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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 내 세대 갈등을 논하려면 먼저 기자라는 직업의 정체성이 과거와 달라졌음을 이해해야 한다. 과거의 기자와 오늘의 기자는 무엇이 다른지, 그 차이를 극복하고 세대 갈등을 해결할 방안은 무엇인지 확인해 본다. 편집자 주
“뉴스룸의 모든 자원들 중에서 언론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시간’이다. 응답자들의 한결같은 불평은 ‘시간이 너무 없어’라는 것이었다. 언론인들은 깊이 있는 분석이나 보도, 보도의 정확성을 방해하는 가장 큰 장애물로 시간적인 압박을 꼽았다. 언론인들 대부분은 현대의 테크놀로지가 자신들이 아무리 빨리 일을 해도 잘했다는 소리를 듣지 못할 정도로 마감에 대한 기대 수준을 높여 놓았다는 데 공감하고 있다. 그리고 인터넷은 텔레비전이라는 위대한 미디어 발명품의 보도 속도가 무색할 정도로 뉴스 회전 속도를 높였다.”2)
10분 동안 수백 건의 기사가 쏟아지는 포털 뉴스판이나 포격 소리가 생생히 들리는 우크라이나 키이우 시가지를 생중계로 보여주는 유튜브 영상을 보면, 속보는 과연 무엇인지 의문이 든다. 아무리 취재를 열심히 하고 기사를 빨리 써도 좋은 기자라는 평을 듣기 어렵다. 이런 기자라면 위 인용문에 충분히 공감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인용문은 1995년부터 5년간 미국 언론계 종사자들을 심층 면접해 2001년 출판된 《Good Work》의 한 구절이다. 방송 뉴스 속보가 무색할 정도로 빨라진 ‘뉴스 회전 속도’의 경험은 결코 2022년 한국 언론계의 현장 기자들에만 해당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 책의 저자들이 심층 면접을 진행했던 1990년대 중후반은 미국 언론계의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객관성과 사실성이라는 저널리즘 전통을 뒤흔드는 인터넷 뉴스 매체가 등장했고, 명예를 중시했던 가문 소유의 언론사는 거대 기업의 계열사로 편입되던 시기였다. 독자가 변하고 미디어 테크놀로지가 변했으며, 언론사의 목표가 달라지며 기자라는 전문직주의의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대략 20년이 지난 지금, 당시 심층 면접에 응했던 기자들은 지금의 기자와 뉴스룸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그러니 언론사 뉴스룸에서 선배와 후배라는 구분으로 격차와 갈등이 불거진 때가 최근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대개 세대론을 뜻하는 알파벳 한 글자의 ‘○세대’라는 호칭은 기업이 소비재 시장의 마케팅 전략을 수립하고 홍보하는 과정에서 나온 경우가 많다. 이 호칭은 마케팅 분야를 넘어 각기 다른 경험을 가진 연령대의 정체성으로 한 사회에서 회자된다. 그러나 이 호칭이 뉴스룸과 같은 특정 직업군의 일상 공간에서 세대 격차나 갈등을 표현하는 용어로 쓰일 때는, 업무 방식이나 태도의 차이를 넘어 보이지 않는 사회적 관계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마르크스(Karl Marx)의 테제처럼 “인간적 본질은 사회적 관계들의 앙상블(ensemble)”이다. 그 경계도 모호한 ‘MZ세대’라는 호명이 불편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특정 출생 연도나 기자 연차로 일반화해 선배와 후배를 구분하고 차이와 갈등을 호소하는 말들은 한 개인이 누군가와 가족·직장 동료·고객·세입자·학부모·시민 등 다양하게 맺는 사회적 관계 중 앙상한 일부만을 확대한 평가일 뿐이다. 뉴스룸의 세대 갈등 또한 이런 함정에 빠진 것은 아닌지. 이 글에서는 이 함정을 피해 가며 다음과 같은 뉴스룸 세대 갈등의 몇 가지 사례를 소개하고 그 배후에 있는 변화를 짚어보려 한다.3)
예상 가능한 미래와 불가능한 미래
기자라는 직업이 높은 급여를 받을 뿐 아니라 일정 수준 이상의 사회적 지위로 인정받던 때가 있었다. 국가의 진입 규제로 인해 보도 기능을 갖춘 매체는 소수였고, 그만큼 기사 하나의 영향력이 컸던 시기다. 이후 대기업에 비해 급여 수준이 낮아지고 뉴스 매체가 급격하게 증가할 때도 기자라는 직업군 내에서 서로 인정하는 암묵적 보상은 분명히 있었다. 법조계 출입기자나 출입처 일진이라는 지위는 적어도 동료 집단 내에서는 인정받는 지위였다. 일종의 사회적 자본 형성이 예전 기자에게는 경제적 이익보다 더 중요한 보상 체계였던 셈이다.
그러나 지금 기자에게 이런 지위는 경력에서 중요한 목표도 아니며 보상으로 여기기도 어렵다. 지금 기자에게 예전 기자는 준거집단(reference group)이 될 수 없다. 매달 받는 급여로 기대할 노동 소득보다 부동산과 주식 같은 자본소득이 더 중요한 경제구조에서 비경제적 보상조차 주지 못한다면 노동의 가치를 저널리즘의 가치와 일치시키기란 쉽지 않다. 게다가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라는 표현처럼 지금 기자가 속한 분야가 과거의 유산으로 남겨질 것이라는 예상은 예전 기자가 지금의 나이에 자리한 직위에 자신이 도달할 수 있을지 되묻게 한다.
일정한 연령대마다 보상과 지위를 예상할 수 있고, 그에 따라 삶을 계획하며 살아온 이들은 후속 세대에게 전할 이야기가 있다.4) 예전 기자가 지금 기자에게 들려주는 ‘민완 기자5)’의 무용담은 이런 이야기의 일부다. 그러나 지금 기자에게는 자신의 삶은커녕 몸담은 언론사의 미래조차 불투명하게 다가오고 있다. 기자라는 직업이 평생의 ‘업’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불안감의 기저에는 예상 가능한 미래를 살아온 예전 기자와 예상할 수 없는 미래를 살아야 할 지금 기자의 간극이 놓여있다.
오래된 권력과 다가올 권력
‘언론은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한다’는 명제는 예전 기자나 지금 기자 모두 공감하는 사회적 책임이자 직업윤리다. 한국 언론이 역사적 국면마다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기록은 예전 기자가 지금 기자에게 물려줄 중요한 감시와 비판의 영역이기도 하다. 1960년 4·19혁명부터 2017년 대통령 탄핵까지 언론이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권력은 대통령, 진보와 보수라는 제도 정치권, 그리고 검찰에 이르는 정치권력이었다. 예전 기자가 지금 기자에게 언론의 사회적 책임과 기자의 자격을 말할 때 언급되는 권력은 바로 이 정치권력이다.
그러나 지금 기자에게 정치권력은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영역의 중심에 있지 않다. 이는 역사적 경험의 문제가 아니라 몇 차례의 정권교체에도 달라지지 않은 삶과 뉴스룸의 일상에 있다. 예전 기자에게는 지금도 정권 교체가 한국 사회의 변화를 주도할 중심축으로 여겨진다. 정권 교체와 같은 국면에서 자신이 쓴 기사가 미친 영향은 급여보다 더 중요한 보상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영향력을 삶의 변화로 이어가기 어려운 지금 기자에게 권력이란 젠더 차별과 혐오나 기후 위기와 같이 자신의 삶에 영향을 미칠 권력, 특정한 인물로 수렴되지 못하는 권력이다.
지금 기자에게 정치권력은 오래된, 그러나 변화조차 기대할 수 없는 협소한 정치체제일 뿐이다. 이들이 보고 있는 오래된 권력에서 예전 기자들 또한 자유롭지 않다. 예전 기자 중 일부가 하루아침에 정치권으로 진입한 ‘사태’가 뉴스룸에서 논쟁이 됐던 시기조차 이제는 과거가 됐다. 이런 풍경은 낯설지 않다. 1960년대 미국에서 가장 급진적이었던 정치 조직인 산업별노동조합회의(CIO, Congress of Industrial Organizations)는 미국 노동총연맹(AFL, American Federation of Labor)과 합병한 이후 제도권 정치체제의 일부가 됐다. 예전 투사들은 베트남 참전을 지지했고, 지금 투사들은 반전과 반체제 운동에 나섰다.6) 이들을 비판하며 정치권력을 넘어 삶의 방식 자체를 바꾸려 했던 청년운동은 오늘날 버락 오바마로 상징되는 정치체제의 일부가 됐다. 지금 기자도 다르지 않다. 그러나 훗날 자신 또한 그 일부가 되더라도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권력은 정치권력이 아닌 자신의 삶에 연관된 다가올 권력이다.
지사적 언론인과 윤리적 회사원
매체 환경과 경제적 변화, 그리고 감시하고 비판해야 할 권력의 확장은 기자란 무엇을 해야 하는가라는 정체성의 문제로 이어진다. 지금 기자에 대한 ‘질문하지 않는 기자’, ‘비판과 항의를 하지 않는 기자’라는 예전 기자의 평가는 기자가 아닌 ‘회사원’이라는 정체성을 전제로 한다. 이때 회사원이란 발품을 팔고 때로는 무례한 행동으로 취재원 앞에서 당당한 기자, 공들여 쓴 기사로 정치권력의 강력한 항의를 마주하는 ‘지사적 언론인’의 반대편에 있는 기자다.
그러나 지금 기자에게 지사적 언론인은 한 언론사에서 미래를 예상할 수 있고 정치권력의 일부가 될 수도 있는 예전 기자의 이상형이다. 지금 기자들에게 저널리스트라는 전문직주의는 군사독재와 민주화 운동 시대에 계몽적인 지사적 언론인으로 인식되면서 지양해야 할 정체성이 됐다. 도리어 회사원이란 지금 기자에게 각자의 직업윤리를 가진 다양한 직업 종사자를 뜻한다. 다만 언론인은 세상을 조금 더 낫게 만들기 위한 감시와 비판이 직업윤리인 회사원이다. 독자에게 카타르시스를 안기는 정치권력을 향한 비판보다 다른 직업을 가진 이들도 공감할 수 있는 삶의 위기를 드러내고 그 원인을 제시하는 비판이 지금 기자의 직업윤리인 셈이다.
뉴스룸에 세대 갈등이 있다면 그 일부는 예전 기자와 지금 기자가 서로 다르게 부여하는 직업 정체성에 기인한다. 지사적 언론인의 태도와 취재 행위가 이제는 독자에게 ‘기레기’의 악습으로 평가되는 오늘날, 새로운 직업윤리에 충실하려는 지금 기자의 항의가 뉴스룸에서 어떤 영향력도 확인받지 못할 때 이탈(exit)이 이뤄진다.7) 매일 같이 이직과 전직을 고민하는 지금 기자의 일상은 예전 기자와는 전혀 다른 정체성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어떤 세상을 바라고 있는가?
뉴스룸의 세대 갈등이란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지금의 후배는 10년 후 누군가의 선배가 될 것이고 그때에도 뉴스룸의 세대 갈등이 회자될 것이다. 그래서 미국 작가 커트 보니것(Kurt Vonnegut)은 한 대학 졸업식 축사에서 “좋았던 옛날은 존재한 적이 없다”고 일침을 놓으며 졸업생들을 “A세대”라 불렀다.8) 어떤 세대 간 갈등이나 차이의 기준은 늘 나이 많은 세대의 과거에 있다. 보니것은 그런 기준이 X세대 같은 알파벳 세대를 만들었다고 비판한다. 모든 세대는 늘 처음부터 시작하는 세대다. 뉴스룸의 세대 격차와 갈등이란 이런 시작의 관점에서 봐야 할 것이다. 세대 간 격차를 넘어 지금도 존경 받고 있는 저널리스트 조지 오웰(George Orwell)은 정치란 “세계를 특정 방향으로 밀고 가려는 욕망, 성취하고자 하는 사회가 어떤 사회여야 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놓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을 바꿔보려는 욕망”이라고 규정했다.9) 오래된 권력을 비판하는 지사적 언론인이든, 다가올 권력을 감시하려는 직업윤리의 회사원이든, 서로에게 다음과 같은 정치적 질문을 던져보면 어떨지. “기자인 우리가 바꾸길 바라는 세상은 어떤 세상입니까?” 뉴스룸 세대 간 격차는 이 질문의 대답에서 좁혀질지 모르겠다.
1) 이 글에서 세대 간 갈등의 사례나 소재로 쓰인 용어와 표현은 전국언론노동조합이 2022년 4월 27일과 6월 8일 두 차례에 걸쳐 진행한 유튜브 콘텐츠 <뉴스룸 세대 갈등>에서 빌어온 것이다. 특정한 표현과 용어는 유튜브 콘텐츠와 다른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으며 그 책임은 필자에게 있다.
2) Gardner, H., Csikszentmilhalhi, M., & Damon, W., 《Good Work: When Excellence and Ethics Meet》, 문용린 옮김, 《Good Work》, 200쪽, 생각의 나무, 2003.
3) 물론 뉴스룸이라는 용어 또한 지나치게 포괄적이다. 신문사와 방송사의 뉴스룸은 분명히 다를뿐더러 언론사의 소유 구조나 매체의 특성에 따라 조직 문화는 상이하기 때문이다. 또한 선배와 후배라는 구분도 어색하기는 마찬가지다. 따라서 이 글에서 뉴스룸은 본방송과 지면을 중심으로 뉴스가 생산되는 공간이라는 의미로 사용하고, 선배와 후배라는 용어 대신 ‘예전 기자’와 ‘지금 기자’라는 표현으로 대신한다.
4) Richard Sennet, 《신자유주의와 인간성의 파괴》, 조용 옮김, 38쪽, 문예출판사, 2002.
5) 재빠르고 적극적으로 취재하는 기자
6) Saul D. Alinsky, 《급진주의자를 위한 규칙》, 박순성·박지우 옮김, 57쪽, 아르케, 2008.
7) Albert O. Hirschman, 《떠날 것인가, 남을 것인가》, 강명구 옮김, 90쪽, 나무연필, 2016.
8) Kurt Vonnegut, 《그래, 이 맛에 사는 거지》, 김용욱 옮김, 90쪽, 문학동네, 2017.
9) George Orwell, <나는 왜 쓰는가>, 《동물농장》, 도정일 옮김, 138쪽, 민음사. 199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