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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제작기] CBS노컷뉴스 <몰락한 재벌 회장의 재기 자금 추적기> 취재기
취재기제작기 | 등록일 : 2022-10-28

수천억 원의 채무를 졌던 그룹 회장이 약 20년 만에 빚을 청산하고 시가총액 600억 원이 넘는 코스닥 상장사의 최대 주주가 됐다. 시련을 딛고 재기한 기업가 이야기가 아니다. 그룹 부도로 인한 고통은 노동자들에게 떠넘긴 채 호의호식하며 살아온 박창호 전 갑을그룹 회장의 자금 은닉 취재기를 확인해 본다. 편집자 주

 

“시가 600억 원 코스닥 상장사의 현재 최대 주주가 IMF 때 쫄딱 망했던 재벌 회장이래.”

 

두 달여간 진행된 취재의 시작은 사소한 한 문장에서부터였습니다. 취재원은 “분명 그 회장 완전히 망했던 걸로 아는데 어떻게 부활할 수 있었는지 모르겠다”라며 의아해했습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의문이 생겼습니다. 과거 기사들을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박창호 전 갑을그룹 회장은 1990년대 초반까지 국내 계열사 15개, 해외 계열사 10개를 거느리며 연 매출 1조 2,000억 원 이상을 기록, 재계 순위 50위권에 들었던 재벌이었습니다. 그러다 IMF 사태로 망했고, 수년간 저질러 온 분식회계가 적발돼 1~2심에서 실형까지 선고받았습니다. 그룹은 부도가 났고, 회장 본인도 수천억 원의 채무를 짊어지게 됐다는 게 마지막 기사의 내용이었습니다.

 

어떻게 빚을 다 갚았고, 약 20년 만에 600억 원 코스닥 상장사의 최대 주주까지 될 수 있었을까.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내심 ‘부자는 망해도 3대는 간다는 말처럼 뭔가 방법이 있었던 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그 과정이 매우 궁금했습니다. 그렇게 최대주주가 된 과정부터 하나씩 살펴보기 시작했습니다.

 

2016년부터 주식 사들여

현재 시가는 135억 원

 

우선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시스템(DART)에 들어가 박 회장이 최대 주주가 된 해당 상장사(정원엔시스)의 공시 내역을 살펴봤습니다. 그러자 수상한 점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박 회장이 처음부터 본인 이름으로 주주명부에 등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부인 최모 씨가 최대 주주로 있는 ‘법인’을 통해 정원엔시스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하더니, 세 딸 명의로도 주식 수십만 주를 구입했습니다.

 

박 회장의 이름이 직접 주주명부에 등장한 시점은 2016년 9월이었습니다. 이때부터 박 회장 일가는 공격적으로 주식을 사들이기 시작했습니다. 템피스투자자문, 신한화섬, 자산장학재단, 이콜로지앤푸드 등 박 회장 가족이 최대 주주로 있는 법인들 전부가 주식 매입에 총동원됐습니다. 결국 올해 3월까지 이들이 확보한 주식만 총 717만 주로, 이는 시가 약 135억 원 상당이었습니다.

 

막대한 자산가가 아니면 불가능한 투자 방식이었습니다. 그런데 박 회장은 쫄딱 망하면서 수천억 원대의 채무도 있었습니다. 도대체 돈이 어디서 나온 걸까. 궁금증을 가진 채 박 회장 일가와 관련된 법인, 부동산 등의 등기부등본을 살펴봤습니다. 그러던 중 한 등기부등본에 있던 ‘2012년 회생 결정으로 가압류 해제’라는 표현이 눈에 띄었습니다.

 

회생으로 8,500억 원 면제

비상식적인 회생 과정

 

‘회생으로 채무를 정리한 뒤 주식 투자로 돈을 번 건 아닐까’하는 생각에서부터 ‘2012년 회생했는데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주식 투자에 나선 것을 보면 회생 때 돈을 숨겨뒀던 것 아닐까’ 등등 여러 생각이 머릿속에서 오갔습니다. 정확한 사실관계를 파악하고 싶어서 법원에 회생 결정문을 요청했습니다.

 

하지만 생각보다 회생 결정문 확보가 쉽지 않았습니다. 법원에서 핵심이 담긴 ‘별지’는 제공해 주지 않았고 고작 3줄짜리 판결문만 공유해 줬기 때문입니다. 국회의원실을 통해 자료 요청을 하는 등 끈질기게 약 한 달 동안 법원 문을 두드렸습니다. 그렇게 확보한 박 회장의 ‘회생계획안’ 내용은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시 박 전 회장의 채무가 약 8,547억 원에 달했는데, 이 중 약 8,523억 원을 면제한다는 내용이었기 때문입니다.

 

박 회장은 “현재 보유한 전 재산이 9억 원에 불과해 채무가 너무 과다하다”고 호소했고, 법원은 박 회장에게 채무 약 8,547억 원 중 약 24억 원만 현금 변제하고 나머지는 면책 결정을 해주겠다며 회생 개시를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자세히 살펴보니 이상한 점이 한둘이 아니었습니다. 박 회장은 법원에 제출한 회생계획안을 통해 본인 전 재산이 현금(예금) 약 300만 원을 포함, 총 9억 원에 불과하다며 자산을 전부 처분하고 열심히 일해 벌 돈을 합쳐 2018년까지 7년에 걸쳐 23억 원을 갚겠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계획안이 통과되자마자 박 회장은 ‘조기 변제’를 신청했고, 한 달 만에 23억 원을 모두 갚았습니다. 처분하겠다던 부동산도 처분하지 않은 채 말입니다.

 

더 놀라운 건 전 재산 9억 원 중 절반 이상인 5억 원 상당이 골프·콘도·호텔피트니스 회원권이었지만 회생을 받는 데는 아무런 제지도 받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가진 재산에 비해 채무가 너무 과다하다”고 호소하며 회생을 신청한 사람의 상황이라고 보기에는 상식적이지 않았습니다.

 

“월 50만 원 반지하 산다”더니 회생 직후 60억 원 유엔빌리지로

 

회생을 받게 된 과정도 수상했습니다. 취재진은 박 회장이 아무런 연고도 없는 수원지방법원에서 회생을 받은 점에 주목했습니다. 거주하는 주소지 관할 법원에서만 회생이 이뤄지는데, 박 회장과 가족들 관련된 부동산·법인 등을 아무리 찾아봐도 수원지법 관할 주소지는 없었기 때문입니다.

 

회생 판결문에서도 주소는 익명 처리됐기 때문에 바로 확인은 어려웠습니다. 특히 10년이나 지난 시점이라 관련자도 모두 바뀐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수많은 자료를 뒤졌고, 그 결과 당시 박 회장이 기재한 거주지로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OO건물 B01’이라는 주소지를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박 회장은 법원에 “반지하에서 월세 50만 원을 내고 생활하고 있다”고 호소하며 월세 납부 내역까지 제출했습니다. 하지만 취재진이 확보한 또 다른 자료에서는 박 회장이 2012년 5월 11일 서울 용산구 한남동 유엔빌리지에 위치한 한 연립주택으로 주소지를 옮긴 사실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2012년 5월 4일 회생 종결 결정을 받고 딱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습니다.

 

결국 박 회장이 회생을 받기 위해 경기 지역의 한 빌라 반지하로 위장 전입을 한 것 아니냐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박 회장이 주소지를 옮긴 유엔빌리지 연립주택은 시가 60억 원 상당이며, 박 회장 부인과 둘째 딸 명의로 된 곳이었습니다. ‘사기 회생’ 정황이 추가로 드러난 겁니다.

 

수천 개 판결문 검색으로 차명 보유한 자금 쫓아

 

취재는 계속 이어졌습니다. 가족 명의로 된 부동산·법인의 구입 및 설립 경위와 자금 출처 등을 쫓았습니다. 박 회장이 갑을그룹 몰락 후 회생을 받기 전까지는 본인 명의로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습니다. ‘회생 전 은닉한 것으로 추정되는 자산’의 애초 출처가 갑을그룹 몰락 이전부터일 가능성도 있겠다는 의심이 들었습니다.

 

7,611개. ‘박창호’ 이름으로 검색되는 법원 판결문 숫자입니다. 취재진은 이들을 훑어보며 동명이인은 제외하고, ‘박창호 갑을그룹 회장’과 관련된 민사·형사 판결문 수십 개를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퍼즐 맞추듯 각 판결문에 흩어져 있는 정보를 조금씩 모으고 모아 ‘그림’을 그려갔습니다. 지난한 작업 끝에 박 회장과 그 가족이 소유한 부동산·법인 등을 대부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82개. 취재진이 열람한 박 회장과 관련된 부동산·법인의 등기부등본 개수입니다. 분석 결과 박회장이 갑을그룹의 위험 징후가 감지된 시점인 1996~1998년 집중적으로 자산을 은닉한 정황을 포착할 수 있었습니다. 이 기간 부인과 세 딸에게 본인 명의 토지를 증여했고, 동생에겐 본인 명의 건물을 매매한 것처럼 위장해 명의를 이전했습니다.

 

당시 부인은 가정주부였고, 세 딸은 미성년자로 아무런 경제활동을 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가족 명의로 부동산 구입이 이뤄졌고, 부인이 법인들 설립자금을 대기도 했습니다. 이들 자금의 출처를 박 회장 측에 수차례 물었지만 박 회장 측은 “오래전 일을 왜 자꾸 들추냐”라는 식으로 답변했습니다. 반론 청취 과정에서 당시 부인 명의로 설립된 법인들이 실제로는 박 회장 운영하에 있었다는 간접적인 증언도 확보할 수 있었습니다.

 

 

박창호 정원엔시스 주식 구입 일지 Ⓒ노컷뉴스

 


오래된 일이어도 잘못 있다면 바로잡아야

 

취재진은 박 회장이 거주하고 있는 유엔빌리지 연립주택과 박 회장 일가가 소유한 경기도 양평의 별장을 현장 취재했습니다. 경기도 양평 별장은 접근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인근 별장 소유주가 대부분 재벌가로 별장 수십 미터 앞에서부터 울타리가 쳐져 있어서 접근이 불가능했습니다.

 

특히 박 회장 일가의 별장은 육지 끝에 위치해 있어 강으로 둘러싸여 있는 구조였습니다. 결국 인근 선착장에 들러 선장님께 취지 등을 설명하자 흔쾌히 별장 앞까지 배를 태워주셨습니다. 그렇게 강 쪽으로 접근, 별장의 실체 등을 파악할 수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강 쪽으로 설치돼 있는 ‘불법 개인 선착장’도 발견했습니다.

 

약 두 달간의 취재가 이어지면서 박 회장의 채권단 중 공공기관인 한국자산관리공사, 예금보험공사로부터 여러 자료를 받았습니다. 예금보험공사가 박 회장으로부터 받아내야 할 채권 1억 원을 17년간 회수하지 못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현재까지 지연손해금만 3억 3,100만 원이 추가된 상황이었습니다.

 

예금보험공사는 취재가 시작되자 뒤늦게 이를 인지하고 “철저한 부실책임 추궁을 위해 회수 노력 지속 중”이라고 답했습니다. 지금까지 채권 회수에 적극적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관계자도 인정했습니다. 박 회장이 자산 은닉을 한 후 회생을 받은 사실이 맞다면 사기 회생으로 처벌받을 수 있으며, 아직 공소시효가 남아 있다는 법조계 유권해석까지 받아 기사에 반영했습니다.

 

“재벌들은 다 그런 식으로 돈을 빼돌리지 않냐.”

 

일부 취재원들이 취재 내용을 처음 듣고는 한 말입니다. 맞습니다. 박 회장을 포함해 수많은 재벌이 이와 유사한 방식으로 재산을 빼돌렸고, 제대로 된 책임을 지지 않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는 결국 자본 권력 앞에서 우리 사회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1990년대 후반 터진 IMF 사태는 우리 사회에 커다란 상처로 남아 여전히 후유증이 있습니다. 당시 재벌 그룹들이 저지른 분식회계 등은 외환위기 사태의 커다란 원흉 중 하나였습니다. 부실해진 은행을 살리기 위해 투입된 공적자금이 수조 원대에 달했고, 이 부담은 국민이 나눠 짊어지게 됐습니다.

 

반면 원흉으로 지목된 이들 중 제대로 책임을 진 이들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번 CBS노컷뉴스 보도로 당시 경영진들의 ‘도덕적 해이’, 우리 사회의 ‘시스템 부재’ 등 문제점을 환기하고, 지금도 잔존해 있는 불공정과 비상식에 대해 다시금 인식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오래전 일이어도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아야죠. 공소시효 문제로 형사 처벌은 못 할 수 있겠지만, 사회적으로라도 바로 잡아야죠. 반복돼선 안 되니까요.”

 

박 회장의 현재 상황 등 취재 내용을 전해 들은 전 갑을그룹 노동자 김소연 씨가 했던 말입니다. IMF사태 이후 노동자들은 계약직, 비정규직을 전전하며 살아왔습니다. 당시 노동자들은 경영에 관여한 바가 전혀 없음에도, 회사가 망한 책임을 오롯이 짊어지고 있었습니다. 반면 경영의 책임자인 회장은 자산을 은닉한 채 호의호식하며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취재를 진행하며 ‘너무 늦은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김 씨의 말에서 취재를 이어나갈 이유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늦었더라도 문제가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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