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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I 기술 발달은 광고 업계에도 막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이미지와 카피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이 만들고 광고 집행과 성과 분석까지 AI가 실시간으로 관리한다. AI가 바꾸고 있는 광고 산업의 패러다임, 어떻게 바라보고 대처해야 할지 확인해 본다. 편집자 주
지난 6월 영국 런던에 있는 글로벌 광고대행사 WPP 본사 전 직원은 ‘충격적인’ 메시지를 받았다. 마크 리드(Mark Read) CEO가 올해 말 퇴임한다는 내용이었다. WPP 직원뿐 아니라 세계 광고업계는 이 짧은 문장에 숨을 멈췄다. 마크 리드는 세계 광고업계의 상징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그가 물러난 배경엔 인공지능(AI)이 확 바꿔 놓은 광고 시장의 지형도가 있었다. WPP가 AI 시대 도래에 따른 광고 산업 패러다임 변화의 격랑에서 좌초한 책임을 물은 것이다. 리드 CEO의 퇴장은 세계 광고 시장의 판도가 완전히 달라졌다는 ‘조용한 선언’이었다.
세계 광고계 주름잡던 WPP 수장 마크 리드 퇴임
마크 리드는 1989년 WPP에 입사해 30여 년간 광고 업계에서 한우물을 판 ‘광고맨’이다. WPP 창업자인 마틴 소럴(Martin Sorrell) 곁에서 광고 전략가로 성장했고, 2018년 소럴의 뒤를 이어 WPP 수장이 됐다. 그가 집권한 7년 동안 WPP는 산하에 흩어져 있던 300여 개 광고회사를 하나로 묶어 조직을 단순화했고, 100여 개 도시에 있던 오피스를 정리하며 몸집을 줄여나갔다. 마크 리드는 AI의 거센 파도 앞에서 광고인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크리에이티브 헤리티지’와 알고리즘이 움직이는 AI 혁신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썼다. WPP가 지켜내려 한 유산은 수십 년간 광고인을 중심으로 구축된 창의적인 브랜드 감각의 전통이었다.
하지만 그 균형은 결국 무너졌다. 코카콜라, 스타벅스, 화이자 등 글로벌 고객사가 줄줄이 WPP를 떠났다. 광고대행사 1위 자리마저 빼앗겼다. 지난해 매출과 시가총액 등 여러 측면에서 경쟁사인 프랑스 퍼블리시스(Publicis)가 치고 올라오며 ‘왕좌’를 내줬다. WPP 주가는 올해 8월 18일 기준 약 50%나 떨어졌다.
AI, 광고 카피부터 영상 제작까지
AI의 급속한 발전은 광고대행사의 존재 이유 자체를 되묻는 계기가 됐다. 과거에는 광고주가 광고 캠페인을 진행하려면 반드시 대행사를 거쳐야 했다. 카피라이터가 슬로건을 만들고, 아트디렉터가 이미지를 구상하며, 미디어 플래너가 광고 집행 전략을 짜는 식이었다. 지금은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직접 광고주가 광고와 홍보 전략을 완성할 수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메타가 내년 중 선보일 예정인 ‘메타 어드밴티지 플러스(Meta Advantage+)’란 AI 광고 도구다. 광고주는 브랜드의 핵심 메시지나 제품 콘셉트 같은 몇 가지 아이디어만 입력하면 된다. 그럼 AI가 알아서 수십 개 버전의 광고 문구와 이미지를 조합해 낸다. 완성된 광고는 즉시 온라인에 게시할 수도 있다. 이렇게 게시된 광고는 소비자의 반응에 따라 실시간으로 바뀌는데, 이 과정도 대부분 AI가 개입해 알아서 한다.
구글도 이 분야에서 앞서가고 있다. 2022년 출시한 ‘퍼포먼스 맥스(Performance MAX)’ 기능은 유튜브, 검색, 쇼핑 등 구글 생태계 전반을 하나로 묶어 광고를 자동 설계한다. AI가 어떤 소비자에게 어떤 광고를 보여줄지를 판단하고, 클릭 가능성이나 구매 확률을 실시간으로 예측해 광고 소재와 문구를 바꾸고 교정한다. 광고, 홍보 예산 배분 또한 자동으로 조정한다. 예컨대 특정 지역에서 반응이 좋으면 광고비를 즉시 늘리고, 성과가 떨어지는 채널에는 집행을 줄이는 식이다.이 같은 과정에서 광고인의 역할은 크게 축소되고 있다. WPP와 같은 대형 대행사 소속의 ‘크리에이터’가 직접 아이디어를 내고 실행하던 시대는 사실상 저물고 있다. 이미지와 카피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이 생성하고, 수십 개 버전 중 소비자 반응이 좋은 광고는 자동화된 ‘A/B 테스트’를 거쳐 즉시 선정된다. 광고 집행과 성과 분석까지 모두 AI가 실시간으로 관리한다. 광고 제작의 패러다임이 ‘창의적 산물’에서 ‘데이터 기반 자동화’로 전환된 것이다. 사람이 할 일은 전체 전략의 큰 그림을 조율하는 ‘오케스트라 지휘자’ 역할 뿐이다.
세계 최고 광고회사는 구글? 광고대행사 매출 10배 앞서
광고 산업의 중심이 더 이상 광고대행사가 아니란 점은 숫자로도 확인된다. 글로벌 테크 기업이 이 시장을 주도하고 있다. 예컨대 구글 모기업 알파벳의 지난해 광고 매출은 2,650억 달러(약 370조 7,000억 원)로 세계 1위 광고 회사에 올랐다. 그 뒤를 이은 메타(1,606억 달러), 아마존(562억 달러), 틱톡(450억 달러), 알리바바(380억 달러) 등도 전부 테크 기업이었다. 이에 비해 WPP 매출은 지난해 147억 파운드(약 27조 7,000억 원)로 초라한 수준이다.

테크 기업뿐 아니라 액센추어송(Accenture Song) 등 컨설팅 기업이 제공하는 전략 기반 마케팅 통합 서비스도 광고대행업 시장을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컨설팅 업체들은 단순히 광고 캠페인을 하는 게 아니다. 브랜드 전략 수립부터 소비자 경험 설계, 앱 개발, 광고 운영 자동화까지 디지털 마케팅 전 과정을 책임진다.
예컨대 액센추어송은 우버와 함께 광고 영업과 운영 시스템을 최근 전면 재설계했다. 이를 통해 100개 이상의 광고 운영 과정을 자동화하고, 광고 성과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대시보드도 구축했다. 이 시스템 덕분에 광고 영업 처리 속도는 기존 대비 70% 빨라졌다. 액센추어송의 광고 매출은 2021년 125억 달러(약 17조 5,000억 원)에서 지난해 190억 달러(약 26조 6,000억 원)로 껑충 뛰었다. 전체 매출에서 광고가 차지하는 비중은 30% 수준에 이른다.
광고업계, AI 전환이 성패 갈라
WPP도 손을 놓고 있었던 건 아니다. 마크 리드 CEO 체제 아래 WPP는 AI 전환을 위한 대대적인 투자에 나섰다. 그룹 차원의 AI 플랫폼 ‘WPP 오픈’ 구축에만 연간 수억 달러를 투입했다. 직원 교육과 업무 프로세스 자동화에도 힘을 실었다. 하지만 결과는 기대에 못 미쳤다. AI 전략의 속도와 실효성 면에서 WPP는 빅테크는 물론 경쟁사인 프랑스의 퍼블리시스에도 한참 뒤처졌다.
퍼블리시스는 자사 내부 AI 플랫폼 ‘마르셀(Marcel)’을 조기에 정착시켰다. 그 결과 퍼블리시스는 지난해 광고 매출과 시가총액에서 WPP를 앞질렀다. 유럽과 미국 양대 시장에서 주요 광고를 잇달아 따내며 확고한 1위 자리를 굳혔다. WPP의 최대 광고주인 코카콜라마저 가져갔다. AI 기술 그 자체가 아니라 그 기술을 얼마나 빠르고 일관되게 조직에 녹여냈는지가 성패를 갈랐다.
WPP도 변화의 필요성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속도는 느렸고, 조직은 무거웠으며, 크리에이티브의 자부심 탓에 기술 수용을 망설였다. 결국 AI를 외치면서도 경쟁에서 뒤처졌다. WPP뿐만이 아니다. 과거 성공 방식에 집착한 전통 광고대행사 대부분이 경쟁에서 밀려났다.

변화하는 광고 시장, 광고주가 원하는 것은
광고주들은 더 이상 ‘멋진 광고’를 원치 않는다. 사람들이 반응하고, 매출로 연결되고, 재방문하는 광고를 원한다. 특히 코로나19 사태 이후 온라인 쇼핑 비중이 폭증하면서 광고와 매출의 상관관계가 핵심 지표가 됐다. WPP는 최근 연례보고서에서 “고객사의 70% 이상이 퍼포먼스 마케팅 등에서 즉각적인 성과를 기대한다”라고 분석했다.

이런 변화는 광고대행사의 수익 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빅테크 기업은 자사의 생태계 안에서 광고를 집행하며 수수료를 가져간다. 이에 비해 광고대행사는 여전히 인건비 중심의 모델에 머물러 있다. 광고 한 건당 프로젝트 단가로 계산한다. 이 단가는 계속 떨어지고 있다. 광고주들이 광고대행사에 빅테크의 AI 기술 도입을 통해 업무 효율을 높이라고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광고대행사가 요구에 맞춰 AI 기술을 활용해 효율을 높이면, 효율화에 따른 비용 감소분은 광고대행사가 아니라 광고주에게 돌아간다.
광고업계는 지금 거대한 전환점에 서있다. 예전에는 눈길을 사로잡는 카피와 창의적인 광고만으로 충분했다. 지금은 이것만으로는 살아남기 어렵다. 광고가 예술에서 과학으로, 직관에서 데이터로 이동하면서 광고 대행사의 자리는 점점 좁아지고 있다. AI와 빅테크가 지배하는 새로운 질서는 전통 대행사의 생존을 위협하고 있다. 이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기 위해선 단순한 AI 기술 도입을 넘어, 광고의 본질을 다시 정의해야 한다.
마크 리드의 퇴장은 단순히 한 대행사 경영자의 퇴진이 아니다. 광고업계 전체에 던져진 숙제이자 경고다. 창의와 기술, 사람과 알고리즘 사이에서 어떤 균형을 찾아내느냐가 앞으로의 광고 판도를 결정할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