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2022년 3월 14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5월 30일 막을 내린 <뜨거운 씽어즈>는 노래와는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원로 배우들이 합창에 도전하는 과정을 담았다. 기존 음악 예능과는 다른 화법으로 잔잔한 감동을 이끌어낸 이 프로그램의 제작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최종 합창을 선보일 백상예술대상으로 향하는 차 안. 리허설을 위해 당일 새벽부터 출근길에 오른 나문희 선생님이 전화기 너머 김영옥 선생님에게 물었다.
“언니, <뜨거운 씽어즈>가 끝나면 우리 더 이상 뜨겁지 않아서 어떡하지?”
마지막 무대를 위해 100일 넘게 뜨겁게 달려온 영옥과 문희. 두 사람의 통화에서는 긴장감보다 아쉬움이 더 묻어났다.
작품은 제목을 따라간다고 했던가. 도합 990살, 연기 경력 500년의 배우들로 구성된 <뜨거운 씽어즈> 합창단은 함께한 시간 동안 생각보다 더 뜨거워져 있었고, 하나둘씩 최종 무대로 모이기 시작했다.
인생을 담은 노래
사실 처음 프로그램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이렇게 뜨겁길 바랐던 건 아니다. 매번 똑같은 가수들이 번갈아 가듯 출연하는 음악 프로그램들에 지쳐 있을 즈음. 뻔한 편곡의 고음 대결이 점점 부끄러웠고, 투표와 탈락의 결과가 더 이상 흥미롭거나 궁금하지 않았다. 화려하게 뽐내는 기교보다, ‘인생을 담은 노래’들이 있는 담백한 음악 예능을 만들고 싶었다. 가수 뒤에서 정신없이 몰아치는 대형 화면 대신, 화자에 몰입할 수 있게 핀 조명만으로 <뜨거운 씽어즈> 무대를 연출한 것도 같은 연유에서였다.
어릴 적, 할머니 손을 꼭 잡고 무대 위에 올라 함께 노래한 적이 있다. 동네에서 주최하는 작은 규모의 대회였지만, 뛰어난 가창력의 내로라하는 참가자들 사이에서 무려 대상을 받았다. 담담하지만 삶의 단편들이 묵직하게 전해지는 할머니의 노래가 ‘감동적’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번 작품을 시작하기 전 개인적인 건강상의 문제와, 키워주신 할머니와의 이별을 동시에 겪으면서 떠오른 그때의 기억. 그리고 삶과 죽음에 대한 많은 생각들. 진실한 이야기가 보이는 음악에 대한 고민. 그렇게 <뜨거운 씽어즈>를 통해 ‘인생은 유한하고 짧지만 소중하다’는 얘기를 전하고 싶었고, 기획단계에서 내가 선택한 장치는 ‘시니어’, 그리고 ‘합창’이었다.
나문희 <나의 옛날이야기>
늘 ‘파마 머리’를 고집하는 할머니가 수줍게 무대 위에 올라 노래하는 모습. 그 이미지가 섭외의 첫 이정표였다. 연출가와 출연자의 관계를 떠나 항상 친손자처럼 대해주시던 김영옥 선생님을 시작으로, 나문희 선생님, 신구 선생님을 차례로 찾았다. 고민의 시간은 조금씩 달랐지만 세 분 모두 ‘개인’이 아닌 ‘함께’ 합창을 만들어 나간다는 취지에 흔쾌히 동감하셨고, 이후 나머지 합창단원 섭외에도 많은 힘을 실어주셨다. 다만 불가피한 상황으로 합창단에 최종 합류하시지 못한 신구 선생님은, 시즌이 끝난 지금까지도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혹여 시즌 2가 진행된다면, 그땐 모실 수 있지 않을까.
첫 방송을 앞두고, 파마 머리 나문희 선생님의 자기소개 솔로 무대 <나의 옛날이야기>가 먼저 업로드됐다. 선공개 영상이었다. 연습 때마다, 그리고 녹화 당시에도 제작진과 스태프 모두를 눈물짓게 한 감동이 화면 너머 대중에게도 전달될까? 걱정이 무색할 만큼 선생님의 노래는 유튜브 및 각종 SNS에서 재생산되며 많은 이슈를 낳았다. 어르신들의 노래엔 힘이 있다. 세월이 묻어나는 읊조림, 혹은 각자 가슴 속에 품은 그리운 누군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파마 머리, 어떤 이유에서건 어르신들의 노래엔 확실히 힘이 있다.
16명 뜨씽즈의 합창
김영옥과 나문희, <뜨거운 씽어즈>의 두 대들보 ‘옥나블리’를 필두로 합창단원 수배에 나섰을 때였다. 앞서 말했듯이, 노래 실력도 실력이지만 삶을 진심으로 노래할 단원들이 필요했다. 어린아이처럼 기뻐하고, 슬플 땐 뜨거운 눈물을 흘릴 수 있는 진실된 캐릭터들을 원했다.
경중을 따지자면 합창에서 ‘창’보다는 ‘합’에 더 중점을 뒀다. 물론 소프라노, 테너, 알토, 베이스 등 파트별 조합과 음악적인 능력도 무시할 수 없는 선정 기준이었다. 그렇지만 ‘합’창을 통해 시니어 배우들 각자 살아온 인생들이 하나로 ‘합’쳐지는 유쾌한 울림을 선사하고 싶었다. 같이 작품을 했거나, 평소 친분이 있는 관계를 바탕으로 조심스레 따뜻한 조합을 만들어 나갔다.
한 가지 걱정이 있었다면, 오히려 배우라는 직업이 걸림돌이 되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무대 위에서 노래하며 표현하는 감정들이 진심이 아닌 되레 연기로 보일까봐 내심 염려한 게 사실이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쉬지 않고 이어진 연습과 촬영 일정 속에서도, 단 한 명의 낙오자(?) 없이 모두들 계속해서 뜨거웠다. 처음 가졌던 염려가 부끄러울 정도로 다들 프로그램에 진심으로 임했다. 배역이 아니어도 충분히 멋진 인생을 살아온 ‘멋진 어른들’을 마주한 순간이었다. 그렇게 16명의 뜨씽즈는 시즌 내내 함께였고, 주어진 수많은 미션을 훌륭히 해냈다. 그야 말로 뜨거운 패밀리였다.
두 음악감독의 뜨거운 시너지
뜨거운 패밀리 그 중심엔 김문정, 최정훈이 있었다. 두 음악감독이 아니었다면 이렇게까지 뜨거울 수 있었을까. 어떠한 좌충우돌 조합이라도 아름다운 하모니를 만들어 내는 뮤지컬 음악감독 김문정, 나이는 어리지만 세대를 아우르는 감성의 밴드 잔나비 최정훈. 두 사람의 만남은 프로그램 시작 전부터 많은 관심을 받았다.
특히 최정훈 음악감독은 영옥과 문희가 출연한 <디어 마이 프렌즈> OST 및 본인의 앨범에도 ‘작전명 청-춘!’과 같은 합창곡을 싣는 등, 합창뿐만 아니라 세월에 대해서도 깊은 공감이 가능한 아티스트다. 김문정의 부드러운 리더십과 최정훈의 음악적 역량, 두 조합은 실제로 뜨거운 시너지를 내었고, 16명에 달하는 합창단원들을 무사히 백상예술대상 특별 무대 위로 이끌었다.
‘진짜’ 어른들의 ‘진짜’ 도전
인생을 담은 합창. 그 감동을 공유하고자 했던 것이 처음 기획 의도였다면, 프로그램에 돌입한 후엔 또 하나의 연출 방향이 생겨났다. 매 순간 순수한 열정으로 <뜨거운 씽어즈>를 대하는 배우들을 보면서, 내가 알게 된 좋은 어른들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타성에 젖어 한주 한주 프로그램에서 시간을 때우는 출연자들과는 달랐다. 꼰대가 유행인(?) 요즘, ‘진짜 어른’이 필요했다. 내가 아는 ‘진짜’ 어른들의 ‘진짜’ 도전을 있는 그대로만 잘 보여준다면, 매회 의미 있는 시간들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진정성 가득한 뜨씽즈 단원들을 통해서, 시청자들에게도 뜨거운 도전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다.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말은 쉬웠지만 그 과정이 결코 만만치는 않았다. 단원들 개개인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전부 풀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긴 제작 기간의 영화나 드라마에서도 주연과 조연이 존재하는데, 매주 쉼 없이 만들어 내야 하는 예능에서 전 출연자들을 모두 주인공으로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섣부른 욕심(?)은 결국 후반 작업 스케줄들을 고되게 만들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다. 오히려 더 담지 못한 것이 아쉽다.
“또 뜨거운 게 오지, 걱정 말자.”
차 안에서 본인 파트 연습에 여념이 없거나, 컨디션을 위해 잠을 청하거나, 긴장 해소용으로 전화를 하거나. 뜨씽즈는 각자 저마다의 방법으로 합창을 준비하며 백상예술대상으로 향하고 있었다. 최종 합창 무대 당일이었다. 함께 시즌을 만들어 나간 제작진도 설렘과 긴장, 상반된 두 감정을 안고 단원들 전원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그간의 많은 기억들로 감회가 새로웠다.
자기소개 솔로 곡을 시작으로 듀엣, 중창, 버스킹, 합창, 백상예술대상 생방송까지. 짧은 시즌 내내 휘몰아치듯 이어진 끝없는 도전들. 심지어 제작진조차 다 예상하지 못할 정도의 타이트한 일정이었다. ‘과연 이게 될까?’, ‘가능하려나?’, ‘힘들 것 같은데…’, ‘안 되면 어떡하지?’ 매일이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지만, 뜨씽즈는 식지 않았다. 뜨거웠다.
‘사는 재미’가 있다며 시간을 쪼개어 연습에 매진한 배우 나문희, 연기하는 배역만큼 노래하는 ‘진짜 자신’도 잘 소화하고 싶다며 속상해하는 배우 서이숙, 힘든 코로나 시기에 우리들의 합창이 ‘희망’이 됐으면 한다는 배우 김영옥. 이러한 진심들이 모여 무사히 백상 생방송 무대까지 달려올 수 있었다. 우리는 모두 시한부다. <뜨거운 씽어즈>의 간절함을 보며 주어진 시간 안에서 시청자들도 다시 간절해지길 바랐고, 혹시 차갑게 식어 있었다면 다시 뜨거워지길 바랐다. 모든 여정의 마지막인 백상예술대상 무대에 도착할 무렵, 수화기 너머 동생 문희에게 영옥이 대답했다.
“또 뜨거운 게 오지, 걱정 말자. 우리 뜨겁게 살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