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상세
그간 노동 현장에 대한 보도는 많았지만, 여성 노인의 노동을 다룬 보도는 거의 없었다. ‘노인 세대 여성의 삶을 노동의 관점으로 본다’는 새로운 접근 방식과 다양한 시도로 올드미디어의 가능성을 보여준 경향신문 젠더기획 특별취재팀의 기획 기사 취재기를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짧은 파마머리, ‘훈이네’라는 간판 아래 군복 무늬 토시를 끼고 빨간색 꽃무늬 앞치마를 질끈 동여매는 누군가의 뒷모습.
경향신문 젠더기획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한 장의 사진과 함께 시작했습니다. 마치 중요한 경기에 나가는 선수처럼 늠름해 보이는 이 장면은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국숫집을 운영하는 손정애(72) 씨가 새벽 4시 장사를 준비하는 모습입니다.
새벽 3시 반 만리동 집에서 짐가방을 들고 남대문시장까지 걸어가는 정애 씨의 출근길에 동행한 날 찍은 사진입니다. 현역 노동자이자 가장으로서 오늘도 일하는 기쁨을 얘기하던 정애 씨가 옷을 갈아입고 조리도구들을 가지런히 정리하는 모습은 경건해 보였습니다. 우리는 그 멋짐을 가장 잘 전달할 수 있는 한 장의 사진을 골랐습니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대한민국 노인 세대 여성의 삶을 노동의 관점에서 정리한 기획입니다. 2022년 1월 26일 손정애 씨의 이야기를 시작으로 3월 4일 독자들의 편지 광고까지 5주 동안(기사 5회, 영상 3회, 편지 광고 2회) 연재됐습니다. 이번 기획은 신문 보도의 여러 공식을 벗어났다는 점에서 고민이 많았습니다. 정애 씨의 사진을 1면에 넣은 것도 그렇습니다. 보통 당일 벌어진 일 중 가장 중요한 장면을 배치하는 신문 1면에 특별한 사건의 당사자도 아닌,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람의 (앞모습도 아닌) 뒷모습을 실었으니까요. 그날 경향신문 1면에 들어간 사진은 정애 씨의 뒷모습뿐이었습니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특별취재팀(이하 젠더기획팀)은 이번 기획을 제작하면서 우리가 가진 한계와 벽을 조금 넘어보고 싶었습니다. 지금부터 우당탕탕 젠더기획 제작기를 풀어보겠습니다.
할머니? 젠더? 일?
잘 봐, 언니들 인생이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의 주인공은 우리 사회에서 ‘할머니’라 불리는 여성들입니다. ‘한강의 기적’이라는 대한민국 경제 발전사나 노동문제를 얘기할 때 주로 남성 노동자들이나 조직, 기업 위주만 정리되는 것이 이상했습니다. 정말 그럴까? 여성들은 내조만 했을까? 우리가 ‘일’이라고 정의하는 것들은 과연 무엇일까? 이번 기획은 이런 질문들에서 시작됐습니다. 여성들이 고생하며 삶을 일궈 온 이야기는 너무 흔해서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로 치부되곤 하지만, 우리는 그 흔하디흔한 이야기에 집중해보고 싶었습니다.
젠더데스크(소통데스크 겸임)가 2021년 10월 게시판에 기획안을 올렸고 이런 취지에 공감한 기자들이 모여 젠더기획팀을 꾸렸습니다. 취재기자와 여성 서사 아카이브 채널 ‘플랫’, 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 사진기자, 뉴콘텐츠팀 PD, 교열기자까지 다양한 직역의 9명이 모여 ‘조각보팀’을 이뤘습니다. 이번 젠더기획팀은 하고 싶은 사람들이 적극적으로 지원해 구성됐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습니다. 각 부·팀장들이 기획팀 합류를 지지해준 덕분입니다. 특히 취재 활동과 분리돼있던 교열부 기자까지 지원 이메일을 보내 합류했습니다. 50대 여성으로 치매를 앓고 있는 어머니를 모시고 있는 교열기자는 기억을 잃어가는 어머니를 보며 어머니의 노동을 기억하고 기록해보고 싶은 마음을 담아 손을 들었습니다.

젠더기획팀은 취재에 앞서 몇 가지 원칙을 세웠습니다. 노인 세대 여성의 이야기를 어둡고 쓸쓸한 시선으로 그리지 않을 것, 가급적 언론에 등장한 적 없는 인물을 발굴할 것, 실명으로 얼굴을 드러내고 자신의 삶을 자신의 언어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의 이야기를 담을 것, 개개인의 서사에 집중하되 구조적 문제를 드러낼 수 있는 데이터를 함께 보여줄 것(각 회차별 원스토리 + 원데이터) 등입니다.
취재원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취재를 시작한 10월 중순부터 기획이 출고된 1월 말까지 전국에서 30명 이상의 취재원을 열심히 찾아다니고 만났습니다. 한 취재원당 5~6번씩 인터뷰를 했고, 지방에 계신 분들은 1박 2일 동안 함께 먹고 자며 깊은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취재하면서 만난 많은 분이 “나처럼 평범한 사람이 무슨 기사가 된다고…할머니들 얘기를 누가 읽어?”라며 기획의 성공(?)을 걱정해주시
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도 ‘일’에 초점을 맞춰 이야기를 시작하면 자신만의 일 노하우, 원칙 등을 즐겁고 신나게 들려줬습니다. 집안 사정과 시대적인 문제로 어쩔 수 없이 노동 현장에 뛰어들거나 힘든 일을 해야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우리가 만난 여성들은 자신의 일을 허투루 여기거나 ‘돈 때문에만’ 하는 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인터뷰를 시작할 때는 “나 별로 한 일 없는데…”라고 했던 분들이 여러 번 인터뷰를 마칠 때쯤엔 “나 일 많이 했네. 사실 우리 집은 나 없으면 안 돌아가지”라며 뿌듯해할 때 우리는 이미 이 기획이 원하던 바를 이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한 일에 대해 물어봐줘서 고맙다”고 한 말씀이 특히 기억에 남습니다.
취재에는 응했지만 여러 이유로 결국 기사에는 등장하지 못한 분들이 더 많습니다. 그 시대 여성들의 일과 삶은 가족 문제와 연결될 수밖에 없는 경우가 많기에, 혹시 가족들에게 해가 되거나 “엄마가 이렇게 살았다는 것을 알면 자식들이 슬퍼할까봐”, “며느리가 시아버지를 존경하지 않게 될까봐” 등등의 이유로 결국 자신의 삶이 기록되는 것을 포기했습니다. 그분들의 마음까지 잊지 않고 기사에 담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기사는 총 5회로 구성했습니다. 1회는 손정애 씨의 인터뷰와 정애 씨와 호적상 동갑내기 친구들인 1954년생들의 삶의 궤적을 데이터로 추적한 분석 기사로 구성했습니다. 2회는 우리 사회가 ‘집사람’이라고 불러온 전업주부 장희자 씨 이야기와 우리 사회의 필수 노동을 분석한 데이터저널리즘팀 기사로 구성했습니다. 두 회차 모두 개인의 서사와 데이터 분석 기사로 구성하는 방식은 같지만, 서술 방식을 다르게 했습니다. 손정애 씨 이야기의 경우 식당에 찾아가 도란도란 수다를 떠는 느낌의 1문 1답 형식으로 구성했고, 2회는 장희자 씨가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독백 형식으로 썼습니다.
기획의 중간인 3회는 엄마가 보는 딸의 노동, 딸이 보는 엄마의 노동을 담았습니다. 노인 세대 여성들의 삶을 주제로 했지만, 남존여비 시대를 산 엄마들의 노동과 페미니즘 시대를 사는 딸들의 노동은 어떻게 다르고 또 같은지 이야기해보고 싶었습니다. 3회 역시 윤순자 씨 모녀의 이야기를 주축으로 하되, 시대 차이를 보여줄 수 있는 여러 데이터와 엄마의 노동을 기록하려는 딸들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 개인의 이야기부터 시대의 화두로 시선을 확장해보려고 노력했습니다. 4회는 지방 여성들이 주인공입니다. 수도권의 이야기에만 머물지 않으려 했습니다. 강릉과 진도, 광주에서 현역 농부와 광부 여성을 만나 가부장제의 그늘과 부족한 인프라 속에서 도시 여성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꿋꿋이 삶을 개척해온 이들의 삶을 들을 수 있었습니다.
5회는 조금 희망적인 이야기를 담았습니다. 딸들이 차별받는 것이 당연한 시대에 태어났지만, 부모님으로부터 큰 사랑을 받으며 자랐고 지금은 그 사랑을 이웃에 돌려주고 있는 60대 여성과 ‘탈혼(결혼제도에서 벗어나는 것)’을 선택하고 자신만의 전문 분야를 개척해낸 50~60대 여성이 주인공입니다. 그중 한 분은 기사에 등장한 분 중 유일하게 가명(실명 대신 자신의 어머니의 이름을 썼음)을 썼지만 얼굴과 이름을 가리고도 충분히 실을 만한 의미가 있다고 판단해 쓰게 됐습니다. 용기를 내 낯선 이들에게 자신의 삶을 들려주신 많은 분께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입니다.
신문지를 굿즈로!
우리의 실험은 계속된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콘텐츠 제작과 유통 방식에서도 몇 가지 도전을 했습니다. 첫째는 기사 출고와 동시에 크라우드 소셜 펀딩 플랫폼 텀블벅을 통해 콘텐츠를 유료화한 것입니다. 우리가 준비한 콘텐츠 일부만 기사를 통해 보여주고, 전체 콘텐츠는 텀블벅을 통해 유료 후원한 분들에게만 공개하는 방식입니다. 실제로 경향신문 지면과 온라인을 통해 보도된 기사는 젠더기획팀이 만든 콘텐츠의 절반 정도고, 유료 회원에게 배송되는 책에만 전체 내용을 담았습니다.
펀딩 플랫폼을 선택한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언론사 플랫폼 외에 다양한 콘텐츠들이 실시간으로 경쟁하는 곳에서 우리가 만든 콘텐츠를 보다 냉정하게 평가받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요즘 누가 (돈 내고) 신문 봐?”라고들 하지만, 의미 있는 콘텐츠는 충분히 시장성이 있다는 것을 확인해보고 싶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독자층의 확장입니다. 젠더기획에서 다룬 주제는 노인 세대 여성의 삶이고 신문의 독자층도 고령화되고 있지만, 텀블벅 주 사용자인 20~30대 여성에게 우리가 만든 콘텐츠를 알리고 젊은 독자들과 소통해보고 싶었습니다.
텀블벅을 통해 우리가 공개한 리워드(굿즈)는 책과 명함(신청자별 개별 제작 명함), 스티커, 엽서, 노트, 독자들의 편지로 만든 신문광고 등입니다. 이중 편지 광고는 ‘신문지를 굿즈로’ 만들면서, 독자들의 메시지로 기획을 완성해보고 싶은 젠더기획팀의 마음이 가장 잘 녹아있는 구성입니다. 엄마, 딸, 누나, 언니, 동생, 배우자, 친구 등 주변 여성에게 보내는 응원과 지지의 메시지를 180자 편지 형태로 보내면 지면에 모아 싣는 방식으로 구성했습니다. 지면이 의미 있는 선물이 될 수 있도록 일부러 레트로 스타일로 디자인하고 편집했습니다. 이 구성 상품은 젠더기획팀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큰 호응을 얻어 앙코르 요청이 쏟아졌습니다. 제작할 수 있는 지면 분량에 한계가 있어 원래 두 개 면(3월 2일 자, 70명)만 신청받았지만, 추가 요청이 많아 두 개 면(3월 4일 자, 70명)을 추가로 제작했습니다. 대선 직전이라 지면 확보가 쉽지 않은 상황에서 편집국장과 신문국장 등이 적극적으로 지원해줬습니다(편집국장과 신문국장은 지면에도 친근한 포즈로 등장했습니다).
독자들의 응원과 올드미디어의 가능성
젠더기획팀 구성원들은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했습니다. 영상을 한 편만 제작하기로 했던 최유진 PD는 총 3편의 본편 영상과 텀블벅용 트레일러까지 총 4편의 영상을 만들었습니다. 덕분에 취재원들의 삶이 한 편의 다큐멘터리처럼 만들어졌습니다. 이준헌 사진기자는 이미 찍은 사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며 쉬는 날까지 나와 추가 촬영을 하며 글이 다 담아내지 못한 취재원들의 이야기를 멋진 사진으로 담아냈습니다. 데이터저널리즘팀 다이브(조형국 기자, 이수민 기자)는 1963년 경제기획원 한국통계연감부터 2021년 통계청 마이크로데이터까지 분석해 데이터 기사가 이렇게 재밌을 수 있다는 것과 우리가 만든 여성들의 이야기가 시대의 이야기라는 것을 확인시켜줬습니다.
여성 서사 아카이브 채널 플랫은 신문 기사로만 머물뻔했던 콘텐츠를 새롭고 다양한 형식으로 확장했습니다. 텀블벅 기획과 진행 실무를 맡은 심윤지 기자는 직접 리워드를 구성하고 기자로서는 낯선 행정·회계업무까지 해냈습니다. 이아름 기자는 책 표지부터 명함, 엽서, 독자 광고까지 우리 기획의 가치를 잘 살려낸 디자인을 직접 맡아 멋지게 해냈습니다. 덕분에 우리는 처음해 보는 작업을 모두 ‘가내수공업’으로 마칠 수 있었습니다.
이하늬 기자는 전국을 다니며 누구에게도 털어놓지 못했던 지방 여성들의 깊은 이야기를 세상 밖으로 끌어냈습니다. 김윤숙 교열기자는 신문 기사보다 분량이 두 배 이상 늘어난 온라인용 기사와 책용 원고의 교열을 꼼꼼하게 해냈습니다.
젠더기획팀이 열심히 일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이 작업이 행복했기 때문입니다. 기획 기사 1회가 나간 지 몇 시간 만에 펀딩은 목표액을 초과 돌파했고, 마감 결과 2,158명의 후원자가 4,326만 원을 후원해주셨습니다. 기사에 대한 직접적인 호응도 뜨거웠습니다. 댓글, 이메일, 전화, SNS까지…. 독자들의 과분한 칭찬과 응원을 받았습니다. 펀딩 마감 이후에 기사를 보고 책을 구입하고 싶다는 문의도 이어져, 지금은 일반 출판 작업도 준비하고 있습니다.

독자들의 편지 광고로 꾸며진 지면 Ⓒ경향신문
“신문은 올드미디어지. 지는 산업 아니야?”
많은 신문기자가 이런 이야기를 들으며 일합니다. <우리가 명함이 없지 일을 안 했냐>는 신문사가 만든 좋은 콘텐츠는 디지털 시대에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조금이나마 확인시켜 줬다고 생각합니다. 오늘도 가치 있고 의미 있는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신문사와 언론계 많은 동료에게 응원의 마음을 전하고 싶습니다. 경향신문 젠더기획팀의 고민과 노력을 알아봐 주신 독자분들께도 다시 한번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