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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년 6월, 성소수자들이 서울 도심을 가득 메웠다. 공개된 장소에서 스스로 모인 집회에서 구호를 외친 사람들이었다. 이날 방송된 영상에서는 집회 참석자들의 얼굴이 블러(blur, 흐림)처리됐다. 불과 몇 년 전 같은 축제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 보면 흐림 처리 없이 참석자들의 얼굴이 그대로 노출된 것을 알 수 있다. 분명 같은 내용의 뉴스인데, 그 사이 무엇이 바뀐 것일까. 사회적 시선인지, 방송사 내부 제작 가이드라인인지는 특정하기 어렵다. 특별히 무언가가 바뀐 것이 아니라, 서서히 굳어온 관행이 어느 순간 눈에 띈 것일 수도 있다. 한 가지는 분명하다. 지금 한국 방송의 흐림 처리는 다른 나라와 단순히 비교하기 어려운 수준에 와 있다는 것이다. 그 규모는 수치로 확인된다.
정금희·최윤정 이화여대 교수팀이 2023년 《한국방송학보》에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국내 사건·사고 뉴스에서 화면 흐림 처리가 적용된 비율은 53.2%다. NBC(미국) 12.9%, BBC(영국), NHK(일본) 1.6%와 나란히 놓으면 차이가 확연하다. BBC의 다섯 배, NHK의 서른세 배다. 방송사별로는 MBN이 40.1%로 가장 높다. 지상파 평균(25.7%)과 종편 평균(33.7%) 사이에도 뚜렷한 격차가 있다.1)
‘무엇을 가렸느냐’에서는 인물 전체(28.3%), 특정 시설·장소(22.9%), 사물·신체 일부(21.8%) 순이다. 가린 이유로는 ‘관련 인물·장소 보호’가 61.3%로 압도적이다. 숫자만 보면 한국 방송이 취재원의 인격권 보호에 유독 신경 쓰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개별 사례를 살펴보면 실상은 다르다.
현장의 실상은 다르다
이란과 미국의 휴전 협상 후 러시아를 방문한 이란 외무장관 아바스 아라그치(Abbas Araghchi)의 외신 인터뷰 영상. 아라그치 외무장관을 인터뷰할 때 내민 마이크의 방송사 로고를 흐리게 처리했다. 법인의 로고는 초상권의 주체도 아니며, 최초 보도를 했던 정보의 출처를 가리는 것은 ‘신뢰할 수 있는 정보 전달’이라는 뉴스의 본령을 훼손할 수 있다.
2019년 정경심 교수가 법원에 출석했을 때, 한쪽 눈에 안대를 착용한 상태에서 나머지 눈 하나만 모자이크 처리됐다. 시청자 누구도 신원을 모르지 않았다. ‘처리했다’는 기록만 남긴 것이다. 당시 현장의 기자들에게 정경심 교수 측이 신원노출 시 초상권 침해 관련 소송을 언급한 것에 대한 현장 취재진의 반발과 최소한의 초상권 보호 사이에서 일어난 안타까운 결과물이었다.
프로그램의 내용에 크게 영향을 주지 않는 경우인데도 혹시나 간접광고의 제재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에 선제적으로 흐림 처리된 영상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스포츠를 즐기는 사람들의 얼굴과 복장, 장비까지 흐림 처리를 한 프로그램이나 도심에서 날씨에 대한 시민 인터뷰에 보이는 건물의 간판까지 지우는 경우도 빈번하다. 뉴스와 프로그램 내내 흐릿한 영상이 나오다 보니 “도대체 무엇을 보고 정보를 얻으라는 말이냐?”라는 지적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간접광고의 오해를 피하기 위한 선제적 조치였다고 해명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방송법 시행령은 “보도·시사 프로그램에 간접광고 규정을 적용하지 않는다”라고 규정하고 있다는 사실을 많은 제작자가 모르고 있다. 돈을 받고 로고나 브랜드를 노출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간접광고에 해당이 되는 것도 아니다.
많이 가려서 손해 본 적은 없다
이런 사례들을 잇는 공통점은 하나다. 왜 가렸는지에 대한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블러·모자이크 같은 익명 처리는 분명히 필요하다. 성폭력 피해자, 아동 피해자, 신변 위협을 받는 내부 고발자. 이런 취재원의 신원을 보호하는 것은 저널리즘의 핵심 원칙이자 든든한 토대다. 문제는 이 필수적인 익명화와 편의적인 익명화가 뉴스룸 안에서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이해하려면 뉴스룸 안에서 작동하는 페널티 구조부터 봐야 한다. ‘너무 많이 가렸다’는 이유로 제재받는 일은 없다. 반면 ‘너무 많이 보여줬다’는 이유로 제소되는 일은 빈번하다. 이런 비대칭이 뉴스를 만드는 과정에서 모자이크를 기본값으로 만들었다. 많이 보여줘서 언론중재위원회에 제소되는 일은 빈번하고, 법적 분쟁으로 이어지는 경우도 적지 않다. 한국은 사실을 적시한 명예훼손도 형사처벌 대상이다. 법적 리스크는 한쪽에만 있다. 이 구조에서 편집 판단은 자연스럽게 영상을 가리는 쪽으로 기운다. 편집권이 기자의 저널리즘적 판단에서 법무적 논리로 이동하고 있다는 신호다.
이미지 처리 기술의 발달도 한몫했다. 과거에는 모자이크 처리가 번거로운 작업이었다. 그 번거로움이 역설적으로 ‘가려야 하나’라는 판단을 망설이게 하는 1차적 게이트키핑으로 작동했다. 이미지 영상 편집 기술이 발전하면서 클릭 몇 번으로 처리가 가능해지자 그 고민이 사라졌다.AI 기반 자동 모자이크 도구가 확산되는 지금, 이 경향이 더 심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취재와 편집의 분리도 무분별한 익명화 처리에 영향을 주었다. 현장 취재기자와 영상 편집자가 다를 때, 편집자는 취재 맥락을 모른 채 화면만 보고 편집을 결정한다. ‘취재기자가 이미 판단했겠지’라고 여기는 경향 때문이다. 취재기자도 ‘편집 과정에서 어느 정도는 처리하겠지’라며 판단을 미루는 경우가 종종 있다. 분업화된 뉴스 제작 과정에서 저널리즘적인 판단은 사라지고 관행만 남게 된다.
출입처 관계도 작동한다. 고발성 기사에 특정 브랜드가 등장하면 기업 홍보 담당자는 모자이크 처리를 요청한다. 목적은 브랜드 보호보다 담당자 본인의 면피에 가깝다. 이 요청을 했다는 사실 자체가 업무 수행의 기록이 된다. 언론사도 출입처 관계를 고려해 요청을 받아들이면 양측 모두 ‘처리했다’는 기록이 남는다. 익명화의 목적이 ‘보호’에서 ‘관계 관리’로 바뀐 것이다.
이처럼 가려야 하는 데는 무수히 많은 이유가 있고 처리도 간편한 데다, 또 가리지 않은 영상을 방송했을 때 추가적인 인센티브가 있는 것도 아니기에 모자이크하지 않을 이유를 찾기는 점점 어려워진다. 무분별한 모자이크 처리를 뉴스룸 구성원의 게으름 탓으로 돌리기에는 구조적인 장애물이 너무 많은 상황이다.
가릴수록 줄어드는 신뢰
BBC의 편집 정책은 익명화가 ‘제작자와 시청자 모두에게 이상적이지 않다(not ideal)’라고 명시하고 있다. ‘취재원은 가능한 한 공개적으로 발언해야 하고, 시청자가 취재원의 신뢰성과 전문성을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신원과 이력을 공개해야 한다’라고 권고한다. 특히 주목할 대목이 있다. ‘신원을 숨기기 위해 사용하는 화면 블러 처리나 음성 변조 등의 방법들이 때로는 우리가 전달하는 콘텐츠의 시청각적 품질을 훼손할 수 있다’라는 것이다. 모자이크가 내용만 가리는 것이 아니라 화면의 질까지 떨어뜨린다는 점을 BBC도 지적하는 셈이다. 한국 방송에서 익명화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과는 출발점부터 다르다.2)
과도한 모자이크가 쌓이면 다른 문제가 생긴다. 처음에는 가려진 화면이 불완전함의 신호를 주지만, 그것이 반복되면 시청자는 ‘어차피 뉴스는 다 가린다’는 체념으로 반응하게 된다. 진실을 전달해야 할 언론이 오히려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인상을 주고 있는 것이다.
흐릿한 화면이 불편한 이유는 인지심리학으로 설명된다. 뇌는 선명하게 처리되는 이미지를 신뢰할 수 있는 정보와 등치시키는 경향이 있는데, 이를 처리 유창성(processing fluency) 효과라 한다. 흐릿한 이미지를 볼 때 뇌는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그 수고로움은 불쾌감과 불신으로 번진다. 또 흐림 처리된 장면은 주변 화면과 해상도 불일치를 만들어 시청자의 시선을 오히려 그쪽으로 끌어당긴다. 가리려다 더 주목시키는 역설이 생기는 것이다.
‘왜 가리는가’라는 질문의 복원
익명화가 나쁜 것은 아니다. 저널리즘을 지키는 핵심 원칙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필수적인 익명화와 편의적·형식적 익명화가 같은 이름 아래 구분 없이 뭉개지고 있다는 점이다. 뉴스룸에는 두 종류의 모자이크가 공존한다. 하나는 언론 윤리의 결과이고, 다른 하나는 리스크 회피의 결과다. 지금 한국 방송에서 과잉 생산되는 것은 후자다.ᅠ
과잉 익명화가 문제라면 해결의 시작은 명확하다. ‘왜 가리는가’라는 질문을 기자들 스스로 하는 것이다. 뉴스 생산의 목적이 신뢰 있는 정확한 정보 전달에 있다고 믿는다면 가려야 할 정보와 보여줘야 할 정보에 대한 판단이 보다 명확해질 수 있다. BBC처럼 익명화 이유를 시청자에게 밝히면, 설명 책임이 생긴다. ‘시사 프로그램에서 피취재자가 착용한 브랜드 로고는 모자이크 대상이 아니다’, ‘이미 스스로 신원을 밝힌 인물은 익명화 대상이 아니다’, ‘이미 다른 언론사가 실명으로 보도한 사안은 추가 모자이크 없이 보도할 수 있다’처럼 사례 중심의 구체적인 기준이 뉴스룸 가이드라인에 있어야 한다.
이 변화는 어느 뜻있는 기자 개인이 혼자 이룰 수 없다. 편집 시스템이 모자이크 처리 이유를 체크할 수 있도록 설계돼야 하고, 뉴스룸 내부의 취재기자, 촬영기자, 영상 편집자가 방송 제작 가이드라인을 준용해야 한다. 또한, 공들여 제작된 가이드라인이 제대로 교육·공유될 수 있도록 뉴스 생산자들을 대상으로 한 주기적인 제작 실무 교육도 필요하다.
그동안 기술 편의주의에서 과도한 모자이크만 신경 썼다면 이제는 그다음을 생각해야 한다. AI 기반 자동 모자이크 도구가 빠르게 보급되고 있다. 클릭 몇 번으로 처리가 가능했던 것이 이제는 자동화된다. 판단 없이 처리되는 익명화가 더 많아질 것이라는 의미다. 기술이 마찰을 없애는 속도만큼, 뉴스룸의 판단 기준도 그에 맞춰 따라가야 한다. 현실이 그렇지 못하더라도 최소한의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다.
저널리즘은 신뢰라는 토대에서 존재한다. 과도한 모자이크는 시청자를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언론에 대한 불신을 스스로 키우는 일이다. 더 많이 가리거나 덜 가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왜 가리는지에 대한 고민과 질문을 기자 스스로 던지는 것. 그것이 지금 한국 방송 저널리즘이 회복해야 할 가장 기본적인 사항이라 믿는다.
1) 정금희·최윤정(2023), <흐려진 이미지 자동화 검출 방법을 이용한 사건·사고 방송뉴스의 화면흐림처리 영상분석>, 한국방송학보, 37(1), 129-167쪽
2) , Editorial Policy, BBC, https://www.bbc.com/editorialguidelines/guidance/anonymity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