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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현장] 기자의 질문에 대해 질문하다
미디어현장 | 등록일 : 2022-05-27

질문을 꼭 해야 할 자리에서 침묵하는 기자들을 우리는 흔히 봐왔다. 그들은 왜 질문하지 않을까. 해외와 비교해 써내는 기사는 많지만 정작 내용은 충실하지 못한 우리 언론의 실상을 살펴보고, 기자에게 질문의 의미가 무엇인지 짚어본다. 편집자 주

 

박근혜 정부 시절 대통령과의 간담회에서 기자들이 취재를 접고 질문 없이 듣고만 있던 모습은 이후 국민에게 ‘질문하지 않는 기자’의 대표적 이미지로 각인되며 실망을 안겨줬다. 또 G20 폐막 때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한국 기자들의 질문을 받겠다고 거푸 질문을 청해도 우리 기자들이 끝내 침묵하던 장면은 지금도 걸핏하면 온라인에 소환된다. 기자의 ‘질문’에 관한 문제는 이런 공개석상에서의 침묵만 있는 것은 아니다. 취재 과정에서 취재원을 압박하며 질문을 쏟아내지 못하거나 취재 사안을 놓고 끊임없이 의문을 품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지 않는 것도 살펴야 할 문제다. 이 글에서는 ‘기자가 질문을 던지지 못하는’ 현상에 대해 생각해 보고, 이어 기자에게 질문이란 어떤 의미를 갖는지 논하고자 한다. 먼저 기자가 질문하지 않는 데 대한 기자들 스스로의 해명과 주장을 모아 간략히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애써 준비한 질문을 모두가 공유해 버리면 준비한 기자에게 돌아오는 실익이 없다.

△ 적극적인 질문과 취재로 기자 평판이 높아지면 대우가 좋은 곳으로 이직하니 회사도 그다지 반기지 않는다.

△ 보도자료와 뉴스통신사 서비스가 충분히 또 빠르게 제공돼 늘 의존하다 보니 현장에서 질문이 줄어든다.

△ 튀는 걸 좋아하지 않는 보수적인 기자 사회의 문화도 영향을 끼친다.

△ 질문이 함량 미달이라 눈총 받거나 반박으로 난처할 수 있으니 안전하게 간다.

△ 어느 한쪽을 편드는 것으로 비쳐질 수 있어 자제한다.

△ 다들 속보 압박이 커 질의응답보다 온라인용 1보를 신속히 송고하는 데 힘을 쏟는다.

△ 정당, 청와대, 정부 부처, 기업, 연예기획사 등 취재원이 여러 이유를 대며 질문을 사전에 차단한다.

△ 시원한 사이다 질문을 퍼부으라는 것은 대립과 확증편향에서 오는 요구가 아닌가?

△ 좋은 기사를 유료로 구독하는 언론 시장구조가 된다면 질문의 질과 양은 개선될 거다.

 

이 답변들은 전문직으로서 기자의 위상과 직업윤리 수준을 보여준다. 또 현재 언론이 처한 구조적 위기를 엿보게도 한다. 우리 기자의 취재와 기사가 부실해지고 있다는 건 이미 오래전부터 지적됐고 갈수록 뚜렷해지고 있다. [표 1]은 한국과 미국 주요 언론의 기사당 평균 취재원 수와 인용 건수에 대한 연구 결과다.

 


 

 

두 신문의 비교에서 기자 1인당 써내는 기사 건수는 우리 쪽이 훨씬 많다. 그러나 기사의 길이나 취재 인용 건수로 보아 내용의 충실도가 떨어진다는 걸 짐작할 수 있다. 간과하지 말 것은 조선일보의 인용 건수와 기사 한 건의 양적 충실도는 우리 언론 중에서 최상위권이라는 점이다. 2004년의 위 연구 결과와 2020년 발표된 같은 주제의 연구 논문 결과를 비교 해 살펴보자.[표 2]


취재원을 만나지도, 마주쳐도 질문하지 않았다

 

이상의 정치 기사 연구 결과를 토대로 할 때 우리 신문 기사는 정치인 한두 명의 발언을 인용한 짧고 단순한 발언 중계형 기사가 많다는 걸 알 수 있다. 포털사이트에서 많이 읽히도록 이슈몰이에 치중하는데다 최소한의 산술적 균형마저도 확보하지 않기 때문이다. 정치 기사는 단순한 동정 기사가 아니라면 여야 정당에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정치평론가나 정치학자를 취재하게 된다. 그럴 경우 한 건당 서너 명 정도 인용할 필요가 있다. 특정 정당 관련 기사라 해도 당내 계보나 파벌, 지도부, 당직자, 평론가를 두루 취재하려면 서너 명은 된다. 인용 건수의 과소는 결국 취재원을 만나지도 않고 마주쳐도 질문하지 않았다는 방증이 된다.

 

한 명의 취재원에게서만 듣고 그대로 쓰는 ‘완전 단일 관점 기사’도 계속해 늘고 있다. 또 발화 주체, 즉 도대체 누가 이야기한 것인지 확인해 알리지 않는 “~전해지고 있다, ~관측되고 있다” 등의 어미로 끝나는 ‘무주체 피동형’ 기사도 늘고 있다. 여기에 베껴 쓰기와 기사도용이 거리낌 없이 횡행하는 언론 현실을 고려하면 취재 현장에서 왜 질문이 적은지 설명이 가능하다. 그리고 사회의 변동과 언론사 내부 상황, 테크놀로지의 발전 등도 기자의 질문에 크게 영향을 미치는 것으로 보인다.

 

△ 셀럽(유명인)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이 주요 취재원으로 등장

△ 기자단 중심의 단톡방 운영을 통한 브리핑·논평 공유

△질문과 후속 취재를 지시하지 않는 데스크와 편집국

△ 하루 24시간 수시로 송고하는 보도 시스템으로 인한 인력 부족

△심층성·객관성보다 선정성과 오락성 비중 증가

 

1970년대 미국 언론의 정치권 취재에서 번진 ‘따옴표 저널리즘’의 취재 행태는 당시에 자조적으로 ‘쇼핑하러 간다’는 말로 표현되기도 했다. 여야 정당 및 각 부처에 소위 ‘입 털어주는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주워 담으면 된다는 의미다. 편리하고 효율적이며, 발언하는 그대로 옮겼을 뿐이니 안전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취재 쇼핑은 오늘에 와서는 쇼핑을 넘어 자판기 수준에 이르렀다 할 만큼 간편해지고 있는 것이다. 이슈의 현장과 당사자, 이해 관계자를 직접 만나거나 통화해 취재하는 ‘발품 취재(shoe leather reporting)’에서 관련자나 인플루언서의 페이스북, 인스타그램을 취재하고 카카오톡과 텔레그램으로 취재하는 ‘손품 취재(finger touch reporting)’가 취재의 주류가 됐다는 지적도 나온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피동적 공격성’의 문제

 

기자도 더 훌륭한 기사를 쓰고자 나름 노력하지 않는 건 아닐 것이다. 그러나 드러난 대로 충분한 사전 취재와 다양한 시각, 창의성을 갖춘 질문이 더 치열하게 준비되지 않는다면 기자는 발전하지 못한다. 그런 준비 없이 잘 쓰고자 한다면 각각의 기사가 더 매끄럽고 유려하게 형식적 기술만 발전할 뿐 사안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날카로운 통찰, 예지와 전망을 제공하지 못한다. 전문가나 당사자를 앞에 두고 직접 물어보고 따진다는 것은 취재에 들이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하는 대단히 효과적이고 능률적인 방법인데 기자가 굳이 질문을 피한다는 건 나태함 말고는 딱히 설명할 길이 없다. 또 이것을 지적하고 길을 열어주는 것이 데스크나 에디터의 역할인데 뉴스룸 내에서의 소통 또한 부실하다. 어쩌면 문제의 핵심은 질문하지 않는 데스크, 에디터의 문제다. 이것이 더 심각하고 중요하다는 것이다.

 

질문의 준비와 현장에서의 실행은 기자의 사고력과 경험치를 높이는 가치 있는 행위다. 간결하면서도 문제의 핵심, 독자의 궁금증에 최적화된 질문을 만들어내고 순간적으로 짜낼 수 있다는 건 실력이고 발전이다. 물어봤자 뻔한 대답이 나올 거라 여겨도 일단 물음을 던지고 결과를 대하면 다음 질문이 떠오를 수도 있고, 다른 동료가 의외의 것을 간파해 낼 수도 있으니 던져야 한다. 같은 맥락에서 기자의 성실한 취재와 질문은 언론사의 사설과 논평의 질을 높인다. 논설위원이나 칼럼을 준비하는 데스크의 작업은 대동소이하다. 기자의 기사를 인용해가다 나름의 비평과 의견을 첨부하는 것이니 기자의 작업은 사설과 칼럼의 1차 작업인 셈이다.

 

독자와의 관계도 기자의 질문에 영향을 미친다. 지식과 정보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으로 활용되지만은 않는다. 자극적이고 위태로운 정보들이 값이 나가고 대중은 난해하고 복잡한 진실보다 선정적인 제목과 소재에 이끌리는 경향도 보인다. 특히 정파적으로 양분돼 극단적 대립이 이뤄지는 현실에서 이런 조건에 부합하는 기삿거리를 확보했을 때 굳이 반박과 비판 질문으로 공은 더 들이고 조회수는 떨어뜨리려 하지않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한 가지 제기해 볼 것은 ‘피동적 공격성’의 문제다. 어떤 상황에서는 기자의 야성이 한껏 발휘되며 장시간에 걸친 치열한 질문과 비판이 퍼부어지는데 다른 어떤 곳에서는 입조차 열지 않는가 하는 것이다. 기자의 안위와 우위가 압도적으로 보장된 상황에서만 질문을 퍼붓는 건 아닐까? 검찰에 소환돼 고개를 숙인 피의자·참고인들에게 혐의 사실을 인정하느냐, 사과하겠느냐는 식의 질타를 퍼붓는 것이 대표적 예다.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 강한 피동적 공격성의 문제로 보인다. 물론 정파적 이유로 인해 소속 언론사가 공격하고자 하는 대상일 경우 질문이 매서워지는데 그것 역시 기자로서는 상급자와 소속 언론사의 지지와 지원을 받으니 마음 놓고 매서운 질문을 퍼붓는 것이라 여겨진다.


질문하지 않는 기자와 언론의 위기

 

나름대로 공들여 질문을 준비해 회견장이나 브리핑 현장에서 내놓을 경우 그에 대한 답변을 모든 참석 기자가 공유한다면 내게 돌아오는 실익이 없지 않으냐는 반문은 지극히 공급자 중심의 언론관이다. 이용자인 국민 중심으로 사고한다면 충실한 질문일수록 반드시 던져야 하고 그것을 토대로 후속 질문과 취재를 펼쳐가는 것이 언론의 책무다. 그것은 특종 경쟁과는 다른 차원에서 봐야 한다. 기자회견장에서 튀는 걸 삼가게 되는 기자 사회의 보수적인 문화? 전투에 투입된 병사가 서로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며 상대에게 총을 겨누고 쏘지 않는다는 말이 성립되는 것일까 묻고 싶다. 모두가 준비된 질문을 중복 없이 효율적으로 가능한 한 많이 던진 뒤 축적된 답변을 관심에 따라 취사선택해 송고하는 것이 옳다. 누가 이를 두고 기자 사회의 문화가 자제와 절제 없이 질문을 많이 퍼붓는다고 비난하겠는가.

 

기자의 집요한 질문이 정치적 편파성으로 오해될까 저어한다는 것도 생각해 볼 문제다. 기자 스스로 자신이 공정하고 객관적인지 살피는 노력은 필요하다고 본다. 그러나 취재에서는 취재원 또는 취재원의 답변이 공정하고 객관적인지 간파하는 게 기자가 노력할 과제다. 그것을 위해 기자는 질문을 던져야 한다. 취재원과의 관계나 자신에 대한 평판을 이유로 질문을 묻어버리는 건 적절치 못하다. 그걸 객관성을 위한 취재 방식이라고 내세울 수 있을까. 질문이 없으면 그곳은 취재 현장이 아니다.

 

그렇다면 취재 현장의 기자가 질문을 던지지 않는 다는 것은 사회 속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 첫째, 질문이 없다는 건 독자·시청자에 대한 존중, 주권자인 국민에 대한 존중을 상실한 것이다. 언론과 기자는 정보와 뉴스 커뮤니케이션에서 국민의 대변자이자 대리인이고 신뢰할만한 가이드로 존재해야 하는데 ‘질문 없음’과 ‘질문 지시 없음’은 국민 대중을 소외시키는 행위다.

 

둘째, 기사는 기자의 지적 생산물이다. 동시대의 사회 구성원인 국민 대중에게 유익이 되도록 생산적인 사회적 자산이 돼야 한다. 그러나 언론은 질문 없이 받아쓰고 후속 취재 없이 보도함으로써 부실하고 제한적인 정보를 이용자에게 일방적으로 공급하고 있다.

 

셋째, 기자회견과 자료 제공 뒤 기자의 검증과 비판 없이 보도되고 여론이 조성되면 언론은 철저히 힘과 자본을 가진 기득권층을 대변하게 된다. 

 

넷째, 기자의 질문은 우리 사회 민주주의의 역량과 직결된다. 언론인은 국민의 직접적인 경험이 도달하지 못하는 곳을 누비며 취재해 진실의 실체에 접근하고, 국민 대중이 제한적인 직접 경험을 넘어서 사회 문제를 폭넓고 깊이 있게 이해하도록 돕는 역할이다.

 

따라서 언론이 신뢰할 만한 취재 검증을 거친 타당한 뉴스를 지속적으로 제공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위태로워진다.

 

이런 관행과 시스템을 고치는 것이 과제라는 숱한 지적이 있었지만 기자도 언론사도 개혁과 쇄신의 취지에 걸맞은 변화를 추구하지도 해내지도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언론이 버텨온 것은 보험성을 띤 정부 및 기관, 기업의 홍보 예산 지출과 부실한 언론 관련 제도, 무책임한 정책, 감독의 부재 덕분이다. 여기에 우리 언론은 생존의 방식으로 정치 세력화나 정치 세력에 의존함을 선택하고 있다.최소한의 지적 공정성과 정치적 중립성마저 잃어가는 것은 위기를 잠시 지연시킬 뿐 결국은 언론의 생존 기반을 허물며 우리 언론의 위기를 치명적인 것으로 만들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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