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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추석 연휴 화제성 1위는 코로나19도, BTS도 아닌 나훈아였다. KBS에서 언택트 형식으로 진행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가 폭발적인 반응을 보이며 그야말로 ‘신드롬’을 일으킨 것이다. 이 콘서트 성공의 의미는 무엇일까, 그리고 앞으로의 TV는 어떤 모습일까. 이번 콘서트를 모티브로 TV의 현재를 짚고, 21세기 TV의 미래를 전망해 본다. 편집자 주

코로나19, 나훈아와 BTS
2020년 연말이다. 이즈음 연례행사인 ‘올해의 이슈’ 1위는 단연 코로나19 팬데믹일 것이다. 그다음은 무엇일까? 아마도 지난 9월 30일 KBS에서 방송된 <대한민국 어게인 나훈아> 콘서트(이하 나훈아 콘서트)가 아닐까 싶다. 대중적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지 오래된 KBS가 시청률 30%를 올리는 기염을 토했다. 트로트(물론 나훈아의 음악을 트로트로 제한할 수 없다) 음악을 선호하는 기성세대만 KBS 앞으로 간 것이 아니었다. 때마침 불고 있던 트로트 바람에 힘입어 KBS는 물론 TV에 대한 관심마저 고조됐다.
더 흥미로운 것은 나훈아가 ‘뜬’ 9월과 10월이 블랙핑크와 BTS가 미국 음악 시장을 히트 친 바로 그때라는 점이다. 지극히 한국적인(?) 트로트와 미국적인 스타일의 한국 음악이 동시에 히트 친 것이다. 특히 ‘지금 여기’에 발 딛고 사는 우리에게는 BTS보다 나훈아가 더 진한 여운을 줬던 것 같다. 돌이켜 보면 2020년은 코로나19 외에도 기억할 만한 사건이 많다. 전례를 찾기 힘든 거대 여당의 탄생, 분단국가의 아픈 현실을 보여 주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 폭파 사건과 서해상의 공무원 피격사건, 영화 <기생충>의 미국 아카데미영화제 4관왕, 신천지와 광화문 집회로 인한 코로나 확산, 국내 최고기업 총수의 사망 등 여전히 주목할 만한 사건이 넘치는 한 해였다. 그럼에도 나훈아 현상이 눈에 띄는 것은 코로나19로 실의에 빠진 시기에 국민을 위한 절묘한 타이밍의 콘서트, 이 둘을 연결 짓는 신곡 ‘테스형’의 메시지 효과가 크게 한몫해서이지 않을까 싶다. 편성의 힘과 노련한 예능인이 보여 준 감각적인 위로의 서사가 코로나 국면에서 빛을 발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여전히 질문이 남는다. 7명의 청년 트로트 군단의 종횡무진 방송도 있었는데 나훈아는 어떻게 단 한 번의 콘서트로 이 같은 열광을 끌어낼 수 있었는가? 트로트는, 그리고 2020년 나훈아는 더 이상 회귀할 수 없이 21세기에 묶여 버린 한국인들에게 지난 세기의 가족, 우리, 공동체를 확인 시켜준 위로의 멜로디라고 생각한다. 그 멜로디와 콘서트 안팎의 분위기는 20세기 가족과 TV가 함께 만들었던, 요즘 식으로 말하면 과거의 노멀(normal)했던 (이제는 그렇게 노멀하지 않은) 서사였다. 굳이 은유해 본다면, 나훈아 콘서트는 코로나가 떠밀어 낸 강 너머 이편에서 저편의 환송 축제를 바라보는 느낌, 이편의 뉴노멀(new normal)로 표현된 저편의 노멀이 신기루처럼 느껴졌다.
나훈아 콘서트 읽기1: 가족TV의 추억
미디어 문화의 시각으로 볼 때, 나훈아 콘서트의 TV 시청 방식은 전형적인 ‘가족TV(family TV)’다. 아마도 이 글을 읽는 기성세대는 “TV는 당연히 가족TV지 무슨 소리야” 하겠지만, 밀레니얼 또는 이른바 Z세대라 불리는 디지털 세대에게는 기성세대가 떠올리는 그런 가족TV의 이미지는 없거나 희미하다. 후자들에게 TV는 유튜브이거나 넷플릭스이지 KBS나 MBC, SBS는 아니다. 설혹 이들 채널을 떠올린다 하더라도 그들에게 지상파는 더 이상 중심부 매체는 아니다.
실제로 TV 수용자의 파편화, 분극화 경향은 지상파를 중심부 매체에서 점점 더 주변부의 어떤 집단(cluster)으로 이동시켜 왔다. 중심부 매체와 주변부 매체를 나누는 차이는 주목(attention)의 차이, 그러니까 콘텐츠 혁신과 관심의 집중, 소비시간, 그리고 일상적인 대화의 소재에 따라 나눠진다. 일상성 연구는 일상의 흐름과 TV의 흐름 간 상관성으로 TV의 문화적 지위를 설명한다. 혁신적인 콘텐츠가 부족하니 관심과 소비 시간이 떨어지고 일상적인 대화도 없다. 지상파의 드라마 또는 뉴스, 다큐멘터리등이 TV 밖 우리의 주목을 끄는 힘은 점점 더 줄어들고 있다.
이는 가족TV 반대쪽에서 생성되고 있는 ‘개인 TV’에 대한 지상파(와 유료방송을 포함한 전반적인 레거시 미디어)의 견인력 부족 때문으로 설명된다. 욕망, 정보, 소통의 매개체인 미디어의 활용은 항상 시간과 공간의 교직 속에서 자신의 위치를 설정한다. 공간 구속성과 시간 구속성을 XY 좌표로 나눠 보면, 지상파(그리고 우리가 일반적으로 인지하는 TV라는 장치)는 높은 시간 구속성과 높은 공간 구속성이 지배하는 강한 동시성의 가족TV이다. 그 반대편에 낮은 시간 구속성과 낮은 공간 구속성을 띤 개인TV가 있다. 강한 비동시성이 이곳을 지배한다. 스마트폰을 비롯해 갖가지 개인 장비를 통한 방송 소비가 그것이다. 플랫폼으로는 구독형 OTT가 대표적일 것이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가족TV와 개인TV 사이에는 개인TV가 네트워크 연결성을 토대로 동시성을 보완한 느슨한 동시성의 ‘우리TV’, 가족TV가 시간(또는 미시 공간적) 차이를 활용해 개인화된 TV 소비를 추구하는 ‘나의TV’가 있다. 네 가지의 TV 형식은 순환적 관계로 엮여 있다.[표]
결국 가족TV는 디지털화 과정을 통해 개인TV로 재설정되고 다시 우리TV와 나의TV로 변주한다. 지금의 TV는 이 네 개의 TV 위치를 오가며 수용자들과 만난다. 그런 점에서 보면 나훈아 콘서트는 전통적인 가족TV의 문법으로 만들어진 콘텐츠다. 비록 인터넷 네트워크로 객석을 채웠지만 그 쇼가 펼쳐 보인 세계와 분위기, 메시지는 무척이나 20세기적이다. 그렇다 보니 디지털 복제에 의한 미디어 확산성(spreadability)이 거의 없다. 나훈아 본인이 강력하게 요청해서겠지만(나훈아는 자신의 무대를 일회성 뮤지컬로 생각한 듯하다), 이 시대의 바이럴인 SNS에서는 이번 공연 영상을 찾아볼 수 없다. 유튜브는 과거의 나훈아 영상이나 신곡 뮤직비디오 영상만이 연관 콘텐츠로 노출될 뿐이다. 대중의 감성을 자극하고 소통의 문을 열기 위한 기본적인 커뮤니케이션 구조가 막혀 있다.

나훈아 콘서트 읽기2: 고사양 TV 또는 양질의 TV
가족TV와 잘 어울리는 나훈아 콘서트는 자연스럽게 집과 가족의 온기를 떠올리게 한다. 이는 집에서의 생활에 보다 충실하고자 하는 삶의 태도 변화와 결부돼 있다. 집에 대한 강조는 코로나19라는 특별한 전염병이 몰고 온 사회적 격리에 대한 반작용처럼 보이지만 징후는 이미 그전부터 있었다. 폭발적인 부동산 구매 바람이 지나고 코로나19로 인해 부동산 거래는 많이 축소됐지만 집에 대한 투자는 역대급으로 늘어났다. 베란다를 확장하거나 화장실·거실·방·주방 리모델링과 같은 집 구조 변경과 함께 각종 세간살이 품목, 그중 특히 가전제품을 새로 들였다. 그 품목 중 으뜸이 고사양 TV(high-end TV)이다. 평면TV에서 HD, UHD, OLED로 이어지는 디지털 기술 발전의 화려한 약속이 물화된 것이 바로 고사양 TV이다. 이 TV는 고립된 가족TV와 달리 다양한 연결된 시청(connected viewing)을 제공한다.
원래 TV는 집의 기능과 역할은 물론 그 공간에 머무는 가족의 안락함과 휴식, 즐거움을 재정의하는 대표적인 가정 내구재였다. ‘집-TV-가족’은 마치 태생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보일 정도이다. 특히 우리에게 그 태생은 근대화와 동시 병행하는 것이어서 가족TV의 경험은 근대 산업 역군들의 가정생활을 가늠하는 기준점 같은 것이었다. 실제로 당대를 되돌아보면 20세기 산업 역군으로서 집은 한국인에게 수면, 양육, 영양의 공간, 즉 머물기보다 에너지를 보충하는 주유소 같은 곳이었다. 거기에서 TV는 근대화에 지친 몸을 가족의 맥락 안에서 충전하고 새로운 정보를 사사화(私事化)1)하는데 맞춤화된 장치였다. 그것이 1970년대 경제 호황과 함께 일어난 ‘텔레비죤·붐’의 속살이었다. 이제 막 도시로 이주한 샐러리맨들의 로망은 텔레비전 붐에 맞춰 근대 가족의 삶의 양식을 일신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고사양 TV 물결은 그것과 사뭇 다르다. 당시 붐이 근대화의 발전과 그 안에서의 교육, 휴식을 위해 지펴진 것이라면, 지금의 고사양 TV 붐은 양질의 문화 향유, 연결된 시청과 사회적 시청, 그리고 보호 및 안전과 결부돼 있다. 이제 집은 충전의 공간이기보다 머무는 공간, 전통적인 독서는 물론 뜨개질을 하고 목공일을 하며 게임도 함께하는 공간이다. 집 자체의 목적에 보다 충실한 공간이 되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고사양 TV에서는 과거 텔레비전을 두고 벌였던 가족 구성원 간의 미묘한 신경전도 없다. 시청자 저마다의 서사가 플랫폼에 기록되고 각기 다르게 소비되기 때문이다. 결국 반세기 전 텔레비전이 화물신화(cargo cult, 서구의 화물선에 실려 온 신문물이 우리를 해방해줄 것이라 믿는)의 신문물이었다면, 지금의 고사양 TV(거기에 저마다의 손에 들려있는 개인 미디어)는 가족 구성원 모두가 만족하는 시청 경험과 안전한 대한민국(우리의 영토 안에서 우리의 브랜드를 달고)을 체험할 수 있는, 어쩌면 그것은 근대화가 약속했던 마지막 개척지의 하나일지도 모른다.
고사양 TV는 필연적으로 양질의 TV(quality TV)를 대동한다. 전자가 기술적 우월성을 지시한다면 후자는 그런 기술로 표현된 높은 문화적 밀도를 의미한다. 나훈아 콘서트 역시 현장의 관객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고사양 TV가 제공하는 밀도 있는 정보 전달을 통해 양질의 무대를 완성했다. 거실 시청자들은 네트워크로 연결된 전 세계 대한민국 국민과 함께 트로트, 나훈아를 하나의 장르로 표현한 고급스런 디지털 현존을 경험했다. 주로 젊은 세대에만 내리쬐던 디지털 기술이 모처럼 기성세대로 향했던 것이다. 하지만 콘서트의 풍경과 메시지는 가족TV 문법이었으니 ‘양질의 아날로그’라고 해야 옳을 것이다. ‘대한민국 어게인’이라는 구호가 그것을 극적으로 표현했다. ‘다시 한번’ 호명하고 싶었던 대한민국은 무엇이었을까? 고성장의 대한민국이었을까? 아니면 반공으로 국론이 통일된 대한민국? 그것도 아니면 민주주의를 위해 피 흘리던 그런 대한민국이었을까? 다시 한번 과거를 호명하기보다 새로운 미래를 호출해야 하지 않았을까?
이런 불안감이 이는 이유는 아마도 그처럼 화려한 콘서트가 불러일으킨 가족TV의 추억이 계속 이어지지 못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사실 고사양 TV는 트로트나 일일극, 주말극장, 시사 스페셜보다 일괄 출시와 몰아보기, 에픽(서사극), 알고리즘, 추천 등과 더 잘 어울린다. 내일 또는 일주일 후를 기약하는 벼랑 끝 기법(cliffhangers)보다 ‘지금 당장’ 다음 에피소드를 시청하는, 그래서 몰아보기는 물론 이어 보기와 다시보기, 따라잡기, 잘라보기 등 다변화된 시청행동과 더 잘 어울린다. 가족들과 관성적으로 함께 보는(가족들과 리모콘 전쟁의 결과를 수반한) 일일극이나 주말극보다 나의 취향에 맞는 에픽에 더 잘 어울린다. 고사양 TV의 물질성에 올라탄 양질의 TV는 ‘비용의 미학(aesthetics of expense)’의 지평 위에서 과거의 드라마와 영화,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허문 새로운 텔레비전 형식이다.
따라서 나훈아 콘서트는 익숙한 20세기 문화를 양질의 TV로 재현했지만 가족TV의 부활을 보증하지는 않는다. 집의 강조 측면에서도 마찬가지다. 가정 내에 저마다 안락한 공간을 차지한 가족 구성원들은 때때로 나훈아 콘서트 같은 가족 예능이나 가족 드라마를 함께 보겠지만, 자신의 취향을 저격하는 양질의 OTT 콘텐츠를 개인TV-우리TV-나의TV의 순환 속에서 점점 더 많이 시청할 것이다. 집의 온기나 가족의 온기는 저마다의 ‘나의 온기’를 채우는 과정에서 작동할 것이다.


KBS와 가족TV의 의례
이즈음 KBS(그리고 지상파)에 대해 이야기할 수밖에 없다. 국민 통합은 20세기 초반 TV를 처음 기획할 때의 근본적인 출발점이었다. 공공재인 전파를 배타적으로 사용하는 TV가 공익이 무엇인지 찾아 나서며 발견한 대표적인 기능 중 하나가 국민 통합이었기 때문이다. 방송에서 국민 통합은 근대적 삶의 의례(ritual)를 생산하고 기억시킴으로써 완성된다. 그런 의례의 범주에는 왕가의 결혼(royal wedding)이나 최고 지도자의 취임, 올림픽, 월드컵 등과 같은 스포츠 이벤트, 그리고 계절적으로 요구되는 콘서트 등이 있다. <가요무대>, <전국노래자랑> 역시 그런 의례의 대표 프로그램이었다. 이런 것들은 민족국가의 삶, 일상적 규칙성, 집단기억, 시공간의 특정한 사용과 결부돼 있다. 그것은 또한 수신료와도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래서인지 나훈아가 콘서트 도중 유별나게 KBS를 자주 언급한 것이 눈에 띈다. KBS가 대중 콘서트와 같은 대중적 프로그램을 예전에 비해 잘 안 한다는 핀잔일 수도 있고, 코로나 와중에 그나마 KBS가 이런 프로그램을 기획한 것에 대한 칭찬일 수도 있다. 그가 예능인을 넘어 사회적 발언을 했다면 수신료의 가치에 대해 언급했을 수도 있다(그의 발언을 정치적으로 해석하는 견강부회는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다).
나는 그의 잦은 언급이 우리가 익히 알던 KBS와 가족TV가 이 시대의 사회적 의례를 왜 제대로 생산하지 않는가에 대한 질문으로 들린다. ‘테스형’ 가사를 빌려 말하자면 “아픈 세상에 KBS가 무엇을 하고 있지”라는 푸념 말이다. 비록 가족TV가 화려하게 부활하지 못할지라도 ‘이렇게까지 하릴없이 쪼그라들 이유는 없지 않은가’라는 탄식 말이다. KBS를 비롯한 지상파가 민족과 국가, 지역사회, 가족 등 개인보다 공동체에 대해, 그들의 운명과 역사적 과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면, 그들에게 닥친 의례 생산의 위기는 어떤 이야기 소재와 표현 방식을 따를 것인가 일 것이다. 이를 헤쳐나가기 위해서는 크게 두 가지의 도전을 해결해야 한다.
첫째는 앞서 말한 비용의 미학을 성취하는 일이다. 나는 KBS가 1990년대 말 드라마 <용의 눈물>을 통해 편당 제작비 1억 원 시대를 연 것을 기억한다. 그 드라마에서 장군을 따르던 군졸의 숫자는 영화를 방불케 할 정도로 대규모였다. 하지만 해가 갈수록 군졸의 꼬리는 짧아졌다. 실제 군졸을 세우든 정교한 CG로 대체하든 비용의 미학이 없이는 만족할 줄 모르는 시대가 됐다. 공영방송에도 투자하고 성과를 나누는 새로운 생태계가 만들어져야 한다.
둘째는 수용자 욕망에 대한 충실한 탐구다. 지금의 KBS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젊은 세대는 거의 십중팔구 이기적인 불효자들이다. 그들의 주 시청자인 60대 이상 노인들의 카타르시스를 건드리기에 더없이 좋은 소재이기 때문이다. 그런 식으로는 지속 가능한 공영방송을 유지하기 힘들다. 그것은 끝이 있는 게임이다. 지속 가능한 공동체 담론과 욕망을 찾아내는 것이 KBS가 당면한 문제이다.
하지만 이 두 도전은 KBS가 단순히 민족국가의 의례를 재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유료방송과 OTT가 주도하고 있는 ‘세계관의 콘텐츠’의 위상을 성취했을 때 비로소 해소될 것이다. 공동체의 의례를 생산하는 것을 넘어 수용자 저마다의 이야기 욕망에 화답하는 세계관의 콘텐츠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미디어가 그렇듯(심지어 OTT 플랫폼마저도), KBS도 역사적으로 부여받은 공영방송의문화적 설정상태(cultural set)에 입각해서 말이다. 비용의 미학과 수용자 욕망에 대한 탐구는 그 방향으로 가기 위한 조건이다. <어벤저스>의 세계, <기묘한 이야기>의 세계, <미생>의 세계, <킹덤>의 세계처럼 우리가 KBS에 기대할 수 있는 세계관의 콘텐츠 양식은 어떻게 완성될까? 지금 KBS(그리고 지상파)는 그런 콘텐츠의 지평을 찾아야 한다.
21세기, TV란 무엇인가?: 넷플릭스가 KBS와 다른 점
마지막으로 우리가 알아야 하는 것은 나훈아나 BTS가 음악을 들려준 사람들은 대중이 아니라 ‘식별된 개인’이라는 사실이다. 객석을 메운 스크린 속 개개인은 물론이거니와 집에서 그 프로그램을 시청하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유튜브나 여타 융합 미디어를 통해 시청하는 사람들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지극히 한국적인 것도, 지극히 미국적 스타일도 대중이라는 모호한 조건에서 시청하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식별된 개인의 상태에서 시청했다.
사실 식별된 개인으로서 TV 수용자 개념은 그리 낯선 것이 아니다. 비록 우리가 대중매체라는 말을 줄곧 써 왔지만, 미디어 수용자는 처음부터 어떤 구체적인 주체(someone)이면서 익명적 다수(anyone)였다. 한 미디어학자는 이를 ‘for-anyoneas-someone structure’3)라고 설명한다. 해석하자면 대중매체 수용자는 개인적 존재 상태에 있는 동시에 대중으로 부각되는 구조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대중적 존재 상태에 있으면서 개인 수용자에 더 방점이 찍힌 구조, 즉 ‘for-someone-asanyone structure’라고 해야 한다. 알고리즘 추천을 생각해 보면 그 이유는 자명하다. 이것이 KBS와 다른 넷플릭스의 모습이자, 이제 더 이상 미래가 아닌 21세기 ‘현재’ 텔레비전의 모습이다.
1) 사적인 경제 영역이 공적 영역을 지배하고 시민의 자유로운 삶의 잠재성이 고양되지 못하는 사회에서 시민이 소극적 자유를 찾아 친밀성의 내면적 영역으로 도피하는 경향. 한나 아렌트의 용어이다.
2) Paddy Scannell,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