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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책 한 권 ‘읽은’ 사람이라고 하는데, 실은 책 한 권 ‘쓴’ 사람이 더 무서울지도 모른다. 따라서 여러분은 지금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글을 읽고 있는 셈이다. 첫 소설을 출간한 지 얼마 안 된 하룻강아지, 장강명 무서운 줄 모른다고 했다.
이제 막 소설 한 권 출판한 초짜에게 ‘소설 쓰는 노하우’를 내놓으라는 요구는 천자문 뗀 서당개에게 《사서삼경》을 논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다. 이런 글을 쓰는 건 경우 없는 짓이다. 그럼에도 변명은 있다. 소설 한 권 쓰고 싶다는 생각이 괜스레 부끄러워 SNS는커녕 대밭에서도 ‘(소)설밍아웃’ 하지 못하고 서랍 깊숙이 숨겨 놓고 있는 기자들이 분명히 있다. 나도 그랬다. 그 기자들에게 이렇게 말씀드려야 할 의무가 나에게는 있다.
“네. 심지어 저도 썼습니다.”
이 사건으로 책 한 권 써볼까?
소설을 쓰는 데 기자만큼 유리한 직업이 또 있을까. 기자는 새로운 사건을 접하는 게 업이다(소재가 풍부하다). 날마다 다양한 사람들을 직접 만나서 사연을 듣는다(현장 취재에 익숙하다). 매일 기사를 작성한다(글쓰기 연습을 따로 할 필요가 없다). 가끔 독자들로부터 소설 쓰고 있다는 욕을 먹는다(벌써 소설을 쓴 셈이다).
‘영화보다 더 영화 같은 현실, 소설보다 더 소설 같은 기사’. 대한민국 기자들은 추리 소설과 무협 소설, 신파 멜로 소설을 거쳐 가끔은 판타지와 SF까지 넘나드는 다이내믹 코리아의 온갖 사건들을 취재한다. 누구보다 디테일하게 사건의 내막을 파악하고 있으며, 매일 아침 사건의 기승전결을 쌈박하게 정리해서 보고하는 습관까지 보유하고 있다. 헬조선에 사는 기자들의 노동 강도를 고려하면 매일 단편 소설 한 편씩 쓰고 있다고 해도 아주 헛소리는 아니다.
일하면서 ‘이거 영화로 만들면 대박 나겠는데? 이 사건으로 책 한 권 써볼까? 소설로 쓰면 딱인데 말이지’ 이런 생각 한 번쯤 안 해본 기자는 없을 거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 재미난 사건들이 왜 책으로 나오지 않는 걸까. 취재기는 (여전히 부족하지만) 그래도 좀 있는 편이지만 소설은 참 드물다. 아깝고 아까운 일이다.
그래도 사람이 염치라는 게 있다. 이렇게 하면 소설을 잘 쓸 수 있다고 말할 능력이 나에게는 없다. 첫 소설 《삼성동 하우스》를 쓰면서 겪은 좌충우돌 우여곡절을 평소보다 조금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는 게 초보 작가의 최선이다.
고삐 풀린 상상 열차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이건희 동영상 스캔들’을 소설로 써야겠다고 마음을 먹은 건 2017년이었다. 1년 가까이 관련 취재를 하면서도 ‘몰카(몰래카메라)’ 일당을 직접 취재할 기회는 없었다. (삼성을 포함한) 모든 취재원이 도망 다니는 숨바꼭질이었다. 이들의 실물을 처음 본 건 결국 법정에서였다. 몰카를 직접 찍은 여자, 범죄를 기획한 남자, 삼성에게 돈을 뜯어낸 남자…. 그토록 찾아 헤매던 취재원들이 모두(삼성 관계자 빼고) 재판정에 모여 있었다. 내가 썼던 기사 속 인물들이 활자에서 튀어나와 눈앞에서 숨쉬고 있는 듯한 생경한 느낌. ‘만찢남’이 아니라 ‘활튀남’이었다.
그런데 기사를 쓰면서 상상했던 캐릭터와 실제는 일치하지 않았다. 누구는 생각보다 뚱뚱했고, 누구는 생각보다 왜소했고, 누구는 생각보다 목소리가 가늘었다. 기사를 쓰면서 실제 세계를 모사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실제 세계는 내 머릿속과 전혀 따로 놀고 있었다. 팩트의 집합이라고 할 수 있는 기사는 보여주고 싶은 (전체) 세계의 극히 작은 부분집합에 불과했던 거다. 기사 말고 세계를 총체적으로 보여주는 더 좋은 방법이 분명히 있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다.
몰카를 찍은 성매매 여성이 그날 법정에서 구속됐다. 여성은 구치소로 끌려가기 직전 방청석에 있었던 한 남성과 부둥켜안고 서럽게 울었다. 저 여성도 평범한 생활인이었구나. 저 둘은 어떻게 만났을까. 몰카를 찍게 된 사연은 뭘까. 일당들은 서로 친한 사이였을까. 삼성에게 뜯어낸 돈은 순조롭게 분배됐을까. 상상은 자유인 데다가 공짜이기까지 하다. 한번 고삐가 풀린 상상 열차는 폭주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내가 장편소설을 쓴다는 건 경험도 밑천도 없는 영세 건설업체가 경부고속도로쯤 되는 대형 토목 사업을 수주한 것과 매한가지다. 제대로 된 설계도를 그릴 능력이 나에게는 없었다. 그저 서울에서 대전 찍고 대구 거쳐 부산으로 이어지는 거칠고 굵은 선만 조악한 지도에 그리고 출발했다.
그렇게 처음 설정한 도로는 2차선이었다. 1차선은 범죄자들이 모종의 인연으로 만나고 모여서 재벌 회장의 성매매 몰카를 찍고 협박해서 돈을 뜯어내는 이야기. 2차선은 이 범죄를 취재하고 보도하는 이야기. 1차선과 2차선은 나란히 진행하지만 어딘가에서 만나고 교차해 서로 간섭하게 될 것. 전자는 ‘범죄의 재구성’ 류의 ‘케이퍼 무비’에 해당하고, 후자는 ‘스포트라이트’ 류의 취재기 장르에 해당. 전자는 범죄의 나락으로 빠져드는 인간 군상의 비극이며, 후자는 팩트를 확보해 가면서 방해 세력을 돌파해 스테이지를 클리어하는 일종의 게임이다.
기사도, 예술도 결국 디테일이다
이쯤 해 놓으면 그다음부터는 결국 디테일이었다. 기사도 디테일이 중요하지만, 인생도 디테일이고, 예술도 디테일이다(그 옛날 교과서에서 배운 소설 구성의 3요소가 왜 인물, 사건, 배경인지 뼈에 사무치게 느낄 수 있다).
정해진 순서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나는 세부적인 사건보다 인물을 먼저 설정했다. 인물이 너무 많으면 복잡하고 감당이 되지 않았다. 너무 적으면 빈약하고 볼품이 없었다. 인물들의 이름을 정하고, 나이, 고향, 성장 배경, 이력 같은 디테일을 정했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각 인물은 평생 만난 취재원들의 조합이었다. 기자 캐릭터는 뉴스타파 동료들의 모습을 최대한 살리려고 노력했다(소설은 친정 뉴스타파에 바치는 헌사이기도 했다).
이렇게 태어난 인물들이 서울을 출발해서 부산에 도착하면 소설은 끝나는 거다. 하지만 출발과 도착이 있다고 소설이 되지는 않는다. 인물들을 태운 차량은 쉼 없이 주행해서 천안, 대전, 대구를 지나가야 하겠지만, 실제 이야기는 주행 과정에서 벌어지는 구체적인 사건의 연속이어야 한다. 양재역 1번 출구에서 만나 쏘나타를 타고 막내가 운전했는데, 가다가 기름이 떨어지고, 휴게소에서 우동을 먹다가 바퀴벌레가 나오고, 식곤증에 깜빡 졸다가 사고가 날 뻔해야 한다.
오케이. 여기까지가 얼기설기 세부 설계에 해당한다. 자 이제 슬슬 써볼까? 빈 화면에 커서가 깜빡거린다. 긴 침묵. 도대체 뭘 써야 하는 거지? 인물을 사건 속에 집어넣으면 막 저절로 술술 써질 줄 알았다. 착각이었다. 진정한 고난의 행군은 이제 시작이었다. 미도와 용식은 처음에 어디서 만났을까. 몇 시쯤이지. 미도는 용식에게 반말을 할까 존댓말을 할까. 기분은 어떤 상태였을까. 옷은 뭘 입고 있지. 여차여차 여기까지 됐다. 그래서, 그런데, 첫 단락 첫 문장은 어떻게 시작하지?
“책 쓰기는 자전거 타기”
장강명 작가는 책 쓰기를 자전거 타기에 비유했다. 처음에는 어려워 보이지만 한번 타기 시작하면 그다음은 쉽다는 뜻이다. 첫 문장에서 이틀을 헤매고, 첫 사건에서 일주일을 허비했다. 두 번째 사건은 사흘이면 가능했다. 속도가 붙었다. 하루에 한 장 쓰기도 어려웠는데 어느 날은 열 장을 썼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이고 자시고 밤을 새워 원고를 쓰다 러너스 하이(runner’s high)가 아니라 라이터스 하이(writer’s high)의 짜릿함을 느끼고 말았다.
이렇게 초고는 두 달이 채 걸리지 않았다. 초고를 완성하고 나는 내가 천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뒤 1년 넘게 걸린 퇴고 과정에서 나는 지옥을 맛보았다.
누구나 소설(을 포함한 책)을 쓸 수 있다고 믿게 만드는 마술 같은 문구가 있다.
“소설을 하루에 한 페이지씩 쓴다면, 1년 뒤 장편소설 한 권을 가지게 된다.”
간단한 산수다. 쓰는 페이지가 조금 커서 A4라면, 석 달이면 책 한 권이 된다. 1년에 장편 소설 세 권은 놀 거 다 놀아가면서 쓸 수 있다는 계산이다. 가능할까. 물론 다 뻥이다. 그게 가능하면 우리는 모두 헤밍웨이나 김훈이 됐을 거다.
하지만 나도 《책 한번 써봅시다》라는 달콤한 제목의 책을 읽고 용기를 얻었다. 믿고 싶은 걸 믿을 뿐이다. 삶이 허무하고 고통스러울 때 누구나 천국에 갈 수 있다는 구원의 말씀을 거부할 도리는 없는 것 아닌가.
지하 주차장에서는 내비게이션 GPS가 잡히지 않는다. 주차장 출구를 나가면 좌회전인가? 아님 우회전인가? 알 수 없다. 그렇다고 지하에 계속 주차만 하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일단 차를 몰고 나가면 곧 GPS가 잡힌다. 처음에 잠깐 틀린 방향으로 갈 수도 있지만 유턴하면 된다. 부산에 가고 싶으면 일단 지하에서 나와 출발하자. 도로를 잘못 타서 강릉으로 가면 또 어떤가. 주차장보다는 만 배쯤 좋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