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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슬픔의스토리텔링》
ⓒ푸블리우스
‘탈출은 지능 순’이라는 동료 기자의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줄 잇는 주변의 퇴사 소식을 건네며 곁들인 자조 섞인 농담이었다. 기자의 값어치와 업무 환경이 예전 같지 않으니 괜찮은 사람은 알아서 먼저 떠난다는 얘기다. 딱히 덧붙일 말을 찾지 못해 희미하게 웃고 말았던 그날의 기억이, 이 책을 읽으며 다시 떠올랐다.
흔히 언론이 위기라고 한다. 위기의 징표는 여기저기서 나타난다. 추락한 언론 자유 지수, 줄어드는 영향력, 떠나는 기자, ‘기레기’라는 멸칭까지. 이러한 복합적인 위기 앞에서 때로는 기자의 한 사람으로서 항변하기도 하고, 거대한 시대적 조류 앞에서 어쩔 수 없는 것 아니냐며 체념하기도 한다.
그런데, 진짜 언론이 위기일까? 우리는 언론사와 기자의 위기를 언론의 위기로 생각하는 건 아닐까? 《분노와 슬픔의 스토리텔링》을 펼친 내내 든 생각이다. 동아일보 기자로 23년 6개월 1주일을 지낸 송상근 이화여대 저널리즘교육원 특임교수가 국내외 좋은 기사 20편을 소개한 책이다. 당대의 좋은 보도를 모아 읽다 보면, 언론이 위기라는 말에 일말의 의심을 품게 된다. 가슴이 살짝 두근거리기까지 한다. 자그마한 희망 비슷한 걸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다.
장기 취재가 의미 있는 기사로
저자는 뉴욕타임스의 ‘미투’ 보도처럼 전 세계를 흔들어 놓은 기사만을 좋은 보도로 꼽지 않았다. 인터넷, 스토리텔링, 감정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기준으로 선정해, 지금껏 덜 알려졌지만 그 기준에 부합하는 보도까지도 주목했다.
송상근 교수는 특히 분노와 슬픔이라는 감정에 집중했다. “언론은 사실을 객관적으로 전하는 데 충실해야 하므로 내용을 감정적으로 구성하면 문제라는 인식이 지배적”이지만, “보도가 감정적이면 문제라고 해서 감정 그 자체를 다루지 않으면 곤란하다”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핵심은 감정을 전달하는 방식이다. 그것을 잘 구현한 기사를 꼽았다. 권력, 죽음, 재난, 약자로 인한 분노와 슬픔의 스토리텔링 사례를 전한다.
2021년 9월호 애틀랜틱에 실린 <20년이 지날 때까지>1) 기사가 대표적이다. 2001년 9.11 테러로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이들의 이야기다. 상실의 고통을 같이 겪고 있으면서도, 아들을 잃은 부모와 연인을 잃은 여자친구가 오랜 기간 반목했다. 고인(바비 매클바인, Bobby McIlvaines)의 일기장을 누가 가질지를 두고 싸우다 미움이 켜켜이 쌓였다. 재난이 남긴 상처 때문이다. 그저 잊으라는 말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서로의 보살핌 없이는 인간이 상처 난 자리에 쉬이 머무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제니퍼 시니어(Jennifer Senior) 기자는 오랜 기간 취재했고 서두르지 않았다. 기사가 나갔고, 바비의 남동생과 여자친구는 9.11 테러 이후 처음으로 마주하고 밥을 같이 먹었다. 화해의 첫발을 내디딘 셈이다. 분노와 슬픔을 잘 담은 기사는 공동체만이 아니라 취재원에게도 구원이 될 수 있다. ‘솔루션 저널리즘’이라는 거창한 말까지 붙이지 않더라도, 해당 보도는 세상에 나와 자신이 할일을 다 했다. 우리에게도 큰 힌트를 주는 기사다. 한국 사회에 깊은 상흔을 남긴 여러 재난의 피해자 얼굴이 겹친다.
2018년 7월 한겨레21과 한겨레신문의 <한국에서 천안함 생존자로 살아간다는 것> 보도도 같은 결을 담고 있다. 당시 화학공학과 3학년에 재학 중이던 변지민 기자는 천안함의 진짜 침몰 원인을 밝히고 싶었다. 기자가 된 그는 천안함 생존자를 수소문해 접촉했다. 프랑스에 있는 최광수 씨와 이메일 40통을 주고받았다. 그 과정에서 변 기자가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천안함 침몰의 진실’이 아닌, 생존 장병의 사연이었다. 외상후스트레스장애를 겪는 이들을 “보수는 이용했고 진보는 외면했다”.
여기서 기자는 가설을 수정하고 취재 경로를 바꿨다. 나는 이 보도의 탁월성은 바로 이 부분에서 나왔다고 본다. 성실하고 집요하게 취재했고, 그 과정에서 새로 나온 팩트를 온전히 응시했다. 천안함 사건 속에 있는 사람에 주목했다. 국가가 외면한 그들의 고통을 비췄다. 사회역학자 김승섭 교수와 함께 생존 장병 24명에 대한 사회적 경험과 건강 실태 조사도 벌였다. 천안함 장병들을 설득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렸다.
“한겨레 등 진보 언론을 불신하는 이들에게 ‘침몰 원인 논쟁을 넘어 인권의 문제로 접근하고 싶다’고 세 달에 걸쳐 설득했고, 겨우 마음의 문을 열 수 있었다(관훈언론상 공적서).”
취재 과정에서의 어려움 솔직히 담아내이 책은 보도 후 기자들이 내놓은 공적서나 취재 후일담에도 눈길을 준다. 해당 보도가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과 정성, 노력, 인원 등을 꼼꼼하게 살핀다. 덕분에 기사가 나오기까지의 앞뒤 사연도 접할 수 있다. 좋은 보도가 더욱 입체적으로 다가올 뿐만 아니라, 읽는 재미도 쏠쏠하다. 매번 아이템 갈급에 시달리는 기자로서는, 덕분에 얻는 아이디어도 많다. 저자는 이러한 취재기 또한 기삿감이라고 덧붙인다. “취재 과정의 자세한 설명이 언론 신뢰도를 높이는 가장 쉬운 방법”이라는 조언도 함께 한다.
취재기에 대한 주목은 이 책의 강점 중 하나다. 기자 출신 저널리즘 연구자의 덕목이 빛나는 부분이기도 하다. 그저 에피소드 중 하나가 아니라, 취재 기자들이 내놓은 후일담은 좋은 보도에는 ‘투자’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기자정신으로만 포장할 수 없는, 비용이 분명하게 발생하는 현실이 있다. 그것은 데스크의 몫이고, 언론사의 몫이고, 언론계의 몫이다.
2018년 9월 서울신문의 <간병살인 154인의 고백>2)은 제목에서 느껴지듯 방대한 취재를 곁들인 기사다. 한국기자협회 기자상 공적설명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노력을 쏟았다. 판결 108건 검토, 가해자 혹은 유족 20여 명 접촉, 가족 간병인 325명 설문조사, 6주간의 가족 간병인 치유 프로그램 참가 등. 가족을 살해한 경험을 안고 사는 이들의 사연은 단연코 단시간에 드러날 수 없는 이야기다. 긴 시간을 쏟아붓고도 겨우 나올 수 있는 기획이다. 실패할 자유를 주는 취재, 그것을 확보해주는 데스크와 조직의 역량이 버텨줄 때 이러한 역대급 보도가 세상에 나온다. 15년 전 장애인 딸을 살해한 아버지를 취재하러 갔다 거절당했던 유영규 탐사기획부장의 경험이 보도의 출발점이 됐다.
좋은 보도에 조직의 뒷받침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이 책의 동아일보 히어로콘텐츠 사례로도 알 수 있다. 2020년 창간 100주년을 맞이해 동아일보는 ‘히어로콘텐츠팀’을 만들었다. 취재 인원과 시간만 확보해준 것이 아니다. 팀원은 3개월간 매주 한 번씩 모여 내러티브 기사 작성을 연습했다.
취재가 어느 정도 끝난 다음에는, 사내 평가위원들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거쳐 대표 필자를 뽑았다. 이후에도 대학교수, 소설가 등에게 보여주고 3차례 퇴고했다. 여기서 끝이 아니다. 최종 출고 전 데스크와 취재기자들이 모여 토론하고 기사를 고쳤다. 단계 단계마다 정성을 다했다. 동아일보의 심층기획을 담당하는 히어로콘텐츠팀은 기수마다 세부적 차이가 있지만, 담당 기자들은 수개월이라는 취재 시간을 보
장받고 취재원 수십 명을 만날 수 있었다. 디지털화에도 노력을 쏟았다. 모두 예산이 드는 부분이다.
결국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는 건 진정성
《분노와 슬픔의 스토리텔링》이 꼽는 작품들은 하나같이 긴 시간이 투자됐다. 기자 개인의 역량으로만 가능하지 않은 일들이다. 부러운 이야기인 동시에 모범 사례다. 더 널리 알려져, 언론계 널리 정착돼야 할 일이다.
그렇게 세상에 내놓은 기사가 많은 사랑을 받았다는 점도 고무적이다. 종종 ‘아무리 좋은 기사를 내놓아도 안 본다’는 한탄을 들을 때마다 힘이 빠진다. 히어로콘텐츠는 온라인 조회가 대부분 300만을 넘는 등 호평을 받았다. 시절이 아무리 변해도, 좋은 기사는 여전히 힘이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줘서 고맙다.
저자는 기자 지망생일 때 ‘약자를 대변하는 기사’를 좋은 기사라 생각했다. 군부가 세상을 지배하던 때의 청운이었다. 기자가 되고 난 다음에는 좋은 기사 기준이 추가됐다. ‘특종으로 인정받는 기사, 정확하고 공정한 기사, 사내외 반응이 있는 기사’. 그리고 현업에서 한발 물러나 저널리즘 교육을 담당하면서 좋은 기사 목록에 기준 하나를 더 추가했다. ‘다시 쓰고 싶은 기사’다.
이 책을 다 읽으니, ‘따라 쓰고 싶은 기사’가 자꾸 생긴다. 송상근 교수가 꼽은 좋은 기사의 기준에 하나를 살포시 더해본다. 배우고 싶은 기사, 필사하고 싶은 기사, 아이디어를 더해주는 기사. 즉 따라 쓰고 싶은 기사! 그러한 좋은 기사가 쌓여 좋은 언론을 만든다고 감히 말해본다. 그렇기에 언론이 위기라는 말에 반박하고 싶다면, 일독을 권한다.
1) <Twenty Years Gone>, The atlantic, 2021.8.9, https://www.theatlantic.com/press-releases/archive/2021/08/september-2021-cover-pressrelease/619694/



