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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은 현대사의 비극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이 같은 일이 목포에서도 벌어졌음은 최근에야 보도됐다. 전남일보는 1980년대까지 목포에 위치했던 옛 동명원이 ‘제2의 형제복지원’이라는 사실을 밝혀내고, 이곳에서 자행된 인권유린을 고발했다. 침묵하는 관계자들의 답을 들을 때까지 끝낼 수 없는 이 취재기를 따라가본다. 편집자 주

“지금 원장도 직원들도 다 바뀌었어요. 도대체 왜 다 끝난 옛날 이야기를 가지고 이러시냐고요!”
핸드폰 넘어 짜증 섞인 관계자의 말이 들려왔다. 기자랍시고 안면도 없는 사람이 코로나19 시국에도 무턱대고 단체시설에 찾아가고, 며칠 내내 귀찮게 전화까지 하니 여간 기분이 나쁜 게 아니었나 보다. 취재원에게 감정이입을 잘 하지 않는 나지만, 이상하게도 무시하면 그만인 말에 순간 화가 치밀었다.
짧은 기자 경력과 어린 마음에 “과거 동명원에서 인생이 송두리째 어긋난 사람이 있다고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이하 진화위) 조사에도 포함됐는데, 기관으로서 설명할 책임 있는 거 아니에요?”라고 응대했다. 그러자 상대방이 “우리가 저지른 일도 아닌데, 왜 책임이 있습니까?”라고 받아쳤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대꾸할 말이 없었다. 잠깐의 정적 이후 “동명원 가지고 기사 쓰는데 동명원에 물어보지도 않고 쓸 수는 없잖아요…!”라며 얼버무리고 전화를 끊었다.
‘내가 왜 이러고 있지? 증거도 자료도 없고 그렇다고 협조적인 취재원도 없고….’ 알려진 게 아무것도 없는, 40여 년이 지나면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린 옛 동명원 사건을 가지고 나는 구체성과 객관성을 담보한 기사를 써야 했다. 그러기 위해서는 뭐라도 물고 늘어져야 하는데, 내겐 그렇게 해서라도 끈질기게 파헤쳐야 한다는 명분을 찾는 게 먼저였다. 갑자기 기자가 되기 전 우연히 학교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던 책을 떠올랐다. 지금까지도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는 책이다.
“내 나이가 어느새 37살이다. 곧 38살이 된다. 형제복지원에 잡혀가던 1984년을 포함하면 어느새 28년이 흘렀다. 그러나 형제복지원 사건은 28년 동안 단 한 번도 세상에 드러난 적 없이 묻혀 있었다. 우리는 그때도 어둠 속에 있었고, 지금도 어둠 속에 있는 것이다.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나는 겉모습은 37살의 아저씨지만 내면은 그게 아닌 것 같다. 그냥 나는 9살, 12살의 꼬마가 아닐까? 그러니깐 9살짜리 꼬마가 이렇게 글을 써서 들어 달라고 하는거다. 들어주세요. 우리 얘기를 들어주세요.”
단숨에 읽어내려간 책을 보고 마음속 분노가 일었다.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을 세상에 알린 피해자 한종선 씨가 쓴 《살아남은 아이》다. 이 책은 어린 나이에 영문도 모른 채 부산의 한 부랑인 수용시설로 잡혀 들어간 한종선 씨의 생존기다. 지금 생각해보니, 대학 시절 강렬하게 읽은 책 한 권이 전남일보가 최근 보도한 옛 동명원 사건의 시작이었는지 모르겠다. 형제복지원 사건을 항상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부산 형제복지원을 전남에서 떠올리다
그동안 한종선 씨가 특별법 제정을 위해 국회 농성을 하고 인권 관련 행사에 참여해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관심 있게 챙겨봤다. 한종선 씨를 주축으로 피해자들이 제법 모여 이들이 과거 고(故)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에 내려졌던 특수감금 등 혐의 무죄 판결에 대해 재심을 요청했다는 기사도 봤다. 부산일보의 기획 기사 <살아남은 형제들>(형제복지원 피해자들과 해당 사건을 연구한 활동가들의 인터뷰)을 열독하면서 변화를 체감했다.
부산의 형제복지원 사건은 권력의 비호 아래 이뤄진 어두운 역사의 단면이다. 사회 정화라는 미명 아래 사람들은 이름 없이 사라지고 죽어갔다. 언론은 무엇을 했는가. 1980년대에는 박인근 형제복지원 원장의 미담 기사가 나왔고 1990년대에는 형제복지원 폐쇄로 인해 거리에 노숙인이 넘쳐난다는 기사가 나왔다. 한종선 씨가 국회 앞 거리에서 형제복지원을 말할 때, 언론은 없었다.
그래도 침묵을 끝낸 한종선 씨의 고군분투 덕에 달라진 것은 많았다. 대학 시절 책을 읽었던 그때와 상황이 변했다. 부산에는 형제복지원사건 피해자종합지원센터가 생겼고 진화위 2기 출범 첫 조사 개시 사건으로 형제복지원이 지목됐다. 국가인권위원회 부산인권사무소 첫 번째 정책 권고로 부산 시장에게 “형제복지원 피해자 지원을 강화하라”고 요청하기도 했다.
형제복지원뿐만 아니다. 박정희 정권에서 탄생한 전국의 부랑인 수용시설은 전두환 정권을 거쳐 견고한 불법을 저질렀다. 옛 동명원 사건도, 부산의 형제복지원 사건도 개인의 탐욕과 비뚤어진 국가 권력의 합작품인 것이다.
사실 부산 형제복지원의 이름을 전남에서도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전남에서 가장 큰 항구도시인 목포의 동명원. 진화위 2기의 조사 대상이라는 것 외에는 제대로 알려진 바 없었다. 그러나 그 실체는 형제복지원 못지않은 인권유린이 자행되던 ‘아우슈비츠’였다.
여순사건 추념식 참석을 위해 전남 여수를 찾은 정근식 진화위 위원장의 인터뷰에서 옛 동명원 사건 취재는 시작됐다. 여순사건과 전남의 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사건으로 자주 진화위 홍보팀과 연락을 주고받았던 터라, 지역 언론과 독대 인터뷰 기회를 흔쾌히 얻을 수 있었다.
인터뷰에서 정근식 위원장은 진화위 2기의 조사 개시 사건 특징에 대해 “과거 사회적 약자를 대상으로 한 수용시설 인권침해 사례”라고 언급했다. 첫 조사 개시 사건이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전남의 사례가 있느냐고 되물었다. 정근식 위원장은 잠깐 기억을 더듬더니 “목포에 동명원이라고 하나 있다”고 답했다.
대학 시절 《살아남은 아이》를 읽었다는 점. 기자 생활을 하면서 부산일보의 형제복지원 기획 보도를 주의 깊게 봤다는 점. 지역 언론임에도 불구하고 서울에 위치한 진화위 홍보팀과 연결됐다는 점. 여러 언론사 중에서 정근식 위원장과 독대 인터뷰 기회를 얻었다는 것. 이 모든 것이 우연일까, 인연일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어쨌거나 나머지 우연은 이제 기자의 몫이었다.
집단수용소 같았던 동명원 피해자를 찾아
광주로 돌아와 인터넷 검색창에 동명원을 쳐봤다. 이따금 어딘가에서 기부를 했다거나 노숙인들이 자활 치료에 성공해 사회에 잘 적응했다거나 등의 미담 기사가 나왔다. 페이지를 계속 넘겨보니, 2015년 시설이 횡령 등의 내홍을 겪으면서 설립자 일가가 경영에 손을 떼고 실형을 선고받았다는 이야기도 나왔다.
과거 신문 기사도 살펴봤다. 1980년대 동명원 내 폭행치사 사건을 기술한 단신 기사들이 몇 건 나왔다. 동명원은 어떤 곳이었을까. 피해자들의 실체를 찾을 수 있을까. 고민이 깊어졌지만, 전남에서 형제복지원 사건과 유사한 일이 있었다면, 목포시는 진상 규명과 함께 과거 비극을 외면한 사실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죄하고 피해자 중심 기관이나 부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초 자료 조사 이후 곧바로 목포 동명원 취재팀을 꾸렸다. 취재팀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어느새 목포를 벗어나 전국으로 흩어진 피해자들을 추적하는 것이었다. 진화위 2기를 통해 ‘동명원 인권침해’ 사건으로 진실 규명 신청을 했던 피해자를 만났고 목포시 인권단체를 통해서도 피해자 연결을 시도했다. 피해자를 찾는 노력은 피해자들 사이에서도 알려져 많은 증언을 확보했다. 취재팀은 흔적도 없이 사라진 당시 상황을 증언을 토대로 기사를 그려나갔다.

3개월간의 끈질긴 취재 끝에 드러난 동명원 사건은 개인의 일이 아니었다. 진화위 2기가 출범하고 조사를 개시한 수천 건의 사건 중에서도 단 한 명의 진실 규명 신청이 전부였던 동명원 인권침해 사건. ‘인권침해’라는 짧은 수식어는 점점 뚜렷해지고 있었다.
한 피해자는 외상후스트레스장애와 상세불명 인격장애를 겪고 있었고 또 다른 피해자는 여전히 1980년대 시설 관계자들이 찾아오지 않을까 두려워했다. 인권이 당연시되는 지금에 이르러서도 진실을 이야기했다가 자신이 해코지 당할 것을 우려했다. 비교적 최근 동명원을 빠져나온 한 피해자는 지방자치단체의 무관심에 무력함을 느끼기도 했다.
그들의 피해 진술은 충격적이었다. 대부분 목포역 인근에서 공무원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에 의해 납치됐으며 동명원으로 옮겨진 이후 가혹행위의 표적이 됐다. 동명원 입소자들에게 관리자와 설립자 원장의 자녀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피해자들은 감시 속에서 청소, 밭일, 돼지우리 관리 등의 일을 했다고 증언했다. 식사는 부실했으며 아동을 대상으로 하는 가혹행위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갓 10대에 들어선 아이들이 신축 건물을 짓는 중노동에도 투입됐다. 무엇보다 도망가는 아이들을 다시 붙잡아 사냥개와 함께 가두거나 사망에 이르게 해 암매장하는 과정을 목격했고 이에 동원됐다는 증언도 있었다. 기사에 다 적지 못할 정도로 잔인하고 처
참한 묘사도 많았다.
마을 주민들이 기억하는 옛 동명원은 피해자들이 말하던 모습들과 대부분 일치했다. 한 주민이 옛 동명원을 보고 “집단수용소 같았다”라고 말했던 게 기억에 남는다. 목포시에 근무하면서 자신이 직접 트럭을 몰며 부랑아를 동명원에 옮겼다는 노년의 주민도 만났다.
무대응의 벽에 갇힌 피해자들의 절규
취재가 계속될수록 납치, 암매장, 성폭행, 가혹행위 등 피해자 증언은 실체에 가까워졌다. 동명원의 어두운 비극을 외면한 지방자치단체의 고질적인 업무 행태 또한 드러났다. 한 피해자는 최근 2년에 걸쳐 동명원을 관할하는 목포시에 민원을 넣었다고 했다. 내용은 과거 동명원에서 이뤄진 납치, 암매장, 성폭행, 가혹행위 등을 조사하고 자신의 과거 입소 기록을 찾아달라는 요청이었다.

이 외에도 한때 동명원에서 복지사로 일했다고 밝힌 한 제보자가 ‘동명원 암매장’ 관련 민원 내용을 제기했지만, 목포시는 관심이 없었다는 말을 전해줬다. 전남일보의 취재 훨씬 전부터 실체를 밝히기 위한 관련자들의 여러 시도가 있었지만, 목포시는 무대응으로 일관한 것이다.
인권침해 조사기관인 국가인권위원회(이하 인권위)도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지난 2018년 6월 전남학대피해장애인지원센터가 동명원 피해자를 대표해 인권위에 진실 규명을 요청하는 진정서를 제출했지만, 인권위는 1년 뒤인 2019년 옛 동명원 사건의 피해자가 제소한 진정에 대해 조사 기각 및 각하 결정을 내렸다.
인권위의 기각 사유는 ‘과거 동명원에서 발생한 것으로 추정되는 구타, 성폭행, 강제노역, 암매장 등의 사건 발생 시기가 발생한 날로부터 1년 이상이 지났다’는 것이었다. 또 인권위는 “동명원 운영진이 2015년 교체됐다”며 “현재 시설 관계자 면담 조사 결과 2015년 시설장 교체 전에는 그러한 일이 발생했지만 2015년 시설장 교체 후에는 모두 잘 지내는 것으로 파악돼 진정인의 주장을 입증할 만한 객관적인 증거를 찾기 어렵다”는 이유로 기각을 결정했다.
지방자치단체와 관계 기관의 무관심 속에 목포 동명원은 50여 년에 걸쳐 발생한 피해자들을 가리는 견고한 벽을 쌓아 올렸던 것이다. 전남일보 보도는 오랜 세월 켜켜이 묻혀 있던 동명원 사건을 들춰낸 최초의 시도와 같다.
국가인권위원회 부산인권사무소는 ‘형제복지원 피해자의 명예 회복과 지원 체계를 강화하라’고 박형준 부산 시장에 권고하기도 했고, 경기도 선감학원의 경우 이재명 당시 경기도지사가 직접 피해자들에게 사과하면서 피해자 조사·분석도 추진한 바 있다. 이렇듯 타 시·도는 과거 수용시설 인권침해 사건 해결에 있어 한 발짝 앞서 나가고 있었다.
부산의 형제복지원 등 과거 수용시설을 연구한 전문가를 찾아가 비극적인 역사의 맥락을 짚기도 했다. 박정희 정권이 만든 내무부훈령 410호에 의해 전국에 부랑인 수용시설이 생겼으며, 1970년 사회복지사업법 제정을 통해 ‘복지’라는 국가의 의무를 민간에게 떠넘기기 위한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는 점을 시사했다. 부랑인 수용시설을 둘러싼 국가의 관리·감독은 형식적이었고, 비리와 인권유린을 눈감아주며 법인 운영주체들의 이익을 보장해주는 형식이었다. 특히 목포동명원은 당시 내무부훈령 410호에 근거한 전국 부랑인 수용시설 36개소 중 하나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목포시, 전남경찰청 등에 흩어져 있는 동명원 관련 자료 또한 입수했다. 이를 통해 설립자 일가가 어떻게 부를 축적했고 어떤 과정으로 시설의 성격 변모가 이뤄졌는지 파악했다. 또 무안 신축 이전 이후 2000년대까지 동명원의 폐쇄적인 운영이 계속됐다는 여러 정황에 한 발짝 다가갔다.
이와 함께 2015년 동명원 설립자 일가는 근로기준법 위반, 업무상 횡령·사기, 입소자 대상 강제 피임 의혹 등의 내홍을 겪으면서 동명원 운영에서 손을 놓게 됐고 징역형을 선고받았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탄탄한 취재를 바탕으로 3일 연속 7건의 심층 보도를 이어갔다. 보도 이후 편집국에는 입소 피해자, 과거 직원 등의 제보 전화가 이어졌고 후속 보도를 멈추지 않았다. 해당 보도는 한국기자협회가 주최하는 이달의 기자상을 받았다. 상을 받았다는 것보다 옛 동명원을 수면 위로 끌어냈다는 사실이 더 기뻤다.
침묵으로 일관한 지방자치단체장들은 지방선거에 재출마해 열을 올리고 있다. 여전히 동명원에 관심이 없는 채로 재선을 노리는 게 답답할 뿐이다. 아직 동명원 보도를 끝낼 수 없는 이유기도 하다.
침묵에 침묵을 더해 야만은 한층 더 견고해진다. 취재 초반 나의 고민은 해결된 지 오래다. 말하는 것보다 말하지 않는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한다. 눈앞에 침묵은 쉽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변화는 침묵을 끝내는 것에서부터 온다는 것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