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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 아카이브 프로젝트-모던코리아>는 KBS가 개국 이후 현재까지 모아온 자료 영상을 바탕으로 제작되는 다큐멘터리다. 방대한 영상 자료가 한 편의 다큐멘터리로 완성되기까지 제작진의 노력과 고충을 확인해 본다. 편집자 주
<KBS 아카이브 프로젝트-모던코리아(이하 모던코리아)>는 2019년부터 띄엄띄엄 방송돼 현재까지 15개 에피소드가 방송된 다큐멘터리 시리즈다. ‘아카이브 프로젝트’라는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 이 시리즈는 KBS가 풍부하게 보유하고 있는 자료 영상들을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다. 자료 영상의 본격적인 활용에 그 초점을 맞추다 보니 다큐멘터리의 구성 방식이나 제작 방식도 기존의 방식과는 조금 달라질 수밖에 없었고, 내레이션을 배제하고 자막을 과감하게 배치하는 <모던코리아>의 특징적인 스타일이 자리 잡게 됐다. 제작 과정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먼저 2018년 방송된 <88올림픽 30주년 기념 다큐-88/18(이하 88/18)>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88/18>은 <모던코리아> 시리즈의 프리퀄 에피소드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 제작 방식이나 스타일 면에서 <모던코리아>의 원천이 된 다큐멘터리라고 할 수 있다. 1980년대 한국이라는 나라에 올림픽 개최가 예정됐다는 사실이 야기한 정치·경제·문화적 변화는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제5공화국 기간 내내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를 위해 ‘올인’할 수밖에 없던 당시의 상황을 KBS의 자료 화면을 통해 시청자들에게 전달하고자 제작된 다큐멘터리가 <88/18>이다.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아 계기성 특집 다큐멘터리로 제작됐지만 <88/18>은 기존의 일반적인 텔레비전 다큐멘터리의 형식과는 달리 자료 화면 중심의 푸티지(footage) 다큐멘터리1) 형식을 취하게 됐는데, 이 역시 ‘1988 서울올림픽’이라는 소재 그 자체와 관련이 깊다. 서울올림픽 개최가 대한민국 사회 전반에 끼친 영향이 심대했음은 위에서도 쓴 바 있지만, 방송 분야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KBS의 내부 아카이브 검색 시스템을 통해 자료 화면을 검색하다 보면, 서울올림픽의 예행연습처럼 치러진 서울 아시안게임이 있던 1986년을 전후로 아카이브의 질적·양적 측면 모두에서 현격한 증가와 성장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86-88 성공 개최’가 시대정신이었던 만큼 당시 방송 분야에도 많은 투자가 이뤄졌고, 그것이 짧은 기간 안에 방송의 질과 양의 급격한 성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서울올림픽’으로 검색되는 자료 화면은 일단 그 분량이 엄청났고, 뉴스는 물론이고 드라마와 쇼까지 다양한 장르에 걸쳐 있었다. 다시 말해, 서울올림픽 30주년 다큐멘터리를 위해 제작자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은 매우 풍부한 상황이었다. 그 풍부함은 제작자가 내레이션 등을 통해 별도의 설명을 추가할 필요 없이, 기존 자료 화면에 실려있는 이야기들을 엮어내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완결된 이야기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정도였다. 만드는 이가 하고자 하는 말이 어딘가의 자료 영상에 이미 기록돼 있는 것이다. 실제로 <88/18>은 별도의 내레이션 없이 자료 화면 자체만을 활용해 제작됐고, 조금 더 ‘날것’의 자료를 시청자에게 직접 제시하는 <88/18>의 스타일은 ‘서울올림픽’이라는 1980년대의 한국을 관통하는 키워드를 그 주제로 잡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아카이브 영상을 핵심에 두는 제작 스타일은 2018년 당시에는 매우 새로운 방식으로서 상당한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KBS 내에서도 아카이브 활용의 빈도와 방식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으로 생각해보는 흐름이 형성되기 시작했다.2)
아카이브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의 확장이 필요하다는 KBS 내부의 여론은, 오랜 시간 잠자고 있는, 아마도 대한민국에서 가장 많은 분량으로 추정되는, KBS 영상 아카이브를 생각해보면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게다가 돈도 많이 들지 않는다!). 그렇게 1년여간의 준비 기간을 거쳐 2019년 하반기부터 방송되기 시작한 시리즈가 바로 <모던코리아>다.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시간
<모던코리아>는 제작비가 별로 들지 않는다. 몇 번의 인터뷰를 제외하고는 새로 촬영할 일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시간이다. 입체감 있는 자료 영상 그 자체의 전달을 위해 내레이션이라는 편리한 스토리텔링 장치를 포기한 <모던코리아>는 그 대가로 절대적으로 길어진 영상 자료 리서치 시간을 필요로 한다. 러닝타임 50여 분의 <모던코리아> 한 편을 제작하기 위해서는 평균 1,500시간 전후의 자료 영상을 들여다보게 된다. 1,500시간의 영상은 인간 두뇌 용량의 한계를 넘는 시각적인 입력량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냥 영상을 들여다볼 뿐 아니라 그 내용을 별도의 엑셀 파일로 세세하게 정리해가면서 봐야 하고, 그래야만 추후 편집 단계에서 그 영상을 체계적으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아카이브 푸티지 다큐멘터리 제작에 있어 아마도 이 과정이 가장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게 되는 과정일 것이다. 그러나 좋은 자료가 나올 확률은 리서치의 분량과 정비례한다. 즉 넓고 깊게 파 내려갈수록 좀 더 좋은 재료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주어진 시간 내에 최대한 많은 양의 영상 자료를 찾아보고 싶은 것이 제작자의 마음이고 그에 비례해 체력과 정신력은 고갈되어가기 마련이다.
다큐멘터리에 사용될 가능성이 있는 장면들이 제작자 본인의 머릿속을 최소한 한 번은 거쳐 가야 하기 때문에, 이 지난한 과정을 다른 제작 보조자들에게 맡길 수 없다(두뇌 용량의 한계로 먼저 입력했던 장면들이 기억의 뒤편으로 사라지더라도, 제작자의 머릿속 어딘가에는 남아 어려울 때 실마리를 던져준다고 믿는다). 실제로 많은 PD가 리서치 기간 중 극심한 스트레스를 호소한다. 몸은 좀 피곤해지더라도 직접 나가서 촬영하는 편이 훨씬 낫겠다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이러한 사례들에서 볼 수 있듯 아카이브 영상이 핵심적인 위치를 차지하는 방식의 다큐멘터리는 리서치 시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리서치의 양과 결과물의 질은 정비례한다.
<모던코리아>와 비슷한 시기에 시작된 타 방송사의 아카이브 프로그램으로는 SBS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 프로그램의 경우 스튜디오 출연자들의 토크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 위클리 프로그램의 특성상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하는 푸티지 중심의 형식은 취하기 어려웠을 것이라 생각한다. 리서치 기간 중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주요 원인 중 또 다른 하나는, 내가 지금 외롭고 괴롭게 파헤치고 있는 이 자료들이 실제로 만들어질 다큐멘터리에 어떻게 사용될지 거의 감이 잡히지 않다는 것이다.
협업자들과 쌓은 10여 년의 신뢰
자료 영상을 엮어서 제작하는 아카이브 다큐멘터리의 리서치 과정은 대체로 외로운 과정이다. 그 바탕이 되어주는 1,500여 시간의 영상을 제작자 본인이 직접 시청하며 자신의 머릿속에 입력해야 하고, 다른 사람이 이를 대신해 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단 자료 영상에 대한 리서치가 완료되면 협업의 시간이 시작된다. 리서치한 자료 중 본방송에 실제로 사용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부분들을 따로 추려 협업자들(작가, 음악감독, 미술감독 등)과 공유할 수 있는 단계가 됐기 때문이다. 보통 1,500시간의 영상 중 본방송에 사용될 가능성이 큰 40시간 내외의 영상을 추려내는데, 역시 적은 분량은 아니지만 저화질의 저용량 파일로 협업자들과의 공유가 비로소 가능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체 영상 데이터베이스를 머릿속에 입력하고 있는 사람은 PD 본인뿐이고 다른 협업자들은 그 간추린 버전만을 볼 수밖에 없다는 것은, 제작의 가장 큰 파트너인 작가와의 역할 분담이 기존 형식의 다큐멘터리와는 많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기존 다큐멘터리의 경우, 작가는 이야기의 구성부터 깊이 관여하고 내레이션을 집필하는 역할까지 맡는다. 그러나 푸티지 다큐멘터리의 경우 이야기의 구성을 보유하고 있는 자료 영상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데, 작가는 보유 중인 자료 영상의 간추린 일부만을 머릿속에 입력하고 있다. 따라서 자료 영상을 엮는 과정도 PD가 주도적으로 해나갈 수밖에 없고, 작가는 이에 대해 비평하고 추가적인 의견을 제시하는 보조적인 역할에 머무를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된다. 이는 PD와 작가 모두에게 약간의 적응이 필요한 상황이기도 한데, PD는 (어쩔 수 없이) 작가에게 충분한 도움을 받지 못하고 평가만 당한다고 느낄 수 있고, 반면에 작가는 (어쩔 수 없이) 본인의 의사가 프로그램에 충분히 반영되지 못한다고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푸티지 다큐멘터리의 제작에 앞서 PD와 작가에게 각각 자신의 역할에 대한 명확한 분담과 이해가 필요하며, 서로의 관계에 신뢰가 쌓여 커뮤니케이션 비용이 적게 들수록 불필요한 제작 에너지의 낭비를 막을 수 있다. 2011년부터 계속해 민혜경 작가와 작업해 오고 있는 가장 큰 이유도 역시, 10여 년에 걸쳐 형성된 커뮤니케이션의 원활함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모던코리아>의 제작 과정과 스타일에 큰 영향을 미치는 다른 두 협업자는 음악감독과 미술감독이다. 내레이션이 없는 프로그램의 특성상 시청자의 입장에서는 이야기의 구조를 이해하는 데 비교적 어려움이 있을 수 있는데, 이때 도움을 주는 요소들이 바로 음악과 그래픽이다. 2011년부터 함께 일해 온 박민준 음악감독(Dj Soulscape)의 경우 한국 대중음악을 학구적인 자세로 탐구하는 음악인이다. 예전엔 주로 다큐멘터리의 시대적 배경이나 ‘톤 앤 매너(tone and manner)’에 어울리는 선곡이 주된 작업 방식이었다면, 근래에는 한국의 전통음악이나 대중음악의 기본 요소들을 별도로 녹음한 후 이를 조합해 새로운 음악을 만들어 내는 방식으로 진화하고 있다. 역시 2011년부터 함께 작업해 온 김기조 미술감독 역시 기존 방송 자막과는 결이 다른 과감한 시각적 시도를 거듭하고 있으며, 그 특유의 스타일은 10여 년의 시간을 거쳐 오며 한국 방송의 그래픽 문법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과거’라는 유한한 자원의 한계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 채널을 돌리다 보면 <모던코리아>와 유사한 영상 편집이나 그래픽 스타일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 그 프로그램의 제작자들이 <모던코리아>를 보고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것인지는 알 길 없으나, 최소한 그러한 흐름을 앞장서서 시도는 해봤다는 생각이 들어 자잘한 뿌듯함을 주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지상파 방송사들의 궁여지책에서 나온 잠깐의 블루오션을 보는 듯한 의구심에 약간은 착잡한 마음도 없지 않다.
지난 수년간 ‘아카이브’라는 방송의 키워드로 기획된 적지 않은 프로그램들을 통해 자료 화면을 활용하는 새로운 방송 문법이 자리 잡아 가고 있다. 이는 <모던코리아>의 제작자로서 기쁜 일이지만, 이제 문제는 그 다음 단계인 것 같다. ‘과거’라는 자원은 유한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새로운 창작을 할 수 있는 기회의 창이 그리 오랫동안 열려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주로 20세기라는 과거를 재소비하는 경향은 방송에만 국한되지는 않는다. 지구인들은 이미 최소 20년째 리믹스와 리바이벌과 리부트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뉴트로한’ 문화생활을 영위하고 있다. 리부트를 다시 리부트 해가며 ‘레트로’는 예상보다 훨씬 장수하고 있는 판이다. 아마도 이러한 한계는 21세기 초반 대중문화의 전체적인 한계일 것이다. 새로운 돌파구는 과연 나올 수 있을까? 나온다면 어디에서 나올까? 나로서도 불안한 마음으로 궁금해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1) 내레이션 없이 영상과 인터뷰만으로 구성된 다큐멘터리. 편집자 주
2) 2018년 무렵은, 뉴미디어의 등장으로 영향력이 예전 같지 않은 공중파 방송사들이 자신들만이 보유한 고유 자산인 아카이브의 활용에 공통적으로 관심을 쏟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