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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국인 계절 근로자 프로그램은 파종기·수확기 등 단기간 집중적으로 일손이 필요한 농어촌의 근로자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만들어진 제도다. 문제는 브로커가 개입해 온갖 불법과 인권침해의 온상이 되고 있다는 것. 현지까지 찾아가 필리핀 노동자들의 피해 실태를 고발한 KBS 광주방송총국의 취재기를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지난 1월 전라남도 해남에서 필리핀 국적 계절 근로자들이 한국인을 고소하는 보기 드문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수수료 명목으로 임금의 반을 갈취했다는, 소문처럼 떠돌던 ‘브로커’를 외국인 노동자가 고발한 겁니다. 브로커는 외국인 노동자의 여권과 통장을 빼앗고 강제 출국을 운운하며 협박을 일삼았습니다. 월급날이면 통장에서 돈을 이체해 가거나 때로는 수금을 돌았습니다.
법무부 지침으로 운영되는 외국인 계절 근로자 프로그램은 원칙적으로 사인(私人)의 개입을 금지하고 있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프로그램을 도입한 지자체들은 브로커의 존재를 마지못해 시인하면서도 여건상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이었습니다. 농어촌 인력난 해소를 위해 도입했지만, 브로커의 개입 아래 불법과 인권침해의 온상이 돼 있었습니다.
계절 근로자 4만 시대, 관리·감독은 허술
정부가 2015년 도입한 외국인 계절 근로자 프로그램. 지난해 4만 명의 외국인 노동자가 국내에 들어왔고, 올해는 상반기에만 4만 8,000여 명이 각 지자체에 배정됐습니다. 하지만 법적 근거가 미비해 법무부 지침에 의해서만 운영되고 있으며 관리·감독도 허술하기만 합니다. 국내 지자체가 외국 지자체와 직접 업무협약을 맺는 구조로 여건이 열악한 일부 지자체는 계절 근로자의 모집과 송출, 관리를 도맡아 주겠다는 브로커의 유혹에 넘어가는 실정입니다. 해남 고소 사건은 그 핵심인 브로커의 실체가 드러났다는 점에서 중요했습니다. 고소 사실을 기반으로 낸 첫 보도 이후 보도국에서는 심층 취재가 필요하다는 판단이 나왔습니다. 곧바로 추가 피해자 찾기에 나섰습니다. 브로커 고소에 도움을 줬다는 한 이주민 인권 단체를 수소문해 접촉하면서 실마리를 잡았습니다.
고소 사건 보도는 신호탄이 됐습니다. 이주민 인권 단체 관계자의 초대로 들어간 페이스북 메신저 제보방에는 수십 명의 필리핀 노동자들이 유사 피해를 호소하고 있었습니다(취재 과정에서 만난 필리핀 국적 노동자 대부분은 페이스북을 통해 서로의 소식을 주고 받았으며 통화도 페이스북 메신저를 이용했습니다). 해남을 비롯해 완도와 고흥, 진도 등지에서 일하는 계절 근로자였습니다. 해남 사건에서 드러난 홍 모 씨를 비롯해 미스터 김, 미스터 리 등 여러 브로커의 이름이 오르내렸습니다. 브로커와 주고받은 문자 메시지나 불법적인 보증금 계약서, 수금하는 모습이 찍힌 사진과 영상이 공유됐습니다. 방송 매체 특성상 직접 피해자를 만나 생생한 목소리를 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고용주와 브로커의 눈치를 살피느라 몸을 사리는 분위기였습니다. 해남 고소 사건 이후 브로커의 단속이 강화됐다는 얘기도 들려왔습니다.
피해 노동자 접촉 난관에 해외 취재 전향
완도의 한 섬마을에서 자원자 한 명이 나왔습니다. 하지만 끝내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소재는 파악됐지만, 계절 근로자 신분인 그는 숙소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실정이었고, 매번 달라지는 휴식 시간에 맞춰 취재진과 일정을 조율하기도 쉽지 않았습니다. 브로커가 계절 근로자들을 찾아다니며 수금하는 순간을 포착하려고도 해봤지만, 전남 섬 곳곳에 뿔뿔이 흩어져 있는 계절 근로자 가운데 어느 날, 누구에게 갈지도 가늠할 수 없었습니다. 결국, 완도 피해자는 화상 통화를 이용해 인터뷰를 진행했고 이를 보도했습니다. 해남 브로커가 약취유인 혐의로 입건돼 수사가 진행되고 전라남도가 인권침해 전수 실태조사에 나서는 등 사안은 진전이 이뤄졌지만, 사건 보도를 하면서도 현장의 생생함을 전하지 못한 게 아쉬움으로 남아 필리핀 현지 취재에 나서게 되었습니다.
해남에서 발생한 인권침해 사건은 필리핀 현지에서도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지난 1월 중순쯤 필리핀 정부는 한국으로의 계절 근로자 송출을 중단하겠다고 발표했고 이는 필리핀 현지 언론을 통해 보도됐습니다. 하지만 정작 국내에서는 주무 부처인 법무부조차 이러한 상황을 공식적으로 알리거나 확인해 주지 않았습니다. 필리핀 대사관과 관련 부처에 전화를 걸고 이메일을 보내도 좀처럼 답이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때마침 필리핀 중앙 부처인 해외이주노동자부(DMW, Department of Migrant Workers)가 한국에서의 계절 근로자 문제 해결을 위한 포럼을 진행할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하게 됐습니다. 현지 정부 관계자로부터 직접 사실을 확인하면 될 일이었습니다. 포럼을 일주일 남겨두고 급하게 해외 취재 일정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현지 취재에 나선 김에 과거 한국에서 일했던 계절 근로자들을 만나 피해 사례를 수집하기로 했습니다.
인권 단체 통해 당국자 접촉·실태조사까지
그렇게 지난 2월 중순쯤 필리핀으로 향했습니다. 주어진 취재 기간은 닷새. 해남 브로커 고소에 관여했던 이주민 인권 단체의 도움이 컸습니다. 이 단체가 범아시아권 인권 단체(MFA, Migrant Forum Asia)와 연결돼 있어 필리핀 해외이주노동자부 포럼에 공식 초청자 자격으로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으로의 계절 근로자 송출 중단에 대한 당국자의 공식 입장을 인터뷰하고 관련 행정명령 문건도 확보했습니다. 관계자 취재를 거치며 계절 근로자 제도를 다루는 양국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법무부의 관리 아래 지자체가 당국의 허가를 받아 외국인 노동자를 들여오는 제도였지만, 필리핀에서는 정부 개입 없이 지자체 자체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지자체마다 쓰이는 계약서나 비용도 달랐습니다. 브로커는 현지 지자체의 에이전시로 나서서 계절 근로자의 모집과 송출에 개입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서 계절 근로자로 일했던 노동자들을 찾는 일은 생각보다 수월하게 진행됐습니다. 이미 페이스북 메신저를 통해 한국과 현지에 머무는 노동자들과 연결돼 있었던 데다, 사전 페이스북에 시간과 장소를 공지해 취재진이 도착했을 때는 이미 80여 명의 피해 노동자들이 모여있었습니다. 필리핀 타를라크(Tarlac)주 아풀리드(Apulid)라는 빈촌에서 이뤄진 피해 실태조사는 이주민 인권 단체가 자체 제작한 설문지를 이용해 진행됐습니다. 먼저 계절 근로자로 일했던 기간과 지역, 통장과 여권 압수 여부, 임금 착취나 체불 여부 등을 적게 했습니다. 특이 사항이 있는 피해자는 불러내 면접을 이어갔습니다. 이탈 방지 명목의 보증금과 실비보다 부풀려진 이면 계약서, 연대 책임 등 인권침해에 해당하는 내용이 여기서 나왔습니다.

현지에서 파악한 브로커의 개입 실태
또 하나의 수확은 브로커가 현지 지자체와 깊숙이 결탁돼 있다는 증언이었습니다. 현지 주민들에게 한국 계절 근로자는 누구나 바라는 일자리였습니다. 농촌 마을에서의 반년치 임금이 한국에서 한 달 일한 것과 맞먹는 수준이기 때문입니다. 한국 계절 근로자를 다녀오면 고향에 집도 짓고 땅도 살 수 있다는 게 주민들 얘기입니다. 과도한 수수료를 물고 임금을 떼여도 많은 돈을 벌 수 있기에 일부 노동자는 한국인 브로커를 ‘보스’라고 부르며 따랐습니다. 미스터 김, 미스터 리 등 지역마다 대표적인 브로커가 터를 닦고 있었고, 이들은 해당 지자체와 유착 관계를 맺고 있다는 증언이 이어졌습니다.
현지 주민이 계절 근로자를 하려면 지자체마다 설치된 페소(PESO)라는 고용센터에 서류를 제출하는 게 첫 관문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브로커의 개입이 시작된다는 점이었습니다. 피해 노동자들은 페소의 신청 창구에 브로커를 돕는 현지인이나 유착 공무원이 앉아 수납을 맡고 있다고 주장했습니다. 실제로 필리핀 지자체장과 브로커가 나란히 계절 근로자들에게 사업 설명을 하는 장면이나, 브로커가 나서서 신청자들을 대상으로 오리엔테이션을 펼치는 영상 등은 페이스북에 버젓이 게재돼 있었습니다.
현지에서 만난 필리핀 푸라(Pura)시 시장은 브로커의 개입 문제 때문에 피해 민원이 잇따르면서 2년 전부터 경남 거창군과 브로커 없이 근로자 모집·송출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현지에서만 들을 수 있는 생생한 목소리들이었습니다.
허점투성이였던 제도, 손질 시급하지만…
필리핀 현지 취재를 중심으로 기획 보도를 마무리하면서 석 달에 걸친 계절 근로자 브로커 취재는 일단락됐지만, 이후 외국인 노동자 정책에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습니다. 법무부는 필리핀 측의 송출 중단으로 차질이 빚어지자 계절 근로자 자격을 유학생 부모까지 확대하거나 지자체 간에 노동자를 교류하는 방안을 마련하는 등 인력 확충책에 골몰했습니다. 일부 지자체는 계절 근로자 인권침해 방지를 위한 실태조사와 교육에 나서기도 했지만, 브로커를 차단할 대책은 여전히 부족합니다. 그사이 베트남에서는 계절 근로자 선정을 미끼로 한국인이 사기를 저질렀다는 보도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 만난 지자체 관계자들은 이제 농어업은 외국인 인력 없이는 유지할 수 없다고 입을 모았습니다. 계절 근로자만 해도 수요가 폭증하면서 해마다 배 이상 배정 인원을 늘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인권 단체들은 여전히 외국인 노동자가 돈벌이 수단이나 도구로 여겨지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합니다. 인구 절벽과 지역 소멸은 갈수록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더 많은 외국인 노동자가 유입될 겁니다. 관련 법도 미비하고 불법적인 브로커조차 걸러내지 못하는 허점투성이 제도를 이대로 방치해도 되는 걸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