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아무리 많은 사건·사고를 접하는 기자라 하더라도 참사 현장 취재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언론에 대한 신뢰 하락, 타사와의 경쟁, 사고 현장 목격으로 인한 트라우마 등은 그러한 어려움을 더욱 가중시킨다. 이태원 참사 취재기를 통해 사고 현장을 보도하는 기자들의 마음가짐을 살펴본다. 편집자 주
기자는 현장을 먹고 큰다
2013년 7월 18일 밤 10시. 회사에서 차를 타고 출발해 충남 태안 안면도 백사장 포구에 도착하니 까만 바다를 달빛이 비추고 있었다. 이따금씩 수색선에서 조명탄이 터지면 바다와 하늘의 경계가 어렴풋하게 보였다 사라지길 반복했다.
그때마다 백사장에서 자녀를 기다리던 부모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이날 사설 해병대 캠프에 참여했던 공주사대부고 학생 5명은 “바다로 들어가라”는 교관의 지시를 따랐다가, 바다에서 나오지 못했다.
“아들은 어떤 분이었나요.”
심장을 내어놓고 우는 가족들 틈에 이 문장을 차마 입 밖으로 내뱉지 못하고, 쭈뼛거리다 돌아서기를 반복했다. 모두가 탈진해 실내로 들어간 사이 백사장에 남아 까만 바다만 바라보던 내게, 한 어머니가 아들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렇게 다음날 1면 기사를 썼다. 태안 현장을 다녀오자 한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기자는 현장을 먹고 크는 거야.”
아마도 어려운 상황 속에서 질문을 하고, 며칠 동안 낯선 지역 여관방을 ‘취재본부’ 삼아 고생했기에 1면 기사도 쓸 수 있었다는 뜻이었을 거다.
당시 나는 4년 차 사회부 사건팀 소속이었다. 유독 사건·사고 현장이 많았다. 불과 사흘 전이던 7월 15일에는 올림픽대로 상수도관 공사 현장에 한강 물이 유입돼 일하던 노동자 7명이 사망한 ‘노량진 수몰 사고’ 현장에 있었다. 2014년 2월 경북 경주 마우나리조트 붕괴 사고로 대학생 10명이 사망했던 현장에도, 같은 해 4월 세월호 참사 현장에도 있었다. 사고의 원인과 규모, 현장 분위기는 모두 달랐지만, 누군가의 슬픔을 캐물어야 하는 기자의 일이 버겁게 느껴진다는 생각은 모든 곳에서 비슷하게 들었다. 하지만 힘든 취재를 거듭하면 할수록, 내 스스로도 ‘기자는 현장을 먹고 큰다’는 말을 가슴에 훈장처럼 새겼다.
정말 기자는 현장을 먹고 클까
2021년 4월 사회부 사건팀장을 맡은 이후에도 크고 작은 사건·사고들은 이어졌다. 광주 아이파크 붕괴, 울진 산불, 이천 화재 등 안타까운 인명 사고들이었다. 현장에 취재기자를 보내 드러나지 않은 이야기를 찾아내고 유가족 사연을 취재하는 방식은 똑같았다. 사건팀장으로서 가장 먼저 고민한 건 ‘어떤 기자를 현장에 보낼까’였다. ‘기자는 현장을 먹고 큰다’고 했으니, 현장도 기자들의 상태에 따라 고르게 맡겨야 했다.
하지만 긴급하게 터지는 현장에서 이런 고민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는다. 지난해 10월 29일 이태원 참사도 그랬다.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닿을 수 있는 사람, 그게 1순위였다. 참사가 발생하기 직전, 대부분의 언론사는 사회부 기자들에게 이태원 핼러윈 스케치를 맡겨둔 상태였다. 3년 만에 마스크를 벗어던진 채 거리에서 핼러윈을 즐기는 인파의 들뜬 표정을 기사에 녹여내는 것, 단순한 기사였다.
우리 팀 기자도 현장에 있었다. 스케치를 마쳤다기에 오후 10시 30분쯤 기자를 철수시켰다. 하지만 이후 SNS에 올라오는 영상들을 보며 팀 단체 대화방에서는 ‘이상하다’, ‘현장을 확인해봐야 할 것 같다’는 의견들이 올라왔다. 당초 현장에서 철수하기로 했던 기자에게 전화를 걸어 현장에 다시 보냈다.
당시 참혹했던 상황들은 글로 다 적지 않아도 될 것이라 생각한다. 이날 이후 현장에 있던 후배에게 나는 차마 ‘기자는 현장을 먹고 크는 거다’라는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날 현장에서 보고 들은 모든 것들이 기자들에게는 엄청난 트라우마였기 때문이다. 취재 경쟁, 비극의 한가운데서 이를 기록해야 한다는 압박감…. 과거에는 당연하게 감내해야 했던 것들도 이제는 달라지고 있었다.
현장 취재가 점점 어려워진다는 걸 처음 느낀 건 세월호 참사 때부터였다. 2014년 4월 16일부터 참사 발생 후 일주일은 진도체육관에 머물며 실종자 수색 상황을 기다리는 가족을 스케치하는 일을 했다. 이전에 사고 현장 취재를 경험했던 터라, 실종자 가족에게 다가가 취재를 하는 건 예전보다 수월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참사를 마주할수록 취재는 더 어려웠다.
가족 취재는 가로막혔다. 희생자 수가 슬픔의 크기와 비례하는 건 아니지만, 진도체육관 안에 수백 명의 가족이 모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우는 모습은 내게도 충격이었다. 당시 무리하게 취재하던 기자들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커지기 시작했고, 내 기억에 참사 셋째 날부터는 아예 체육관 관중석 아래로 기자들이 내려갈 수 없었던 것 같다.
4월 18일은 아무런 짐도 챙기지 못한 채 현장에 내려온 지 사흘째 되던 날이었다. 씻지도 못한 채로 체육관 스케치를 하거나, 진도경찰서에서 나온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가져다 여관방에서 펼쳐 기사가 될 만한 것들을 찾는 식이었다. 그런데 이날 내 눈앞에 들어온 장면은 충격적이었다. 멀끔한 셔츠를 입고 머리를 단정히 빗어 넘긴 한 외국인 앞에 실종자 가족들이 “내 얘기를 들어달라”며 모여 있었다. 외신 기자였다. 이 기자는 심지어 양손을 주머니에 찔러 넣은 채로, 난관에 기대 실종자 가족을 내려다보면서 이들이 하는 말을 듣고 있었다.
실종자 가족으로부터 한마디를 듣지 못하고 씻지도 못한 채 현장을 지켜왔던 나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실종자 가족의 마음을 연 건 정작 외신 기자들이었다니…. 뭐가 잘못된 걸까. 한국의 언론 보도를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들 앞에서 내가 앞으로 무슨 기사를 쓸 수 있을까 고민도 깊어졌다.
8년 뒤 이태원 참사 현장은 좀 나아졌을까. 그래도 고민하는 기자들이 많아졌다는 건 긍정적인 변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겠다. 참사가 발생하면 사고 책임자를 따져 묻고, 참사 희생자 가족들을 인터뷰하고, 막을 수 있었던 사전 징후들을 되짚어보는 일. 참사 현장 취재 방식은 비슷했다.
하지만 취재 환경은 크게 변해있었다. 사고 당사자들은 취재에 대한 거부감이 과거보다 훨씬 컸고, 아예 접근 자체가 차단되는 경우가 많았다. 현장에 갔던 팀원들에게 이태원 참사 나흘째 되던 날 모여 어떤 게 가장 힘든지 물었던 적이 있다. 한 기자는 “눈물이 계속 날 정도로 현장 상황에 몰입하며 힘들게 취재를 시도했는데, 한 희생자의 친구는 내게 ‘이게 재밌어요?’라고 물었다. 슬프고 힘든 상황에서 조심스럽게 꺼낸 말조차 ‘기레기’ 취급을 당한다고 생각하니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고 했다.
또 한 번은 유족 취재를 담당하던 팀원이 “희생자 유족이 경찰 피해자보호계에 정식 요청을 해 기자들의 접근 자체가 막혔다”고 했다. 예전처럼 무리하게 취재 시도를 하거나, 밤새 현장을 지키다 우연히 한마디를 듣는 방식의 취재 자체가 통하지 않는 시대가 됐다.
부족하지만 그래도 참사를 대하는 언론의 취재 방식이 조금은 나아졌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상황을 함께 고민하고 희생자들의 상황을 이해하려는 언론 내부 분위기가 커졌다는 점 때문이다. 만약 이번 참사에서도 내가, 혹은 각 언론사의 데스킹 라인의 선배들이 이전과 같은 방식의 취재를 고집했다면, 과거의 현장과 비교해 이태원 참사 보도가 나아진 건 하나도 없었을지 모른다. 현장도 더디지만 천천히 변해가고 있다.
그래도 성적표는 나온다
사건·사고 현장 취재가 기자로서 더 어려운 점은, 똑같은 조건에서 언론사가 동시에 경쟁하기 때문이다. 비슷한 시간대에 현장에 도착하고(회사마다 현장에 투입되는 인원은 다르겠지만 독자들에게 이건 중요치 않다), 사고 상황, 사연, 제도적 문제 등에 대한 취재 경쟁을 시작한다.
이태원 참사 발생 일주일 동안은 하루 3시간 이상 잠을 자지 못했던 것 같다. 새벽 내내 ‘단독’을 검색하며 우리가 놓친 기사가 뭔지 파악해야 했고, 조간신문이 나오는 새벽 시간에는 성적표를 펼쳐보듯 조심스럽게 기사를 살폈다.
참사 현장을 대하는 기자들의 생각이나 취재에 대응하는 유족들의 태도는 크게 달라졌지만 여전히 과거와 똑같은 형식의 보도들도 있었다. 현장의 고민들이 단 몇 개 언론사만의 노력으로 해결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당시 국민일보에서는 유족과 살아남은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어떻게 전해야 할지 내부에서 고민이 많았다. 자극적으로 보도하지 않되, 참사의 문제점을 충분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위해 많은 의견을 나눴다. 하지만 다음날 다른 언론사에서 ‘단독’을 단 유가족 사연 기사를 싣거나, 선정적인 제목을 단 기사들을 쏟아낼 때면 과연 우리의 고민은 가치가 있는 건지 헷갈리기도 했다. 특히 이런 기사들이 ‘가장 많이 본 뉴스’에 올라오면 더욱 혼란스러웠다. 물론 부족한 부분도 있었지만 그래도 회사 내에서는 편집국장단과 사회부장, 온라인뉴스부장이 자극적 보도에 대한 우려에 공감해줬고 하나하나 함께 고민하며 기사를 내보낼 수 있었다. 당연한 말처럼 들리지만, 물을 먹고 먹이며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하는 언론사에서는 용기가 필요한 일이었다고 생각한다.
참사 보도에서 더 중요해지는 기자의 역할
사건이 발생한 지 나흘째 되던 날, 참사 현장에 있었던 기자가 “몸이 이상하다”고 했다. 눈물이 나고, 두통이 심해 일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기자는 이후 빈소 취재를 담당하던 중이었다. 취재 부담과 당시 현장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에 후유증이 컸던 것으로 보였다. 회사에서는 현장 기자들이 누구보다 힘들 수 있다는 점을 이해했고, 가능한 지원을 하기로 했다.
이 시점부터 기자 한 명 한 명에 대한 건강 상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10명의 팀원 중 3명이 “업무하기에 어려움이 있다”고 해 곧바로 현장에서 철수시켰다. 이 기자들은 회사 지정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고 약 처방을 받았다. 일부 팀원은 아직까지 병원 치료를 계속하면서 건강 상태를 체크하고 있다.
일부 팀원이 트라우마로 힘들어하고, 남은 기자들 역시 체력적으로 지쳐가던 때에 팀원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눴다. 이날 기자로서 진지한 고민을 하는 후배들의 이야기에 나도 큰 위로를 받았던 것 같다. 우리가 나눈 대화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가치 있는 일을 한다고 믿는다”는 것이었다.
과거보다 기자로 살아가기 더 힘든 환경이지만 묵묵히 현장에서 오늘을 기록하는 기자들이 있다. 특히 이런 언론의 역할은 참사 보도에서 더 중요하다고 느낀다. 내게는 이태원 참사가 현장을 기록하는 기자들이 사명감을 갖고 일할 수 있도록, 선후배들이 함께 고민하고 용기 낸 첫 참사로 기억될 것 같다. ‘중요한 건 가치 있는 일을 한다는 마음’ 아닐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