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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신문이 호반그룹에 인수되면서 프레스센터에까지 여파가 미치고 있다. 프레스센터의 건립부터 현재까지 역사를 되새겨 보고, 한국 언론에 있어 그 의미와 역할을 다시 한번 짚어본다. 편집자 주
“IMF의 고금리정책(Overshooting Policy, 구제금융을 받는 국가가 고금리를 유지토록 해 지원한 돈이 다른 나라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하는 정책)이 한국에는 맞지 않는다. 이 내용을 국제사회에 알릴 방법이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니 프레스센터 맨 꼭대기 층에 가면 외신기자들이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맥주 마시고 대화하는 공간(사실은 꼭대기 20층이 아닌 18층 외신기자클럽 라운지를 말함)이 있었다. 국가적 현안을 외국에 알려야 할 때 사용했던 경험이 있어 떠올랐다. 거기로 갔다.
외신 기자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IMF가 한국에 강요하는 정책 세 가지(고금리정책, 구조조정, 민영화) 가운데 고금리정책이 왜 한국에 맞지 않는지를 설명했다. (당시) 한국의 저축률이 35% 내외였고, 국가 채무비율이 건전했다. 외환 관리를 잘못해서 온 흑자 부도다. 따라서 금리가 과도하게 높아 건전한 기업까지 쓰러지고 있다. IMF가 우리 경제를 망치고 있다. 우리 경제를 망치려고 IMF가 한국에 돈 빌려준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외신 기자들에게 설명했다.
블룸버그, 이코노미스트, 월스트리트저널 기자의 질문이 이어졌다. 최선을 다해 성실하게 답변했다. 다음 날 이들 유력 언론들은 ‘한국에 대한 IMF의 고금리정책은 잘못됐다’는 취지의 기사를 보도했다. 기사 나간 지 3~4일 후 IMF가 재협상에 응했다. 결국, 29.5%의 금리는 8%로 원상회복됐다.”
지난 7월 29일 국회의사당 의원회관에서 있었던 김대중정치학교(교장 문희상 전 국회의장) 강의에서 김진표 국회의장이 1997년 IMF 구제금융 당시 금리 인하 협상 과정을 설명하면서 언급한 내용이다. ‘프레스센터’의 기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경제 리더십과 자신의 역할을 강조하면서 나온 에피소드였지만 필자에게는 ‘외신기자클럽이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하는 반문으로 다가왔다.
당시 김 의장은 재정경제부(현 기획재정부) 금융정책실 산하 은행·보험국장이었다. 고금리로 하루 300개가 넘는 기업이 쓰러져 가는 것을 목격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의 재협상 필요성이 맞는 진단이었다. 그러나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등 보수 언론은 “무모하게 IMF와 맞서다간 다시 IMF 돈을 빌려 쓰고, 결국 중남미 국가들처럼 될 것”이라며 재협상 주장을 맹렬히 비판했다. 김대중 대통령 당선인도 보수 언론의 공격에 주춤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이런 분위기에서 외신 보도가 이어지자 이들 언론도 잠잠해졌다.
프레스센터의 역사
서울신문이 호반그룹에 인수되면서 그 여파가 프레스센터에까지 확산되고 있다. 서울신문이 태평로 프레스센터를 떠난다. 금년 10월 이후라고 곽태헌 사장이 공식화했다. 가는 곳은 서초구 우면동 호반건설 본사 사옥이다. 공식적으로는 서울신문·프레스센터 재건축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호반그룹 입장에서 재건축은 쉬운 일이 아니다. 건물 지분을 서울신문과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약 절반씩 나눠 갖고 있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호반그룹(서울신문)의 재건축 요구에 응해, 호반그룹의 계획대로 추진되는 방향을 생각해 볼 수 있다. 문제는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재건축에 소요되는 막대한 비용을 감당할 수 있느냐다. 공기업에 대한 긴축의 고삐를 죄고 있는 현 정부 임기 안에 동의를 얻어 내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이다.
다음은 호반그룹이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건물 지분을 인수하는 방안이다. 호반그룹이 가장 바라는 방식일 수 있다. 쉬운 일일까? 정부의 의지에 따라 의외로 쉽게 결정될 수 있는 일이지만, 엄청난 정치적 부담을 안아야 한다.
지금 프레스센터 빌딩 위치에는 원래 서울신문과 신문회관이 독립 건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신문회관에 대해 1959년 편집인협회(현 한국신문방송편집인협회)가 회관 건립 문제를 처음 발의했으나, 언론계가 자력으로 신문회관을 신축하거나 기존 건물을 구입할 여력이 없었다.
1961년 5·16 직후, 군사정부는 ‘최고회의 언론정책’을 공표했다. 신문회관 건립은 이 언론 정책을 실천에 옮기는 가시적 결과였다. 군사정부는 당시 1,300여만 원을 출자해, 서울신문 사옥 앞 부지에 신문회관을 설립했다. 1962년 5월이었다. 지하 1층, 지상 3층의 미완성 건물이었다. 옥상에는 향후 증축을 염두에 둬서 기둥의 철근들이 그대로 노출돼있었다. 건물에서 국회의사당(현 서울시의회)이 한눈에 들어왔다. 준공 당시 지하에는 그릴과 다방이, 1층에는 정부간행물 전시장을 겸한 기자들을 위한 서비스 룸이 있었다. 2층에는 신문협회, 기자협회, 신문연구소(한국언론진흥재단 전신), 신문윤리위원회 등이 입주했었다.
1962년 제6회 신문의 날에 맞춰 발행된 《편집인협회보》에 실린 기사의 한 문장에는 당시 신문회관의 위상에 대한 신문인들의 깊은 고민이 묻어 있다.
“언론계는 신문회관이 신문인의 언론 창달과 상호 친선에 크게 도움이 되기를 바라고 있는 반면에 단순한 관청의 일부분이 되지 않기를 절실히 희망하고 있다.”
언론계가 자체 자금으로 언론회관을 마련하지 못해 정부의 신세는 졌지만 정부가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아야 한다”고 천명하고 있다.
신문회관은 1962년 사단법인으로 출범함과 동시에 △신문 아카데미 △출판물 간행 △외국 저명 언론계 인사초청 강연 △신문인 영어 강습 △신문인상 △오락 및 운동경기대회 개최(연 2회) △신문인을 위한 영화와 공연(월 2회) △호텔, 식당, 다실 신설 △도서실 신설 등을 골자로 하는 사업 계획을 수립한다. 현재 한국언론진흥재단을 비롯해 기자협회, 신문방송편집인협회, 신문협회, 신문윤리위원회 등 언론단체들이 수행하는 거의 모든 사업에 대한 얼개가 만들어졌다.
프레스센터 건립 후 사반세기까지
이후 20년간 서울신문과 신문회관이 이웃해 별도 건물로 유지되던 형태는 1981년 전두환 신군부 출범 때 현재의 서울신문·프레스센터라는 통합 건물로 거듭난다. 《서울신문 100년사》에 따르면 신사옥건립(서울신문·프레스센터) 논의가 이뤄진 것은 1980년 11월이었다. 당시 문태갑 사장과 이우세 편집국장이 5공 출범 이후 처음으로 전두환 대통령과 특별 단독 회견을 갖는다. 이 자리에서 사옥 건립을 건의했다. 6개월이 지난 1981년 5월, 이광표 문화공보부 장관이 프레스센터의 필요성을 말함으로써 서울신문 사옥과 프레스센터를 함께 짓기로 결정했다. 건립위원회는 이광표 문공부장관, 문태갑 서울신문 사장, 허문도 청와대 제1정무비서관, 이원홍 KBS 사장, 김성진 연합통신 사장으로 구성했다. 인터넷이 없던 시대에 언론의 3대 축인 신문·방송·통신사 대표와 정부의 언론 주무 부처 장관 및 청와대가 나섰다. 언론계 공동 자산임을 과시했던 것으로 보인다.
건립 비용은 공익자금(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방송광고 판매 수수료’의 전신)을 활용했다. 공익자금이란 용어에서 보듯, 당시 방송 광고 독점 판매로 조성된 이 돈은 문화 인프라 구축에 쓰였다. 예술의전당을 짓는 데도 공익자금이 쓰였다. 땅은 대지의 원 소유주인 서울신문이 제공했다. 1층에서 11층까지의 소유권은 서울신문이 갖고 건물 이름은 서울신문사 빌딩으로, 12∼20층과 옥탑 소유권은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갖고 건물 이름은 프레스센터로 했다. 특이한 점은 프레스센터의 관리 운영권은 완공을 앞두고, 한국신문회관에서 이름을 바꾼 한국언론회관(한국언론진흥재단 전신)이 담당하는 형식을 취했다는 점이다. 저널리즘과 밀접하게 관련된 프레스센터를 광고 판매 대행 기관인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관장할 경우 언론인들의 반발이 우려돼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1982년 4월 6일 기공식 이후 정확히 3년 후인 1985년 4월 6일 완공한 프레스센터에는 32개 단체가 입주했으며 706명이 근무했다. 방송위원회·언론중재위원회 등 법정단체와 신문협회·방송협회·기자협회·신문편집인협회 등 언론단체, 지방신문 서울지사, 워싱턴타임스·아사히신문 등 주한 외신 한국 지사, 관훈클럽 등 언론단체 사무실이 입주했다. 1988년 설립된 전국언론노동조합연맹도 설립과 동시에 18층에 자리를 잡았다. PD연합회도 방송회관이 준공돼 목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이 건물에 입주해 있었다.
이후 사반세기 이상 프레스센터는 ‘언론인의 전당’으로 순탄하게 이어져 왔다. 그러던 것이 2009년 「방송광고판매대행등에 관한 법률(미디어랩법)」이 제정되면서 큰 혼란에 휩싸인다.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의 소관 부서가 문화체육관광부에서 방송통신위원회로 바뀐다. 동시에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가 소유해 온 고정자산도 문화부에서 방통위로 넘어갔다. 언론계는 ‘언론인들의 요람이자 전당이라는 설립 목적에 맞게 프레스센터를 문화체육관광부에 남겨야 한다’고 정부에 강력하게 요구했다. 종국에는 방송통신위원회와 문화체육관광부의 부처 간 다툼으로 번졌고,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와 한국언론진흥재단 간의 소송전까지 이어졌다. 어정쩡하게봉합되긴 했으나 갈등의 불씨는 여전히 남아 있다.
민영 언론의 운영이 미칠 영향
문제는 프레스센터가 설립 취지에 맞는 본연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느냐다. 1985년 준공 이후 프레스센터 본연의 기능은 점점 위축되고 있는 실정이다. 무엇보다 언론인들의 취재 편의를 제공해야 하는 기능이 쪼그라들고 있다. 10년 전에도 주요 외신사를 비롯 지역 언론사 서울지사가 입주하고 싶어도 못하는 문제가 지적되기도 했다. 그 당시에도 상주 외신 96개 사 가운데 BBC(영국), ABC(미국), TV아사히(일본) 등 5개 사만이 입주해 있고, 국내 지역신문사도 7개 사만 입주해 있었다.
10년이 지난 현재, 여건은 더 악화됐다. 상주 외신 101개 사 중 프레스센터에 지사를 두고 있는 언론사가 없어졌다. 도쿄신문만이 이 건물에 서울지사를 두고 있지만, 프레스센터가 아닌 서울신문에 입주해 있다. 지방신문 서울지사도 더 줄어들었다. 부산일보, 매일신문, 경남신문, 강원일보, 강원도민일보 등 영남과 강원권 신문 5개 사만 남아 있다.
프레스센터의 기능과 역할을 논의할 때면, 으레 미국의 내셔널프레스빌딩(NPB, The National Press Building)과 비교한다. 백악관과 국회의사당 사이에 위치해 있고 백악관을 걸어서 10분 이내에 갈 수 있다. 위치나 교통 여건은 우리의 프레스센터도 뒤지지 않는다. 워싱턴에 특파원을 두고 있는 국내 언론 27개 사 가운데 60%에 가까운 16개 사가 내셔널프레스빌딩에 사무실을 두고 있다. 일본, 필리핀, 싱가포르 등 아시아 대부분의 국가와 유럽 각국의 워싱턴 지사가 이 건물에 운집해 있다. 취재 편의 중심의, 말 그대로 언론인의 전당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서울신문이 민영화되자 많은 변화가 일고 있다. 호반건설이 인수하기 전까지 서울신문은 정부가 지배주주였던 신문사다. 그랬기에 40년 전 서울신문과 신문회관을 헐고 통합 서울신문·프레스센터로 재건축된 것도 상대적으로 쉬웠다고 볼 수 있다. 특히 무소불위 군사정부 대통령 결정까지 있었다. 이젠 민간 기업과 정부가 건물 지분을 반반씩 소유하는 형태로 변했다. 민영 언론 서울신문의 건물 운영 방식은 프레스센터에 상당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 총선 때 프레스센터 건물에 걸린 오세훈 서울시장의 선거 홍보용 펼침막이 언론단체와 갈등을 빚은 적도 있다. 민영 서울신문은 건물의 재산권 행사라고 주장할 수 있지만, 그 파장은 같은 건물에 입주한 언론단체, 언론계 전체에까지 미쳤다. 앞으로 유사한 갈등 빈도가 늘어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어떤 경우에도 프레스센터는 ‘언론인의 전당’이란 사실은 지켜져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