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상세
[기획연재]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 되짚기 05 - 현장
기획연재 | 등록일 : 2023-07-28

“수나 카라베이는 거울을 보면서 눈 화장을 고치고 버스 핸들에 기대어 아침 기도를 했다. ‘제발 인내심을 갖게 해주세요’ 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버스 안에서 바닥을 닦고, 좌석을 청소하고, 손잡이를 소독하고, 연료를 가득 채우는 등 도시에서 가장 바쁜 도로에서 10시간 동안 운전할 수 있도록 점검을 마쳤다. (…) 수나는 주(州) 의사당을 지나 시내를 지나 로키 산맥으로 향하는 30마일이 넘는 4차선 콜팩스 도로로 버스를 몰았다. 45세의 그녀는 거의 10년 동안 덴버 15번 버스 노선을 운전하며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 그녀가 매일 버스에서 마주하는 덴버는 새로운 전염병의 물결로 변한 상태였다. 팬데믹이 시작한 뒤 덴버의 노숙자 수는 50%나 증가했다. 폭력 범죄는 17%, 살인은 47%, 일부 재산 관련 범죄는 거의 2배 증가했다. 펜타닐과 메탐페타민 압수량은 최근 1년간 4배로 증가했다.” (워싱턴포스트, 2022.6.5.)

 

올해 퓰리처상 장편 글쓰기(Feature Writing) 부문을 수상한 미국 워싱턴포스트 기사의 한 대목이다. 작성자는 미국의 언론인이자 작가인 엘리 새슬로우(Eli Saslow). 새슬로우는 하루를 시작하는 수나와 버스에 탑승한 승객의 반응을 몇 문단에 걸쳐 묘사하고 난 뒤 진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새슬로우는 수나의 시선을 빌려 팬데믹 이후 도시의 변화를 보여주면서 노숙자 증가율과 범죄 관련 통계를 슬그머니 독자들에게 보여주기 시작한다. 그는 약 2만 자(영문 기준) 분량의 기사를 통해 자신이 직접 관찰한 장면과 수나의 이야기, 그리고 팬데믹 관련 각종 ‘팩트’와 사례를 조금씩 버무리며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하나의 스토리를 완성했다. 퓰리처상 심사위원회는 새슬로우의 기사를 두고 “팬데믹 국면에서 어려움을 겪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현대 미국 사회의 모습을 날카롭게 관찰할 수 있다”고 평가했다.

 

이 기사를 취재 내용을 요약해 제시하면서 정보를 중요한 순서대로 배치하는 일반적인 ‘역피라미드형’으로 바꾼다고 가정해보자. 덴버(Denver)의 노숙자 수가 팬데믹 이전보다 50% 늘어나고 마약 압수량이 4배로 증가했다는 통계 수치가 기사의 첫머리인 ‘리드’ 문장에 나올 것이다. 이어 다양한 통계와 함께 전문가의 분석, 현장의 반응, 정책 당국의 대응 방안이 담겨 완결성 있는 ‘스트레이트 기사’로 구성될 것이다. 기자가 수나를 관찰 취재하고 인터뷰한 내용은 어떻게 쓰일까. 스트레이트 기사 뒤에 팬데믹 이후 도시의 변화상을 현장에서 목격한 하나의 사례나 ‘코멘트’로 활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새슬로우가 완성한 기사와는 상당히 다른 결과물이 나왔을 것이다.


역피라미드 형식을 벗어나지 못하는 이유

 

한국 언론과 기자들이 역피라미드 형식의 기사를 주로 활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사실 ‘시간’이다. 글쓴이는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팀(히어로팀) 5기에 참여하면서 인물과 이야기가 담긴 기사를 쓰기 위해 평소보다 얼마나 더 많은 노력과 시간이 필요한지 경험했다. 히어로팀은 지난해 8월 순직 공무원 유가족의 이야기를 다룬 기사 <산화, 그리고 남겨진 사람들>을 연재소설 형식으로 6회에 걸쳐 보도했다.

 

당시 히어로팀은 전체 기사를 끌어갈 주인공 격인 취재원(순직 소방관 유가족)을 찾아 설득하고 섭외하는 데만 40여 일을 썼다. 이어 유가족의 일상을 따라다니며 관찰 취재하면서 신뢰를 쌓고 인터뷰 내용이 사실인지를 교차 검증하기까지 3개월 넘는 시간이 걸렸다. 유가족의 주변 인물 30여 명을 만나 이야기를 듣고 공문서와 스마트폰 대화 내용까지 꼼꼼하게 확인하는 과정이 필요했다. 방대한 취재 내용을 독자들이 몰입할 수 있는 하나의 이야기로 꿰어내는 작업에도 꽤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히어로팀은 출범 5개월 만에야 활동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취재) 기자 4명이 공들인 작품이지만 국내 여느 언론사에선 버거운 작업방식인 만큼 기사 생산의 효율성을 높이는 방안이 미래 과제다.”

 

지난해 관훈언론상 심사위원회는 히어로팀의 ‘산화’ 시리즈를 저널리즘 혁신 부문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도 국내 언론 현실과 바로 맞닿아 있는 문제를 정면으로 지적했다.

 

국내 언론사에 소속된 상당수 기자는 매일 발생하는 새로운 뉴스를 전달하는 일에 전념하고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조사에 따르면 2021년 기준으로 신문 기자들은 일주일 평균 13.7건의 지면 기사를 작성했다(2021 한국의 언론인). 이처럼 하루에 기사를 여러 건 작성해야 하는 상황에서 정밀한 관찰과 교차 검증을 거쳐 재밌는 보도물을 만들기 위한 작업은 일종의 ‘사치’로 여겨질 수밖에 없다.

 

인물과 이야기 중심의 스토리텔링형 기사가 언론계 안팎에서 상대적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문화도 스트레이트 기사가 널리 쓰이는 이유 중 하나로 꼽을 수 있다.

 

2014년 관훈언론상 심사위는 저널리즘 혁신 부문 수상작으로 과거 인권 침해 사건을 보도한 한겨레의 <형제복지원 대하 3부작>을 선정했다. 당시 관훈언론상 보고서를 보면 일부 심사위원은 이 보도를 두고 “너무 정통 저널리즘과 멀어진 것 아니냐”고 지적했다. 과거 사건을 소설처럼 재구성한 형식이 담백하게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는 역피라미드형 스트레이트 기사와 큰 차이를 보였기 때문일 것이다.

 

심사위는 표결 끝에 이 보도를 수상작으로 선정하면서도 “소설적 기법의 내러티브 보도는 특별한 장점과 함께 부분적인 고민거리도 안겨줬다”는 의견을 남겼다. 심사에 참여한 현직 언론인과 교수 등의 복잡미묘한 심경을 드러낸 평가였다.


몰입과 공감을 불러오는 특별한 매력 필요

 

이후 9년이 흘렀어도 언론계 안팎의 인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한국기자협회가 언론인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제공하기 위해 좋은 보도를 정기적으로 선정하는 ‘이달의 기자상’과 ‘한국기자상’의 수상작 목록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른바 주류(主流) 스트레이트 기사가 매우 높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 권력의 민낯과 사회의 이면을 파헤쳐 독자들에게 직관적으로 드러낸 보도다.

 

기자라면 누구나 직접 쓴 기사가 더 많이 읽히고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길 희망한다. 새롭고 창의적인 시도를 하려고 해도 언론계와 사회에서 이를 인정해주지 않는 분위기라면 누구도 쉽게 도전하기 어렵다. 상당수의 젊은 기자는 기사를 조금이라도 다른 방식으로 써보려 하다가 데스크의 손을 거치며 역피라미드형 기사로 바뀐 경험이 있을 것이다.

 

역피라미드형 스트레이트 기사는 잘못이 없다. 독자들에게 내용을 정확하고 빠르게 전달하는 가장 효율적인 기사다. 그래서 수십 년간 널리 쓰여온 것이다. 문제는 한국을 대표하는 ‘뉴스 콘텐츠’들이 대체로 딱딱한 스트레이트 기사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는 점이다.

 

SNS와 OTT 등 새로운 디지털 플랫폼이 빠르게 성장하고 있는 요즘 ‘기사’의 경쟁 상대는 더 이상 ‘다른 언론사의 뉴스’가 아니다. 언론사는 전 세계에서 쉼 없이 쏟아져 나오는 모든 콘텐츠를 상대로 독자들이 기사를 읽도록 하기 위한 생존 경쟁을 벌이고 있다.

 

디지털 플랫폼 이용자의 관점에서 쉽게 생각해보자. 한정된 시간을 어떤 콘텐츠를 위해 쓸 것인가. 무조건 재밌어야 한다. 다른 세상의 이야기가 아니다. 다양한 디지털 콘텐츠와 실시간으로 경쟁해야 하는 언론사의 기사도 결국 재밌어야 독자들이 읽는다. 여기서 말하는 ‘재미’는 단순히 ‘fun(즐거움)’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독자들이 기사에 흠뻑 빠져 몰입해 공감할 수 있는 ‘특별한 매력’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국언론학회장을 맡고 있는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2010년 <언론 체계와 신문의 가치 창출> 논문에서 “한국 신문(언론)은 사회적으로 중요하면서 흥미롭고, 문제가 되는 사안을 좋은 이야기로 만들어 ‘읽는 재미’를 (독자에게) 제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진실 추구, 독립성 등 저널리즘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선에서 최선의 방식으로 재밌는 기사를 작성할 때 독자들의 선택을 받을 수 있다는 의미다. 이 같은 제언이 나온 것도 벌써 13년 전 일이다.

 

다행스러운 것은 한국 언론계 곳곳에서 독자들이 깊게 몰입할 만한 기사를 제작하려는 시도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다는 점이다. 60∼70대 여성 노동자의 이야기를 새로운 스토리텔링 기사로 풀어낸 경향신문의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지난해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서울신문은 최근 스위스에서 한국인으로는 열 번째로 조력 사망한 80대 남성을 밀착 취재해 작성한 스토리텔링 기사로 <금기된 죽음, 안락사> 기획 시리즈를 시작하며 화제를 모았다. 동아일보가 2020년 출범시킨 히어로팀 1∼6기는 매번 새로운 형태의 내러티브 기사와 디지털 특화 콘텐츠를 선보이며 독자들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

 

이른바 ‘잘 읽히는 기사’를 쓰기 위해 각 언론사와 현장 기자들은 물밑에서 이처럼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물길질을 이어온 것이다. 당장 눈앞에 닥친 발생 기사 마감 같은 ‘현실 업무’를 처리하면서도 작은 부분이라도 새롭게 혁신하려는 몸부림이다. 이러한 노력과 고민이 조금씩 쌓이고 있는 만큼 조만간 한국 언론계도 역피라미드형 스트레이트 기사 중심의 ‘단색’에서 벗어나 다채로운 색채를 갖추리라 확신한다.

저자의 다른 미디어
  • 필자 : 지민구
  • 소속 :
  • 직함 :
  • 발행 : 2023-07-28
  • 조회수 : 51
  • 키워드 :
블로그 공유 트위터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