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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OTT와의 경쟁으로 위기를 맞고 있는 국내 방송 사업자들은 다양한 생존 전략을 구사하고 있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국내 방송 사업자들이 내수시장에서 겪고 있는 어려움과 이에 대한 대응 현황을 살펴보고 위기 타개 방안을 모색해 본다. 편집자 주
텔레비전의 위기, 방송사의 위기라는 표현은 이제 진부하기까지 하다. 이 위기론은 학계나 산업계의 토론장을 벗어나 일상에서도 충분히 체험된다. 수업받는 학생들이 요즘 푹 빠진 TV 프로그램에 대해 신명나게 이야기하면서도 그 콘텐츠를 만든 방송사가 어딘지는 모른다고 대답할 때, 필자는 이제 놀라지 않는다(유튜브라고 대답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글로벌 OTT가 재편한 생태계 질서 안에서 국내 방송 사업자는 위기 타개를 위해 여러 전략을 구사하고 있지만, 적자생존과 자연도태 사이에서 녹록지 않은 줄타기를 하는 듯하다. 본 글에서는 종편의 출범, 글로벌 OTT의 국내 시장 진입 등으로 반복된 경쟁 심화가 지상파 방송사의 편성 전략에 미친 영향을 살펴본다.2) 내수시장의 함정에 빠진 TV가 선택한 생존 전략(편성 전략)이 시청자 복지를 위협하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도 논한다.
일본 한류, 중국 한류와 같이 시장이 확대되는 순간마다 제작비 상승은 반복됐고, OTT 한류에 이르러서는 내수시장에서 감당할 수 있는 드라마 제작비 규모의 한계점이 붕괴됐다(조유경, 2024.1.26). 이제 드라마 평균 제작비는 회당 20억이 흔해졌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내수시장 규모를 고려할 때 적정한 드라마 제작비 수준과 실제작비 간의 격차를 내수시장에서 메울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렇게 내수시장의 함정에 빠진 드라마 산업(노동렬, 2023)은 시청률 기반의 수입 이외의 수익원을 창출해야 하고 해외 매출을 극대화하는 전략을 선택하게 된다. 이 전략이 의미하는 바는 두 가지다. 첫째, 내수시장 주 시청층이 아닌 해외 소비자의 취향을 공략하는 전략적 기획의 필요성과 둘째, 드라마를 통한 수익 감소가 교양·다큐멘터리 등 다른 장르 콘텐츠 생산과 편성에 미치는 영향이다.
이 두 가지를 중심으로 방송사의 편성 전략은 변해왔으며 분석 결과는 ‘편성 장르·포맷의 양극화’와 ‘프로그램 제작 축소’로 귀결됐다.

양극화와 쏠림 현상의 가속화: 가성비에 따른 선택과 집중
2007년에 비해 2023년의 드라마 포맷 다양성은 매우 감소했다.[표 1] 특히 주간 연속극과 아침드라마는 세 방송사에서 모두 사라졌으며 주말연속극도 KBS2에서만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2023년에 MBC는 미니시리즈와 일일연속극만을, SBS는 미니시리즈만 편성했다. 포맷의 쏠림 현상은 경쟁 심화와 위기 속에서 방송사가 제한된 자원을 효율적으로 배분하기 위해, 즉 편성 관계자들의 표현에 따르면 ‘선택과 집중’에 따른 결과다.
글로벌 OTT의 투자 없이는 자체적으로 드라마 제작비를 조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글로벌 OTT의 투자를 지향하는 포맷들로 방송사의 편성 기획이 집중되고 있다. 40~60대가 방송 내수시장의 주 시청층을 이루고 있지만 방송사는 이제 내수시장 소비자를 위한 드라마 생산을 꺼린다.
교양·정보 프로그램에서도 세부 포맷의 양극화 현상은 드라마와 동일하게 나타난다.[표 2] 드라마와 예능 콘텐츠에서 획득한 수익으로 광고 경쟁력이 약한 프로그램(교양, 다큐멘터리, 보도 등)을 제작해 왔던 방식(문성철, 2011)은 유지하기 어려워졌다. 다큐멘터리의 경우 좋은 품질을 위해서는 큰 비용이 들지만 IP를 활용할 방안이 별로 없어 제작이 축소됐고, 그 외 교양·정보 프로그램 역시 협찬 없이는 제작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방송사는 적은 제작비로도 납품이 가능한 외주 제작사를 선택해 교양·정보 편성표를 채우는 전략을 수행하고 있다.

“드라마 포맷 자체의 다양성이 줄어들었다. 넷플릭스, 글로벌 OTT에서 선호하는 장르, 취향에 맞춘 기획과 포맷으로 다 천편일률이 됐다. 넷플릭스나 디즈니플러스가 드라마 제작비의 50%를 넣는 시장이 됐으니 거기에 맞는 기획을 방송사가 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제작사 관련 협단체 임원)
“장르도 적자생존이다. 교양 프로그램은 품이 많이 들고 다큐멘터리는 제작 우선순위가 완전히 밀린다.” (지상파 편성 관계자 C)
“(편성에서) 선택과 집중의 기준은 수익성과 경쟁력, 브랜드 가치 제고다. 요즘 상황이 어려워지다 보니 수익성이 가장 중요해졌고 거기에 신경을 많이 쓰는 상황이 됐다.” (지상파 편성 책임자 A)
“교양 프로그램도 제작비가 적게 들고 수익이 남는 포맷들만 살아남는다.” (지상파 편성 책임자 B)
경쟁력 있는 프로그램을 더 많이, 공격적으로 제작해 수익을 높이는 최선의 전략을 실천할 수 없는 상황에서, 방송사는 ‘가성비’를 기준으로 ‘선택과 집중’이라는 차선의 전략을 수행하고 있다. 여기서 가성비는 수익이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장르·포맷의 경우엔 소수 기획에 투자를 극대화하고, 그렇지 않은 장르·포맷은 생산량과 제작비를 모두 최소화한다는 뜻을 내포한다.
방송사의 자연도태 징후
제작 축소와 시청자 복지의 위기
프로그램 장르·포맷 양극화 현상의 심각성은, 제작 편수 감소와 함께 방송사의 제작 역량 상실을 우려하게 만든다. 글로벌 OTT와의 경쟁에서 열세에 처한 방송사들은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가능성이 있는 드라마와 예능에는 내부에서 동원 가능한 규모 이상의 자본을 집중 투자하면서도 제작 작품의 수는 현저하게 줄이고 있다. 여러 연령대의 시청자에게 소구할 수 있는 중소 규모의 다양한 프로그램 제작보다는 글로벌 OTT의 투자를 받을 수 있는 소수의 대규모 기획에 한정된 자원을 투입하는 것이다. 이는 재방송 비율 증가 추세로도 확인된다.[표 3]

특히 지상파 방송사의 드라마 본방송 비율은 2023년에 이르러서 30~40%대까지 떨어졌다.[표 4] 2007년 60~70%를 차지했던 본방송 비율과 극명한 차이를 보인다. 재방송 비율의 급증은 경쟁 심화와 제작비 상승으로 이제 방송사들이 자력으로 양질의 다양한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생산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음을 방증한다.

“제작비가 계속 올라간다. 편성표를 채우는 게 다 돈이니까 본방송을 빼고 다 재방으로 채우는 거다.” (지상파 편성 책임자 A)
“16부작 기준으로 드라마 회당 평균 제작비가 15억이다. 너무 높아져서 편수를 줄인 것이다. 다른 채널도 마찬가지다. 드라마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새로운 본방 프로그램이 다들 줄었다. 수익구조가 열악하니까 프로그램 제작이 줄어든 것이다.” (지상파 편성 책임자 B)
“재방을 늘린 전략은 그냥 돈이 없어서다. 모든 것에 투자할 수 없어서 비난을 감수하면서까지 그렇게 하는 거다.” (지상파 편성 관계자 C)
방송사가 위기 타개책으로 삼고 있는 ‘프로그램 축소’, ‘재방송 비율의 증가’는 편성 장르·포맷 양극화 현상과 함께 방송사가 자연도태 되는 징후라 할 수 있다. 생존력을 키우려는 적응의 결과가 시청자 복지의 위기를 초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지상파들의 생존 전략은 시청자 복지를 향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가속화되고 있다. 글로벌 OTT로부터 투자 유치가 가능하고 판매 및 유통 수익을 극대화할 수 있는 소수의 프로그램만 제작하겠다는 방송사의 전략에서 주 시청층을 포괄하는 모든 연령대를 위한 다양한 양질의 프로그램, 특히 교양·정보 프로그램은 소외될 수밖에 없다.
더욱이 방송사의 자연도태 징후는 제작 PD들이 프로그램 기획에서 방송의 공적 책무 수행을 깊이 고민하고 이를 담아내기 어려운 환경과 맞물린다. 방송사는 우수한 생산요소의 외부 유출을 막기에도 역부족이다. 방송사로서의 공적 책무보다 ‘글로벌 OTT형’의 콘텐츠 기획·생산에만 매진하기 때문에 발생하는 방송사 자연도태 가속화 현상은 이들이 처한 딜레마 상황을 보여준다. 현재와 같은 위기 속에서 프로그램 제작은 ‘편성 콘텐츠의 양극화-다양성 감소-시청자 복지 위협’이라는 악순환의 적자생존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현실 직시한 해법 계속 논의돼야
자원이 희소한 공간·환경에서는 생존경쟁이 일어나면서 특정 환경에 더 적합한 변이를 가진 개체들은 살아남지만 그렇지 못한 개체들은 저절로 사라진다(Mitchell, 2009). 이것이 자연도태(natural selection)에 따른 진화의 핵심이다. 개체들은 절대적으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진보를 거듭하는 것이 아니라 주어진 환경에서 도태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며 다른 개체와의 상대적 우위를 통해 (환경에) 선택받고자 한다(최재천, 2000). 이는 시장 경쟁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특정한 시장 경쟁 상황에서 어떤 행동과 판단 양식은 다른 것들보다 생존에 더 적합하며 이를 갖추지 못한 사업자는 시장에서 도태된다(Alchian, 1950).
하지만 자연도태는 일시적이고 국지적인 환경을 전제한다. 또한 자연도태는 효율이나 혁신과 상관없는 방식으로 작동할 수도 있다(조원광, 2013). 방송 시장 경쟁 심화가 반복된 역사 속에서, 또 글로벌 OTT 중심으로 생태계가 재편된 상황에서, 방송사들은 내수시장의 함정이라는 어려움과 함께 편성 장르·포맷의 양극화와 제작 프로그램 축소, 재방송 비율 증가라는 생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는 단기적으로는 적자생존의 전략일 수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방송 시장의 다양성 감소 및 방송사의 공적 정체성 상실, 그리고 시청자 복지 위협 면에서 자연도태 과정에 진입했음을 함의한다. 매우 우려할 만한 일이다.
협소한 내수시장을 놓고 경쟁하는 방송사 규모로는 글로벌 OTT가 구축한 게임 규칙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글로벌 OTT 생태계에서 우리 방송사가 생존하기 위한 새로운 메커니즘 디자인이 필요하며, 이를 위해서는 내수시장의 게임 규칙을 개혁하는 수준을 넘어서는 제도적 시야 및 방향성이 선행돼야 한다. 개별 사업자, 특히 지상파에만 집중한 국내 방송 산업 차원의 규제가 아니라, 방송사와 경쟁하는 여타 플랫폼과의 관계까지도 포함하는 경쟁력 강화를 위한 선순환 구조를 국가 차원에서 시급하게 디자인해야 한다. TV 위기의 시대, “길은 안 보이고”(지상파 편성 책임자 B), “답이 없지만”(지상파 편성 관계자 C), 현실을 직시한 해법은 계속 논의돼야 한다.
1) 본 글은 2024년 《한국방송학보》 38권 2호에 실린 필자의 논문 <방송사의 자연도태 징후: 편성의 양극화와 프로그램의 다양성 위기를 중심으로>를 발췌, 수정한 것임
2) 분석을 위한 자료는 크게 두 가지다. 2007년(세계금융위기 이전), 2012년(종편 출범 직후), 2016년(넷플릭스 국내 진출 직전), 2021년(종편과 글로벌 OTT와의 경쟁 심화), 최근 비교 자료로서 2023년의 지상파 편성 자료(KBS2, MBC, SBS)를 통시적으로 분석하고, 지상파 편성 관계자, 제작사 관계자(드라마, 교양), 제작 관련 협단체 관계자를 대상으로 심층 인터뷰(총 7명)를 진행했다.
3) 이하 [표 2]~[표 4] 출처 동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