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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권’을 뜻하는 단어와 AI가 결합된 용어인 ‘소버린 AI’는 한 국가나 조직이 자국 내에서 독립적으로 구축·운영하는 인공지능 시스템을 의미한다. 한국을 비롯한 세계는 왜 소버린 AI 개발에 속도를 내고 있는지, 현황과 함의, 전망을 짚어본다. 편집자 주
소버린 AI(Sovereign AI)는 AI 반도체 시장을 주도하는 엔비디아가 일찍이 강조해 온 개념이다. 미국 외 각국이 자체 AI 인프라 구축에 나서야 자사의 그래픽처리장치(GPU) 판매 증가로 이어진다는 셈법에서 출발했다. 국내에서는 네이버가 선두에 섰다. 하정우 AI미래기획수석이 네이버 재직 당시 소버린 AI 전파의 선봉장 역할을 했다.
필자가 연합뉴스TV 프로그램 <탐사보도 뉴스프리즘>을 진행하던 2023년 말, 당시 네이버클라우드 AI이노베이션 센터장이었던 하 수석이 출연했다. 그의 기성 미디어 첫 출연은 ‘소버린 AI’라는 주제로 관통됐다.
당시는 네이버가 전사적으로 소버린 AI 캠페인을 시작한 시기였다. 독자적인 자본력과 기술력만으로는 미국의 대규모 언어 모델(LLM)을 따라잡기 어려운 상황에서 나온 전략이었다. 더구나 AI를 둘러싼 미·중 패권 경쟁이 가속하면서 한국 경제의 미래를 놓고 위기감이 커지자, 소버린 AI에 대한 주목도가 커졌다.
소버린 AI 실현을 위해서는 컴퓨팅 인프라와 인재풀, 제도적 기반이 뒷받침돼야 한다. 컴퓨팅 인프라의 경우 LLM을 자체 개발하고 이와 연계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이 기본 수순이다. 미국이나 중국의 AI 생태계에 각 영역이 잠식당하지 않고 기술 자립성과 데이터 주권을 확보하려면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생성형 AI 대응 추격전, 유럽도 소버린 AI에 주목
챗GPT가 열어젖힌 생성형 AI 시대에 한국 정부와 기업의 대응은 상당히 뒤처졌다. 정부는 지원 방향과 규모를 놓고 갈피를 잡지 못하는 모습이었고, 기업들은 기술적으로 앞서나간 미국을 좀처럼 따라잡지 못했다. 반면, 중국은 딥시크 개발로 글로벌 AI 시장에 충격파를 주고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 아래 대규모 투자를 진행하며 미국을 상대로 거센 추격전을 펼쳤다.
새 정부 출범 후 소버린 AI는 정부 과제로 본격적으로 수용되며 추진 속도가 붙었다. 한국만의 흐름은 아니다. 소버린 AI는 우리나라뿐 아니라 유럽 등에서도 이미 화두로 떠올랐다. AI 분야에서 기본적인 기술 자립을 이루지 못하면 미국이나 중국의 AI 생태계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는 위기의식이 유럽 각국에서 커지면서 대규모 투자로 이어지고 있다.
특히 프랑스의 독자 LLM인 미스트랄(Mistral)이 가능성을 보이면서 소버린 AI를 추구하는 여러 국가에 희망을 주기도 했다.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소버린 AI 인프라 구축에 대해 ‘주권을 위한 우리의 투쟁’이라고 표현할 정도로, 프랑스는 각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영국과 독일도 독자 AI 생태계 조성에 나섰다. 일본 역시 대규모 투자를 통해 소버린 AI 모델 개발에 나섰고, AI 시대를 뒷받침할 데이터센터 구축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인프라, 인재풀 확보하고 개방 생태계 구축해야
문제는 소버린 AI 구축에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며, 성공 여부도 장담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AI 경쟁의 성패는 고비용의 GPU와 신경망처리장치(NPU)를 얼마나 확보하느냐에 달려 있다. 정부가 추진하는 국가대표 AI 정책도 기업이 활용할 GPU를 정부 예산으로 확보하느냐가 핵심이다. 소버린 AI는 LLM을 넘어 클라우드와도 직결돼 있다. 클라우드는 AI 서비스를 뒷받침하는 방향으로 발전할 수밖에 없다. 이미 국내에서도 아마존과 구글은 클라우드 서비스에서 LLM API와 각 기업의 소규모 언어 모델(SLM) 구축을 지원하고 있다. 결국 AI 데이터센터와 이를 뒷받침할 전력망까지 포함한 인프라 전반이 소버린 AI 범주에 속한다.
특히 국방 분야에서는 그 필요성이 더욱 크다. 국가 안보용 AI가 외국 기술에 의존한다면, 위기 상황에서 최악의 경우 해당 국가의 기술 통제를 받을 위험이 있다. 경제 분야에서도 외국산 AI에 종속될 경우 해당국과의 외교 관계가 심각하게 틀어졌을 때 취약 요인이 될 수 있다.
제조업 강국인 우리나라에서 소버린 AI의 생태계 범주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생성형 AI는 멀티모달 AI로 발전하고 있으며, 휴머노이드 및 스마트팩토리와 연결되는 피지컬 AI로 진화할 수밖에 없다. 이 과정에서 AI 인재를 육성하는 생태계를 구축하면서 인재 유출을 막고 해외에서 유능한 인재를 유치하는 것도 중요한 과제다. AI 스타트업 생태계의 발목을 잡는 불필요한 규제도 개선이 요구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이해당사자 간 갈등 조정이 선행돼야 하는 건 필수다.
소버린 AI의 성패는 이 과정에서 선순환 생태계를 구축하는 데 달려 있다. ‘갈라파고스화’로 악순환의 고리가 형성되면, 차라리 외국산 생성형 AI를 활용하는 것보다 못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급성장이 예고된 국내 AI 클라우드 인프라 시장도 글로벌 오픈소스에 폐쇄적으로 접근하면 국내 AI 생태계의 다양성이 떨어질 위험이 있다. 공공 클라우드 등 국내 클라우드 시장에서는 국가대표 AI로 최종 선정된 기업 한두 곳이 상당한 지분을 행사할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 과정에서 국내 정책이 글로벌 AI에 문을 닫아거는 데 치중한다면 시장의 갈라파고스화를 초래할 수 있다. 국가대표 AI 역시 국내 시장에 안주하게 되면 글로벌 시장에서의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 클라우드와 밀접한 보안 산업 역시 개방된 생태계 내에서 해외로 뻗어나갈 수 있는 경쟁력을 키울 수 있다.
프랑스는 미스트랄 생태계를 독자적으로 구축하면서도 글로벌 시장의 현실에 맞게 개방적으로 설계했다. 미스트랄은 마이크로소프트(MS)로부터 투자받으면서 MS의 클라우드 플랫폼 애저(Azure)1)에 진출하게 됐다. MS로서는 오픈AI 모델을 독점 제공하는 데 따른 유럽연합(EU)의 규제 리스크를 줄이면서 시장 점유율을 확대해 나갈 수 있고, 미스트랄은 MS 애저를 통해 글로벌 시장으로 진출할 기회를 얻어 ‘윈-윈’ 구조를 만들었다.
정당한 콘텐츠 대가로 고품질 학습 데이터 확보할 수 있어야
데이터를 학습시키고 결과물을 생성할 수 있는 반도체 확보도 중요하지만, 데이터 확보 자체도 핵심 사안이다. 소버린 AI를 명분으로 콘텐츠 등 데이터를 LLM 기업에 사실상 저가로 넘기도록 유도할 경우 AI 생태계의 악순환을 야기할 수 있다.
특히 이제 데이터는 양이 아니라 질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올해 미국 생성형 AI 시장의 동향을 살펴보면 이런 흐름을 확인할 수 있다. 잘못된 내용을 사실처럼 만들어내는 할루시네이션(환각) 현상을 최소화하는 것이 생성형 AI 간 경쟁에서 핵심 과제로 부상했다. 생성형 AI 기업들이 양질의 데이터 확보에 사활을 걸고 투자하는 이유다. 1인 콘텐츠 생산물이건, 거대 기업의 생산물이건 콘텐츠만 좋다면 구매해 간다.
아마존이 지난 7월 AI 학습 등에 사용하기 위해 뉴욕타임스에 연간 2,500만 달러(약 347억 원)를 지급하기로 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다. 아마존이 ‘왜 뉴욕포스트를 선택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을 던져볼 필요가 있다. 좋은 콘텐츠가 좋은 AI를 보장한다. 아마존과의 거래로 뉴욕타임스도 양질의 콘텐츠 생산을 위한 투자액을 늘리는 등 생태계 선순환이 자연스럽게 이뤄지는 셈이다.
결국 소버린 AI 생태계에서도 국내 LLM 기업이 기술 경쟁을 통해 글로벌 투자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고, LLM 기업은 투자금을 기반으로 직접 좋은 데이터를 구매하는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다. 국내에서 이 같은 생태계를 구축하지 못하면, 각 콘텐츠 분야 생태계는 기반이 허약해질 수밖에 없다. 경쟁력 있는 콘텐츠가 국가대표 AI가 아니라 제값을 쳐주는 해외 AI와 독점 계약을 하는 흐름도 상상이 가능하다. 해외 AI 입장에서는 국내 생태계의 약한 고리를 공략하는 셈이다.
반면 품질 좋은 콘텐츠가 국내 기업으로부터 제값을 받고 LLM이 내놓는 양질의 답변에 이바지하게 되면, 자연스럽게 낮은 품질의 왜곡된 콘텐츠는 수요처를 찾기 어렵게 된다. 저널리즘과 LLM의 선순환은 당연히 사회적 후생 증가로 이어지지 않을까.
1) 마이크로소프트에서 제공하는 클라우드 컴퓨팅 플랫폼. 편집자 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