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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트렌드]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 언론 보도는 어땠나
미디어 트렌드 | 등록일 : 2024-11-29

지난 10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 사회가 떠들썩했다. 언론은 앞다퉈 수상 관련 보도를 전했고, 서점가에서는 한강 작가의 책들이 품귀 현상을 빚었다. 언론은 노벨문학상 수상을 어떻게 다루고 있는지 짚어본다. 편집자 주

 

영화평론가 앙드레 바쟁(Andre Bazin)의 2018년 책 《완전한 저술(Écrits complets)》에 수록된 글 <영화와 대중 예술(Le cinéma et l’art populaire)>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과거 대학원 비교문학 수업에서 인상 깊게 읽은 문장으로, 강의 노트에 손으로 적은 책 내용 일부를 압축해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19세기까지 대중 예술(popular art)이란 개념은 한 공동체의 내적 속성과 분리되지 않았다. 특정 집단의 특징에 부응할수록, 다른 집단과 유사한 면이 없을수록 대중적이었다. 현대문명에서 이 단어는 정반대로 해석된다. 지구상에서 널리 수용될수록 대중적이라고 평가받는다.”

 

예술의 대중성이란 한 공동체를 다른 공동체와 구별 짓는 특징적인 단어로 시작됐다가, 훗날 다른 공동체에서도 그것이 받아들여질 때 쓰이는 단어로 바뀌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 자리에서 영화 이야기를 하려는 건 아니지만 바쟁의 이 문장은 지금 이 순간 유의미하다. 예술의 지역성과 세계성을 양분하면서 동시에 둘 다 움켜쥐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바쟁이 언급한 한 공동체의 내부적 속성이 특징되는 예술과 외부 공동체의 인정을 받는 예술은 문학 장르에서는 지역 문학과 세계문학을 가리키게 된다. 

 

예술이란 한 공동체만의 특징을 결집하는 힘과 그 특징을 타 공동체로부터 이해받으려는 힘 사이를 오가면서 자체의 위상이 정립된다. 은유하자면 전자는 구심력, 후자는 원심력일 것이다. 서로 다른 방향으로 뻗는 두 힘이 정확한 균형을 이루는 위대한 예술은 내부 공동체와 외부 공동체에 동시 수용될 자격을 얻는다. 이때, 구(球)의 정중앙 한 점으로만 힘이 결집하면 그것은 밀폐이자 자폐가 되면서 예술로서의 지위가 상실되고, 원의 바깥으로 이탈하려는 힘만 지극히 두드러지면 본연의 정체성을 잃어 예술로서의 매력이 저하된다. 좋은 예술은 두 조건을 충족시켜야 한다. 자기를 응시하면서 타인으로부터 인정받는 예술은 그래서 어렵다.

 

일견 난해해 보이는 논제로 글을 여는 이유는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과 이에 관한 언론 보도를 보며 혼자 들었던 작은 생각 때문이다. 한국시간으로 지난 10월 10일 오후 8시 한강 작가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호명됐다. 그날 이후의 놀라움은 한국 사회에서 현재진행 중이며 12월 10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개최되는 ‘2024 노벨상 시상식’까지 사그라지지 않을 것이다. 


작가 이름에 ‘K’ 왕관 덧씌우기, 노벨상은 올림픽 금메달 아냐

 

한국문학 역사상 가장 중대한 사건을 취재하면서,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 발표 다음 날인 지난 10월 11일 조간신문에 보도된 기사를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 애쓰며 유심히 살폈다. 7시간 시차를 둔 이국땅에서 전해진 소식은 언어로 표현이 어려운 전율을 일으키는 ‘사건’이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개인적 호기심이 발동했던 이유도 컸다. 하나의 문제적인 단어가 역시나 등장하는지가 궁금했다. 바로 ‘K-문학’이란 단어였다. 신문을 읽어보니 이날 대부분의 매체는 ‘한국인 첫 노벨문학상 수상’을 헤드라인으로 뽑았고 K-문학을 전면에 내세운 신문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그 이튿날부터 신문과 방송엔 K-문학이란 단어가 등장했다. 

 

호기심의 이유는 이러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K-문학이란 공동체적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바라본다면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은 집단의 성취라는 평가에 가까워진다. 그와 반대로 K-문학이란 단어가 의도적이든 그렇지 않든 줄곧 배제된다면 노벨상 수상은 작가 개인의 성취란 평가에 근접하게 된다. 나는 한강 작가의 노벨상 수상을 기사로 쓰면서도 그의 이름에 ‘K’의 왕관을 덧씌우는 일이 바람직한가에 관해 스스로 결론 내리기 어려웠고, 그래서 신문을 유심히 살폈다.

 

노벨문학상 수상을 바라보는 두 시선은 지금 한국 사회에 공존한다. 먼저, 이번 수상은 ‘한국어 공동체 집단의 성취’로 평가된다. 한강 작가의 책을 28개 언어로 번역하고 해외 도서전에서 소개하는 데 9억 원이 소요됐다고 한국문학번역원은 발표했다. 한강 작가를 해외에 알린 《채식주의자》의 해외 출간도 대산문화재단의 막후 지원이 뒷받침됐으므로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홀로 완성해 낸 결과는 아닐 것이다. 금전적인, 혹은 물질적인 지원만이 ‘한강 노벨상 수상은 집단적 성취’란 세간의 평가를 뒷받침하지도 않는다. 후대의 문학은 선대의 문학에 어떻게든 빚지므로 오솔길을 걸어온 선배 작가들이 축적한 문학적·문화적 토양이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이어졌다는 이야기도 논의된다. 하지만 반대되는 논지도 설득력이 전혀 없지는 않다. 한강 작가의 소설을 단 한 작품이라도 읽어본 독자는 한강 소설에 등장하는 수많은 인물은 하나의 단일 공동체라는 무형의 무게로부터 무력하게 이탈되거나 스스로 이탈하려는 자들이란 점을 어렵지 않게 간파하게 된다. 

 

한강 소설의 키워드는 기억과 상처였고, 상처와 고통의 연원은 개인에서 역사로 확장됐다. 역사적 비극을 소설의 소재로 삼았더라도 한강 소설에 나오는 인물들의 고통은 집단의 목소리가 아니라 개인의 비명으로써 그려졌다. 그 고통을 해소하는 방식은 집단적 해결이 분명히 아니었다. 스스로 몰락하거나 타자를 애도하거나, 혹은 식물이 되려 하거나. 따지고 보면 문학이란 지극히 개인적인 내면의 작업이며, 이는 모든 예술이 그러하지 않던가.

 

따라서, 한강 작가의 문학을 가로지르는 상반된 두 주장 가운데 어느 쪽만이 바람직한 시선이라고 규정하긴 쉽지 않다. 한 작가의 내면에서 발아된 문학이 공동체의 소산인지 사적인 결과물인지를 판정하는 건 아마도 불가능할 것이다. 다만 분명한 건 한국 언론, 특히 한국의 문화예술을 다루는 언론 보도를 보면 개인의 예술적 여정에 손쉽게 ‘K’의 왕관을 덧씌운다는 생각을 개인적으로 지우기가 어렵다. 2016년 부커상 수상 때도, 2024년 노벨문학상 수상 때도 예술가 한강의 수상이 ‘K-문학의 승리’로 귀결되는 건 아무래도 어색하다. 

 

 

서울 종로구 한 서점에서 시민들이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한강의 책을 살펴보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문학’과 ‘K-문학’은 달라

관용어 ‘K-문학’ 선택 신중을

 

‘한국문학’이란 단어와 ‘K-문학’이란 단어는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서로 다르다고 개인적으로 생각해 왔다. 두 단어는 동일한 대상을 지시하는 다른 표현인데, 다르게 해석된다. ‘한국문학’은 (거친 정의겠지만) 한국어를 사용하는, 한국인이 집필한, 한국인 공동체의 기억이란 유산 위에 건립된 문학을 의미하는 보통명사일 것이다. 세 조건이 결합되기도 하고 하나의 조건만 충족해도 한국문학으로 보기도 한다. 

 

반면 한국 언론이 K-문학이란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엔 앞서 설명한 ‘한국문학’과 다르게 쓰인다. 한국인 집단 너머의 또 다른 문화권으로의 ‘확산’을 전제 삼을 때만 K-문학이란 표현이 쓰이기 때문이다. 단어 K-문학은 한국문학의 세계적 확산이란 미래적인 조건 위에서만 허용된다. 그런데 해외 언론을 유심히 보면 한국문학을 지칭할 때 K-문학이란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는다. 미국과 유럽의 주요 언론사 웹사이트를 검색해 보니 ‘K literature’나 ‘K-literature’란 단어는 잘 보이지 않았다. 아직 일반화된 단어가 아닌 것이다. 간혹 ‘K Lit’란 축약어가 발견됐는데 고유명사가 된 ‘K-POP’에 견준다면 ‘K Lit’도 사용 빈도는 낮았다. 위 두 단어를 사용하는 웹페이지는 대부분 국내 언론의 영문판이므로, K-문학은 과장하자면 ‘내수용’ 표현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K’의 주체인 당사자(한국 사회, 한국 언론 등) 외부 공동체로의 ‘확산’을 기대하며 단어 ‘K’를 반복 사용한다면 이 단어는 중립적인 보통명사가 아니라 목적성을 내포한 슬로건이 되고 만다. 

 

반론도 있을 것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K-문학이 해외 언어권에서 더 많은 주목을 받으리란 기대는 모두를 들뜨게 한다. 하지만 이러한 견해에 대해 (조심스럽지만) 개인적으로 부정적이다. 노벨문학상은 수상한 해당 작가의 작품으로‘만’ 출판시장을 단일화시킨다. 지난 3년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욘 포세(Jon Fosse), 아니 에르노(Annie Ernaux), 압둘라자크 구르나(Abdulrazak Gurnah)의 작품은 꽤 많은 주목을 받았지만 한국 독자가 노르웨이, 프랑스, 탄자니아의 지역 문학 전체에 눈길을 돌리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으로 한국문학 전체가 해외 시장에서 주목받을 가능성은 적다. 출판계 지인은 적어도 수개월 동안 출판시장은 ‘한강 문학’과 ‘비(非) 한강 문학’으로 양분될 가능성까지 점쳤다. 서울 광화문의 한 유명 서점에 가보니 한강 작가 매대는 인산인해를 이뤘고, 온라인 서점에서는 한강 작가의 소설 전작(全作)을 세트로 묶어 판매 중이었다. 전해 듣기로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후 한강 작가의 책은 300만 부 넘게 판매됐다고 한다. 그러나 다른 작가들의 책이 놓인 매대는 노벨문학상 수상 이전과 그리 다를 바 없이 한산하다. 한강 소설을 내지 못한 출판사들이 내년 생존을 걱정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한국 언론이 관용어이자 수식어처럼 남용하는 K-문학이란 단어에 대해선 재고가 필요하다. 

 

한국 언론에서 K-문학이란 단어는 그러므로 제한된 조건에서만 사용돼야 하는, 조심스런 단어라고 생각한다. 한류 정책을 논할 때, 이 단어의 사용은 불가피할 것이다. 분명한 건 세계성을 획득한 지역 문학은 그 공동체의 껍질을 벗고 바깥으로 나아갔으므로, 한 언어 공동체에 속박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만이 유독 ‘K’의 굴레에 갇혀 있는 건 아닐까.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은 ‘한국문학과 세계문학 사이의 낙차가 존재하지 않음’을 증명하는 거대한 사건이었다. 이건 지역 문학인 한국문학이 세계문학에서 인정받았다는 의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K’라는 알을 깨고 껍데기 밖으로 비상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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