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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기자들이 말하는 워라벨
커버스토리 | 등록일 : 2025-04-25

‘기자’ 하면 으레 잦은 야근과 휴일 근무, 늘 격무에 시달릴 것으로 생각된다. 언론인으로 살아가며 업무와 개인 삶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불가능한 일일까. 익명의 기자 네 명의 사례를 통해 워라밸을 위한 해법을 고민해 본다. 편집자 주

 

#1. 세 아이와 함께한 ‘언론밥’ 23년 

40대 여성 기자

 

“아이가 셋인데, 괜찮으세요?”

 

모 언론사 근무 23년째, 40대 후반 여성인 나는 아이 셋을 키우고 있다. 중학생 1명, 초등학생 2명이고 막내는 초등학교에 올해 입학했다. 대학교 동기들 자녀는 고등학생 혹은 대학생인데 나는 어쩌다 늦둥이를 낳다 보니 갈 길이 참 멀다.

 

아이가 셋이라고 하면 대부분의 사람은 놀란 얼굴이 된다. 특히 여성 후배들은 눈이 동그래지며 “아이가 셋이나 되는데 괜찮으세요?”라고 묻는다. 이 질문에는 “세 아이 키우며 일하다 보면 아이들에게 소홀해질 것 같아요. 회사 일에도 소홀해질 것 같고요. 이 모든 상황 때문에 괴로울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라는 함의가 있다. 이런 우려가 어느 정도 사실이라고 시인해야 할 것 같다. 육아도, 회사 일도 적지 않은 아쉬움이 있으니 말이다. 

 

셋째를 낳게 된 데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임신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무려 16주 차로, 초음파 화면을 통해 대면한 셋째는 이미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는 ‘인간’이었다. 신께서 나에게 셋째를 주셨고 셋째는 태어나야 하는 아이였다.

 

당시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회사에서 갓 차장이 되어 부지런히 달려야 하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갓난아기를 남의 손에 맡기지 않으려면 육아휴직이 필요하다. 영아를 키우는 데는 많은 에너지가 필요해 야근이 잦고 주말 근무도 해야 하는 기자 일에 온전히 몰입하기 힘들다. 개인적으로 성취하고자 하는 많은 것들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육아휴직 후 복귀하자 편집국 내근 A팀의 팀장으로 발령이 났다. 해당 팀의 일은 취재 부서를 지원해 주는 일이었다. 열심히 하지 않으면 티가 많이 나지만 열심히 해도 열심히 한 티는 나지 않는, 집안 살림하는 것과 비슷한 백스테이지 업무 담당이었다.

 

하지만 업무 예측이 가능하고 적당한 시간에 퇴근할 수 있고 주말과 공휴일에 일하지 않아도 됐다. 양육자의 일정이 예측 가능해야 아이들의 정서가 안정된다는 점을 고려하면 내게는 도움 되는 보직이기도 했다.

 

그러나 2년 임기가 끝나고 나서도 보직이 바뀌지 않자 소위 ‘현타(현실자각타임)’가 왔다. A팀의 팀장 경력은 기자로서의 승진에 도움 되지 않기 때문에 대개 2년 임기를 채우고 나면 바꿔주곤 하는데 나는 예외적으로 2년 이상 하게 된 것이다. 

 

당시 인사권자는 “네게 다른 일을 맡기는 게 애매하고 이 일을 제일 잘할 수 있는 사람이니까 계속 시키는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돌봄’과 ‘지원’에 익숙하고 ‘애매한 포지션’이었던 내가 A팀장으로 계속 일하는 동안 입사 동기들은 취재부서에서 경력을 쌓아 부장으로 승진했다.

 

그때는 기자로서 승진 트랙에서 제외됐다는 박탈감이 정말 컸다. 취재 부서에서 일하는 한 아이들에게도, 부서 일에도 충실하기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음에도 그랬다. ‘내 역량이 이것밖에 안 되나 보다’라며 자책도 많이 했다.

 

여기까지 이야기하면 여성 후배들은 말할 것이다. “그것 보세요. 저는 아이를 낳지 않겠어요. 아이 때문에 발목 잡히는 상황이 오면 아이를 키우는 일에도, 자신에게도 좌절감이 들 테니까요”라고.

 

하지만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지금은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다. 계획이 어긋났다고 해도 좌절하거나 자책할 필요가 없음을 알게 됐기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는 건 좋은 일이지만 계획은 어긋나기 일쑤다. 한쪽 문이 닫히면 다른 쪽 문이 열린다. 또 다른 문을 열고 가다 보면 새로운 경험을 통해 숨어있던 적성을 발견하고 새로운 목표를 설정할 수 있다.

 

집에서 키우는 고무나무를 보며 많이 배웠다. 식물은 가지가 꺾여도 꺾인 가지 옆에서 싹이 난다. 줄기가 끊어져도 물꽂이를 해주면 뿌리를 내린다. 그래서 끊임없이 성장한다.

 

요새 나는 셋째 출산 후 육아휴직 기간에 취득한 석사 학위를 활용해 편집국이 아닌 다른 조직에서 새로운 업무를 시도하고 있다. 어떤 일을 하고 있는지 밝히면 신상이 특정될 것 같아 더 구체적으로 말하기는 힘들지만 석사 때의 전공이 내게도, 언론계에도 의미 있는 일을 하는 데 큰 도움이 되고 있다. 새로운 목표도 생겼다.

 

물론 이렇게 돌아서 가는 길이 ‘더’ 의미 있다고는 말하지 않겠다. 쭉 뻗은 직선대로를 달리는, 소위 ‘잘 나가는 사람들’이 주위에 많으니 말이다. 하지만 길을 돌아가더라도 실망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으며 돌아가는 길에서 오히려 우리 삶의 본질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다.

 

사람이 태어나 한평생 살아간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이가 주는 기쁨은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아이는 내가 소중히 돌봐야 하는 생명인 동시에 막막한 나의 인생에 불을 밝혀주는 등대이자 내가 살아가는 이유이기도 하다. 잠든 아이 옆에 누워 아이 가슴에 귀를 대 본 적 있는 사람은 알 것이다. 아이의 규칙적 심장 소리, 따듯한 체온은 경이로움 그 자체다. 아이들과 지지고 볶고 사는 동안 극단적 에너지 소비가 필요하지만 그것이 내 삶에 의미를 부여하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살아갈 힘이 된다. 나는 아이들을 키우며 인간에 대해 더 깊이 알게 되었고 아이들을 키우지 않았더라면 갖추기 힘들었을 질긴 인내심을 갖게 됐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육아의 짐이 남성에게보다 여성에게 더 무거운 현실, 같은 일을 해도 여성 디스카운트 때문에 성과 낸 만큼 인정받지 못하는 현실은 계속 바꿔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의 어머니 세대와 선배 세대가 변화를 끌어온 것처럼 나는 나의 딸이 자신의 역량만큼, 노력한 만큼 인정 받고 보상받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아이 셋을 낳고 기르는 여성이 “아이 셋인데 괜찮아요?”라는 질문을 받지 않아도 되는 사회가 되게 하는 것이 내가 우리의 딸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자산이 될 것이므로. 

 

#2. ‘얌체’ 말고 ‘일잘러’라 불러주세요 

30대 남성 기자


‘워라밸’이라는 단어에 처음 관심을 갖게 된 순간이 선명하다. 기자 초년병 시절, 누구나 그렇듯 전쟁 같은 나날을 보냈다. 눈을 감았다 뜨면 하루가 지나 있는 것 같았고, 발제만 할 수 있다면 휴식 시간은 물론 식사 시간도 양보할 수 있었다. 선배에게서 걸려 온 전화를 신호음 세 번 안에 받기 위해 스마트워치를 샀지만, 어머니에게 온 안부 문자는 이틀이 지나서야 답장하곤 했다.

 

하루는 그간 소원했던 것이 죄송해 어머니가 좋아하는 양념갈비 가게에 모시고 갔다. 어머니는 아들의 첫 직장 생활이 궁금했던지 이것저것 자세히 물었지만, 나는 고기를 자르면서도 아직 찾지 못한 발제 거리가 더 신경 쓰였다. 애정 어린 질문은 결국 매정한 아들이 짜증을 내고서야 멈췄다. 양념갈비는 생각보다 빨리 탔고, 그걸 내려다보는 어머니의 표정이 오래도록 기억에 남았다. 그제야 일과 가정 사이의 분리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워라밸은 여전히 먼 나라 이야기였다. 부서도 옮겼고, 점차 일하는 요령도 생겼지만 크게 달라진 건 없었다. 좋은 기자의 척도가 ‘워라밸을 얼마나 용감하게 포기하는가’로 보였으니까. 일을 잘한다는 소문이 난 동료들에게 따라붙는 설명은 늘 비슷했다. “휴가 때도 취재원과 만나 술을 마신다”거나 “주말에도 기사에 쓸 논문을 읽는다”…. 마치 개인의 시간을 바쳐야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는 것처럼. 마음 놓고 쉬는 것에 죄의식까지 느껴졌다.

 

퇴근 시간을 지키고, 휴무와 휴가를 꼬박꼬박 챙기는 선배들은 ‘얌체’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주어진 휴가를 사용한다고 대놓고 비난받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좋은 평가를 받지도 못했다. 사실 그들은 한정된 시간 안에 맡은 일을 끝낼 줄 아는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이었는데도 말이다. 나 또한 워라밸을 용감하게 포기하지도, 그렇다고 ‘얌체’가 될 수도 없는 애매한 경계에서 지냈다.

 

6년 차 기자가 된 지금, 부쩍 동료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많이 접한다. 소위 ‘에이스’라 불리며 쉼 없이 일하던 이들이 우울과 공황을 겪는다. 한 후배는 “20대 내내 일한 기억밖에 없어서 이제 와 후회가 된다”고 말한다. 또 다른 선배는 “지금도 이렇게 사는데, 도저히 결혼하고 육아할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 많은 이들이 일하는 것이 고통스러운 지경에 이르러도 쉽게 달라지지 못한다.

 

워라밸을 포기하면 생기는 가장 큰 문제는 그 방식이 몸에 익숙해진다는 것이다. “쉴 수 있을 때 몰아쉬라”거나 “집중할 수 있는 취미를 찾으라”는 조언이 미봉책이 되는 이유다. 워라밸을 포기하는 것이 성실과 능력의 증거라고 여기는 이상, 언제고 문제가 찾아올 수밖에 없다.

 

이제는 워라밸을 지키며 일하는 사람을 ‘얌체’가 아니라 ‘일잘러’라고 불러야 할 때다. 주어진 시간 안에 최선을 다하고, 쉴 때는 제대로 쉬는 것. 그것이 진짜 능력이고, 조직과 개인 모두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이다. 우리 모두가 그런 ‘일잘러’로 인정받을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3. 끝없이 울리는 휴대폰 피해 ‘잠수’

30대 여성 기자

 

몇 년 전, 내가 수영을 해야겠다고 처음 마음먹은 건 ‘단절’ 때문이었다. 이렇게 살다가는 몸이 썩겠다(?) 싶어 등록한 필라테스는 도저히 수업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퇴근한 뒤라도, 쉬는 날이어도 휴대폰은 끊임없이 울렸다. 혹시나 중요한 연락을 놓칠까 운동하면서 신경은 온통 다른 데로 가 있었다.

 

수영은 달랐다. 물속에서 헤엄치는 매주 화요일과 목요일, 저녁 8시부터 9시까지는 어쩔 수 없이 세상(이라기보단 휴대폰)과 단절된다. 좋건 싫건 간에 수영장의 시간은 바깥과 다르게 흐른다. 이게 가능하다는걸, 일과 내 삶은 따로 있다는걸, 수영하면서 깨달았다.

 

나는 수습기자 시절 ‘하리꼬미’를 경험한 마지막 세대다. 사회부 사건팀(경찰팀)에서 교육받을 때 오전 6시에 첫 보고를 하고, 자정까지 관내 경찰서를 돌면서 2시간 간격으로 선배에게 보고했다. 긴 하루가 끝나면 대충 씻고 기자실 구석에 누웠다. 곰팡내가 나는 꿉꿉한 이불은 정말이지 만지기도 싫을 정도였지만 잠은 잘만 왔다. 잠깐 머리를 댔나 싶었는데 금세 새벽은 밝아왔다.

 

그렇게 한 달을 보내자, 세상이 바뀌었다. ‘마지막 세대’라는 건 2018년 7월 정부가 도입한 주 52시간제가 우리에게도 적용됐기 때문이다. 선배들은 죄다 “좋을 때 기자 한다”는 말을 했다. 농담이 반이었고 ‘라떼는’ 경찰서에서 먹고 자는 게 당연했다며 진지하게 말하는 사람들이 반이었다.

 

그들을 꼰대라고 욕했지만, 그럴 이유는 없었다. 나도 곧 자연스럽게 ‘그런’ 사람이 됐기 때문이다. 흔히들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해 가장 나중에 빠지는 게 좋은 기자라고 얘기한다. 모두가 기자로 성장하려면 당연히 개인의 삶은 어느 정도는 희생해야 한다고 했고, 그런 기자가 취재를 잘하고 좋은 기사를 쓴다고 배웠다. 뉴스를 다루는 직업이라는 특성도 있지만, 업계의 분위기는 그 특성을 훨씬 넘어선 것이었다.

 

그래서 나 역시, (나를 아는 선배들은 믿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일과 회사 사람들이 내 삶에서 1번이었고, 휴일에도 종일 노트북을 붙잡고 있을 때가 많았다. 한번은 친구가 어떤 기자와 소개팅을 했는데, 그 사람이 처음 만난 식사 자리에서 갑자기 노트북을 꺼내더니 한참 기사를 쓰더라는 우스갯소리를 전해주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웃을 수가 없었다. 소시오패스처럼 행동하는 그런 상황이 어떤 상황인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딱히 나를 채찍질하거나 혼내는 사람은 없었지만, 항상 ‘이러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중압감을 느꼈던 것 같다. 그러다 보니 후배들을 볼 때도 칼같이 퇴근하는 사람보단 뭐 하나라도 더 하겠다는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정이 갔다. 세상은 바뀌었는데 내 생각은 과거에 머물러 있었다.

 

동시에 회의감이 들었다. 여기까지 쓰고 보니 ‘참기자’인 것 같지만, 사실 나는 게으름 피우기로는 누구에게도 지지 않을 자신이 있다. 쉬는 날 연락 두절되기,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기가 내 기본값이다. 그런 인간이 기자를 한다니,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 같았지만 한편으론 언론사의 암묵적 규칙과 분위기에 이미 적응한 것 같기도 했다. 나부터가 힘들고 괴로우면서도 정작 동료와 선후배들에게선 더 열심히, 더 많이, 더 잘하는 모습을 기대했다. 스스로 모순적이라고 느꼈다.

 

수영은 이렇게 예측 불가능하고 뒤죽박죽인 삶에서 내가 찾아낸, 억지로 균형을 만들어내는 방식 중 하나였다. 수영장에 처음 갔을 때는 1시간 내내 불안했다. 무슨 일이 터졌으면 어쩌지, 출입처에서 긴급한 내용의 공지가 나왔는데 내가 전달하지 않아서 속보 처리가 늦었으면 어쩌지…. 이제는 아니다. 명백히 업무 외 시간에,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그깟 연락 좀 못 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나보고 뭐 어쩌라고? 그렇게 생각한다. 그러라고 백업이 있고, 야근자가 있고, 훌륭한 동료들이 있는 것이다. 이 당연한 사실을 받아들이는 데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지금 내게 중요한 건 단순히 일과 여가의 비율이 각각 얼마인지가 아니다. 내가 내 삶을 얼마나 통제하고 있느냐다. 나와 일을 결코 완벽히 분리할 수 없어서 그 고통에 자주 몸부림치지만, 한편으론 또 그 일을 좋아하는 나를 지키는 방법을 찾아가고 있다. 그래야 그 일을 지치지 않고 오래 할 것이기에.

 

요즘에 발견한 새로운 즐거움은 풋살이다. 지난해 사내 여자 풋살팀이 만들어지면서 합류했는데, 제일 늦잠 자기 좋은 토요일 오전에 기를 쓰고 악을 쓰며 공을 차러 간다.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확히 패스했을 때, 제대로 찬 킥에 날아간 공이 네트에 꽂힐 때, 얼굴이 벌게진 채 맥주를 마실 때(이게 제일 중요하다), 나는 기쁘고 충만하다. 이대로 괜찮은 것 같다. 

 

#4. 딸과 함께 취재 중입니다

50대 남성 기자


기자 인생 팔 할을 사회부에서 보냈다. 시경캡을 두 번 했다. 한 달에 한 번 정도 집에 들러 출입처에서 묵은때를 벗겼다. 어린 경찰들이 경례를 붙여주면 멋쩍게 받아주던 시절이었다. 세월호 참사, 노무현 대통령 서거, 연평도 포격, 천안함 사태가 30~40대 기억 대부분을 차지한다. 쟁의부장과 노조위원장을 거치면서 파업을 두 번 했다. 기자가 친구이자 가족이었다. ‘이게 아니다’ 싶으면 사표를 던졌다. 쓰고 싶은 기사 다 써봤고, 사주에게도 할 말 다 하고 살았다. 그래야 한다고 존경하는 선배들한테 배웠다. 

 

덕분에 또래가 노후 준비할 때 팔자에도 없는 구직활동을 했다. 운 좋게 새 언론사에 자리를 잡아 경기도에서 기자 생활 2막을 시작했다. 그제서야 초등학생 딸아이와 치매 걸린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이른 새벽 아내가 서울 직장으로 출근하면 나는 밥을 안치고 경기도발, 경기 기초지자체발 조간 기사를 쓰기 시작한다. 세탁기 소리로 아이 잠을 깨우고 그 사이 밑반찬을 만든다. 딸아이가 배를 채울 때 빨래를 널고 아침 발제를 마무리한다. 딸아이 등교 시간과 내 출근 시간은 대체로 일치한다. 출입처에서 지면 기사를 마감한 뒤에는 밑반찬을 싸들고 아버지가 머무는 재활병원으로 향한다. 한 달 전 입원을 거부하던 아버지를 설득하며 “혼자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다. 식사와 목욕 수발을 마치고 나면 비로소 취재 시간이 허락된다. 

 

나는 집요한 질문보다는 동네 아저씨 같은 대화로 취재원으로부터 숨겨둔 이야기를 이끌어내는 취재에 공을 들인다. 마감 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긴 호흡의 현장 스케치 기사를 자주 쓴다. 잘 써서가 아니다. 젊은 기자들과의 경쟁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허락되면 딸아이를 축제 취재 현장에 데려간다. 안성맞춤 남사당 바우덕이 축제, 화성 뱃놀이 축제, 광주왕실도자 페스티벌, 군포 철쭉축제…. 꽃과 나무의 이름을, 전통놀이의 재미를 알려준다. 딸아이가 또래와 체험 활동할 때 슬쩍 끼어들어 몇 마디 묻는다. 부모 허락을 받고 사진도 찍는다. 그래서 내 기사에는 딸아이가 자주 등장한다. 

 

지난겨울 폭설 때의 일이었다. 휴교령이 떨어진 데다 마땅히 돌볼 사람이 없는 상황이라 딸아이를 현장에 데려갔다. 점심시간 무렵 출발하기 앞서 신신당부했다. 눈 장난 함부로 하지 말라고. 이유는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 딸아이는 눈을 흘기며 말했다. “아빤 날 몰라?” 목적지는 용인시 처인구 백암면. 오전까지만 해도 경기도 내 최대 적설량을 기록한 곳이었다. 이날 새벽에 60대 남성이 자택 앞에서 눈을 치우다 쓰러진 나무에 깔려 숨지는 일도 있었다. 피해 상황을 눈으로 확인해야 했다. 딸아이와 순댓국집, 편의점, 이발소를 돌았다. 나이 많은, 토박이 주민들에게서 이틀 동안 내린 폭설로 겪은 피해를 전해 들었다. 이구동성 “이런 눈은 평생 처음”이라고 답했다. 21살에 제천에서 시집와 60년째 제일식당(순댓국집)을 운영한다는 박애자 할머니는 카운터에 앉아 취재에 응했다. 포장 포함 순댓국 3그릇을 주문한 뒤였다. 약간의 경계심을 보였지만 딸아이를 보자 마치 증손녀에게 옛날얘기를 들려주듯 전날부터 이어진 폭설의 진행 상황을 시간대별로 알려줬다. 취재에 보탬이 되는 자식이다. 

 

폭설 현장에서 딸아이는 내 주위를 맴돌며 폭설로 만들어진 풍경과 그 속에서 일어난 크고 작은 사건을 귀동냥했다. 코멘트를 받아 적는 내게 “저 아이가 누구냐”고 묻는 취재원들이 적지 않았다. “딸아이”라고 대답하면 다들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휴교령이 내렸다고 덧붙이면 미소 지었다. 딸아이는 나와 떨어져 있어도 불평하진 않았다. 플라스틱 집게틀로 눈오리를 만들어 차 본네트에 진열하는 일을 허락했다. 전쟁터에서도 노는 게 아이들이지 않은가. 집으로 돌아와 딸아이에게 “오늘 무엇을 느꼈냐”고 묻자 “안 가르쳐줄거야”라며 “김치볶음밥 해달라”고 딴소리를 했다. 더는 묻지 않았다. 그저 김치볶음밥을 빨리 만들어 저 입안을 꽉 채워줘야겠다는 생각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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