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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제작기] EBS <뤼순에서> 제작기
취재기 제작기 | 등록일 : 2025-09-26

EBS는 지난 6월 ‘AI 단편 극장’을 통해 국내 최초로 전편 AI 제작 방송을 선보였다. 이어 9월 3일 애니메이션, 교양, 강연, 다큐멘터리 등으로 구성된 두 번째 프로그램인 <뤼순에서>를 방영했다.1) 방송계 AI 활용의 가능성과 과제는 무엇인지 <뤼순에서> 제작기를 통해 확인해 본다. 편집자 주

 

제작 현장은 ‘샐러드 볼’이다. 천양지차인 수십 명이 한 작품에서 뒤섞인다. 까만 피부의 베테랑 카메라 감독 옆에서 섬세한 손맛을 자랑하는 소품 감독이 미니어처 소품을 정갈하게 수놓고, 어느덧 머리가 희끗해진 경륜의 메인작가 뒤로 갓 대학을 졸업한 FD가 힙색을 매고 뛰어다닌다(그러다 철퍼덕 넘어지곤 한다!). 하여간 정말 수많은 종류의 인간 군상이, 각자의 개성을 담아 방송물이란 수공예에 자신만의 한 땀을 수놓는다. 그리고 연출자는 ‘오케스트라’라는 참으로 고리타분한 비유가 말해주듯, 이 모두와 소통하는 지휘자 역할을 한다. 어쩌면 나 역시 그랬다. 적어도 2024년까지는.

 

2025년, 거짓말처럼 내 곁엔 아무도 없었다. ‘EBS AI 단편 극장’ <뤼순에서>를 제작한 2주간의 시간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 딱 한 명 있었다. 나를 지긋이 바라봐 주던 모니터 안 죄수복 차림의 ‘사이버’ 안중근 선생님.

 

필자는 EBS ‘AI플러스팀(AI PLUS팀)’이라는 실험적 조직에서 실험적 AI 방송물을 제작하고 있다. 작년 <명의>라는 프로그램을 제작할 당시 사비를 털어 수강한 AI 교육을 필두로 AI에 눈을 떴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현재 팀에 강제 전출(?) 됐다. 이 팀의 미션은 편당 제작비 70만 원으로 100% AI 제작 방송물을 연내 10개 제작하는 것. 이 글은 그중 가장 최신 제작물인 <뤼순에서> 제작기다. 

 

 

<뤼순에서> 스틸컷. 어느 날, 115년 전 녹화된 의문의 영상 파일이 발견됐다. ⓒEBS

 

 

안중근 의사가 녹화한 영상 편지?

 

《동양평화론》 집필 서사와 그 서문을 보면, 안중근은 사상가 수준으로 평화에 대한 식견과 구체적인 실행 계획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럼에도 안중근이 ‘의사’로만 기억되고 ‘평화 사상가’로는 기억되지 않는다는 아쉬움이 기획의 계기였다.

 

그렇게 탄생한 제작물 <뤼순에서>는 지금으로부터 115년 전 안중근 의사가 뤼순 감옥에서 녹화한 의문의 영상이 발견됐다는 콘셉트의 100% AI 제작 팩션물이다. 안중근의 흔들리는 핸디 카메라 시점으로 찍힌 뤼순 감옥의 전경이 나온 뒤, 거치 카메라를 스스로 설치하는 듯한 달그락거림과 함께 영상 메시지 녹화가 시작된다. 안 의사는 마지막 기록을 남기듯 하얼빈 의거의 전말과 자신의 동양 평화 사상을 담담히 기록하고 미래 세대에게 평화를 향한 울림을 선사한다.

 

AI 영상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하라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AI 작품을 향한 대중의 시선이 그리 곱지 못하다는 부분이었다. <뤼순에서>를 제작할 즈음엔 모두의 유튜브 알고리즘에 AI 영상이 꼭 한 번쯤은 나타나기 시작할 때였고, 존재감이 커지자 그만큼 거부감도 극에 달한 듯 보였다.

 

요인이 크게 세 가지라고 생각했다. 첫째, 밈적(memetic)·오락적 AI 쇼츠 질감에 대한 피로감. 둘째, 기존 CG를 AI로 단순 대체해 만든 어색한 화려함에 대한 납득 불가능성. 셋째, 제작비 절감 목표의 AI 활용에 따른 노동 인력 축소에 대한 사회적 반발감(재연배우가 활약하던 프로그램에서, 재연배우 대신 AI 재연 신을 활용하자 재연배우를 돌려달라는 시청자 민원이 빗발친 것이 대표적 예다).

 

물론 이는 새로움에 대한 일시적 반발감이며 머지않아 AI 영상이 대중의 콘텐츠 소비 문화권에 자연스레 들어가 있으리라 확신한다. 하지만 미래는 미래고, 2025년 현재 AI 콘텐츠를 만들어야 하는 상황에서는 이 반발을 감각해야 하는 것이 맞다. 다음 세 가지 사항을 유념한다면, 현시점에 발생하는 대중의 거부감을 일정 부분 희석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공적·지식적 효익을 주는 콘텐츠, △오직 AI여야만 구현이 가능한 콘텐츠. 다시 말해, AI 사용이 ‘납득 가능한’ 콘텐츠, △인간을 배제하지 않는 콘텐츠.해당 부분들을 이렇게 반영했다. 첫째, 하얼빈 의거 구체적 서사 및 《동양평화론》 집필 미완 서사를 내용적으로 포괄해, 일종의 학습이 발생하는 ‘지식 교양’ 콘텐츠가 되게끔 구성했다. 둘째, 사료와 똑같은 얼굴의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카메라를 켰다는 설정을 가미해, ‘오직 AI로만 실현 가능한 콘텐츠’를 제작했다. 셋째, 대본 작성이나 고증 같은 내용적인 부분은 AI에 의존하지 않고 최대한 인간의 손과 판단으로 작업해 사람의 감각과 숨결이 남아있도록 조치했다.

 

인간에 의한 고증 작업은 특히나 신경 쓴 부분인데, 단순한 정서 위주의 독립운동가 부활 콘텐츠를 넘어 방송국 수준에서 도모하는 ‘지식 교양’ 콘텐츠가 되려면 더욱이 필수요건으로 보였다.

 

AI 콘텐츠는 ‘값싼 콘텐츠’가 아니다

 

AI 제작이 환호받는 이유는 파격적인 비용 절감으로 알려져 있다. 맞는 말일 수 있다. <뤼순에서> 역시 기존 공정이라면 장시간 중국 출장을 가서 실제 뤼순 감옥을 대여하거나 세트를 설치해야 나올 수 있는 그림을 구독료 70만 원으로 2주 만에 더욱 정확한 얼굴의 안중근과 뤼순 감옥 영상으로 구현했으니 말이다.

 

 

실제 하얼빈역(위)과 <뤼순에서>의 하얼빈역 ⓒEBS

 

 

하지만 ‘70만 원으로 뚝딱 만든 콘텐츠’의 내피에는 돈으로 측정할 수 없을 만큼의 수많은 고난과 인내가 있었다. AI 콘텐츠를 만들려면 실로 옴짝달싹 못한 채 ‘생성의 사슬’에 꽁꽁 묶여야 했다. 시작부터 정확한 안중근 얼굴이 도저히 나오지 않아, 수많은 AI 툴과 ‘25시간 엉덩이 싸움’ 끝에 겨우 유사한 모델을 얻어냈다. 안중근의 목소리를 생성하는 데도 무수한 담금질이 필요했다. 계속 중국풍 말투로 생성이 되다 보니 근현대 작품에서 들릴법한 한국적 목소리를 구현하기 위해 미세한 프롬프트 수정을 끝없이 반복해야 했다. 그렇게 기초 재료를 완성하는 데만 3일 밤을 꼬박 새웠고, 이후에는 고증에 기반한 약 310개 비디오 AI 클립을 공장마냥 하나하나 생성해야 했다. 그중 NG 컷, 그러니까 손발 뒤틀림이나 얼굴 경련 신, 차원이 왜곡된 배경 컷 등을 눈물을 머금고 지워낸 뒤 최종 생존한 약 90개의 클립을 활용해 최종본을 완성했다. 좋은 콘텐츠는 절대로 싸게 나오지 않는다더니, 제작비는 적게 들었다지만 제작자의 노동량과 인건비 그리고 터져버린 척추 디스크 치료비를 생각해 보라. 어떤 AI 콘텐츠는 절대로 ‘값싼 콘텐츠’라 부를 수 없다.

 

‘비용 절감’보다 중요한 ‘새로운 유형의 콘텐츠’

 

똑같은 콘텐츠를 값싸고 빠르게 만들 수 있다는 접근은 ‘공급자 마인드’다. 이는 작품 소비 주체인 시청자를 배제한 접근인데, 당연한 것이 ‘이런 화려한 작품을 이렇게나 싼값에 만들었구나’는 시청자가 감동 받는 포인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비용 절감이라는 키워드보다 ‘그동안 실현할 수 없었던 새로운 내용과 정서를 일궈보겠다’라는 기획자적 마인드가 AI 제작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무한히 돌아가는 생성의 굴레와 약간의 척추 디스크만 감당할 수 있다면 AI가 그간 꿈꾸기만 했던 장면을 여지없이 구현해 주는 반려 인공지능이라는 점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뤼순에서> 클립 생성 화면, 약 310개의 비디오 클립을 생성해 90개를 솎아냈다. ⓒEBS

 

 

기술이 기술을 소멸시킨 세상이다. AI만 익히면 아무리 손재주 없고 공학적 감각도 없는 사람이라 하더라도 그간 상상만 했던 전혀 새로운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이제 이야기의 해방이 다가왔다. 내 곁을 지켜주었던 사이버 안중근 선생님의 영상 편지 이야기도 한 방송국의 실험적 프로젝트를 넘어 우리 시대의 평화를 다시금 돌아보게끔 만드는 계기를 제공하는 이야기였기를 조심스레 바란다. 그리고 이 글은 보는 모두가 AI를 활용해 자신만의 서사를 양껏 증폭시키기를 바란다. 다만 명심하라. 이는 멈추지 않는 ‘생성형 런닝머신’에 양발을 올려놓는 것임을. 그리고 조심하라. 바스러지는 당신의 경추와 요추를. 그리고 고독을! 

 

 

 

 

1) <뤼순에서>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와 한국방송통진전파진흥원(KCA)이 주최한 ‘2025년 방송인 인공지능(AI) 영상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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