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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 리뷰]북리뷰: 《고통 구경하는 사회》
미디어 리뷰 | 등록일 : 2024-04-26

 

고통 구경하는 사회 ⓒ웨일북

 

 

2년 전 10월 29일, 휴대전화를 들고 있던 대한민국 국민은 모두 그날을 기억한다. 그날 그 시간, 누구도 동영상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실시간 이태원’ 태그가 붙은 동영상은 휴대전화 속 창이 켜져 있던 모든 곳에 올라왔다. SNS와 채팅방에, 포털과 기사 창에서 사고 장면들은 끊임없이 재생됐다. 흰 천에 가려진 살과 마지막 도움을 청하는 손들과 다급하고 절박한 표정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지금 서울 한복판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라고는 믿을 수 없는 처참한 사건이었다.

 

그 순간을 더 처참하게 했던 것은 “구조 대신 촬영을 선택한” 누군가 영상을 찍고 올렸으며, 그렇게 퍼날라진 영상이 우리에게 도착했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렇게 실시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는 사람들을 다 같이 ‘구경’했다. 대규모 구경꾼이 됐던 그날은 모두에게 뼈아팠다. 사회가 현시대의 고통을 어떻게 콘텐츠로 소비하고 있는지, 이태원 참사는 적나라하게 들춰냈다.

 

김인정의 《고통 구경하는 사회》가 이태원 참사 이야기로 글을 여는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그는 지금 사회의 고통 비즈니스가 어떤 모양인지 가감 없이 드러낸다. 그리고 그는 이 비정상적 이상 징후가 갑자기 나온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재해가 있어야만 지방의 존재를 깨닫는 우리의 시선에서, 눈물이나 사연이 있어야만 비로소 뉴스로 쳐주던 사회 문법에서, 닮은 고통만 공감하던 우리 안에서 존재해 온 현상이라고 그의 취재 기록을 빌어 이야기한다.


고통, 구경인가, 목격인가?

 

저자인 김인정의 이력을 보면 그가 왜 첫 책에서 고통을 화두로 던졌는지 짐작된다. 그는 꾸준히 고통을 보고 기록하고 고민해 온 사람이다. 고통에 대한 질문으로 가득 찬 이 책은 저자의 행적과도 맞닿아 있다. 

 

주로 사회부 기자로 10년간 사건·사고, 범죄, 재해등을 취재한 그의 시선은 고통의 국경도 넘었다. UC버클리 탐사보도센터에서 인종차별 문제, 소셜미디어와 마약 문제, 시민운동 등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제작했고, 더네이션(The Nation), CNN 등 외신에서는 한국의 참사와 학살을 보도했다. 지금 그는 미국에서 프리랜서 기자로 다양한 언론사와 협력하여 취재와 집필 활동을 하고 있다. 

 

《고통 구경하는 사회》는 얼핏 ‘고통’을 탐구한 하나의 완결된 논문 같다. 1장에서 이태원 참사 현장에서 시민들의 구경하는 시선을 포착했던 김인정은 2장에서 고통 포르노가 어떤 모양인지 구체화한다. 지방, 산업재해, 5.18 민주화운동과 빈곤. 그가 뉴스로 다뤘던 다양한 고통이 누구의 눈으로 어떻게 비쳤는지 되돌아본다. 그가 다루는 고통의 외연은 확장된다. 3장에서 저자는 ‘닮지 않은 고통’을 말한다. 미국 증오 범죄, 홍콩 민주화 시위, 마약 문제, 젠더와 지방의 장면을 비추며 접점이 없다는 이유로 우리가 주목하기를 관둔 고통을 사유한다. 

 

책의 마지막 장에 이르러 그는 글을 열 때 던졌던 질문을 다시 던지며 답을 구한다. 구경과 목격은 다른가, 다르다면 우리는 고통을 구경하고 있는가 목격하고 있는가, 계속 구경할 것인가. 그는 이 질문의 해답을 찾기 위해 지금까지 달려온 것만 같다. 치열한 고민을 거친 그의 말은 명확하다. 우리의 응시가 변화의 동력이 될 수 있도록, 실패하더라도 응시를 멈추지 말라는 것이다. 


고통 비즈니스 한복판의 언론

 

오늘날 우리는 뉴스로 타인의 고통을 접한다. 고통이 돈이 된 지는 오래됐다. 고통 비즈니스 속에서 자극성은 상업성으로 치환된다. 더 자극적일수록 더 돈이 되는 시대. 범람하는 고통의 장면들은 우리의 감각을 무디게 하고 무기력하게 한다. 이 고통 비즈니스 한복판에 언론이 있다. 언론은 고통 콘텐츠의 도매시장이자 유통업계, 전시장이 됐다. 그 안에서 고통 콘텐츠를 발굴하고 내보내던 기자인 저자는 딜레마에 빠진다. 김인정은 질문한다. 

 

“내 질문은 이렇다. 이 모든 걸 보면서도, 인간이 무언가를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게 가능할까? 우리가 절망하지 않는 게 가능할까? 우리는, 지치지 않을 수 있을까?”

 

저자는 언론이 단지 구경자를 넘어 목격자로 나아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한다. 얼결에 동참해 온 오늘날 언론이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을 반추한다. 그 결과로 짧은 3분 방송, 6매 신문 기사에서 뉴스 문법에 따라 삭제된 장면들을 이 글에서 그는 다시 끌어올린다. 

 

저자의 눈으로 다시 비춘 뉴스는 이렇다. 충청북도 청주시 흥덕구 오송읍 궁평2지하차도에 가득 찬 흙탕물 속에서 잠겨있던 시내버스를 비추는 보도 카메라는 수도권 사건·사고를 비추던 카메라보다 한발 늦고, 어느새 흔해진 산업재해는 연민을 끌어올 사연이 없으면 평가절하돼 조명받지 못한다. 중앙뉴스가 시공간적으로 아득해진 오월어머니보다 5.18 혐오를 새로운 사건으로 취급해 주목할 때, 지역뉴스는 지역의 참사를 더 느리게 잊기 위해 매년 ‘제사’를 치른다. 

 

누락된 장면을 두고 그는 “뉴스는 시의적절한 슬픔에 대해서만 반응한다”고 일침을 가한다. 동시에 그러한 뉴스 문법에 동참하였던 것을 두고 “우리가 보이는 고통을 수집하는 사이에 보여줄 수 없는 고통과 보이지 않는 고통은 상대적으로 소외된다”며 반성한다. 

 

저자가 누락된 장면을 넣어 다시 써 내려간 이야기는, 기존 뉴스와는 다른 모양으로 흘러가기도 한다. 환경미화원의 지하 쉼터에서 일어난 화재를 다룬 뉴스다. 저자는 화재 원인이 지하 습기와 가전제품 사용이 일으킨 누전으로 정리된 것을 두고 ‘대체로 다 이런’ 지하 쉼터 풍경들을 찾아내 뉴스로 내보낸다. 아슬아슬하게 전기를 끌어다 가전제품을 쓰고 있는 미화원의 지하 쉼터 풍경은 대부분 같았고 그는 ‘와닿게’ 보여주기 위해 미화원들이 자꾸만 가리는 빈약한 살림살이를 찍는다. 뉴스가 제시한 대안은 양지에 만들어진 미화원들의 쉼터였다. 

 

그러나 취재 막바지, 좋은 사례로 꼽힌 취재에도 반가워하지 않는 미화원들의 태도에 그는 깨닫는다. 지상으로 올라간 쉼터는 미화원들의 휴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탓에 주민들의 눈총을 받아야 했다. 그는 “쉬는 걸 보이지 않아야 쉴 수 있는 사람이 있다”고 하면서 고쳐져야 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애초 미화원들의 휴식을 지하로 밀어 넣은 사회였다고 뉴스를 다시 적는다. ‘와닿게’ 보여주고자 미화원들이 손바닥으로 재차 가리던 살림살이를 영상으로 내보내던 취재 방식 또한 적당한 ‘예시’로 뉴스에 등장하는 사회적 약자가 겪어야 하는 고통이 아니었는지 되새긴다. 

 

이미 끝난 뉴스를 다시 건져 올려 가공하는 저자는 무엇을 놓쳤었는지, 무엇을 바라봐야 하는지 치열하게 고민해 새 이야기를 써 내려간다. 고통의 언어를 치열하게 고민했기에 나올 수 있는 뉴스의 모양이다. 


알고리즘 밖으로 나온 고통 

 

저자가 다루는 고통의 외연은 국경을 넘어간다. 그가 “알고리즘과 구독에 갇힌 나의 타임라인을 빠져나와 다른 삶의 존재를 알아채는 것. 나와 연관되지 않은 일 역시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말한 대목은 의미심장하게 다가온다. 국민 대다수가 알고리즘의 필터링으로 늘 접하던 정보의 벽에 갇혀있는 필터버블 사회에서, 믿고 싶은 것만 믿고 보고 싶은 것만 보는 확증편향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럽다. 이러한 확증편향은 편향적 공감으로 옮겨간다. 보고 들어 익숙한 모양의 고통에만 공감하게 된 오늘날, 사람들은 닮지 않은 고통을 쉽게 외면한다. 

 

편향적 공감에 대한 사례로 저자는 우크라이나전이 일어났을 무렵 대니얼 해넌(Daniel Hannan) 전 영국 보수당 의원이 영국 신문 텔레그래프에 적은 글을 가져온다. 해넌은 이렇게 썼다.

 

“그들은 우리와 너무나도 닮았다. 바로 그 점이 이 일을 이렇게나 충격적이게 한다. 우크라이나는 유럽 국가다. 넷플릭스를 보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자유선거에 투표하고, 검열받지 않은 신문을 읽는다. 전쟁은 더 이상 빈곤하고 외딴곳에 사는 이들에게만 찾아오지 않는다. 전쟁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넷플릭스를 보고 인스타그램을 하고 검열 없는 신문을 읽는 이렇게나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빈곤하고 외딴곳에 사는 이들”에게나 일어나는 전쟁이 벌어질 수 있다는 해넌의 말은 더없이 솔직하고 정직하다. 여기서 그가 ‘우리’로 묶고 있는 이들은 넷플릭스, 인스타그램, 유럽 국가, 자유선거의 조건을 충족한다. 해넌은 이렇게 그 바깥에 놓인 이들에 대해서는 전쟁이 찾아와도 놀랍지 않은 위치에 놓는다. 그의 분류법은 필터버블 사회에서 이미 모두가 행해오던 방식이다. 

 

‘우리’와 ‘그들’을 나누는 방식은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데 효과적인 방식이 된다. 결국 오늘날 공감이 촉발되려면 일단 ‘우리’ 안에 속해야 하는 셈이다. 뉴스의 문법은 이러한 편향적 공감을 따라간다. 와닿는 뉴스를 만들기 위해서는 공감을 촉발해야 하므로 뉴스는 시민들과 쉽게 접점을 만들 수 있을법한 것들을 다룬다. 

 

저자는 이 지점에서 다시 묻는다. 나와 닮은 것들에 대한 연민은 비좁은 단위로 파고들어 그 바깥을 바라볼 수 없도록 우리의 이성을 빨아들이고 있는 건 아닐까? 우리가 생산하는 뉴스, 도달하는 뉴스는 나/우리의 테두리를 벗어난 것일 수 있을까? 나와 닮은 것에 대한 연민을 자극하고 발휘하는 것만으로 우리가 세상에 충분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에 대해 저자는 오늘날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닮음을 넘어선 공감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른다. 저자가 국내 재해 현장과 홍콩 시위 한복판, 광주 평화광장과 캘리포니아주의 마약 거리를 종횡무진한 것은 결국 닮지 않은 고통까지 가까워지기 위한 노력이다. 


멈추지 않는 ‘응시’ 

 

뉴스가 오역하거나 누락한 고통을 말하던 저자는 다시 돌아와 구경과 목격 사이 어디쯤 놓여있는 뉴스의 현재 위치를 생각한다. 그리고 오역하거나 누락하더라도 뉴스는 응시를 멈추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보도의 영역으로 넘어온 애도와 공감의 방식은 “겪은 이들과 겪지 않은 이들 사이에서, 기억의 연결고리가 깜빡이다 꺼지지 않도록 기능하는 일”이다. 

 

고통을 응시하는 일은 비단 언론에 한정된 이야기는 아니다. 구경이 될 수 있다는 걱정에 고통을 보는 일 자체를 멈춘다면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기회를 놓치는 일이 된다. 저자는 재차 “구경으로 시작됐다고 하더라고 그 시선을 멈추지 말기를, 여력이 된다면 포기하지 말고 움직이기를” 당부한다. 

 

고통의 재현을 둘러싼 그의 치열한 자기반성과 성찰의 흔적이 묻은 이 책을 덮을 무렵에는, “대중을 위한 일종의 대속(代贖) 작업을 했다”는 추천사가 더없이 와닿는다. 언론과 사회가 진작 했어야 할, 그러나 미뤄둔 고민을 정면으로 마주해 온 그의 기록 앞에서는 모른 척 고개 돌렸던 장면들이 떠올라 떳떳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응시를 멈추지 말라는 그의 당부에는 힘이 있다. 미욱한 고통의 재현만을 경험해 무기력해진 이 시대에, 죄책감을 넘어서야 한다는 그의 말은 날카롭고 중요하다. 지금 더 많은 고통에 대한 이야기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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