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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포럼] 신군부와 언론 검열 ②
미디어포럼 | 등록일 : 2020-04-29

언론의 신뢰를 논하기는커녕 언론이 제대로 된 목소리를 내지 못하던 시대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해 사건 이후, 계엄사령부는 모든 언론과 출판을 사전 검열했다.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아 신문과방송4월호와 5월호 2회에 걸쳐 1980년 신군부의 언론 통제를 재조명한다. 편집자 주

 

 

2020518일은 광주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이하는 뜻깊은 해다. 올해 70주년을 맞는 6·25 전쟁과 60주년을 맞이하는 4·19 혁명의 정신적 계보를 잇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치열한 민족상잔의 비극과 민주주의 혁명의 열망을 융합한 한국 현대사의 뼈아픈 사건이다. 40주년을 기념하면서 과연 우리 선배들은 무엇을 지키기 위해서 그토록 귀중한 죽음과 맞바꾸었는가에 대한 깊은 성찰이 필요하다. 그러나 명확한 진실 규명도 못 한 채, 각자의 이해관계가 실타래처럼 엉켜 광주민주화운동은 미완성의 민주화 운동으로 남아있다. 광주민주화운동은 앞으로 계속 진실 규명이 필요한 현재진행형 운동인 셈이다.

 

이 글에서는 지난 호에 이어 신군부에 의해서 무자비하게 자행된 언론 검열이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어떻게 진행됐는지 당시 삭제된 기사와 현장을 취재했던 기자들의 회고록을 중심으로 재조명하고자 한다. 가혹한 망각의 역사 속에 영원히 묻힐 뻔한 삭제 기사를 근간으로 과연 그 당시 언론이 민주주의를 수호하고, 언론 자유를 쟁취하려고 어떻게 노력했는지 자세히 규명해보고자 한다.

 

통계로 본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언론 검열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내용이 보도됐던 1980519부터 64사이1), 보도검열단을 거쳐 간 기사는 총 12,212이었다. 이 가운데 전면 삭제 777건과 부분 삭제 933건을 합해 모두 1,710건이 삭제됐다. 5·18 격동의 17일간 검열 기사 대비 삭제 기사 비율은 14%에 달했다. 이는 지난 호에 밝혔던 전체 검열 기간 456일 동안 삭제 비율 평균 수치 9.7%보다 4.3%나 높은 수치다.

 

제주도를 포함해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대돼 검열지침이 한층 강화됐음에도 불구하고, 기사 삭제 평균 수치가 높아진 것은 그만큼 정치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됐음을 보여주는 결과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동안 하루 평균 814건을 검열 114건의 기사가 전체 혹은 부분 삭제됐다. [그림 1] 날짜별로 분석해보면 총삭제 비율이 20%가 넘는 시기는 세 곳으로 519(20.57%), 526(25.77%), 62(21.17%)로 나타났다. 전체 삭제 비율 그래프를 분석해 보면 5·18 광주민주화운동 초기에 삭제된 기사 비율이 높았고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인 526 가장 높았으나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종료된 이후에도 꾸준히 관련 기사가 많이 삭제됐음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림 1]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전체 삭제 기사 비율 (단위: %) 

 

한편 [그림 2]와 같이 매체별로 구분해 삭제 비율을 살펴보면, 신문이 평균 33%(866)에 달해 압도적으로 많이 검열당했고 다음이 방송으로, 평균 15%(444), 통신이 평균 5%(287)에 달했다. 분석 결과 그 당시 신문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서 다른 어떤 미디어보다 앞장서 노력했음이 밝혀졌다. 신문의 경우 검열받은 기사 가운데 거의 반이 사라져버리는 총삭제 비율이 40%를 넘긴 날은 총 5일에 달해 그 당시 취재한 기사를 두고 기자와 검열관 사이에 치열하게 밀고 당기는 검열 상황이 있었다고 추론할 수 있다. [그림 2]에 나타난 신문의 경우 519(48%), 523(42%), 526(43%), 529(40%), 62(64%) 등이 40% 이상 보도 삭제가 된 날로 나타났다. 특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계엄군에 의해 폭력적으로 진압된 뒤인 62일 총검열 69건의 신문 기사 가운데 64%에 해당하는 44건의 기사가 검열 삭제돼 사라졌다. 전체 검열 기간 가장 높은 삭제 비율이다.

 

 

[그림 2] 매체별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삭제기사 비율 (단위: %)

 

 

 

어떠한 지침을 가지고 검열했나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 데모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해, 신군부는 몇 가지 중요한 보도검열지침을 하달한다.

 

198041서울의 봄으로 학생들의 민주화 요구 데모가 한창이었던 시기, 검열단 보도처에서 발행한 검열세부지침에 의하면 공공질서와 유관해 시위, 난동, 농성, 불법 집회 등을 선동, 고무, 찬양하는 내용에 대해서는 보도를 일체 불허하지만 예외적으로 학생, 노조, 종교 및 기타의 자연발생적인 시위 등 의견 표현 행위의 단순한 사실 보도는 허용한다는 지침을 각 검열관에게 하달했다. 예외적인 검열지침은 신군부가 언론을 이용해 공공질서를 어지럽히는 학생, 노조, 재야 종교단체의 시위 활동에 관한 보도를 의도적으로 묵인해 혼란 정국 분위기를 여론화시키겠다는 의미였다.

 

계엄 철폐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서울의 봄당시, 198056일 대외비로 취급한 학생시위 관련 보도지침에는 [그림 3]과 같이 국민에게 학생 데모가 부당함을 인식(認識)시킬 수 있는 장면에 한()”해서 보도를 허가했다. 학생이 경찰에게 돌을 던지려는 상황을 묘사해 가며 정치적 목적으로 공공질서가 혼탁해지고 있다는 것을 보도하는 것을 허락했다.

 

 

[그림 3] 학원 사태 관련 검열지침(대외비) <출처 - 대외비 학원사태 지침(1980. 5. 6.)>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 날짜별로 하달된 세부 보도지침은 다음과 같다.

 

. 523

o. 계엄군 활동, 피해 사항은 공식 발표 이외 보도 내용을 금지

o. 소요 진정에 저해되는 사항 금지

 

. 524

1. 보도 불

o. 시위자들의 협상 요구 사항 중 시위자들이 탈취한 무기 장비 회수 또는 피해 복구사항에 대한 개별 취재 내용

o. 인명 피해, 사상자 처리에 관한 개별 취재 내용. , 계엄당국에서 발표한 것은 제외. 소요 자극, 진정 저해요인 상황

2. 보도 가능 사항

o. 시위자들의 방화, 약탈, 살상, 검거, 선동 등 사실 보도, 시위자들 자수 안정회복 권유 관련 사항

o. 협조 사항 - 간첩 검거, 계엄당국 발표, 공식 발표된 계엄군의 활동 크게 취급 요망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날짜별 세부 보도지침에서 주목할 항목은 5242항의 보도 가능 사항으로 그동안 보도 불가 위주의 네거티브 검열지침에서 시위자들의 폭력적인 면과 북한에서 남파한 간첩 검거와 남침 위협을 부각하는 포지티브 검열지침으로 전환했다는 점이다. 당시 엽기적인 토막 살인과 계엄당국의 간첩검거 발표를 사회면에 크게 보도하게 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북한의 불순세력과 연계시키려 노력했고, 공식 발표된 긍정적인 계엄군의 활동을 크게 취급하도록 강요했다.

 

삭제된 기사들

 

5·18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취재 현장을 지킨 조성호 ()한국일보 기자와, 김영택 ()동아일보 광주 주재기자 등의 증언을 토대로 서울의 봄을 통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예고(豫告), 518,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시작된 피의 일요일이후 민주항쟁 여명(黎明) 시기, 521, 금남로의 대유혈 사태, 공수대와 시민군의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피의 초파일라 일컫는 격화(激化) 단계, 527, 도청이 함락된 민주화 운동의 마지막 날 피의 화요일이후 수습(收拾) 시기, 그리고 에필로그: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전국으로 확산된 민주화운동 단계 등 모두 다섯 단계로 구분해 시기별 검열 삭제된 기사를 분석해 봤다.

 

(1) 예고: ‘서울의 봄춘래불사춘

1980년 봄 정치권에서는 서울의 봄이 다시 왔다고 흥분했다. 그러나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서울의 봄을 한마디로 춘래불사춘(春來不似春)으로 표현했는데 봄이 왔다고 남들은 말들 하지만 진정한 자유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이런 맥락에서 422일 합동통신의 <요사태 거리로 확산될 수도> 삭제 기사에서 미국의 권위 있는 시사 잡지 유에스뉴스앤드월드리포트(US News & World Report)한국에서 일고 있는 학원소요는 거리로 확산될 것으로 보이며 이럴 경우의 대응이 확실하다고 예측했다. 또한 이 잡지는 학생소요가 캠퍼스 밖으로 번질 경우 군의 단속이 며칠도 아닌 수 시간 내로 가해질 것이라고 경고하고 다수의 영향력 있는 군 지휘관들은 이미 자유화가 지나치게 신속히 진행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지적해, 한 달 후 광주에서 발생할 민주화운동을 정확하게 예측했다.

 

(2) 여명: 최초 희생자

5·17 조치로 전국으로 비상계엄이 확산되고 각 대학교에 휴교령이 떨어짐에 따라 자정을 기해 각 대학 캠퍼스로 완전무장한 계엄군이 진주했다. 이 과정에서 전주에 있는 전북대학교 교정으로 진입한 7공수 부대원들에게 쫓겨 제1학생회관에서 농성을 벌이던 이세종 군이 518일 새벽 1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게 된다. 당시 사인은 단순 추락사로 발표됐으나, 그의 온몸에는 구타로 인한 상흔이 분명히 남아있었다. 이세종 군의 주검을 검안했던 이동근 전북대병원 교수는 훗날 주검에 나타난 두개골 골절과 간장 파열 등은 추락이라는 한 가지 원인에 의해 동시에 발생할 수 없다면서 추락 전에 계엄군의 집단 폭행 가능성을 제기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최초의 희생자는 광주가 아닌 다른 지역에서 발생했다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80 5. 19.

종류: 통신, 신문

사별: 합동통신, 동아일보

제목: 전북대생 1명 추락사, 계엄군 피하려다

내용:

18일 새벽 130분께 전주시 덕진동 전북대 학생회관 3층 옥상에서 동교 농학과 2년 이세종 군(20, 전북 김제군 월촌면 연정리 281)13미터 아래 콘크리트 바닥으로 떨어져 숨졌다. 경찰에 따르면 숨진 이군은 이날 자정 비상계엄령이 전국에 확대 발표된 직후 계엄군이 학교에 진입 학생회관 쪽으로 몰려들자 학생회관 회의실에 있던 30여 명의 학생들과 함께 몸을 피해 옥상 밑에 부착된 철제 외등 걸이를 붙잡고 매달렸다가 밑으로 떨어져 숨졌다는 것. 전북대생 30명은 17일 낮 12시부터 2층 회의실에 모여 시민 여러분에게 드리는 글의 문안작성을 끝낸 뒤 하오 7시부터 자체오락회를 시작 자정쯤 끝내고 잠을 자려는 순간 계엄군이 돌입하자 모두 옥상으로 피신했다. 전북 계엄사무소 전주 분소는 전북대생 30원광대 보건대생 1민간인 2명 등 35명을 연행 전주 경찰서에서 이번 데모사태와 관련된 경위를 조사 중이다.

(비고: 전면삭제된 기사)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끝난 후 한국일보 사보를 통해서 자사 네 명의 취재 기자들이 일기 형식으로 생생하게 체험한 기사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과정에서 KBS·MBC 방화와 국내 언론에 대한 시민들의 적대감을 묘사한 르포 형식의 생생한 취재 기사가 인쇄물 교정을 보기 위해 임시로 조판된 내용을 찍는 인쇄 형식게라형식으로 다음과 같이 제작됐으나 전면 삭제됐다.

 

1980. 6. 7.

종류: 신문

사별: 한국일보 사보

분류: 게라

제목: 광주사태

내용:

o. 37기 유동성 기자와 함께 광주에 도착한 것이 지난달 19일 하오 835분께. 고속버스가 시내에 들어가지 않고 외곽지대에서 승객을 내리게 해 시내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직감했다. 비가 퍼붓는 밤길을 따라 광주역 쪽으로 무작정 뛰었다.

시내로 들어가는 길목은 모두 차단상태였고 멀리 유동(柳洞)쪽에서 대형트럭 1대가 불타면서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고 있었다. 시내로 접근하는 길목을 찾다가 통금시간인 밤 9시가 됐다. 하는 수 없이 광주역 앞에 있는 강성여관이라는 델 들어갔더니 3층에 마지막 방 1개가 남아있었다. 저녁대신 물을 마시면서 한숨을 돌리고 있는데 갑자기 밖에서 요란한 발자국 소리가 들리면서 유리 창문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쫓아 나가보니 길 건너 KBS건물 유리창을 몽둥이를 든 군중 1백 여명이 때려 부수고 있었다. 950분께 였다. 곧이어 경찰기동대가 3백명가량 나타나더니 이들을 추적, 역과 인근 길목을 뒤지느라 아우성이었다.

o. 20일 아침, 광주의 이상문 반장과 함께 시내를 돌았다. 시가엔 계엄군의 삼엄한 경계망이 펼쳐있다. 18, 19일에 있었던 시위와 계엄군의 진압, 유혈사태를 둘러싼 갖가지 소문이 시가에 만발해 있었다. 상오 9시께 지나가는 장의차를 세워 가두문상을 했더니 광주공원 뒤 양조장공터에서 시체로 발견된 김모씨(35, 월산2)의 유족이었다.

이날의 시위는 하오 3시 넘어 시작돼 하오 5시께부터 두 갈래로 본격화했다. 밤늦게 부터는 중요시설이 불타기도 했다. 작게는 5백명에서 많게는 2만여명에 이르는 군중들 틈새에서 최루탄을 마시며 뛰기를 6-7시간 하다 보니 기진맥진해버렸다. 1030분께 금남로통의 군중은 모두 사라졌으나 제봉로(齊峰路)에서 MBC건물이 전소 된데 이어 시위군중의 함성이 요란하게 밤새 울렸다....

o. 20일 밤-21일 새벽이 수난을 당한 밤이기도 했다. MBC 5층 건물이 전소됐는가 하면 자정께 KBS건물이 불타고 유동의 중앙일보-TBC건물 유리창이 박살났다. K()의 수송차가 시위대에게 빼앗겼는가 하면 한국일보지사 수송차도 빼앗겼다 되찾았다. 언론에 대한 반감이 절정에 이르고 있는 느낌이었다.

앞서 20일 밤 10시 청년 15명 가량이 지사 앞으로 몰려오더니신문방송을 그냥 둘 수 없다면서 길가에 있는 지사수송 트럭을 부수자고 했다. 일 났다 싶어 그곳에 끼어들어 개인재산은 그냥 두지했더니 그말이 맞다면서 물러났다. ....(이하 중략)....

(비고: 전면삭제된 기사)

 

 

(3) 격화(激化): ‘피의 초파일

 

1980. 5. 22.

동아일보 속보. 부분삭제

광주시민과 계엄군이 정면으로 맞서 내전양상으로 발전한 것은 데모대진압에 나선 계엄군이 데모군중에게 발포한 21일 오후 1시부터 20일 낮과 밤을 꼬박 새워 시위를 벌인 데모군중과 도청을 사이에 두고 모두 6개 방향의 도로에서 대두 대치하고 있던 계엄군에게 발포명령이 내려진 것은 21일 오후 1.

도청 건물에 설치된 확성기에서 애국가가 울려 퍼지는 것이 신호가 됐다. 데모대와 대치하고 있던 계엄군은 애국가 소리를 듣자 일제히 들고 있던 곤봉을 버리고 메고 있던 M16으로 데모대전열을 향해 일제히 사격을 시작했다. 뜻하지 않은 발포에 당황한 시위 군중들은 쓰러진 동료들을 메고 뿔뿔이 흩어지려했으나 계속적인 계엄군의 사격으로 부상자는 버리고 골목길과 건물 안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금남로 3,4가 쪽의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체 군 저지선이 무너진 줄 알고 앞으로 돌진, 시내버스와 아시아 자동차에서 탈취한 장갑차를 앞세우고 밀고 들어가다 다시 군의 일제사격을 받기도 했다. 이 사격으로 동구청 앞에서 데모대에 끼어있던 노인 2명과 학생차림의 청년 4명이, 여자 1명이 그 자리서 쓰러졌고 많은 사람이 부상한 체 데모대에 들려나갔거나 앰뷸런스로 후송했다. 1시 반 경 계엄군은 시청 앞 분수대를 중심으로 모두 6개 방향의 데모대를 향해 앉아 쏴 자세를 취하면서 경계에 임했고 시민들은 300미터 떨어진 금남로 3가 쪽에 3천여 명이 다시 몰려들었다.

오후 150분 경 데모대들은 다시 군 트럭 장갑차 등을 앞세우고 도청 앞의 군 저지선을 향해 밀려오자 군은 도청 주변의 건물 옥상까지 병력을 배치, 시위 군중들의 접근상황을 사격은 하지 않은 채 지켜보기만 했다. 152분 전일방송 앞으로 달려온 40대 시민 한 명은 방송국 건너편 5층 건물 옥상에 있던 계엄군이 조준 사격한 총에 맞아 그 자리에 쓰러지고 바로 무등고시학원 앞 골목길에서도 손에 화염병을 쥔 청년도 총에 맞아 엎어졌다. 금남로 3가 쪽으로 다시 밀려난 군중들은 확성기로 대통령은 광주시민이 이렇게 죽어 가는데도 무얼 하느냐. 우리는 무기도 없습니다. 그러나 80만 시민이 다 죽을 때까지 민주회복을 위해 싸울 것이다고 울부짖었다. 오후 2시부터...

 

위의 삭제된 동아일보 22일 자 속보 기사에서 보는 바와 같이 521일 치열했던 광주민주화운동을 묘사한 모든 현장 기사는 철저하게 삭제됐다. 이처럼 광주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자 계엄사령부는 5·18 광주민주화운동 시작 4일이 지난 21일 광주에서 데모 사태가 발생했다는 것을 공식 발표했다. 동아일보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격화된 522일 자에 1면 톱으로 광주 데모사태 닷새째제하의 그동안 발생했던 광주 시민의 항쟁 상황을 상세히 보도했다. 그 당시 데스크를 총괄했던 정구종 전 동아일보 편집국장의 회고록2)522일 자 동아일보 1면 지면 편집에 얽힌 뒷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실려 있다. 그날은 지면 편집 관련해 검열단과 기나긴 숨바꼭질을 거쳐 원래 강판 시간보다 훌쩍 넘긴 오후 4~5시가 돼서야 인쇄됐다고 한다.

 

“5월 22일에는 1면 톱으로 ‘광주 데모사태 닷새째’ 제하에 그동안의 광주시민 항쟁상황을 상보하였다. 그러나 기사는 모두 검열을 거쳐야했기 때문에 기사 데스크를 총괄하던 나로서는 어떻게 하면 광주시민항쟁의 실상을 독자들에게 전할 수 있을까 하며 지혜를 총동원하는 데스크작업의 줄타기가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검열단으로부터 붉은 펜으로 삭제지시를 받은 기사는 다시 수정하여 보내는 등의 숨바꼭질이 계속되었기 때문에 보통 낮 12시에 인쇄되던 석간이 오후 4-5시가 되어서야 나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기간 중 가장 치열했던 521일 상황을 상세하게 보도한 동아일보 522일 자 1면 기사 검열 과정을 [그림 4]부터 [그림 6]까지 돼지 꼬리와 붉은 펜으로 난도질당한 지면을 보면서 분석해보고자 한다. 신군부는 신문지면 검열 과정을 통해서 시위대의 요구를 묵살하고 그들에 대한 표현을 교체하고 핵심 문장을 삭제해 폭도화시키는 프레임으로 몰아갔다. 가혹한 기사 검열을 통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실을 철저하게 은폐하고 왜곡했다.

 

-. [그림 4]에서 볼 수 있듯이 원래 의도했던 1면 톱 큰 제목인 <광주 유혈 사태 닷새째>가 검열 과정을 통해 피해자 중심 프레임이었던 유혈(流血)’이 삭제되고 가해자 중심의 프레임인 데모로 교체돼 [그림 6]에서 보는 바와 같이 최종판에서는 <광주 데모 사태 닷새째>로 수정됐다.

 

-. [그림 4]1차 검열에서는 일방적인 계엄사 발표에 만 의존하지 않고 본사 취재를 병렬 편집해 상호 비교할 수 있도록 구성했으나, [그림 5]에 나타났듯이 1차 검열을 거치면서 하나로 합쳐 버렸다.

 

-. [그림 5]2차 검열에서는 광주 유지 15명이 제안한 7대 요구 사항이 박스 기사 형태로 편집돼 있었으나 [그림 6]의 최종판에서는 모두 삭제됐다. 검열을 거치면서 피해자 중심에서 가해자 중심 지면으로 탈바꿈했다.

 

-. [그림 4]<16개 시군 번져사상자 많아> 소제목이 [그림 5]와 같이 1차 검열에서 인접 시군 번져, 군경·시민 사상자 발생으로 수정돼 ‘16’, ‘많아와 같은 숫자나 수식어가 모두 삭제됐다. 용어 사용에 있어 ‘16인접으로, ‘사상자 많아사상자 발생으로 상황 파악에 필요한 구체적인 용어를 애매모호한 용어로 검열 과정에서 교체당했다.

 

-. [그림 5] 소제목에서 인접 시군 번져 군경 시민 사상자 발생에서 인접 시군 번져시민을 삭제하고 군경 사상자 발생만 부각하려 했던 정황이 나타난다. 그러나 이 삭제지시는 무시되고 원안대로 군경·시민 사상자 발생으로 최종판에서 관철된다.

 

-. [그림 4]데모대가 공포쏘자 시민은 귀가소제목이 [그림 5]에서는 공포소리나자 시민은 곧바로 귀가. 헬기로 자제(自制)전단(傳單)’으로 바뀌었으나 최종판인 [그림 6]에서는 원안인 데모대가 공포쏘자 시민은 귀가를 유지했다.

 

-. [그림 4]의 소제목 ‘18일 전남대생시위 군경충돌하며 과격해져 기관총 소총 등 3천여정 실탄 17만여발 탈취[그림 5]에서는 ‘18일 전남대생 시위 군경충돌하며 격화. 기관총·소총·수류탄·장갑차·실탄 등 탈취‘3천여정‘17만발같은 구체적인 수치를 삭제하고 수류탄·장갑차를 추가해 탈취 동기는 언급하지 않고 민주화를 갈망하는 시위대를 흉악한 폭도로 탈바꿈시켰다.

 

-. [그림 4] 본문에서 부분 삭제된 문장은 전국계엄확대후 시국을 성토하며’, ‘수많은 사상자를 내면서’, ‘전시민이’, ‘과격한 데모진압으로 흥분한’, ‘과격한 진압으로 흥분된 시민들은 감정이 격화된데다’, ‘10만에’, ‘3천여정의’, ‘나주에서는 관내파출소의 무기가 상당수 탈취되었다. 경찰집계에 따르면 21,22일 사이 탈취된 무기는 소총342정 경기관총9정 자동소총1정 실탄1743백여발 수류탄47개 공기총탈환 8상자 등이다’, ‘시위대는 이날 새벽 발견된 민간인 사망자의 시체 4구가 실린 리어카를 트럭 뒤에 매달아 끌고 다녔으며 이를 본 시민들이 흥분, 곳곳에서 모여들었다.’와 같은 상세숫자나 구호 등 이었다.

 

-. [그림 5] 본문에서는 구체적인 수치가 잇달아 삭제됐고 영광에서는 1천여명이 22일 새벽3시까지 철야데모를 벌였다. 담양에서는 데모대가 트럭3대를 앞세우고 경찰서 정문에 돌진했으나 경찰서가 점령되지는 않았다. 나주에서는 관내파출소의 무기가 상당수 탈취되었다등이 삭제됐다.

 

 

 

[그림 4] 1차 검열 당한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동아일보 522일 자 1

 

 

 

[그림 5] 2차 검열 당한 동아일보 522일 자 1

 

 

 

[그림 6] 동아일보 522일 자 1면 최종판

 

 

 

-. [그림 7]522일 당일 1면에 게재될 예정이었으나 삭제된 동아일보 백인수 시평이다. ‘구문(舊聞)’이라는 제목으로 신문이 백지 상태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어느 무엇도 보도할 수 없는 현실을 자조적으로 표현한 내용으로, 새로운 소식을 전하는 신문(新聞)’이 아니라 아무것도 전할 수 없는 백지상태의 구문(舊聞)’이라는 당시 언론 상황을 시니컬하게 풍자했다.

 

 

 

[그림 7] 동아일보 522일 자 1, 삭제된 백인수 구문(舊聞)’ 시평

 

 

 

(4) 수습(收拾): 도청 함락 후

광주 일원에 계엄군이 진군하면서 광주민주화운동은 무자비하게 진압당하게 된다. 526일 광주 시민 5,000여 명이 계엄군과 시민들의 충돌을 피하려고 피난하는 장면을 동양방송은 구슬프게 보도하고 있다. 26일 자 소년동아에 광주시민에게 피를 보내자는기사가 나온 직후, 재경 광주고 동창들이 서울 지역에서 광주 시민 돕기 헌혈 운동을 전개했으나 경찰과 중정직원에 의해 제지됐다. 527일자 언론 보도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진압하는 과정을 자세히 보도하면서, 특히 도청을 접수하는 과정을 자세히 묘사하고 있고 사망자 명단이 공개됐다. 그러나 목포는 여전히 시위 7일째를 맞고 있었다.

계엄군이 광주를 진압하는 시기와 때를 맞춰 계엄사령부는 학생 시위와 관련한 배후조종자 명단을 공개 수배했다. 이 가운데 이해찬, 심재철, 신계륜, 이철 등 많은 이가 훗날 한국 정치에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다. 광주 시민들은 외신 기자와 내신 기자를 심하게 차별대우했는데안팎으로 가혹한 검열을 받는 국내 기자들과 달리 검열에서 자유로운 외신 기자들에게 취재하지 못할 성역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신문과 방송이 두절된 광주 시내에서 25일부터 각종 상황을 알리는 대자보가 등장하기도 했다. 20일부터 경향, 중앙, 동아, 한국, 신아일보 등 5개 일간지와 2개 통신 그리고 일부 방송 기자들이 중심이 돼 언론 검열을 거부하는 성명서를 내걸고 제작 거부에 들어갔고 기자협회 회장단이 계엄 당국에 연행됐다. 삭제된 기사에 따르면 기자들은 특히 최근 광주사태와 관련, 사태의 배경이나 직접적인 원인, 확산과정 등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이 당국의 일방적인 발표문을 보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사태의 진상을 잘못 알리고 있다고 지적하고 이러한 신문을 제작하기보다는 차라리 신문의 발행을 중지시키는 것이 최소한의 양심이라는데 의견의 일치를 보고 제작거부에 들어갔다고 명시하고 있다.

 

1980. 5. 27

종류 : 신문, 방송

사별 : 중앙일보, KBS, TBC

분류 : 게라

제목 : 광주사태

내용

계엄군이 진주한 광주시가는 일반시민들의 외출이 금지된 가운데 무거운 정적이 감돌고 있다. 거리에는 계엄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출동, 경비를 하고 있으며 무장군인들이 510m간격으로 23명씩 지켜서있다. 상오 7시가 넘으면서 공무원과 경찰관들이 계엄군의 검문검색을 받으면서 출근했을 뿐 일반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있다.

시민들은 상오 240분쯤 소란한 분위기에 새벽잠을 깬 채 불안에 떨며 아침을 맞았으나 집안에 발이 묶였다. 어제까지 거리를 휩쓸었던 시위대의 모습도 자취를 감추었다.

(계엄군의 진주) 27일 상오 240분 첫 총성이 울린 뒤 시위대의 차가 거리를 누비며 여자 마이크 목소리로 광주시민여러분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광주전역에 비상이 걸렸습니다. 계엄군이 시내전역에서 들어오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에게 협조해주기 바랍니다.” “시민, 학생 수습대책위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시민들은 잠이 깨 집안에서 불안에 떨었다. 상오 340분부터 도청쪽을 비롯한 시내곳곳에서 소란한 소리가 시작돼 상오 6시까지 계속됐다. 간혹 다이나마이트폭음과 탱크에서 쏘는 총소리인 듯 한 큰 폭음도 들렸다. 시민들은 지난 18일 이후 가장 소란한 분위기에 놀라 전기불을 켜지도 못한 채 지하실로 대피하거나 놀라 우는 어린애들을 달래기도 했다.

계엄군은 새벽부터 방송을 통해 시민은 문을 열지 말고 문밖으로 나오지 말라. 폭도들과 간첩은 자수하라. 자수하면 생명은 보장한다라는 방송과 모든 집회는 불허한다는 포고문 방송을 되풀이했으며 또 외국인을 위해 영어방송도 계속됐다. 이어서 헬기와 경비행기가 날며 시민들의 협조와 무장시위대를 숨겨주지 말 것을 방송을 통해 당부했다. 한편 광주 시내 전화도 작전이 벌어지는 동안 모두 불통됐다가 작전이 끝난 상오 740분 이후에 통화가 재개됐다. 계엄당국은 또 경찰과 공무원은 상오 730분까지 정상출근 하도록 당부하고 상오 5시 관공서와 주요시설을 비롯한 광주전역을 장악했다고 발표했다. 이런 가운데도 상오 8시 가까이 까지 간간이 총소리가 들렸다.

 

(광주사태 사망자)

광주사태의 사망자가운데 27일 상오 현재 명단이 밝혀진 사람은 다음과 같다.

 

(사망자 명단)

전남대부속병원(32)

김안부(36, 광주시 월산2132), 강정웅(39), 김경환, 박기웅, 이세호(4명은 함평경찰서 경찰관), 박기연(16, 학생, 광주시 산수동 3925), 진정태, 라홍수(36, 농성동 718), 남인표(전북 금족군 백산면 3407), 김영철(24, 2904), 김광섭(26, 해남군 속곡면 방춘리), 윤형근(22, 2287), 이재술(42, 광주시 백운동 408), 최승희(21, ), 정민구(23, 광주시 림동 100), 최영호(48), 홍선기(35, 불노동 113), 임수준, 안행섭 (22, 림동 82), 이순진, 김원식(여수시 신정동 23), 김상구(라주군 산포면 산제리), 미확인, 안병섭(22, 임동82), 이수현(28, 3), 유진관(산수동), 김홍기(63, 농향동 582), 장하일(38, 백운동 395)

기독교병원(14)

박금희(18, , 춘태여상고 3), 이성자(, 대학생), 안병태(대학생), 임규수(학생), 조희선, 조남식, 정찬용, 전영진, 채이병(26), 진연진(광주시 중향동 592), 손광수

광주통합병원(5)

김형려(23, 백운17), 양해남(31, 서구 화정동 75514), 임정식(20), 정관철중사, 전용운 일병

적십자병원(18)

박형수(18, 종일고2), 김복만(30, 운전사, 장협), 이진형(25, 군인), 전정호(30), 김인배(25), 윤재식(30), 노지운(19, 영암읍), 신복남(30), 8명 미상

병원에 안들어간 사망자

김용표(24, 조림동), 황씨(62, 광산동 도실빌딩)

조선대 부속병원(3)

정충길(40, 함평경찰서), 2명은 미확인

(비고: 전면삭제된 기사)

 

 

(5) 확산김의기 죽음 이후 전국으로

수많은 꽃다운 영혼을 빼앗아간 5·18 광주민주화운동은 또 하나의 때 묻지 않은 영혼을 빼앗아가며 마무리를 짓는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시작을 알리는 숭고한 죽음이 전주 전북대 농학과 이세종 학생으로부터 시작됐다면못다 이룬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서러운 끝을 알리는 죽음은 5월 30일 서울 종로5가 기독교회관 6층에서 서강대 무역학과 김의기 학생의 투신투신이었다그 당시 기독교회관은 시국 관련 기독교계 움직임을 한눈에 들여다볼 수 있는 망원경이고 현미경과 같은 장소였다종파별 단체와 신도회 같은 조직들이 한 건물에 들어 있어시국 관련 기사가 가장 많이 생산되는 곳이기도 했다김의기 열사는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직접 목격하고 이 기독교회관을 5·18 광주민주화운동을 널리 알리는 거사 장소로 정한다그는 투신하면서 직접 제작한 유인물에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점철되고 있고유신잔당들이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데 모든 민주시민들은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고 절규했다.

 

1980. 5. 30

종류 방송통신(동양), 신문(동아일보신아일보조선일보한국일보)

사별 : CBS, KBS, DBS

제목 : 20대 청년자살 유인물 뿌리며

내용 :

20대 청년이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유인물을 거리에 뿌리며 건물위에서 길바닥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오늘 오후 515분쯤 서울 종로구 연지동 기독교회관 건물에서 성동구 마장동 21살 김의기군이 동포들에게 드리는 글이라는 시국에 관한 유인물을 거리로 뿌리며 30여 미터 아래 길바닥으로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오늘 김군이 뿌린 유인물의 내용물을 보면 민주시민들의 뜨거운 피를 뿌리게 한 남도의 봉기가 유신잔당들의 언론탄압으로 왜곡과 거짓악의에 찬 허위선전으로 점철되고 있다고 주장했다이 유인물은 또 유신잔당들이 이제 그 최후의 발악을 하고 있는데 모든 민주시민들은 유신잔당의 마지막 숨통에 결정적 철퇴를 가하자고 말했다유인물은 이밖에 내일 낮 12시 서울역 광장에 모여 민주화를 위한 성전에 몸바쳐 싸우자고 말했습니다한편 김군의 어머니 54살 권채봉 여인에 따르면 숨진 김군은 서강대학교 무역학과 4학년을 중퇴했는데 지난 17일 집을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비고전면삭제된 기사)

 

사법고시 합격자 문재인군 기사도 삭제

 

광주에서 벌어진 5·18 광주민주화운동이 마무리돼가는 65, 동양통신과 KBS, CBS에서 <포고령위반 연행된 학생·사법시험합격> 제목으로 기사를 출고했지만 검열에 걸려 삭제됐다. 포고령위반으로 연행돼 구치소에 수감돼 있던 경희대학교 법률학과 4학년 문재인 군(27)이 제22회 사법고시 2차 합격자였다고 보도한 것이다. 그의 자서전 운명183유치장에서 맞는 사시합격에서 서술했듯이, 경희대에서 단 2명이 합격한 사법시험에서 그의 합격이 취소되지 않도록 학교 차원에서 총력을 기울여 구명해 문재인 대통령이 사법시험 최종에 합격할 수 있었다. 만약 군사재판에 회부됐더라면 합격 취소는 물론 현재의 대통령도 불투명하지 않았나 추론해 볼 수 있다.

 

1980. 6. 5.

종류 : 통신, 방송

사별 : 동양통신, KBS, CBS

제목 : 포고령위반 연행된 학생·사법시험합격

내용 :

4일 발표된 사법고시 합격자 가운데 현재 포고령위반혐의로 경찰에 연행돼 조사를 받고 있는 대학생이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22회 사법고시 합격자인 경희대 법률학과 4학년 문재인 군(27)은 지난달 13일 학원소요사태로 서울 청량리 경찰서에 연행돼 지금까지 조사를 받고 있다. 문 군은 지난 754월 집회와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혐의로 자격정지 1년 집행유예 1년 등의 실형을 선고받고 올해 복직했었다.

(비고: 전면삭제된 기사)


 

언론이 함께 진상 규명 위해 노력해야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같이 혹독한 계엄령이 발효된 준전시(準戰時) 취재 여건 속에서도 그 당시 언론인은 사회의 파수꾼이라는 언론의 소임을 소홀히 할 수 없다는 자부심으로 취재하고 제작했음이 삭제된 기사를 통해 밝혀졌다. 상상도 할 수 없었던 군의 무자비한 폭력 속에서도 민주화 세상을 갈망하는 시민, 대학생, 종교계 등 다양한 계층의 열망을 빠짐없이 보도하고 진실을 알리고자 펜 하나로 총칼에 맞선 흔적 하나하나를 짚어 볼 수 있었다. 아직 진상 규명이 필요한 부분은 언론 간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 다 함께 머리를 맞대고 풀어나가야 한다. 당시 5·18 광주민주화운동과 관련된 보도는 경쟁이 아니라 한 신문 한 방송에라도 더 보도되는 것이 필요하다는 암묵적 합의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점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불혹의 40주년을 맞이해 5·18 진상규명을 위해 피해자 측의 외로운 광야의 외침에서 벗어나, 올바른 진실규명을 위해 침묵의 카르텔을 깰 수 있는 가해자 측의 용감한 양심선언이 필요한 시점이다.

 

 

 

 

 

 

1) 사전 문헌 분석 결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관련 언론 보도검열 통계 분석은 비상계엄 발효 후인 1980519일부터 관련 후속 보도가 계속 이어진 64까지 17일간을 분석 기간으로 설정했다.

2) 정구종, <산업·민주·정보화시대 언론인으로 달려온 43>, 관훈저널2017년 봄(통권 142), 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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