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상세
신군부와 언론 검열 ①
미디어포럼 | 등록일 : 2020-04-01

언론의 신뢰를 논하기는커녕 언론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계엄사령부는 모든 언론과 출판을 사전 검열했다.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신문과방송4월호와 5월호 2회에 걸쳐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제를 수록한다. 편집자 주

 

197910·26 사건은 한국 현대사에서 유신 독재 체제가 종식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 이후 민주화를 향한 온 국민의 염원은 뒤로한 채, 전두환 장군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가 12·12 쿠데타를 통해 권력을 장악했다. 급작스러운 대통령 서거로 발효된 비상계엄사태를 빌미로 삼아, 신군부의 철저한 사전 언론 검열과 언론인 대량 해직, 언론 통폐합이 이뤄졌다. 한국 언론사의 가장 혹독한 시련기였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19791027일 발표된 계엄포고 제1호에 따르면, 대학 언론을 포함한 모든 언론·출판·보도는 계엄사령부(이하 계엄사) 보도검열단의 철저한 사전 검열을 받아야만 했다. 보도검열단은 특정 인사를 중심으로 한 민주화 운동에 관한 보도를 철저히 통제·왜곡했다. 단합된 소수의 군부를 주축으로 한 안정적인 세력을 구축하기 위함이었다. 신군부의 강제지도형으로 완벽한 사전 통제에 의해 언론이 검열되는 상황에서, 진실 보도는 요원한 일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 글에서는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계엄사 보도검열단에서 삭제됐던 언론 간행물을 중심으로 당시의 언론 실태를 2부로 나눠 재조명하고자 한다.

 

누가 검열받았나

 

당시 언론은 국가의 통제 아래 암묵의 카르텔이 형성돼 있었다. 경향신문, 동아일보, 서울신문, 신아일보(경향신문에 흡수 통폐합됨),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국일보 등 일곱 개 종합신문과 매일경제, 서울경제, 현대경제 등 특수 신문이 매일 8면을 발행하고 있었다. 통신은 합동통신과 동양통신(연합통신으로 통폐합돼 현재 연합뉴스로 명칭을 바꿈), 방송은 기독교방송(CBS), 동아방송(DBS, KBS에 흡수 통폐합됨), 동양방송(TBC, KBS에 흡수 통폐합됨), 문화방송(MBC), 한국방송공사(KBS) 등 다섯 개 방송국이 있었다.

 

 

[1] 보도검열단 인원구성표(비율)

 

 

누가 검열했나

 

비상계엄 이후 정훈병과를 중심으로 육해공군에서 차출된 군인은 물론 경제나 문화, 외신 같은 전문 지식이 있어야 하는 특수 분야 검열을 위해 문화공보부, 경제기획원, 서울시청 소속 공무원들이 보도검열단에 파견돼 전문 분야에 대한 검열을 대행했다.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총 51명의 보도검열단 구성원 가운데 53%에 해당하는 27명이 민간인으로 구성돼 있다. 문화공보부에서 검열을 위해 파견된 공무원이 11(22%)으로 육군(25%) 다음으로 많았다. 이 밖에도 경제기획원과 시청 공무원들이 해당 전문 분야의 검열을 담당했다. 또한 언론의 중요성을 고려해 보안사 합동수사본부와 중앙정보부에서 감독업무를 담당하는 조정관을 파견해 검열 업무를 통제했다.

검열단 조직은 [그림 1]과 같이 검열 단장을 중심으로 조정관과 보좌관이 자문 역할을 담당하고 하부 조직으로 신문반, 방송반, 통신반, 잡지반, 행정 및 지원반 등 모두 5개 반으로 구성돼 있었다.

 

 

[그림 1] 보도검열단 편재표

 

 

어떻게 검열했나

 

검열관들이 항시 지니고 다녔던 검열관 수첩에 있는 검열지침에는 세 개의 큰 보도 방향과 여덟 개 검열지침이 상세하게 명시돼 있었다. 이 지침을 기준으로 상황에 맞춰 기사를 검열했다. 우선 3대 보도 방향은 북괴 도전의 봉쇄와 국가보위(國家保衛) 국민생활의 안정(安定) 국민총화로 조국 근대화 발전(發展)이었다. 세부적인 8개 검열지침은 발표문 이외 게재 금지 비상계엄에 관계해 목적을 부당하게 왜곡·비방·선동하는 내용 국민 여론 및 감정을 자극하는 사항 치안 확보에 유해로운 사항 군 사기를 저하시키는 사항 군 기밀에 저촉되는 사항 공식 발표하지 않은 일체의 계엄사무 사항 기타 국가이익에 반하는 사항 등으로 명시돼 있었다. 외신 관련 전재도 이에 준한다고 명시하고 있다추상적이고 해석이 애매모호한 보도 검열지침으로 인해 현장에서 기자들과 많은 논쟁이 벌어지곤 했다.

 

 

[그림 2] 일일 보도겸열 결과 보고양식 사례(1979121)

 

 

얼마나 검열했나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비상계엄이 선포된 19791027일부터 계엄이 해제된 1981124일까지 총 456일에 걸친 계엄 기간 동안 계엄사 내 검열단에서는 [그림 2]와 같은 양식에 기초해 신문, 방송, 통신, 잡지, 문화홍보로 분류해 총 277,906건에 달하는 관련 기사를 검열했다. 평균적으로 하루 평균 610여 건의 기사를 검열했다. 277,906건의 검열 기사 가운데 전면 삭제는 11,033(4%)이고, 부분 삭제는 16,025(5.8%)에 달해 전면과 부분 삭제된 기사 건수를 모두 합하면 27,058건이었다. 전체 검열 기사 대비 삭제 비율을 계산하면 9.7%. 이것은 하루 평균 610여 건의 검열 기사 가운데 60건에 달하는 기사의 전체 또는 일부분이 보도되지 못했다는 의미다.

보도검열단의 각 매체별 검열 건수와 삭제 경향을 살펴보면 총 277,906건의 검열 기사 가운데 통신이 116,843건의 검열을 받아 전체 검열 건수 가운데 42%로 가장 많은 검열 빈도수를 보이고 있다. 그 다음은 신문으로 7190(25%), 방송 687(22%), 잡지 21,815(8%), 문화홍보 8,971(3%) 순으로 나타났다.

한편 검열 대비 삭제 비율을 살펴보면 총 27,058건의 삭제 건수 가운데 신문이 11,485건을 차지해 가장 높은 42%를 차지하고 있고, 다음은 방송 7,014(26%)과 통신 6,884(25%)이 엇비슷한 삭제 비율을 나타내고 있다. 그러나 잡지 1,279(5%)와 문화홍보 396(1%)의 삭제 비율은 타 매체에 비해서 미미한 비율이다. 전면 삭제와 부분 삭제의 비율도 전체 삭제 비율과 유사한 경향을 보인다.

종합적으로 살펴볼 때 매체별로는 통신이 양적으로 가장 많은 검열 빈도를 보였지만, 검열 대비 삭제 비율에서는 신문이 현저하게 높다는 특징이 있다. 모두 7190건에 달하는 신문 검열 건수 가운데 11,485건이 부분 또는 전면 삭제를 당해 비율적으로는 16.36%의 삭제 비율을 보인다. 이것을 다시 풀이하면 100건의 검열 기사 가운데 평균 16건의 기사가 삭제됐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수치는 방송의 11.6% 삭제율과 통신의 5.9%의 삭제율과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높은 수치다. 이것을 매체별로 살펴보면 [2]와 같다.

 

 

[2] 매체별 보도 검열 대비 삭제 비율 분석표

 

 

 



[그림 3] 날짜별 보도검열 대비 삭제비율 추이

 

 

전체 검열 기간 중 검열 대비 삭제 비율을 그래프로 살펴보면 [그림 3]과 같은 경향을 보이는데, 특히 날짜 대비 검열 대비 삭제 비율 그래프에서 두드러진 경향을 보여주는 세 시점을 발견할 수 있다. 가장 높은 검열 대비 삭제 비율을 나타내는 시점은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전후한 시기인데, 이 기간에 특정일은 최고 검열 기사 대비 삭제 기사 건수의 비율이 54%에 이른다. 그다음은 12·12사태를 전후한 시기고, 이와 비슷하게 검열 대비 삭제 비율이 높게 나타나는 시기는 19802월과 3월 사이로 학원가를 중심으로 일명 서울의 봄이라고 하는 민주화 이행 논의가 한창 진행될 시기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5월의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검열 대비 삭제 비율은 점차 감소해 하향 추세를 보이는데, 이는 정국이 안정됐다기보다는 신군부가 언론 통제 고삐를 더욱 강화했기 때문이라고 분석 할 수 있다.

 

 

[그림 4] 동아일보 19791231면 검열 전과 후 비교 지면

 

 

무엇을 검열했나

 

방대한 기사 검열을 유형별로 분석해 보면 삭제, 수정, 교체 등으로 구분할 수 있고, 분야별로 살펴보면 일반 기사, 만평, 외신 등으로 구분해 살펴볼 수 있다.

 

1. 삭제 및 수정 기사 - 1

1면에 게재될 많은 정치 현안 기사들이 아래와 같이 삭제되거나 수정됐다. 이 과정에서 삭제된 기사는 백지로 나갈 수 없기 때문에 돌출 광고로 누더기처럼 지면을 메꿨다.[그림 4]

 

[그림 5] 한국일보 1979년 12월 9일 검열 삭제된 게라’ 지면

 


[그림 6] 조선일보 19801126면 검열 전과 후 비교 지면

 

 

2. 삭제 및 수정 기사 - ‘게라

한국일보 1979129게라(인쇄물의 교정을 보기 위하여 임시로 조판된 내용을 찍는 인쇄 용어)’ 제목은 <긴급조치 관련 단체 소개>로 검열 결과 전면보류 판정이 나온 기사 사례다.[그림 5]

 

3. 전체 삭제 기사

검열단에서 규정한 여덟 가지 검열지침을 근거로 민주화관련 기사들이 삭제당했다.[그림 6]

 

 



[그림 7] 경향신문 19791235면 검열 전과 후 비교 지면

 

 

4. 교체 기사

1979123일 자 경향신문의 경우 통일한국의 미래상세미나 지면 중계 과정에서 김철수 서울대 교수의 글이 삭제돼 다른 발제자인 구상 중앙대 교수의 주제 발표 기고로 교체됐다.[그림 7]

 

 

[그림 8-1] 동아일보 19791226일 삭제된 고바우 만평

 

 


[그림 8-2] 동아일보 19791226일 고바우 만평이 삭제된 실제 지면 

 

5. 만평 검열

현란한 영상물이 끊임없이 자극하는 현재와 달리 볼거리에 굶주렸던 40년 전, 신문에 실린 네 칸과 한 칸짜리 시사만평은 대중의 정보 욕구를 충족시켜주고 그들의 애환을 대변했다. 당시 시사만평은 “‘몽둥이(기사)’가 제 역할을 못 하면 바늘(만평)’로 쑤시는 재미라도 있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있었다. 신군부는 시사만평에 대해 만약 만평이 쉬게 되면 독자들로부터 관계 기관의 압력이 작용했다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서 무슨 일이 있어도 빠져서는 안 된다는 기본 검열 정책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도 많은 만평이 삭제돼 지면에 실리지 못했다.[그림 8-2]

 

[그림 9] 주한미군 발행신문 성조지(Pacific Stars and Stripes) 1979년 11월 30일 부분 삭제된 기사

 


[그림 10] 신문과방송19801월호 서정우 연세대 교수의 부분 삭제된 기사와 실제 지면

 

 

6. 외신 검열

많은 국민이 국내 언론이 일방적으로 발표하는 부실한정보를 보충하기 위해 자연스럽게 외신에 관심을 두게 됐다. 그 당시 예리한 면도칼로 도려내지 않은 한국 관련 국제뉴스는 외국 문화원에서 자유롭게 열람이 가능했고 이는 곧바로 복사돼 은밀하게 식자층을 중심으로 국민에게 회자돼 유언비어의 근원이 되곤 하였다. [그림 9] 사례와 같이 주한미국이 발행하는 성조지도 검열 대상이었다.

 

 

7. 잡지 및 기타간행물

[그림 10] 사례와 같이 신문과방송, 뿌리깊은 나무잡지와 대학의 학보와 같은 기타간행물들이 검열을 당했다.

 

2020년은 5·18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기념하는 해다. 그 당시 피 끓는 파토스(pathos)’를 가지고 민주화를 외쳤던 386세대는 어느덧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가는 이순(耳順)의 나이로 접어들게 됐다. 이 세대는 에토스적인 명제 속에서 파토스와 로고스 사이에서 고민하는 세대기도 하다. 40년 전에는 계엄이라는 으로 인해 활동의 제약을 많이 받았지만, 현재는 바이러스라는 으로 인해 행동의 구속을 당하는 아이러니한 시대를 살고 있다. 만남과 집회 금지를 통행금지와 같은 타율에서 사회적 거리두기라는 자율로 변화된 것 빼고는 40년 전 상황을 반복하고 있다. 다음 호에서는 40년 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삭제됐던 기사를 중심으로, 치열했던 언론 취재 현장을 통해 쟁점 이슈를 재조명하고, 문재인 대통령과 관련된 검열 삭제 기사와 관해서도 살펴보고자 한다.

 

 

 

저자의 다른 미디어
  • 필자 : 이민규
  • 소속 :
  • 직함 :
  • 발행 : 2020-04-01
  • 조회수 : 8
  • 키워드 :
블로그 공유 트위터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