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기사 상세
[취재기·제작기] MBC경남 <어른 김장하> 제작기
취재기·제작기 | 등록일 : 2024-01-26

<어른 김장하>는 ‘진주의 큰 어른’이라 불리는 김장하 선생의 삶을 그려낸 다큐멘터리다. 지역방송 프로그램으로 시작해 OTT, 영화까지 영역을 확장하며 시청자와 관객의 큰 호응을 얻어낸 <어른 김장하>의 제작 과정을 따라가 본다. 편집자 주

 

시작은 한 술자리였습니다. 50대 남성이 모교 이사장 자랑을 하는데 생전 처음 듣는 이야기였습니다. 100억 대 학교를 명문으로 키워 국가에 기부하고 온 동네 사람들을 아무 조건 없이 돕는데, 정작 본인은 차도 없이 다닌다는 한약방 주인. 절대 자신을 알리는 인터뷰를 하지 않는다는 점까지 모든 것이 놀라웠습니다. 

 

당장 기획서를 썼습니다. ‘주인공 없는 인물 다큐는 가능하다’, ‘꼰대를 혐오하는 시대, 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어른을 기다리는 시대’…. 배짱은 좋았지만, 설득력은 부족했던지 기획서는 2년을 묵혀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전화위복으로, 제작 허가가 떨어졌을 때 상황은 좋은 쪽으로 많이 바뀌어 있었습니다. 우선 주인공인 김장하 선생이 60년 운영한 남성당한약방의 문을 닫을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덕분에 남성문화재단 해산, 진주가을문예 마지막 시상식 등 선생이 참석할 수밖에 없는 여러 공식 행사가 이어졌고, 평생 지역을 위해 헌신한 이의 은퇴를 직접 기록할 수 있었습니다. 아예 영상을 찍기 어려우리라 생각했던 기획 초반에 비하면 고무적인 성과였습니다. 

 

다큐멘터리의 또 다른 축인 김주완 전 경남도민일보 편집국장 역시 이른 은퇴를 하는 참이었습니다. 2015년 《별난 사람 별난 인생 그래서 아름다운 사람들》이라는 책을 쓰며 김장하 선생을 짧게 취재했던 그에게 협업을 제안했습니다. 전면에 나서지 않는 주인공 대신 주변인을 취재해 이야기를 모자이크하려면 존재감 있는 프레젠터가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마침 김주완 기자 역시 은퇴 후 첫 과제로 김장하 취재를 준비 중이었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습니다. 이렇게까지 운 좋게 모든 일이 맞아떨어질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멋진 타이밍이었습니다.

 

 


 

 

기자와 PD의 낯선 협업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경남의 주요 신문사와 방송사, 그것도 전현직 기자와 PD가 모여 1년간 협업을 한다니 걱정하는 목소리도 컸습니다. 경쟁 언론사 간에 주요 정보를 독점하려다 분쟁이 일거나 기자와 PD의 기싸움으로 파국을 맞이한 사례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모든 취재 내용과 자료를 공유하되 영화-출판이라는 서로 다른 매체에서 각자의 결과물을 동시에 오픈’하는 방식을 선택했습니다.

 

영상 취재는 강력한 침투력과 전파력을 갖지만 누락되는 정보가 많습니다. 출판물은 보다 정확한 정보 전달이 가능하지만 확산에 오랜 시간이 걸릴 수도 있지요. 2023년 새해 벽두에 MBC경남은 다큐멘터리 <어른 김장하>를 방송하고, 김주완 기자는 경남도민일보 출판사 피플파워를 통해 책 《줬으면 그만이지》를 출간했습니다. 다큐를 본 사람은 책을 궁금해했고 책을 읽은 사람은 다큐를 궁금해했습니다. 서로 경쟁하지 않고 단점을 보완하며 장점을 극대화하는 전략은 결과적으로 홍보 과정에서 매우 효과적이었습니다.

 

취재 과정에서도 기자와 PD의 서로 다른 작업 방식이 부딪히지 않을까 긴장하기도 했습니다. 특히 글로 작업하는 신문기자 입장에서는 여러 촬영 장비와 스탠바이 시간이 매우 비효율적으로 느껴졌을 겁니다. 김주완 기자 역시 처음엔 본인 인터뷰가 끝났는데도 촬영을 위해 좀 더 이야기를 나눠 달라는 PD의 주문이 불편했다고 합니다. 후에 ‘인서트’의 개념을 알고 나서는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도와주셨죠. 한여름에 땀을 뻘뻘 흘리며 무거운 장비를 들고 뛰는 강호진 촬영감독을 보고 방송 제작진의 고충도 이해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PD인 저로서는 가끔 긴 질문 끝에 ‘네’, ‘아니요’로 대답하게 하는 신문기자의 인터뷰가 당황스러웠습니다. 4K 촬영이라 한없이 늘어나는 저장용량에 속이 타들어 가기도 했지요. 그래도 철저하게 팩트체크 된 소스들로 편집할 때의 개운함이 모든 걸 보상해 주었습니다. 기자는 당시의 상황을 집요하게 취재해 이야기의 맥을 잡고 PD는 당시의 감정을 물으며 드러나지 않았던 색다른 이야기를 끄집어내는 두 가지 색깔의 인터뷰는 무척 즐거운 경험이었습니다.

 

 


 

 

하나의 작품으로 방송, OTT, 영화까지

 

처음 기획부터 영화 제작을 목표로 했기에 익숙한 방송용 29.97fps1) 대신 24fps로 촬영하느라 어려움도 있었습니다. 촬영 계획을 세우는 것보다 데이터를 관리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들였던 것 같습니다. 프로그램 간 호환을 위해 파일명 규칙을 정해 변환하고 뒤죽박죽인 자료 화면을 하나하나 정리하는 순간엔 쏟아버린 쌀알을 주워 담는 기분이었습니다. 하지만 촬영 전부터 DI(컬러보정작업) 등 후반작업에 대한 확실한 계획을 세우고 시작했기에 뒤로 갈수록 에러율은 낮아지고 퀄리티도 높아졌습니다. 결국 제작 지원 스케줄에 쫓겨 영화보다 방송 송출을 먼저 하게 되었지만 6개월 뒤 넷플릭스 버전을 만들 때도, 1년 뒤 영화 버전을 만들 때도 비교적 탄탄하게 준비했던 프리 프로덕션의 덕을 보았습니다.

 

방송과 OTT, 영화까지, 비슷하지만 확실히 다른 세 매체를 하나의 작품으로 모두 경험하게 됐지만 그 차이나 특징을 정리하기에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웨이브나 넷플릭스 같은 OTT는 일반 중소 제작사가 먼저 콘텐츠를 제안할 창구조차 찾기 어렵지만 확실히 방송에 비해 젊은 층에 파급력이 큰 매체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또 지역사 프로그램 판매가 아직 체계화 되어있지 않은데, OTT 수급 방식을 경험하며 포스터, 섬네일부터 에피소드별 요약, 심의번호까지 프로그램별 데이터베이스를 만들어 두는 것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영화로 만들어 보자 결심하고서는 우선 다큐멘터리 영화 전문 배급사인 ‘시네마 달’에 공식 메일을 보내 우리 작품을 봐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방송 전문가가 영화 전문가는 될 수 없다는 걸 인정하는 게 처음 넘어야 할 문턱이었습니다. 제작과 송출을 모두 담당하는 방송사는 최종 편집본을 내는 시기가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미뤄지기도 하지만 여러 후반작업이 함께하고 심의와 배급, 상영이 각자의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영화는 편집본을 재수정하면 막대한 예산과 시간이 낭비되기에 최종 편집본을 매우 신중하게 결정해야 했습니다. 

 

 


 

 

방송 PD에게는 더 설 던 관객과의 만남 

 

방송 버전은 아무도 모르는 김장하라는 인물을 소개하는 것에 중점을 둔 설명문에 가까웠다면 영화는 스토리라인이 좀 더 부각되길 원했습니다. ‘자신의 선행을 숨기려는 김장하’와 ‘어떻게든 알리려는 김주완’, 두 인물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같은 느낌을 강화하려 노력했습니다. 그래서 분명 따듯한 이야기인데 묘한 서스펜스가 있습니다. 

 

또 김장하 선생의 의외의 유머 감각, 소탈한 생활 태도 등이 영화의 내용과 형식에서 모두 잘 드러날 수 있도록 노력했습니다. 김인영 음악감독과의 첫 회의에서 오케스트라의 비장함, 현악기의 애수를 뺀 담백한 음악을 부탁했습니다. 선생은 소박하고 편안한 분인데 영화가 웅장하다거나 비장해지지 않도록, 무엇보다 영웅화하지 않도록 연출적으로 신경을 썼습니다.

 

살아계시는 분에 대한 이야기라 어려웠고 또 제대로 허락받은 게 아니라 마음고생이 있었습니다. 영화에 잠깐씩 등장하는 김장하 선생의 모습 역시 마이크를 채우고 조명을 세우는 등, 정식으로 인터뷰를 한 것은 아닙니다. 허락하지 않으셨으니까요. 대신 김주완 기자가 찾아가 대화를 나눌 때 옆에서 슬쩍 촬영하는 것까지 억지로 막지는 않으셨기에 가능한 촬영이었습니다. 

 

김주완 기자라는 대선배와 함께 작업한 것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허락받지 못한 인터뷰를 어떻게 취재 윤리를 지키며 진행하고 사회에 필요한 내용을 전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나눴고, 그 결과 김장하라는 인물이 이 사회에 미친 영향, 공적인 부분들을 취재하는 데 집중하고 그의 개인사, 가족사는 최대한 드러내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영화 개봉 후에도 관객들이 김장하 선생을 만나고 싶어 하지만 은퇴한 김장하 선생께서 편안하게 지내실 수 있도록 함께 지켜달라 부탁드리고 있고 모두 크게 공감해 주셔서 감사한 마음입니다.

 

개봉 후 관객과의 만남은 방송사 PD로서는 새로운 경험이었습니다. 늘 TV 너머의 시청자를 상상만 하다가 직접 뵙고 감상을 나누는 일은 두렵기도 하고 설레고 감동적이기도 했습니다. 특히 다양한 세대가 이 영화를 해석하는 방향이 다른 듯 같다는 사실에 희망을 느꼈습니다. ‘좋은 어른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하기도 하고 ‘내게 저런 어른이 있었다면’ 바라기도 하지만 결국은 모두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으로 이어졌습니다. “꼰대를 혐오하는 시대, 하지만 어느 때보다 어른을 기다리는 시대”라는 카피와 같이 세대 갈등은 실체보다 과장된 또 다른 혐오 조장이었을 뿐, 실은 서로를 이해하고 기대길 바란다는 사실에 지금 우리가 목말라하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지역방송이 구현해야 할 ‘지역성’이란

 

미디어는 오늘도 각자도생을 이야기합니다. 모두가 오디션장에 선 긴장감으로 자기 계발에 쫓기며 일상을 살아갑니다. 모두가 경쟁자이고 얕보이지 않기 위해 몸을 부풀리거나 단단한 벽을 칩니다. 하지만 사실은 다들 좋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합니다. 영화 <어른 김장하>를 통해 인간의 선의가 무엇까지 할 수 있는지 그 가능성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특히 청소년들에게 인간의 선의를 믿어도 된다고, 그건 촌스러운 게 아니라 용감하고 강한 거라고, 그게 오히려 내가 안전해지고 사회가 성장하는 가장 빠르고 효율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영화에서 이 가능성을 발견하신 분들이 많이 울고 함께 웃어주신 것 같습니다.

 

지역방송은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입사 후 거의 20년이 다 되어가도록 내내 위기, 고비, 고사 직전이라던 지역방송사 PD로서 지난 한 해 <어른 김장하>와 함께 한 여정은 흥분되고 신나는 경험이었습니다. 간혹 “지역 피디가 왜 그런 것까지 해?” 혹은 “경남 피디가 왜 여기까지 와서 취재해?”라고 하시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마 지역방송이 구현해야 할 ‘지역성’에 대해 뭔가 오해를 하신 것 같습니다. 지역성은 지역을 행정구역 안에 가두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면 지역이라는 울타리는 다양성을 키우고 보살피는 ‘생크추어리(sanctuary)’가 아니라 차별하고 격리하기 위한 ‘게토(ghetto)’가 되겠죠. 지역의 경계를 한계선으로 보지 않고 전문 영역으로 본다면 많은 것이 달라집니다.

 

지역 어젠다가 전 지구적 보편성을 가질 수도, 특수한 지역 아이템이 전 지구적 관심을 끌 수도 있습니다. 김장하 선생의 이야기에서 대한민국 전체, 인류 전체가 공감할 수 있는 보편적인 의미를 건져내 바깥으로 내보내는 것도 지역성 구현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른 김장하> 이후 지역 시청자와 관객들이 우리 지역이 자랑스럽다, 우리 동네가 이렇게 예쁜 줄 몰랐다고 말씀해 주실 때, 내가 지역방송사 PD로서 그래도 역할을 하고 있구나 뿌듯했습니다. 우리가 배경이나 대상이 아니라 주체가 되는 경험. 앞으로도 지역 시청자 여러분께 우리가 우리 스스로 말한다는 감각을 계속 지켜드리고 싶습니다. 

 

 

 

 

 

 

1) Frame Per Second. 초당 재생되는 프레임 수. 영화에서는 보통 24fps를 사용한다.

저자의 다른 미디어
  • 필자 : 김현지
  • 소속 :
  • 직함 :
  • 발행 : 2024-01-26
  • 조회수 : 6
  • 키워드 :
블로그 공유 트위터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