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보지도 듣지도 못하는 이들이 우리 사회에 있다.
암흑과 침묵 속에 사는 이들의 삶을 우리가 감히 상상할 수 있을까.
소통보다 관심이 더 시급한 우리 사회의 ‘데프블라인드’. 지금껏 들리지 않았던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인 국민일보 이슈&탐사팀의 취재기를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지난해 ‘헬렌켈러센터’가 국내 한 민간 복지재단에 만들어졌다는 단신 보도를 봤다. 듣지도 보지도 못하는 헬렌 켈러(Helen Keller) 같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 있다고? 그동안 들어본 적이 없는 세계였다. 과거 기사를 검색했더니 시각과 청각의 중복 장애를 다룬 기사가 없지는 않았다. 하지만 부족해 보였다. 미국의 헬렌 켈러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는데 한국의 시청각장애인 관련 기사는 그렇지 않았다.
지난 2월 회사에 두 번째 이슈&탐사팀이 만들어졌다. 두 달쯤 뒤 우리 팀 네 명은 회사 소회의실에서 다큐멘터리 영화 한 편을 함께 봤다. 영화 제목은 <달팽이의 별>. 전혀 보지 못하고 청각도 거의 남아있지 않은 시청각장애인 조영찬 씨와 척추장애가 있는 아내 김순호 씨에 관한 이야기였다. 안타까움과 두려운 감정이 함께 밀려왔다. 우리가 저 암흑 같은 세상에 뛰어들 수 있을까. 영화로까지 제작된 이야기를 또 다룰 수 있을까. 망설여졌지만 분명한 건 다른 팀원에게도 시청각장애는 새로운 이야기였다. 취재해볼 만하겠다는 공감이 이때 생긴 것 같다.
우리는 시리즈 첫 회가 보도된 6월 3일까지 약 두 달간 취재했다. 돌이켜보면 미지의 세계로의 탐험 같았던 취재다. 일단 시청각장애인을 직접 만나 이야기를 듣는 게 목표였다. 과거 기사에서 그들의 목소리는 한두 줄짜리 설명에 불과했다. 가급적 많은 시청각장애인을 만나고 싶었다.
취재할 곳은 많지 않았다. 시청각장애인 관련 협회나 단체는 없다. 그동안 정부의 실태 조사도 없었다. 작은 모임 두 개가 유지되고 있었다. 시청각장애인들이 스스로 만든 ‘손잡다’와 선교 모임 ‘손끝세’. 기초 취재 대상으로 삼을 만한 것은 한국장애인개발원의 보고서와 손끝세에서 활동하는 고경희 수어통역사의 석사학위 논문 정도였다. 조원석 손잡다 대표와 심층 면접 경험이 있는 서해정 한국장애인개발원 연구위원의 도움으로 시청각장애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3단계 통역이 필요한 의사소통 취재하다 보니 왜 그동안 이들에 대한 보도가 많지 않았는지 알 것 같았다. 소통이 문제였다. 시청각장애인은 선천적인 경우가 있고 후천적인 경우가 있다. 태어날 때부터 혹은 아주 어렸을 때 시각과 청각에 문제가 발생하면 선천적 시청각장애다. 소통이 가능한 선천적 시청각장애인은 국내에 없다. 후천적 시청각장애는 시각장애인으로 혹은 청각장애인으로 살다가 다른 장애가 추가로 생긴 경우다. 청각장애인이 나중에 시각장애를 얻은 경우가 상대적으로 더 많다. 이들과는 소통이 가능하다. 수어를 손으로 만지는 ‘촉수화’를 통해서다.
촉수화 개념은 과거 기사와 보고서를 통해 미리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현실에서 촉수화로 시청각장애인과 소통하는 일은 ‘글’과 달랐다. 취재팀이 촉수화로 인터뷰한 첫 사람은 마흔한 살의 이희경 씨다. 태어난 지 얼마 안 돼 청력을 잃고 왼쪽 눈의 시력은 7세 때, 오른쪽 시력은 28세 때 잃은 분이다.
방극렬 기자가 이씨를 서울의 한 카페에서 인터뷰했다. 현장에는 이씨뿐 아니라 이씨의 활동지원사 김씨, 그리고 김씨의 딸이 나와 있었다. 활동지원사 김씨는 이씨와 촉수화로 의사소통할 수 있는 사람이다. 촉수화는 수어에 바탕을 두고 있지만 수어와는 또 다른 차원이다. 촉수화를 할 줄 안다고 해도 처음 만나는 사람끼리는 대화가 쉽지 않다고 한다. 평소 소통하는 상대가 촉수화로 통역해주는 게 가장 좋다.
그런데 활동지원사 김씨는 청각장애인이었다. 방극렬 기자는 수어를 못 하므로 질문을 전달하려면 또 다른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수어통역사인 김씨의 딸이 기자와 김씨의 소통을 도와줬다. ‘기자-김씨의 딸-김씨-이씨’로 이어지는 3단계 통역이 이뤄졌다. 여기에 이씨와 김씨도 촉수화로만은 의사소통이 100% 되지 않는지 손바닥에 글자를 쓰거나 같은 수화를 반복하며 되묻는 모습이었다. 결국 짧은 질문 하나도 통역사를 통해 답을 듣기까지 2분이 넘게 걸렸다. 가장 길게는 5분 넘게 기다려 답을 들었다.
촉수화 통역보다 더 어려웠던 것은 인터뷰 섭외였다. 어렵게 연락처를 구해 연락을 시도했지만 연락이 되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주변 사람이 대신 전화를 받아 인터뷰 거절 의사를 밝힌 경우도 있다. 취재팀을 만나겠다고 했다가 나중에 마음을 바꾼 사람도 있었다. ‘소통 욕구가 있을 테니 인터뷰에 잘 응해주겠지’ 하는 취재팀의 생각은 오산이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들을 만나기가 왜 그렇게 어려웠는지 조금씩 알게 됐다. 시청각장애인은 소통이 어려운 탓에 고립된 경우가 많다. 가족 간이나 친한 사이에도 오해가 많이 일어난다고 한다. 의사 전달과 확인이 잘 안 되니 예민하기 마련이고 외부 세계를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그들끼리 갈등도 자주 일어난다. 모두 소통이 잘되지 않은 탓이다. 이런 점을 이해하고 난 뒤부터는 그들의 태도와 행동을 어느 정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됐다.
헤아릴 수 없는 암흑과 침묵의 세계
우리는 시청각장애인을 보호하는 시설도 취재했다. 경기도 여주 ‘라파엘의 집’은 수십 년 전부터 시각중복장애인을 보살피고 있다. 차낙중 씨라는 시청각장애인이 이곳에 있다는 수십 년 전 기사를 검색해둔 터였다. 1970년대 후반 장항선 철도 중간 터널에서 발견된 차씨는 ‘터널 중간 기차에서 떨어진 아이’라는 뜻의 이름을 갖게 됐다. 나이도 정확하지 않아 당시 8세, 지금 53세로 추정된다.
라파엘의 집을 방문하기 전 김유나 기자가 은퇴한 정지훈 전 라파엘의 집 원장을 만났다. 정 전 원장은 어린 시절 사고로 시력을 잃은 뒤 평생을 시각중복장애인과 함께 한 분이다. 차낙중 씨 스토리를 기대했는데 그를 만나고 온 김유나 기자의 입에서 다른 이름이 나왔다. “원장님은 이관주 씨 이야기를 더 많이 하던데요.” 이관주 씨는 교육이 시도됐던 시청각장애인이었다. 정 전 원장은 한국의 헬렌 켈러가 될 수 있었던 관주 씨 이야기를 들려주며 안타까워했다. 옛 기사를 검색해보니 1994년 신문에 이관주 씨 이야기가 있었다. 한 살 때 청력을 잃고 열두 살에 양쪽 시력을 잃은 이씨가 스물다섯 살 나이에 중학교 입학 검정고시에 합격했다는 기사였다. 그럼 지금은?
취재팀은 한국의 헬렌 켈러 후보였던 청년의 지금 모습이 궁금했다. 며칠 뒤 라파엘의 집에서 그를 만났다. 관주 씨는 옛날 신문 속의 모습과 전혀 달랐다. 삶의 의욕을 잃은 듯한 모습. 과거에는 손가락 글씨로 소통을 했다고 하는데 지금은 소통할 수 있는지 여부조차 불분명했다. 라파엘의 집 직원들을 통해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도 그는 무표정했다고 한다.
우리는 다시 관주 씨를 가르쳤던 옛 신문 속 교사를 찾아갔다. 당시 서울맹학교 교사였던 이영미 교사는 현재 발달장애 국립특수학교인 한국경진학교 교감이었다. 이 교사는 헌신적으로 관주 씨를 가르쳤지만 육아 부담 등으로 교육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 교사는 김유나 기자가 보여준 관주 씨의 최근 사진을 보고 눈물을 흘렸다. 시청각장애인에 대한 교육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은 상황에서 개인의 노력은 한계가 있었다. 한 편의 영화 같은 관주 씨 이야기는 시리즈 1회에 소개됐다.
우리가 만난 시청각장애인 중 상황이 가장 힘들어 보인 사람은 김예지 씨와 그 가족이었다. 올해 스물다섯 살인 예지 씨는 태어나서 무언가를 보거나 말을 들은 적이 없는 선천적 시청각장애인이다. 그의 부모는 말이 통하지 않는 예지 씨를 돌보는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 권중혁 기자가 두 차례 찾아가 취재한 그들의 일상은 충격적인 게 많았다. 예지 씨는 불만이 있으면 자해하는 것으로 표현한다. 낮과 밤이 개념이 없고 깨어 있을 때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부모는 늘 선잠을 잔다.
예지 씨와 가족의 이야기는 시리즈 기사 중 가장 긴 글로 다뤘다. 처음에는 고되고 힘든 일상으로 기사를 채워도 부족할 것 같았다. 그런데 권중혁 기자가 예지 씨 어머니의 일기장을 빌려 왔고 거기서 예지 씨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이 담긴 내용을 찾아냈다. “예지가 내 입술을 만지면 나도 예지 입술을 만지고, 목을 만지면 나도 목을 만져줬다. ‘나는 엄마, 너는 예지’라고도 말해줬다. 아는지는 모르겠지만.” 이런 내용이 들어가 기사가 더욱 호소력을 갖게 되지 않았나 싶다.

한국의 헬렌 켈러를 만날 수 있기를···
시청각장애인을 만나고 돌아온 기자들의 표정은 밝지 않을 때가 많았다. 모든 사람의 사연과 현실이 안타까워 우리는 마음을 추슬러 가며 일을 해야 했다. 우리는 출근해 “전날 밤 시청각장애인이 나오는 꿈을 꿨다”라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렇지만 어둡고 부정적인 면만을 보여주지 않으려 했다. 시리즈 6회 기사에서 시청각장애인의 미래와 희망을 전했다. 대학원 박사 과정 중인 조영찬 씨, 마라토너로 살고 있는 이철성 씨와 차승우 씨, 장애 인권 월간지 기자인 박관찬 씨, 대학생인 김하선 씨의 ‘별빛같은 꿈’을 보여줬다.
취재를 어느 정도 마치고 시리즈 순서를 구성할 때 ‘시청각장애인’이라는 말 대신 ‘데프블라인드’를 쓰기로 했다. 시청각장애인은 시각장애인과 청각장애인을 함께 부를 때도 쓰여 현실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렵다고 생각했다. 일부 전문가도 데프블라인드라는 용어를 쓰기를 권했다. 무엇보다 그동안 시청각장애인을 소개한 기사와 차별화가 필요했다. 국내 시청각장애인을 종합적으로 취재한 첫 심층 기획기사인 만큼 지금까지와 다른 용어를 쓰기로 했다.
1면 기사에 시청각장애인 12명의 사진을 실명으로 넣은 것은 우리 주변에 데프블라인드가 이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각각의 사진에 검은색 배경 처리를 했는데, 이는 이들이 암흑 같은 세계에 살고 있음을 뜻한다. 검은색 배경은 사실 처음에는 생각하지 못했다. 라파엘의 집에 함께 취재를 간 최현규 사진부 기자가 미리 검은색 천막을 준비해 그곳 시청각장애인의 사진을 찍은 데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노력을 쏟아부은 기획이지만 아쉬움도 남아 있다. 세상에는 숨어 있는 데프블라인드가 더 많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은 그나마 소통 능력과 의지가 있는 분들이었다. 취재 과정에서 소외되고 고립된 데프블라인드가 더 많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중 몇 명의 이야기는 연락이 닿지 않아 전해들은 말을 근거로 보도했다. 우리를 놀라게 한 건 라파엘의 집에 우리가 만났던 분들 외에 다른 시청각장애인이 더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 사실을 취재가 어느 정도 진척된 뒤 알게 됐는데 ‘다른 시청각장애인’들은 소통이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전해 들었다. 선천적 데프블라인드여서 가족이 더 이상 돌보기 힘든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미국과 일본, 영국 등은 데프블라인드를 위한 사회적 지원의 역사가 훨씬 길다. 코로나19가 아니었으면 그런 나라들을 방문해 그들에 대해 어떤 교육과 지원이 이뤄지는지 알아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해외 취재를 통해 데프블라인드가 자립해 사는 일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다.
취재팀은 시리즈 마지막 기사에서 ‘헬렌켈러법’이 곧 발의될 예정이라고 보도했지만 10월 중순인 현재까지 발의되지 않았다. 국회에서 이를 준비 중인 것으로 안다. 데프블라인드 당사자들은 법안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들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이해와 이동 보조, 통역 등 실질적인 지원이라고 말한다. 같은 데프블라인드라고 해도 각자의 장애가 조금씩 다르고 소통 방법도 달라 맞춤형 지원이 필요하다.
헬렌 켈러는 1880년 6월 태어나 1968년 6월 사망했다. 처음부터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대한민국 데프블라인드 리포트>는 헬렌 켈러가 태어난 지 정확히 140년이 지난 2020년 6월에 보도됐다. 미 국에서는 헬렌 켈러 이후에도 많은 데프블라인드가 사회의 지원과 교육에 힘입어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됐다. 우리는 아직 제대로 된 지원을 시작도 못 하고 있다. 우리의 시리즈 기사가 ‘한국의 헬렌 켈러들’이 나오는 시기를 앞당기는 데 기여할 수 있기를 바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