프(Dmitry Muratov)는 오슬로에서 열린 2021년 노벨상 시상식에서 연설 끝부분에 저널리즘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우리는 폭정에 맞서는 해독제다.”
15년 전 피살된 탐사저널리스트 안나 폴리티코프스카야(Anna Politkovskaya)가 몸담았던, 권위주의 러시아에 마지막 남은 독립신문 중 하나인 노바야가제타(Novaya Gazeta)의 편집장에 걸맞은, 일견 고귀하고 야심 차면서도 다소 낭만적인 슬로건이 아닐 수 없다.
이 말이 저널리즘에 대한 찬사라 할지라도, 그 같은 정의는 정보 복잡성이 늘고 있는 상황과 세계 시민에 매일 주어지는 정보의 퀄리티가 심각하게 저하된 현실, 민주주의에 미칠 수 있는 위해를 설명하기에는 역부족이다. 더군다나 이미 대중 상당수가 저널리즘을 신뢰하지 않는 것 역시 설명하지 못한다. 오늘날 악의적 정보(malinformation), 의도적으로 조작된 정보(disinformation), 혹은 신뢰 문제에 봉착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일들을 이해하고자 한다면 이들은 면밀히 검토돼야 한다. 진단을 넘어, 절대적인 해독제는 아니더라도 치료제를 찾고자 노력해야 한다. 2020년 초 시작된 코로나19 사태로 이 모든 상황은 전혀 좋아지지 않았고 오히려 악화하고만 있기 때문이다.
디지털에서 재현되지 못한 아고라
저널리즘에 대한 대중의 신뢰 잠식은 인터넷의 등장과 더불어 갑자기 나타난 현상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문제를 기술과 소셜미디어 탓으로 돌릴 수는 없다. 가령 미디어 신뢰에 대해 일간지 라크루아(La Croix)가 매년 프랑스에서 실시하는 여론조사에 따르면, 신문사, 라디오, TV에 따라 비록 편차가 있고 어느 해에는 소폭 개선되는 양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지난 30년간 신뢰 지수는 매년 하향 곡선을 그리고 있다. 이는 저널리즘 그 자체, 저널리즘 품질, 저널리즘에 대한 접근성 측면에서 저널리즘이 대중의 기대에 미치지 못함을 의미한다.
또 다른 조사에 의하면 프랑스에서 기자는 엘리트층으로 인식된다. 이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지배 권력이 연상되는 단어인 만큼 기자들이 동일시하고자 하는 이미지, 즉 리처드 닉슨 미국 대통령의 사임을 부른 워터게이트 사건을 주도한 밥 우드워드(Bob Woodward)나 칼 번스타인(Carl Bernstein)과 같은 ‘제4의 권력’, 혹은 ‘대항 권력’의 이미지와는 사뭇 거리가 멀다.
게다가 인터넷 시대가 도래하면서 이 거리는 더욱 멀어졌다. 온라인에서 직접 발언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지면서 과거 기자들이 수행하던 아고라의 파수꾼, 즉 게이트키퍼의 역할은 대체됐기 때문이다. 나는 이것을 2000년대 초반 몸담고 있던 일간지 리베라시옹(Lib ration)에서 베이징 특파원으로 있을 때 신문사 웹사이트에 블로그를 시작하면서 몸소 느꼈다. 오늘날은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 된 웹 2.0의 시대, 독자·청취자·시청자가 직접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시대가 됐다. 기자들이 목소리를 독점하던 시대는 종말을 고했다.
많은 기자는 이와 같은 격랑에 저항하고자 했지만, 훗날 소셜미디어는 이 격랑을 문자 그대로의 의미인 ‘쓰나미’로 변화 시켜 버렸다. 나를 포함한 몇몇 기자들은 이 흐름을 받아들이면서도 대중에게 전해지는 정보의 질이 훼손되지 않도록 최대한 애썼다.
인터넷 상호작용의 증가는 두 개의 현상을 출현시켰다. 하나는 정제되지 않은 정보가 갖는 한계는 있었지만, 행위자들이 창출해내는 새로운 정보, 증언, 전문가 소견이 증가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하나는 혐오, 허위 정보, 정보 조작의 ‘판매자’들이 순식간에 정보를 왜곡시키면서 고대 아테네의 아고라를 디지털에서 재현하지 못한 채 표현의 자유 공간이 아주 빠르게 ‘복싱링’으로 전락했다는 것이다.
2007년 나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프랑스 최초 인터넷 신문인 뤼89(Rue89)를 창간했다. 친구들, 친척들, 그리고 독자들의 기부금 덕분에 온전히 독립적으로 운영될 수 있었던 신문이었다. 온라인 사이트는 엄격한 저널리즘 규칙을 따르되 참여적 형태인 웹 2.0의 원칙으로 운영됐다. 우리는 새로운 형식을 실험해보기로 했다. 디지털 지면을 기자든 아니든 글 쓰는 모든 이들에게 열어놓되, 저널리즘의 직업윤리와 정보 검증 규칙을 모든 기사에 적용하는 것이었다. 댓글 창 역시 중요한 자리를 차지했다. 시의 적절한 기사들이 곳곳에서 들어왔고, 활발한 댓글로 초기 정보가 토론을 통해 더욱 풍성해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기사 수명은 저자가 ‘끝’이라는 단어를 쓰거나 편집장이 기사를 싣는 순간 다하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독자들이 의견을 남길 때 제2의 인생을 이어가는 것이라고 우리는 믿었다. 그러나 이는 오래 가지 못했다. 악성 댓글 등 사이트에 가해지는 공격을 버텨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언론인의 위상과 역량을 뒤흔든 세 가지 위기
2010년대 초반, 검증과 직업윤리 규칙만이 존재하던 이 자유 공간은 곧 전쟁터로 변해버렸다. 우리는 지난 몇 년 전부터 소셜미디어에 나타나는 현상을 초창기에 경험했다. 바로 허위정보, 혐오 선동, 음모론 등이다. 이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우리가 가진 프로젝트를 전부 부정하는 것들이었다. 우리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몰랐다. 케임브리지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 정보 유출 사건1)과 미얀마, 에티오피아, 우크라이나 사태2)에서 페이스북이 미친 영향을 보듯, 온라인 네트워크가 대량 허위 정보의 무기로 사용되는 것을 막을 수 있는 묘안을 찾지 못한 것은 다른 플랫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정보 공간의 거대한 변화에서 언론은 소외됐다. 오늘날 소수 독자만이 소셜미디어가 아닌 뉴스 사이트나 앱을 통해 직접 정보에 접근한다. 그러나 이들 역시 소셜미디어가 초래한 혼란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언론은 자신들의 위상과 역량을 뒤흔든 삼중위기를 겪었다. 첫 번째 위기는 디지털의 등장으로 붕괴한 비즈니스 모델이다. 위기에 제때 대처하지 못한 신문들은 폐간의 고통에 놓여있다. 매년 프랑스 기자의 수는 감소하고(반면 ‘커뮤니케이터’의 수는 증가한다), 미국의 수많은 도시에서 지역신문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으며, 미디어 집중 현상은 더욱 심각해지고 있다. 암흑의 10년을 지나 미디어 산업은 이제 간신히 다시 고개를 들었지만(뉴욕타임스나 르몽드의 온라인 구독자 수는 놀라울 정도다), 미디어 환경은 분명 변했다.
두 번째 위기는 언론 영역에 직접적 영향을 미치는 정치에 대한 것이다. 앞서 언급했듯 언론인이 점점 지배적 엘리트의 톱니바퀴로 인식되면서, 전 세계 곳곳에서 언론은 포퓰리스트가 만들어 낸 충동질의 공격 대상이 됐다. 도널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이 기자를 거짓말쟁이 혹은 ‘국민의 적’이라고 부르거나, 프랑스에서 파리 엘리트에 대항하는 민중의 반란인 노란 조끼 시위대를 취재할 때 TV 방송사에서 안전을 위해 경호원을 대동해야 하는 것을 보면 과거와는 사뭇 다른 우려스러운 세상이 아닐 수 없다.
세 번째 위기는 기술 발전으로 인한 저널리즘 정보와 소셜미디어의 표현 사이의 혼란이다. 다른 것은 일절 고려하지 않고 광고 수익에 눈이 멀어 클릭 수에만 집착하는 대형 플랫폼에 가장 큰 책임이 있다. 소셜미디어 알고리즘은 검증된 정보보다 자극적인 허위 정보에 가시성을 준다. 2016년 세상을 놀라게 한 트럼프 전 미국 대통령의 당선 이후, 뉴욕타임스는 페이스북에서 수백만 회 공유됐던 힐러리 클린턴과 사탄숭배에 대한 게시물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조사했다. 취재 기자들이 찾아낸 것은 러시아 정보기관이 아닌 재능 있는 대학생이었다. 이 시스템을 잘 파악한 그 학생은 학비 마련을 위해 스스로 자극적인 바이럴 뉴스를 만들어내면서 수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그러나 케임브리지애널리티카 사태가 보여주듯 이와 같은 아마추어의 난입은 불법으로 취득한 유권자의 개인 취향 정보를 선거에 활용하는 것과 같은 ‘진짜’ 음모의 등장을 막지는 못한다.
언론인 개별·집단적 내부 성찰 이뤄져야
이 삼중 위기의 결과는 수십 년간 그런대로 작동해온 체계의 붕괴로 이어졌다. 아울러 세대간 이어지던 정보 전달 관행의 단절을 가져왔다. 과거에는 집에 늘 놓여있던 지역 일간지 혹은 전국 일간지를 가족이 함께 읽었지만, 디지털 기술 발전과 더불어 그런 시대는 끝이 났다.
삼중 위기는 또한 정치적 지표의 상실을 야기했다. 내가 어렸을 때 신문 가판대에 가면 본능적으로 어떤 신문이 우파 신문인지, 어떤 잡지가 셀럽의 사생활만을 보여주는지, 어떤 것이 진지한 성격의 신문인지 알 수 있었다. 오늘날 같은 나이의 청소년이 준비 없이 인터넷을 마주하면 모든 것이 평등한, 진실과 거짓이 공존하고 어떠한 지표도 없는 망망대해를 헤매게 된다. 그 결과 그들은 혼돈 속으로 빨려 들어가게 된다. 어쩌면 그건 음모론자들이 바라는 바인지도 모르겠다. 소셜미디어라는 것이 존재하기 훨씬 이전인 1974년 뉴요커(New Yorker)와의 인터뷰에서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이미 “모든 사람이 당신에게 항상 거짓말을 한다면 당신은 그 거짓말을 믿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아무것도 못 믿게 된다. 아무것도 못 믿는 국민은 자기 의견을 가질 수 없다. 행동할 수 있는 능력을 빼앗길 뿐 아니라 사고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 역시 박탈당한다. 국민이 그렇게 되면 당신은 원하는 대로 그들을 조종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 바 있다.
따라서 저널리즘이 진정한 해독제가 되고, 민주주의 실천을 위한 필수불가결한 정보로서 역할을 되찾고자 한다면 이미 행동하기 시작한 재앙에 정면으로, 그리고 다각적으로 맞서야 한다.
언론인도 이 책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제는 언론인이란 직업에 대한 개인적·집단적 내부 성찰이 이뤄져야만 한다. 언론과 언론인이 넘쳐나게 되면서 뉴스 정보는 미국에서 유입된 정보와 엔터테인먼트의 혼재인 ‘인포테인먼트’에 휩싸여 버렸다. 현실 세계와 콘셉트의 경계 역시 모호해졌다. 또한 저널리즘만이 비판의 손길이 닿지 않는 유일한 ‘권력’이 될 수 없음에도 너무나 많은 저널리스트와 언론이 독자·청취자·시청자들의 비판적 시선을 수용하지 않으려 했다.
또한 언론이 양질의, 사회적 유용성을 지닌 저널리즘을 생산해야만 시민들이 뉴스 생태계에서 유용한 저널리즘과 전혀 그렇지 않은 저널리즘을 구분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대가를 치러야 해독제가 될 수 있다
주목할 만한 혁신 사례가 있다. 파나마 페이퍼스(Panama Papers)와 같은 전 세계 수십 개의 신문사, 수백 명의 기자가 함께 협업하는 탐사보도가 그 사례다. 저널리즘 자체가 치열한 경쟁이고 개인주의적 직업 속성 때문에 많은 언론인이 협업에 익숙하지 않다는 점을 고려했을 때, 이러한 시도는 형식적으로도 혁신적이다. 동시에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 경제 및 정치 권력자들이 자행하는 대규모 조세 회피 체계를 만천하에 드러냈다는 점에서 저널리즘의 사회적 유용성이라는 고귀한 가치를 다시금 회복시켜 줬기에 내용적으로도 의미가 있다. 내부 고발자의 문건으로 시작된 탐사 취재는 어떠한 기관이나 제도에서 할 수 없는, 사회에 유익하면서도 모두가 감지할 수 있는 저널리즘이라는 직업에 새로이 정당성을 부여했다.
상황을 개선하기 위한 또 다른 최우선 과제는 교육 체계 내에서의 미디어 교육이다. 아이들에게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말을 할지 가르치는 것의 문제가 아니다. 신뢰할 수 있고 검증된 정보에 근거해 스스로 의견을 형성할 수 있도록 무기를 주자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 점점 더 어린 나이에 인터넷을 헤매게 된 아이가 루머와 탐사보도, 진지한 정보와 거짓정보를 구별하기란 쉽지 않다. 프랑스 학교에서 어린아이들을 미디어의 세계로 입문시키는 수업에 참여한 적이 여러 번 있다. 간단한 사고 개발을 통해 정보, 영상, 스토리에 대한 비판적 거리 두기를 학습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은 즐거움을 느꼈고, 나는 이를 보며 매번 감명받곤 했다. 가령 간단한 실험으로 사진 하나에 모든 진실이 담긴 것은 아니라는 점을 배울 수 있다. 틀 짓기(framing)만 달리해도 스토리가 달라진다거나 모든 정보가 동일한 가치를 갖지 않는다는 점을 말이다. 경험만이 정보에 담긴 함정을 피할 수 있게 해주고 우리에게 맞는 정보 경로는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미디어 교육은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만, 학교 밖에서 정보 문맹으로 우리의 민주주의가 훼손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필수적이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디지털 플랫폼이 야기하는 참담하도록 파괴적인 영향은 국가의 규제 조치로만 종식할 수 있단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전 세계적으로 민간 혹은 국가 주도의 많은 시도가 있다. 그중에서 내가 회장을 맡은 국경없는기자회(Reporters sans Fronti res)에서 진행하는 ‘저널리즘 트러스트 이니셔티브(JTI, Journalism Trust Initiative)’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는 독립위원회에서 일 년 동안 수립한 객관적인 기준을 근거로 정보를 ‘라벨링’하는 시도다. 이 라벨 덕분에 플랫폼, 미디어, 대중은 정보의 정글 속에서 방향을 찾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것이 만병통치약은 아닐 테지만 위협받는 정보의 세계를 구원하기 위한 여러 장치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이는 국가 규제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이제 플랫폼은 국가보다 강력한 힘을 지니고 국가만이 법에 근거해 이들에게 책임을 강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발전, 시대의 변화, 세계 격변으로 야기된, 지금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혁명’에 걸맞은 거대한 도전의 시대다. 많은 해결의 실마리가 우리 앞에 놓여있고, 이를 위해서는 반드시 새로운 실험과 시도가 필요하다. 이 대가를 치러야만 우리는 모든 폭정에 대항하는 해독제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피에르 아스키는 누구?
프랑스 통신사 AFP 기자, 프랑스 일간지 리베라시옹
(Libération) 베이징 지국장을 지냈다. 2007년 프랑스
최초의 인터넷 독립신문인 뤼89(Rue 89)를 공동으로 창
간했고 2016년까지 최고경영자(CEO)로 지냈다. 2017년
부터 국경없는기자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1) 컨설팅 업체 케임브리지애널리티카(Cambridge Analytica)가 2018년 수백만 페이스북 가입자의 프로필을 동의 없이 수집하고, 그 정보를 정치 선전에 활용해 논란을 빚었던 사건. 편집자 주
2) 페이스북은 허위 정보, 혐오 표현, 극단주의적 게시물을 확산해 미얀마 정부의 로힝야족 학살, 에티오피아 내전, 우크라이나 내전 등을 부추겼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편집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