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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약 76개 국가에서 42억 명이 투표에 참가할 것으로 추산되는 슈퍼 선거의 해다. 전시 상황에서 치러진 3월 러시아 대통령 선거를 필두로 6월 유럽의회 선거, 11월 미국 대선까지 중대선거(critical election)가 줄지어 예정돼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선거는 권력을 형성하는 유일한 제도로서, 공정한 선거 없이 민주주의는 없다. 정치학자 쉐보르스키(A. Przeworski)는 민주주의를 불확실성의 제도화(institutionalization of uncertainty)로 언명하였다. 그것은 ‘주기적 선거, 공정한 규칙, 결과의 불확실성, 결과에 대한 승복’으로 구성된다. 이런 면에서 한국은 1987년 민주주의 이행 이후의 선거에서 빛나는 금자탑을 쌓아 올렸다. 단적으로 8차례의 대통령 선거를 안정적으로 치르며 4차례의 권력 교체를 이뤄낸 성과는 후발 민주주의 국가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월드와이드웹(world wide web) 등장 이래 부단한 정보통신 혁명은 기술을 사회변동의 핵심 요인으로 정착시켰다. 웹사이트에서 소셜미디어로 그리고 인공지능으로의 플랫폼 진화는 곧 인류 문명의 도약을 함축한다. 특히 기술을 소수 전문가 영역에서 다수 대중의 영역으로 개방해 온 흐름은 기술 문명사의 지대한 공로다. 일찍이 하워드 라인골드(Howard Rheingold)가 ‘위대한 평등자(the great equalizer)’로 칭송한 바처럼, 뉴미디어는 사회계층 간 경계를 넘어 전방위적으로 작동하는 영속적인 사회변동 기제로 인식된다. 정치 과정에서도 이러한 변화가 가속돼 대의민주주의는 아래로부터의 참여 민주주의와 길항(拮抗)하며 역동성을 배양해 왔다. 특히 오프라인에서 온라인으로 무게중심이 현격하게 이동한 선거 캠페인은 현대 민주주의의 총아로 운위된다.
이렇듯 2000년대는 민주화와 정보화가 전면적으로 교차하며 개막됐다. 그러나 민주주의와 기술의 만남이 늘 희망의 미래를 빚어낸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지속적으로 민주주의에 대한 중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열린 사회의 적들의 출현이다. 그들은 광범한 유권자 참여와 역동적인 캠페인의 막후에서 선거의 정당성을 훼손하며 절차적 민주주의를 무너뜨렸다. 시초는 2002년 대선의 병풍사건이었다. 군 출신의 김대업이 야당 대선 후보 아들이 병역을 기피했다고 폭로했다.
그럴듯한 증거자료가 언론 매체와 인터넷을 타고 범국민적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개표 결과 1·2위 후보 간의 득표율은 2.3%포인트에 불과하여 확인되지 않은 뉴스가 승패를 가르는 분기점이 되기에 충분했다. 이어서 2012년 대선 전까지 국가기관의 온라인 여론 개입이 이뤄지기도 했다. 당시 수사 결과, 주요 포털사이트와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야당과 정부 비판 세력에 대한 광범한 댓글 공세가 이뤄졌고, 국군 사이버사령부와 기무사령부의 여론 개입이 드러나기도 했다. 2016년 대선 전에는 드루킹의 매크로 프로그램을 이용한 포털사이트 검색어 순위 조작 및 대규모 댓글 공세가 드러나 조작되지 않은 포털 토론장이 없다는 비난이 고조되기도 했다.
근래의 생성형 AI 열풍은 AI에 대한 선험적 인식을 현실적 경험으로 전화시키고 있다. 정보 유통 생태계에서 생성형 AI 또한 ‘초고도화된 콘텐츠 생성 플랫폼’으로 개념화할 수 있다. 그런데 정보 생성 알고리즘이 인간이 창안한 산물이며, 투입되는 정보들의 다양한 속성과 사회적 맥락이 혼재돼 있다는 점에서 ‘트루스(Truth) AI’를 구현하는 것이 가능할지 의문시된다. 즉 끊이지 않는 가짜뉴스 이슈가 시사하듯이, AI에서 파생되는 오정보(misinformation)와 허위 조작 정보(disinformation) 등 탈진실 정보의 범람을 통제하는 것이 AI 확산의 대전제다. 특히 역대 대선이 지시하는 것처럼 정보의 진위 여부보다 생성의 의도(intention)를 판별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따라서 강한 목적의식을 가진 방향성 동기화(directional motivation)를 규율하는 시스템을 확립하는 것이 관건이다. 테슬라 최고경영자인 일론 머스크는 “챗 GPT가 때때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 ‘트루스(Truth) GPT’라는 이름의 진실을 추구하는 AI를 만들겠다”고 공표한 바 있다.
탈진실 AI의 선거 민주주의 위협은 이미 현실로 부상했다. 지난 미국 대선과 유럽의회 선거에서 러시아에서 출원한 챗봇과 생성형 AI를 이용한 가짜뉴스 확산이 쟁점으로 제기됐다. 그리고 영국의 브렉시트 탈퇴 여부 국민투표에서도 러시아 계정에서 브렉시트에 관련한 15만 6,252개의 트윗 게시물과 4만 5,000개의 메시지가 발송된 것으로 조사됐다. 근래 미국에서는 트럼프 전 대통령이 체포되거나, 바이든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탱크 지원을 호소하는 내용의 딥페이크(deep fake) 영상과 음성이 큰 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지난해 5월 미국 국방부 청사 폭발 사진이 유포돼 금융시장에 위기를 초래하기도 했다. 국내에서는 지난 지방선거 무렵 한 후보가 대통령 AI 동영상을 유세에 활용해 불법 선거 논란을 빚은 바 있다. 이밖에 세계 각국에서 챗봇과 AI 아바타 딥페이크 범용화로 인하여 법제 간의 충돌과 선거 참여 형평성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신생 플랫폼이 등장하게 되면 늘 오용의 문제가 뒤따르고 진흥과 규제 사이에서 사회 갈등이 심화되는 경로의존성(path-dependency)을 벗어나지 못한다. 반면 플랫폼의 개인화 시대에 미디어와 이용자의 책무성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중요해졌다. 그리고 AI가 인간과 같은 권리의 주체로 공인되는 트랜스 휴머니즘(transhumanism)이 개화하게 되면 미래 플랫폼의 파급력은 상상 이상이 될 것이다.
이에 따라 세계 각국의 정부와 국제기구들은 AI 규범과 디지털 권리의 재구조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럼에도 앞서 말한 책무성이 제도화되지 않는다면 현재의 논의는 사문화될 가능성이 크다. 아울러 지난 수세기 동안 인류의 숭고한 희생을 통해 쌓아 올린 민주주의도 탈진실의 도전 앞에 퇴행할 것이다. 책무성의 제도화에는 플랫폼 사업자를 규율하는 강고한 법률과 규범이 필요하며, 공정이용(fair use)에 대한 사회적 협약과 엄격한 이용자 규약도 필수적이다. 아울러 국내외적으로 국가와 시장 간의 위임 거버넌스를 통해 실효성 있는 규제 시스템을 정초하는 과제가 요청되고 있다. 그리고 탈진실 정보를 악용한 공직 선거 농단 등 범죄행위에 대해서는 가중처벌 등을 통해 선거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지능정보화 시대에 헌정 체제와 민주적 정당성을 강화하기 위한 핵심 과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