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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기 제작기] KBS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 제작기
취재기 제작기 | 등록일 : 2025-12-26

2024년 12월 3일 국회에는 나이와 직업을 가리지 않고 다양한 사람들이 모였다. 비상계엄 선포의 순간을 누구보다 생생히 체험한 이들은 아주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이들의 목소리가 담긴 KBS 다큐멘터리 제작기를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12·3 비상계엄이 보름 정도 지나서였던 걸로 기억한다. KBS 신관 8층 편집실에 틀어박혀 <추적 60분>을 한 컷 한 컷 붙여내고 있었다. 12·3 비상계엄과 뒤이은 탄핵 정국을 기록하기 위해 많은 인력이 필요했다. <추적 60분>의 모든 PD가 매주 방송에 투입됐다. 나도 그중 한 명이었다. 계엄 선포 이후 제대로 잠을 잔 밤이 며칠이던가. 나는 무거워진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고 있었다. 쿵쿵. 누군가가 편집실 문을 두드렸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니 반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내가 한때 팀장으로 모셨던 (그러나 당시엔 그냥 옆 부서 선배였던) 유종훈 프로듀서였다.

 

그는 내게 할 말이 있다고 했다. 내용은 대충 짐작 가능했다. 그가 비상계엄 직후부터 새 기획을 들고 같이 일할 후배를 구하고 있다는 소문이 파다했으니까. 심지어 몇몇 PD들은 벌써 그의 제안을 거절했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그러니까 그의 ‘원픽’ 후배는 내가 아니었고, 나는 곧 여기저기서 이미 차이고 온 제안을 받게 될 터였다. 자존심이 상할 일까진 아니었으나 다소 샐쭉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거절할 준비를 마치고 그가 입을 떼길 기다렸다.

 

“내가 기획안 아이디어가 하나 있거든. 그래서 같이 일할 사람이 필요한데. 비상계엄 현장에 있었던 사람들의 증언을 인터뷰 영상으로 채록해서 유튜브에 올리는 거야. 어떠니?” 

 

나는 곧바로 내 의사를 밝혔다. 

 

“언제부터 시작할까요?”

 

거절하기엔 너무나도 매력적인 기획이었다. KBS가 꼭 해야 할 프로젝트였고, 동시에 KBS만이 할 수 있는 프로젝트이기도 했다. KBS는 이미 현대사를 영상으로 세세히 기록해 온 전통이 있다. 5·18 민주화운동을 다룬 <광주는 말한다>부터 <인물현대사>, <현대사 영상프로젝트>까지. 집요하게 영상 사료를 만들고 모으고 정리하는 것은 KBS만의 특기였다. 기록의 힘은 시간에서 온다. 시청률, 조회수와 같은 구체적 성과가 당장 드러나지 않더라도 우직하게 프로젝트를 견인할 힘이 필요하다. 콘텐츠를 ‘상품’으로만 생각하는 조직에서는 그런 동력이 나오지 않을 것이다. KBS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 미디어이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 또한 다른 건 몰라도 버티는 일만큼은 자신 있었다.

 

정치권력에 휘둘리는 KBS? 그래도 우리는 만든다

 

유종훈 프로듀서와 나는 시사 프로그램계의 베테랑인 김희정 작가를 모시고 기획안을 발전시키기 시작했다. 프로젝트의 정식 제목은 ‘12·3 비상계엄 증언 채록 프로젝트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이하 <그날 그곳>)로 정했다. 목표 생존 기간은 1년. 그때까지 123명의 증인을 인터뷰하기로 했다. ‘12·3’에서 착안한 숫자였다. 세 자릿수 목표치에 잠시 아득한 느낌이 들기도 했지만 꿈은 크게 가질수록 좋은 것 아니겠는가. 일단 한 번 가 보기로 했다.

 

문제는 상부의 허락이었다. KBS의 지난 2년을 돌이켜 보면 쉽지 않은 일이 될 것이 분명했다.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2024년 초에 있었던 <다큐 인사이트> 세월호 10주기 편 불방 사건이었다. 당시 사측은 ‘총선에 영향을 줄 것’이라는 납득하기 어려운 이유를 들어 해당 프로그램의 4월 방송을 막았다. 이미 제작에 들어간 아이템도 그렇게 엎어진 전례가 있는데, ‘비상계엄 채록 프로젝트’ 같은 걸 할 수 있으려나. 이런 걱정까지 해야 하는 우리의 처지가 조금은 애석했다.

 

어쨌거나 되는 데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었다. 이 난관을 돌파하는 것은 모두 유종훈 프로듀서의 몫이었다. 그리고 그는 보란 듯이 해냈다. 그가 어떻게 관리자들을 설득했는지, 자세한 방법은 나도 알지 못한다. 유 프로듀서의 보고를 받은 관리자들은 이 프로그램의 제작을 묵인해 줬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그것은 외부의 풍파로부터 제작진을 지켜주기 위한 하나의 고육지책이 아니었을까 싶다.

 

이러한 이유로 <그날 그곳>은 어디까지나 ‘서브 프로젝트’일 수밖에 없었다. 나와 유종훈 프로듀서는 본업인 <추적 60분>, <이슈 픽 쌤과 함께>, <긴급진단> 등 프로그램을 제작하며 틈틈이, 그리고 조용히 계엄 채록을 이어 나갔다. 이런 열악한 환경에도 <더 라이브>에서 활약했던 막내 김미래 PD와 박고은 작가가 프로젝트에 합류해 줬다. KBS 영상제작국과 세트 팀에서도 없는 리소스를 쥐어짜 <그날 그곳>을 위한 공간을 마련해 줬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물꼬를 튼 첫 증언

 

2025년 1월 3일, 박민 전 KBS 사장 시절 폐지 후 방치돼 있었던 <더 라이브> 채널을 되살렸다. 채널명을 ‘KBS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로 바꾸고 <12·3 비상계엄 현장에 계셨던 분들의 다양한 증언을 기다립니다>라는 티저 영상을 올렸다.

 

이를 본 <더 라이브> 구독자들의 반응은 냉랭했다. 당연한 결과였다. 우리가 누구인지, 어떤 의도를 가지고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려는 것인지, 시청자로선 알 길이 없었을 테니 말이다. 의심하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었다. 제보받기 위해 만든 메일함도 역시나 잠잠했다.

 

우리가 먼저 인터뷰이를 찾아 나서는 수밖에 없었다. 기사에 소개된 시민들을 수소문하는 것이 첫 번째 방법이었다. 두 번째 방법은 집회 현장에 나가는 것이었다. 응원봉을 들고 있는 집회 참가자들을 붙잡고 “혹시 12월 3일에도 국회 앞에 계셨나요?” 하고 물었다. 긍정의 답이 나오기도 했고, 때로는 ‘내가 아는 사람이 거기에 있었다’라는 제보가 들어오기도 했다. 초반 섭외는 대부분 이렇게 ‘맨땅에 헤딩’으로 이뤄졌다.

 

그 결과 밴드 전기뱀장어의 보컬 황인경 님이 우리의 첫 인터뷰이가 됐다. 두 번째 인터뷰이는 국회 앞에서 군용차를 막아선 장면으로 유명해진 김동현 님이었다. 그저 진심으로 부탁드리는 것 외에는 달리 믿음을 드릴 방법이 없었는데도, 제작진을 믿고 섭외에 응해 줬다. 기적과도 같은 일이었다. 황인경 님과 김동현 님의 증언 영상이 채널에 업로드되자 제보 메일도 하나둘씩 들어오기 시작했다.

 

 

다큐멘터리 <그날 그곳에 있었습니다> ⓒKBS

 

 

시민들의 목소리로 200만 뷰를 달성하다

 

12·3 비상계엄 현장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었다. 대학생, 자영업자, 직장인, 생산직 노동자, 주부, 교수, 변호사, 종교인…. 이 모든 사람이 비상계엄을 막겠다는 일념으로 국회 앞에 모였다. 어떤 방법으로 막아야 하는 것인지, 자신의 힘으로 막을 수 있는 일인지도 알 길이 없었다. 대부분의 시민이 무작정 국회로 향했다.

 

“누구든 희생해야 한다면 그것이 나인 편이 더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날 국회로 향했던 한 시민의 말이다. 나는 치장된 비장함은 결코 시청자를 설득할 수 없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목숨을 걸었다’라는 이야기가 이토록 담담할 수 있다니. 나는 이것이 내가 다큐멘터리 PD로서 늘 갈구해 오던 진정성이라고 느꼈다. 긴박한 현장 영상으로도, 유려한 내레이션으로도 풀어낼 수 없는 무언가였다. 이 진실된 마음은 오직 현장에 있었던 이들의 목소리를 통해서만 전달 가능했다.

 

시청자들 또한 그들의 진정성을 느낀 듯했다. 유명인이 아닌 평범한 시민들의 증언이었음에도 높은 조회수를 기록하기도 했다. 롱폼은 100만 뷰, 숏폼은 200만 뷰를 찍었다.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댓글 반응도 점차 바뀌어 갔다. 초반에는 “KBS라서 보지 않겠다”, “KBS가 이럴 자격이 있느냐”라는 댓글들이 주를 이뤘다. 중반에 접어들면서는 “KBS는 싫지만 인터뷰이들이 훌륭하기 때문에 본다”라는 댓글이 달렸다. 나중에는 “KBS는 싫지만 이것이 가치 있는 기록임에는 분명하다”라는 댓글까지 등장했다. 댓글 반응이 시청자 전체의 의견을 대변할 순 없겠지만, 이러한 피드백이 제작진에게 큰 힘이 된 것은 사실이었다.

 

유튜브에서 TV 다큐멘터리로

 

프로젝트를 시작한 지 10개월쯤 지나고 나니 이런 댓글도 달렸다.

 

“솔직히 얼마 못 갈 줄 알았는데 아직도 하고 있었네요.”

 

나는 이것을 제작진의 지독함에 대한 찬사로 받아들였다. 어느덧 유튜브에 업로드한 인터뷰 클립이 70개가 훌쩍 넘었다. 인터뷰이 수로 치면 이미 아흔 명에 가까운 숫자였다. 처음 목표했던 123명을 채우는 것도 가능해 보였다.

 

고지에 가까워지니 욕심이 생겼다. 증언이 이렇게나 많이 쌓였는데, 유튜브에서만 보기는 아깝지 않은가. 더 많은 시청자에게 그날의 증언을 선보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 찍어온 인터뷰 영상을 바탕으로 동명의 TV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로 했다. 증언과 현장 영상을 퍼즐처럼 맞추어 12·3 비상계엄의 타임라인을 톺아볼 생각이었다. 이 다큐멘터리를 비상계엄 1년을 맞이해 공개한다면 참 뜻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제작진의 바람이었다. 결단은 윗분들이 내려줘야 했다.

 

제작진은 TV 다큐멘터리에 관한 입장을 관리자들에게 전했다. ‘해보자’라는 답이 돌아왔다. 편성해준 시간 또한 의미가 깊었다. 2025년 12월 3일 밤 10시, 12·3 비상계엄이 선포된 지 딱 1년이 되는 시점이었다. 묵인을 넘어선 인정의 순간이었다.

 

<그날 그곳>은 3.4%의 시청률을 기록했다. <그날 그곳> 유튜브 콘텐츠는 ‘가톨릭 미디어 콘텐츠 대상’ 뉴미디어 부문에서 수상하기도 했다. 제작진은 그저 버틴 것 외엔 한 것이 없다. 다만 진득하게 이어온 기록의 가치를 시청자들이 알아봐 주신 결과라고 생각한다.

 

<그날 그곳> 프로젝트는 1년여의 대장정을 끝으로 휴식기에 들어갔다. 현재 제작진은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본업에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에겐 아직 다 듣지 못한 증언이 남아있다. 계엄에 맞선 이들이 아닌, 그 반대에 선 이들의 증언이다. 특히 계엄이라는 국가 폭력의 도구로 동원된 군경의 증언이 간절하다. 이들의 목소리가 KBS의 카메라 앞에 당도하게 된다면 우리는 언제든 <그날 그곳> 프로젝트를 다시 시작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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