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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시가총액 8조 원이 증발된 대규모 주가조작 사건 보도가 언론을 달궜다. 사상 초유의 경제범죄를 최초 보도하고 이후 꾸준히 이 사건을 쫓고 있는 JTBC 이호진 기자에게 취재 후기를 들어본다. 편집자 주
제보자가 처음 말을 꺼낸 건 2년 전이었습니다. 주가조작 세력이 작업 중인 회사들이라며 종목 여러 개를 귀띔해줬습니다. 제보자는 늘 조심스러웠습니다. 보복당할까 우려하면서도 양심의 가책 사이에서 갈팡질팡했습니다. 하루는 증거가 담긴 문건을 보여주겠다며 가져왔다가 도로 가져가는 일도 있었습니다. 어떤 압력을 받더라도 끝까지 갈 수 있는지, 묻고 또 물었습니다. 취재팀은 기사를 썼는데 나가지 못하는 일은 없다고 말하고, 신변 보호 방안 등을 중심으로 설득했습니다.
그리고 올 초, 드디어 제보자가 마음을 열었습니다. 내용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런 대규모 경제범죄가 수년간 누구에게도 적발되지 않은 게 가능한 것인지 믿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1조가 넘는 거래 규모에, 온갖 사회 지도층과 연예인들이 연관돼 있고, 이들이 다단계 방식으로 또다시 다른 투자자들을 끌어들이고, 직원 백여 명을 고용해 실제 기업들을 사들이거나 세워서 배분하는 수수료 정산 방식까지. 지금 대한민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이라기엔 믿기 어려웠습니다.
취재팀은 다방면으로 제보 내용에 대한 검토에 들어갔습니다. 주가조작 세력이 눈치채지 못하게 만날 수 있는 직간접적인 관련자들을 최대한 접촉해 정보들을 모았습니다. 이후 이들이 ‘수수료 정산’ 목적으로 운영하고 있다는 일부 업체 명단을 받은 뒤 각 업체 관련자 명의로 설립된 법인들의 등본을 일일이 떼며 관련 정보를 세세히 파악해 전체적인 윤곽을 그렸습니다. 며칠에 걸쳐 골프연습장, 드라마 제작업체, 승마장들을 돌아봤습니다. 제대로 영업하는 곳은 많지 않았습니다.
대규모 주가조작, 실마리를 잡다
‘이번 건은 된다’ 생각이 들었던 건 라덕연 씨가 가족 명의로 운영 중인 건국대 입구의 마라탕집 취재 때였습니다. 북적이는 번화가에 있던 술집이었는데 금요일 저녁 손님이 취재팀을 빼고는 한 팀뿐이었습니다. 매출이 전국 최고 수준이라는 곳이었습니다. 대학생들이 찾아올 법한 분위기였는데 메뉴엔 200만 원 상당의 양주가 있는 등 다른 체인점들과는 메뉴도 전혀 달랐습니다.
취재팀이 일반 손님으로 위장해 술 마시기를 한 시간여, 술집 관계자가 아무도 없는 포스기로 다가갔습니다. 관계자는 주문을 계속 넣더니, 카드를 꺼내 결제하고 이내 영수증을 뽑아 사진을 찍었습니다. 주가조작으로 발생한 이익 가운데 수수료를 고객 신용카드로 정산하는 현장이었습니다. 이 모습은 취재팀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취재팀은 또, 라덕연 씨가 서울 강남 고급 호텔 카페에서 수십억에서 백억 원 이상 투자한 거액 투자자, 이른바 ‘큰손’들과 회의하는 모습을 몰래 촬영하고 내용도 확인했습니다. 이 자리에서 라덕연 씨는 검찰이나 경찰이 수사해도 다 무혐의 처분받을 것이고, 언론사가 취재해도 문제 될 것이 없다며 투자자들을 설득하고 안심시켰습니다. 절대적인 자신감이었습니다.
이제 대규모 주가조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문제는 보도만 나갈 경우 금융 당국이나 수사 당국이 제대로 된 조사에 착수하기도 전에 이들 세력이 모든 증거를 은폐하고 잠적하거나 해외로 도피할 수 있다는 점이었습니다. 막대한 부를 축적한 이들에게 어렵지 않은 일로 보였습니다. 때문에 취재진은 금융위원회, 검찰과 접촉해 취재한 내용과 자료들을 공유하고 조사에 협조하기로 했습니다.
금융 당국도 몰랐던 사건
알려졌다시피, 이번 사건은 금융 당국이 미리 알아채지 못했습니다. 취재팀이 찾아가 범행 수법과 내용을 설명하자 놀랍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라덕연 세력이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일정 수준 이상으로 주가를 끌어올리지 않고, 매매팀은 계속 이동하며 고객의 집과 회사 근처에서만 거래한다고 이야기하자, 그렇게 한다면 감시망을 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증권 사기의 패러다임을 바꾼 신종 사기가 처음으로 금융 당국에 포착되는 순간이었습니다.

고객명과 주식 매매 장소가 적힌 실제 주가조작 자료 <출처 - 제보자 제공>
차곡차곡 현장 취재와 관련자 취재가 이뤄지던 지난 4월 24일 갑작스레 관련 종목들이 폭락하기 시작했습니다. 모두 주가조작 세력이 관리하던 종목들이었습니다. 취재팀은 주가조작 세력과 연관된 일일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습니다.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락 관련 기사들이 쏟아지는 가운데, 취재팀은 ‘알 권리’를 위해 보도를 시작해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다단계 주가조작’ 보도가 시작됐지만 다른 언론사들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분위기가 바뀐 건 ‘투자자’ 보도부터였습니다. 처음은 가수 임창정 씨였습니다. 수많은 투자자 가운데 함께 법인을 세우고 프로그램을 만드는 등 당시까지도 대외적으로 가장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던 투자자입니다. 역시나 임창정 씨는 연락을 피했고 취재팀은 이틀에 걸쳐 주변 취재를 이어갔습니다. 끈질긴 취재 끝에 결국 임창정 씨 측으로부터 연락이 왔고 인터뷰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도 투자해 손해를 봤다는 임창정 씨의 입장이 방송에 나가고, 이후 본격적으로 다른 언론사들도 취재에 뛰어들기 시작했습니다.
취재팀은 임창정 씨와 같은 유명인이나 사회 지도층 투자자들을 실명 보도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어떻게든 반론과 입장을 들으려 했고, 명확한 근거와 자료를 갖고 답을 요구하는데도 답하지 않는 인물들의 경우 부득이하게 입장 없이 기사를 냈습니다. 통상 보도 전에는 연락을 피하다가도 보도가 나가면 항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번 건의 경우 끝까지 침묵으로 일관한 이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