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0년 익산 장점마을에 비료공장이 들어선 이후, 장점마을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집단 암’ 미스터리가 발생했다. 한 집 걸러 암 환자가 발생했고 그중 일부는 생을 마감했다. 환경부는 주민건강영향조사를 실시해 비료 공장 유해 물질이 그 원인이라고 발표했다. 시사IN이 기록한 주민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본다. 편집자 주
장점마을에서 지내는 한 달 동안 취재진은 주민들과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순간들을 기록할 수 있었다. ⓒ시사IN
2019년 11월 15일 회사 근처 부대찌개집이었습니다. 점심을 먹으며 각자 다음 주에 어떤 기사를 쓸지 이야기 나누고 있었습니다. 누군가 전날 환경부에서 발표한 역학조사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17년 동안 운영됐던 비료 공장 때문에 근처 마을 주민 3분의 1이 각종 암으로 숨졌다는 내용이었습니다. 그곳이 전라북도 익산 장점마을이었습니다.
휴대폰으로 기사를 쓱 훑어보던 장일호 사회팀 팀장이 말했습니다. “여기는 가볼 만한데.” 단순한 현장 르포겠거니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인 저에게 팀장이 말했습니다. “가서 한 달 살아보든지.” 그때는 농담인 줄 알았습니다.
한 달 취재를 할 수 있었던 이유
장기 취재, 그것도 한 달 동안 현장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취재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시사IN처럼 편집국 내 기자를 모두 합쳐도 25명 남짓뿐인 작은 언론사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장점마을 한 달 살기’를 할 수 있었던 건 조직에서 이미 장기 취재를 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이었습니다. 2019년 신년 기획기사로 김동인 기자가 취재한 ‘대림동 한 달 살기’ 프로젝트 <대림>은 독자들에게 호평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조직 내부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긴 호흡의 기사에도 호응해주는 독자들이 많다는 사실은 ‘우리가 좀 더 취재 욕심을 내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싹트게 했습니다. 연달아 나온 <예멘 난민 1년 보고서>, <빈집> 등도 그 가능성을 가늠해보는 일종의 실험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뉴스에 점점 더 쉽게 피로를 느끼는 추세 속에 ‘주간지만이 쓸 수 있는 글은 무엇일까’라는 질문을 던진다면 해답은 현장에 더 가까이, 더 깊게 들어가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한 달 취재를 했던 이유
“기사에 얼굴이 없어.” 부대찌개집에서 관련 기사를 찾아보던 장일호 팀장이 덧붙인 말입니다. 당시 나온 기사 대부분은 ‘장점마을 역학조사’ 결과를 알리는 짧은 기사였습니다. 가끔 당일치기 르포 기사도 눈에 띄었지만 우리는 여전히 궁금했습니다. 2001년 7월부터 2017년 4월까지 17년이 넘는 시간 동안 투쟁해온 사람들의 얼굴이, 목소리가, 웃음소리와 울음소리가 궁금했습니다. 단순히 ‘집단 암마을’로 뭉뚱그려져 불리는 마을 사람들이 각자의 입장에서 겪은 17년은 어떨까요. 그 결을 제대로 살려 기록하기만 해도 성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기사의 흥행(?)은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습니다. 장일호 팀장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습니다. “망할 때 망하더라도 잘 망하는 게 중요하다.”
장점마을에서 보낸 한 달
저와 장일호 팀장, 이명익 사진기자는 올 2월 10일 장점마을에 들어갔습니다. 첫날 마을 경로당에서 어르신들께 우리가 왜 이 취재를 하려고 하는지 자초지종을 설명했습니다. 잠깐 왔다 떠난 기자들을 워낙 많이 만났던 터라 어르신들은 이미 지쳐 있었고 반응은 미적지근했습니다. 큰 삽으로 장점마을을 푹 떠다가 청와대 앞에 가져다 놓아야만 사람들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거라는 한 어르신의 말씀에 우리는 “글로 푹 떠 가겠습니다” 라는 궁색한 대답을 내놓았습니다.
우리가 지낸 ‘숙소’는 최재철 주민대책위원회 위 원장 댁이었습니다. 시골이라 문을 잠그고 다니는 집이 없었는데, 우리 숙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시간이 지나 취재팀에게 마음을 열기 시작한 어르신들은 아무 때나 스스럼없이 “계신가”하며 찾아오셨습니다. 아침 8시에 숙소를 찾아온 신옥희 어르신은 컴퓨터 타자 연습하는 법을 가르쳐달라며 사과와 배가 가득 담긴 광주리를 내미셨습니다. 언젠가 저녁 9시에 숙소를 찾아온 하영순 어르신은 맥주 두 병을 내려놓으며 함께 드라마를 보자고 하셨습니다. 타자 치는 법을 알려드리면서, 드라마를 보고 옥신각신하면서 우리는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들이 이곳 장점마을을 떠나지 않고 살아온 세월 동안 아무도 묻지 않았던 이야기, 꼭 기사에 쓸 이야기가 아니더라도 그들의 삶을 좀 더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함께 부대끼며 살아야만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순간들이었습니다.
물론 힘든 점도 있었습니다. ‘아침에 눈뜨면 출근, 밤에 눈 감아야 퇴근’인 취재 환경은 어쩔 수 없었습니다. 하루 종일 마을 40여 가구를 집집마다 찾아다니며 이야기 듣고, 함께 점심을 먹고, 다른 집에서 점심을 한 번 더 먹고, 다음 집에서 점심 같은 간식을 또 먹고 나서야 숙소로 돌아올 수 있었습니다. 저녁에는 각자 하루 종일 취재한 내용을 숨 가쁘게 정리한 뒤 잠이 드는 생활의 반복이었습니다. 일상과 취재가 분리되지 않은 상황이었지만 거꾸로 말해 그만큼 밀도가 높은, 집중하기 좋은 취재 환경이기도 했습니다.
우리가 이야기하고 싶었던 장점마을
장점마을에는 집집마다 공통적으로 볼 수 있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벽에 걸린 큼직한 농협 달력이고 다른 하나는 십자가(장점마을은 천주교 신자들이 모여 사는 교우촌입니다)입니다. 장점마을 사람들은 한평생 달력을 보며 땅을 갈고 십자가를 향해 기도를 올리며 살아온 사람들입니다. 왜 진작 마을을 떠나지 않았느냐는 질문에는 하나같이 “농사꾼이 땅을 버리고 어디를 가느냐”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부양가족을 이끌고 자신이 평생 해온 일, 자신 있게 할 수 있는 일을 등지는 건 누구에게나 쉬운 일이 아닙니다. 떠날 수 없었던 주민들은 비료 공장에 단체로 찾아가 항의를 하기도 하고, 사장실을 점거하기도 하고, 공장 진입로를 사서 땅을 파버리기도 하고, 시청과 지역 언론에 수차례 제보를 넣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오랫동안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것은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외진 지역의 시골이라는 점이 가장 컸습니다. 지방 행정의 부실한 관리 감독도 그래서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당시의 무책임한 행정에 대해 누가 책임을 져야 하는지는 아직까지도 가려지지 않은 상황입니다. 이곳이 만약 서울 효자동이나 여의도에 위치한 마을이었다면 어땠을까요. 우리가 마을에 도착한 첫날, “여길 푹 떠서 청와대 앞에 가져다 놓으라”라고 하시던 어르신의 말씀이 이해됩니다. 장점마을의 ‘지난 17년’은 대한민국 농촌이 착취당하고 배제당한 ‘역사’이기도 합니다. 취재팀이 주목하고 싶었던 건 그 긴 시간 동안 장점마을 사람들이 그저 암에 걸리기만 했던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들은 싸웠습니다. 싸우다가도 밥을 지어 먹었고, 악취를 맡으면서도 꿋꿋이 논밭에 나가 작물을 가꿨습니다. 그 농작물로 키워 전국 각지로 나간 자식들이 이제 농사 그만 지으시라고 권해도 여전히 장점마을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장점마을 어르신들은 시사IN 취재팀에게 그 희로애락의 단면을 기꺼이 공유해주셨습니다.
장점마을 경로당에서 어르신들을 취재 중인 취재진 ⓒ시사IN
취재를 마치고
코로나19 확산은 우리가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문제였습니다. 취재를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3월 초 무렵에는 장점마을 기사를 바로 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한겨울에 취재했던 장점마을 이야기를 5월 초에야 기사로 풀어낼 수 있었던 이유입니다. 47쪽에 달하는 지면 기사 말고도 취재 중간중간 찍어두었던 영상을 모아 5분짜리 미니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기사와 사진을 온라인에 맞게 다듬어 <장점마을의 17년-해바라기 꽃 필 무렵>이라는 특별 웹페이지도 오픈했습니다. 취재팀은 기사가 나온 바로 다음 날 다시 장점마을을 찾았습니다. 취재를 마치기 전 동네 어르신을 모시고 찍었던 영정사진과 가족사진을 액자에 담아 집집마다 감사 인사를 드렸습니다.
‘정부가 환경오염 피해로 인한 비특이성 질환의 역학적 관련성을 인정한 최초의 사례’인 장점마을의 이번 사례는 대한민국 환경사에 한 획을 그은 사건입니다. 훗날 이 사건에 대한 입체적인 자료가 필요할 때 시사IN 기사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도 단순하고 평평한 피해자 서사를 넘어 각 개인마다의 구체적인 얼굴을 그릴 수 있는 취재를 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