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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능 ‘킬러 문항’ 논란이 뜨거웠다. 사교육, 변별력 문제 등 얽히고설킨 입시의 실타래를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전문가들에게 전화를 걸어 이것저것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한 전문가가 인터뷰 말미에 이런 말을 건넨다.
“솔직히, 킬러 문항은 의대 준비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의 관심사입니다. 대부분 수험생은 킬러 문항 안 풀고 그냥 넘어갈 때가 많죠.”
그러니까 며칠 동안 톱뉴스 자리를 꿰찼던 킬러 문항 논란은 의대 입성의 가늠자가 바뀔 수 있음을 함축할 뿐, 수험생 절대다수의 문제는 아닐 수 있다는 의미였다. 상위층 담론에 기민했던 우리 저널리즘의 자화상일지도 모르겠다. 교육, 더 정확히는 입시만 하더라도 기자들의 시선은 상위권 대학과 의대를 중심으로 향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 저널리즘의 우선순위는 그렇게 엘리트 담론을 향한다.
다 그렇지는 않지만 킬러 문항을 바라보는 우리의 기사 쓰기도 관성적이었다. 킬러 문항이 사교육의 주범이다, 혹은 없애면 변별력 문제가 생긴다, 설왕설래를 기계적으로 전시한다. 절제 혹은 균형이라는 진부한 규범을 소환하며 예의범절에 충실하다. 또 그러면 우리의 기사가 미디어 수용자들로 하여금 불편부당하게 소비될 거라고 믿는다.
‘엘리트’의 관심사가 공동체의 관심사를 오롯이 반영하고 있다는 착시, 그간 우리가 소환했던 ‘규범’적 예의 바름이 최선이라는 관성, 미디어 ‘수용자’들이 우리의 기사에 쉽게 부응할 거라는 환상…. 이런 착시, 관성, 환상은 결국, 저널리즘이 공동체 현실을 얼마나 오독(誤讀)하고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상징적 장면이 아닐까.
저자들의 제언, 개혁과 혁명
《저널리즘 선언-개혁이냐, 혁명이냐(이하 저널리즘 선언)》는 엘리트, 규범, 수용자, 바로 이 세 가지 열쇳말에 주목하며, 현실과 유리되는 우리 시대 저널리즘의 뒤안길을 다룬다.
책은 먼저 ‘엘리트를 위해서만 존재하는 저널리즘’(40쪽)을 사유한다. 뉴스를 만든다는 명목으로 저널리스트와 엘리트가 사실상 공생 관계를 유지해 왔음을 역설하며 포문을 연다. 하지만, 민주주의의 퇴행 속 엘리트들은 도저히 안녕할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엘리트의 위상 변화를 목격하고 있다. 민주주의를 선도하고 있다고 ‘알려진’ 영미와 유럽 국가에서조차 반(反)엘리트주의가 유행병처럼 번진다. 반엘리트를 주창하는 포퓰리스트가 대통령이 되고, 총리가 되는 세상이다. 엘리트의 균열은 저널리즘을 심판의 순간으로 몰아넣고 있다(70쪽). 변화하고 있는 엘리트 시스템에 위탁하는 저널리즘의 미래는 어떠할 것인가. 엘리트 시스템에 위탁하는 저널리즘에 과연 미래가 있는가.
저자들은 이어 현실과 동떨어진 저널리즘 규범을 사유한다(42쪽). 저널리스트들이 금지옥엽처럼 떠받드는 여러 규범, 이른바 정확성, 진실성, 책임성, 투명성은 번지르르하지만 모호하기 그지없다는 것이다. 세상은 가파르게 변하고 있지만, 저널리즘 규범은 여전히 같은 형상으로 박제돼 있다. 그간의 관행적 규범들은 저널리스트의 비판을 무디게 만들고, 결과적으로 권력에 영합하는 도구로 변주되기도 한다. 불평등과 주변화, 억압의 문제는 그렇게 간과되며, 저널리즘의 외연을 협소하게 만든다(96쪽).
그렇다면 이처럼 현실과 동떨어진 규범을 안고 버티는 저널리즘은 과연 지속가능할 수 있을 것인가.
끝으로 저자들은 미디어 수용자들의 불신을 사유한다(43쪽). 미우나 고우나 저널리즘의 든든한 옹호자였던 수용자들은 디지털 시대의 개막과 함께 디지털 콘텐츠로 집단 이주를 시작했다(44쪽). 저널리스트들은 늘 그렇듯 수용자가 알아야 할 뉴스를 가르치려 들지만, 레거시 미디어의 의제 설정은 별 효능감이 없다.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뉴스를 수용자들도 중요하게 여길 거라는 착시다. 수용자의 불신 속 독야청청(獨也靑靑)하는 저널리즘은 과연 생존할 수 있는가.
저자들의 소결은 이렇다. “저널리즘은 이제 소멸할지도 모른다.”
이에 대한 저자들의 제언은 개혁과 혁명이라는 두 표제어로 함축된다. 두 경로는 자유 민주주의에 대한 시선에 따라 갈린다. 저자들에 따르면 개혁은 저널리스트가 자유 민주주의의 옹호자가 돼 복무하는 대안이다. 사회적 불평등을 목격하는 데 그치는 게 아니라, 그 상황을 수정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며, 그 핵심은 포용성이다. 저자들이 말하는 포용성이란 공동체 구성원 각양각색의 목소리를 평준화하지 않으면서 전달하는 저널리즘이다(137쪽).
저자들의 또 다른 제언인 혁명은 자유 민주주의의 범주에 갇히지 않는, 그 너머를 바라보는 대안이다. 폭력으로 뒤엎자는 게 아니다. 엘리트가 전혀 없는 저널리즘을 상상하자는, 보다 확장된 저널리즘의 자유를 적극적으로 갈망하자는 의미다(146쪽).
주변의 소외된 이들을 모두 보듬을 수 있는 저널리즘, 이상적 규범이 아닌 현장의 쓸모를 지향하는 저널리즘이다.
저널리즘의 가능성과 자부심에 대한 사유를 위해
이제 《저널리즘 선언》의 사유를 통해 나의 저널리즘 노동을 바라볼 차례다. 나는 지상파 방송사에 복무하는 팩트체커다. 지금 나의 팩트체크 노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회적 상황은 진영 양극화로 상징되는 긴장감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믿고 싶은 것만 믿는 시대, 거친 갈등은 피아를 명징하게 가르며 정치적 오해를 만든다. 나는 팩트체크라는 레테르(상표)를 달아 기사를 생산하지만, 정작 나의 기사는 진영의 유불리로 읽힌다. 절반은 진정한 기자라며 환호하지만, 나머지 절반은 기레기라는 멸칭으로 공격한다.
결국, 나는 우리 안에 박제된 절제와 기계적 균형이라는 관성적인 저널리즘 규범으로 되돌아간다. 가령, 대선 팩트체크를 할 때도 두 유력 후보의 검증 개수를 맞추는 식이다. 이 진부한 규범은 이 책이 싫어하는 싱거운 예의범절에 가깝다.
팩트체크의 효능감 문제를 차마 간과할 수가 없었던 까닭이다. 나는 내 기사가 진영 논리의 도구로 읽히지 않았으면 좋겠다. 설령, 수용자 자신에게 불리한 팩트체크라도 공감해주길 바란다. 날 선 비판의식으로 사람들을 거세게 몰아붙이는 화법이 우리 시대에 맞는 화법인지도 모르겠다.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한 미디어 수용자들의 반감도 거세다. 훈계적이고 계몽적인 화법은 정서적 반감을 키우곤 한다. 트럼프 지지자들은 트럼프가 밥 먹듯 거짓말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열성적으로 그를 지지한다. 아무리 사실을 말해도 열성적인 지지자들을 훈계했던 저널리스트의 계몽 의식은 옳게 소비될 수 없었다. 오히려 여기서 생긴 반감이 트럼프 현상을 잉태했는지도 모른다. 이런 맥락에서 결국 나의 팩트체크 규범은 밍밍해질 수밖에 없다. 책이 말하는 것처럼, 미디어 수용자가 마냥 합리적이지만은 않은 까닭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또 미디어 수용자들의 합리성을 믿어야만 한다. 이 책은 저널리스트들이 미디어 수용자를 저널리즘의 가치를 충분히 인식하는 존재로 오독하고 있다고 비판한다(44쪽). 지금의 미디어 수용자들은 과거에 비해 부족적(추상적 대의보다 국소적 연대를 중요하게 여긴다는 의미에서)이고, 감정적이며, 표현적이고, 회의적이라고 진단한다(127쪽). 하지만, 나의 팩트체크 노동은, 미디어 수용
자들이 사실과 진실을 좋아하고, 심지어 정언명령으로 여기고 있음을 전제해야 성립될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팩트체커의 자위에 그칠 뿐이다.
심지어 나는, 이 책에서 가장 싫어하는 엘리티즘(elitism)에 의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책이 말하듯 엘리트가 전혀 없는 저널리즘은 상상만으로도 멋진 일이다. 하지만, 팩트체크 노동은 늘 전문가를 향하고, 그 전문가들은 늘 정치 엘리트 그 자체거나 그들과 지난하게 연결된 사람들이다. 엘리티즘은 참 ‘재수 없지만’, 또 한편으로 엘리트의 판단은 ‘문지기’라는 이름으로 공동체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스티븐 레비츠키(Steven Levitsky)와 대니얼 지블랫(Daniel Ziblatt)의 《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는 트럼프 현상의 원인으로 공화당 내부 문지기 기능이 사라진 것을 지목한다. 정치 엘리트가 대의(大義)가 아닌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대선 후보를 결정하는 것은 민주적이지 못하지만, 이를 제대로 가려내는 절차 역시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말하는 문지기 기능과 엘리티즘을 한끝 차라고 읽었다. 팩트체커 역시 허위 정보의 치안권자로서, 치안 엘리트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 엘리트 의식 없이 나는 그만한 책임감을 가
질 자신이 없다.
물론 책에서 말하는 엘리트와 내가 말하는 엘리트는 다를 수 있다. 《저널리즘 선언》이라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책은 마르크스의 《공산당 선언》을 오마주하며 엘리트를 계급론적, 계층론적 개념으로 접근한다. 하지만, 나는 저널리즘 현장에서 이 복잡한 개념을 무 자르듯 구분해 내기가 어렵다. 이 책을 통한 나의 사유는 이렇게 복잡하게 얽히고설켰다. 상충되고 모순되기도 한다. 책의 선언은 구구절절 온당하지만 내가 맞닥뜨렸던 노동의 각론을 상기하면 구구절절 역설로 가득해졌다.
나는 그 역설의 중심에, 이 책이 미디어 수용자 문제를 과소한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책은 미디어 수용자에 대해 꽤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있지만, 저널리스트와 수용자 간의 상호작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덜하다. 가령, 수용자의 특성을 오독하고 있는 것이 우리 시대 저널리즘 왜곡의 본질일까. 디지털 미디어 시대, 이른바 속보 경쟁, 낚시질, 클릭 유도와 같은 경솔한 저널리즘은 어떤가. 오히려 미디어 수용자의 선호를 지나치게 정독(精讀)해서, 그래서 우리가 그간 지켜왔던 전통적이고 관행적인 문지기 기능을 스스로 훼손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책의 가능성을 믿는다. 책의 선언과 나의 팩트체크 노동을 연관 지어 사유할 수 있었던 것은, 팔 할이 책이 가진 진지함 덕분이다. 《저널리즘 선언》은 우리 시대 저널리스트를 매몰차게 몰아세우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저널리즘의 가능성과 자부심으로 충만해 있다. 이런 까닭에 자존감이 바닥난 우리 시대 저널리스트들이 꼭 읽었으면 하는 책이기도 하다. 헐거운 수준의 사유라도 할 수 있게 판을 깔아준 건 고마운 일이다. 혼탁한 미디어 시장, 저널리스트인 우리는 우리의 노동을 사유할 만큼 여유롭지 못했으니까. 그 누구보다 절실히 사유해야 하는 사람들임에도 불구하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